"효심 농민군"이 주둔하며 관군과 싸웠던 고려시대 경상도의 거대한 민중 항쟁의 역사적인 유적지 천지(天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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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심 농민군》이 주둔했던 낙동정맥(洛東正脈)의 가지산(迦智山)에서 분기한 운문지맥(雲門支脈)의 한 웅거지 《못재, 일명 천지(天池)》
●위 사진의 노란 선이 "운문지맥"이다
위 사진의 천지(天池)는 원래 깊고 높은 산속의 물 웅덩이였는데, 효심 농민군이 주둔하면서 수구(水口:물이 빠져나가는 곳)를 막아, 물을 더 많이 가두어 농민군의 식수로 사용했으며,
그후 세월이 흐르면서 농민군이 주둔한 이곳을 "역적 반란군이 주둔한 곳"이라 해서 도둑재(도둑고개 너머에 있는 못)로 불리다가,
그후 방치하여 "쟁피밭"으로 변했다.
※"密陽地名攷"에 기록되어 있으며, 도곡리 마을 노인들이 알고 있음.
※밀양시 상동면 도곡리에 사는 한 주민이 말하기를 "20세기 초까지 물 웅덩이를 평평하게 해서, 벼를 재배하였다" 한다.
10여 년 전에 도재국이 현장을 답사했을 때는 사진과 같이 수초(水草)가 가득하며, 비가 오면 물 웅덩이로 변한다.
이 "못재"를 높은 산속에 있다 해서 "천지(天池)"라고도 불린다.
이곳에 도재국은 "효심 농민군"이 주둔한 역사적인 곳이라고, 간판 가게에서 간판을 제작해서 나무에 걸어놓으려다가
산주(山主)가 허락없이 간판을 걸었다고 문제를 제기할 우려가 있어,
그 간판을 자택에 몇 년간 보관하다가 결국에는 돈을 주고 제작한 아까운 간판을 폐기한 가슴이 쓰라린 일이 있다.
십여 년 전에는 내가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던 시기였기에 모든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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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상동면 編 도곡리 條 기록 내용 :
●도독봉(道德峰, 도적봉, 道德嶺, 道德峙, 도독모치, 도독못째)
아래 뒷실에서 산외면 희곡리로 넘어가는 도덕령 고개가 있는 산 이름이다. 道德嶺은 道德峙, 도독모치, 모독모째라 하여 도둑과 관련된 지명을 띠고 있다.
●(註)레나(도재국) :
密州誌에 "道德峰 정상에는 天池라 부르는 813간이나 되는 못이 있다"고 했으며,
그 못을 중심한 이 일대의 산은 고려 시대 때 草賊들이 官軍과 對峙하여 싸운 곳이라 했다. 그러므로 도덕령, 도덕봉, 도독지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道德嶺, 道德峰, 道德池로 뜻을 순화시킨 것이다.
●(註)레나(도재국) : "도독모째"에서 "째"는 "재" 즉, 고개를 말하고, "도독모치"에서 모는 못 즉, 池를 말하고, "치(峙)"는 "고개"를 말한다. "모치"는 "못(池)"과 "고개(峙)"를 말한다
●도둑못(道德池, 天池)
도덕령 옆에 큰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메워졌다. 일명 天池라고도 했다. 약 80년전에 도곡리에 거주했던 김상두(金相斗)라는 사람이 돈을 들여 이 못에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어 다시 못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註)레나(도재국) :
《密陽誌》가 1994년에 발행되었으므로 2010년을 기준하면 “96년 전에 김상두라는 사람이 ..............,” 김상두라는 사람은 고정리편에 고명학교 졸업생으로 나옵니다
●농방우딩이
도덕령 천지등 동남쪽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으로 농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
●천지등(天池嶝)
하도곡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감나무골, 새청등, 샛들, 정골 등이 이웃해 있다
■(2)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산외면 編 엄광리 條 기록 내용 :
●쟁피밭등
석이방우 동쪽 너머에 있는 산등성이다. 이 곳은 금곡리와 경계 지점이다. 이 곳에는 샘물이 있으며, 쟁피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은 지명이다. 이 곳에도 옛날에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쟁피는 창포의 사투리이다
●(註)레나(도재국) : 쟁피밭등(창포밭등)은 고려 농민군 운문지맥 밀양지구 사령관인 효심 장군이 주둔한 “천지(天池, 못재)”로 추정됩니다 ⇒ 밀양광장의 “고려 농민군 효심 장군 게시판” 참조
■(3)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상동면 編 고정리 條 기록 내용 :
●고명학교터(고명학교지)
우리 나라의 독립과 애국 투쟁에 헌신한 인재를 길러낸 개화기 사설 고명학교가 있었던 자리인데 그 지점은 고정리(고답리) 455번지의 밭이다. 고명학교는 1907년(순종1, 정미) 3월에 고답과 도곡리의 두 마을 유지들이 출자하여 교실 3간, 사택 3간 외에 부속건물들을 세워 원근에서 이름 있는 교사를 초빙하여 신교육을 실시했다.
당시 교직원은 교장에 김상두, 교감에 천준연과 서정백, 교사로 한문과 국어에 서창수, 수학과 예법에 김병환이 담당했다. 또 학생들은 상동면 일원은 물론 청도의 대성면과 밀양읍 등지에서 모여 들어 많을 때는 일백 수십명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는 백민 황상규, 약산(若山) 김원봉과 같은 유명한 독립투사가 배출되었으며, 그 밖에도 안범원, 박희련, 김용호, 천주일, 서상교와 같은 훌륭한 지사들도 재학하였다.
특히 황상규, 김원봉은 졸업 후 이 학교 교사로 근무한 일도 있으며, 192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해외로 망명하여 신간회 독립의열단 등을 조직하여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한 몸을 던졌다. 이 학교는 그러한 액구정신으로 더욱 교육열을 가다듬어 교문에는 항상 태극기를 달고 학생들은 날로 그 수가 늘어났으며, 기세가 높아지자 일제 경찰이 드디어 탄압의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18년경에 일본인 김산이라는 자가 자청하여 이 학교 선생으로 부임한 후 교권을 마음대로 하면서 갖은 방법으로 학부형과 학생들을 회유 협박하다가 김년 만세사건이 일어난 해에 개교 14년만에 경영난으로 패쇄되었다. 지금도 옛 교사 자리에는 담장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