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이 언제부터 서양에 전래되었는가? 그리고 전래된 禪은 서양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오늘날 현대 서양사회에서 禪의 위치와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문제들은 최근에 서양, 특히 유럽에서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먼저 서양이 佛敎와 접촉하게 된 사실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가장 오래된 사건 중의 하나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인더스 강을 건너 갠지스 강에 이르는 원정길에 동행한 학자들에 의하여 그리스로 불교가 전해졌으리라고 보인다. 불교와 서양의 해우는 역사의 부침을 겪으면서 19세기 이전까지 간헐적으로 이어져왔으며, 근대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그의 제자 니체, 톨스토이, 와그너 등의 당대 서양 지성인들을 통하여 불교는 지속적으로 회자되었으며, 마침내 역사학자 토인비에 의하여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이다.”라고 단언하게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서는 禪을 강조한 日本佛敎가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서구에 소개되었으며,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看話禪 중심의 韓國禪이 독자적으로 서구에 소개되었다. 20세기에 불교가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라는 시각에서 비껴나고 점차 대중적인 관심이 고조되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에 대하여 최종석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첫째는 “基督敎 終末論의 虛構에 대한 反省”과 둘째는 “생태계의 파괴위기, 자원고갈의 문제, 과학기술 문명의 발전이 초래한 위기의식” 등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특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권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 기독교의 윤리가 생태계 파괴의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라는 점을 인식한 것과 셋째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 우주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설정하려는 시도”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최종석의 견해에 비하여, 프랑스 사회학자 르누아르는 서양에서 불교가 각광을 받는 이유를 “인간정신에 대한 억압”, “개인의 삶의 의미 탐구에 대한 억압”, 그리고 “개인의 내면의식 탐구에 대한 억압” 이 세 가지 서양 사회를 지배하던 강력한 억제력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르누아르의 관점에는 불교와 불교권에 대한 어떠한 성과를 인정하기보다는 현대 서구사회의 일시적인 잘못된 현상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여 서구에서 불교가 각광받는 현상은 서구사회의 일시적 잘못으로 인한 것이므로 이러한 현상 또한 일시적일 것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이렇듯 관점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는 특별히 20세기에 와서 서양에서 參禪을 근간으로 하는 불교가 대중적인 붐을 일으키는 이유를 살펴 볼 때, 첫째 각국의 불교승려들의 끊임없는 전법 노력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특히 나라를 잃은 티벳 승려들의 노력은 1989년 달라이 라마의 노벨 평화상수상으로 그 정점을 이룬다. 둘째 이러한 불교승려들의 노력으로 서양인 출가 승려 수가 꾸준한 증가세에 있고 아울러 그들의 활동도 폭을 넓혀가고 있다. 서양승려들과 서양불자들의 꾸준하고 점진적인 활동을 통하여 불교에 대한 서양인들의 문화적 격차를 좁혀 가고 심리적인 괴리감도 극복하여 갈 수 있게 되었다. 르누아르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를 1990년 초반으로 보았는데, 그때부터 서양에서 불교는 급성장을 하게 된다. 이것은 달라이 라마의 노벨 평화상수상 직후부터 시작된 달라이 라마와 불교에 대한 언론매체의 대대적인 관심, 미국의 유명 영화배우인 리처드 기어의 불교귀의와 그의 종교 활동, 그리고 『리틀 붇다(Little Buddha)』, 『티벳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 『쿤둔(Kundun)』과 같은 불교와 직접 관련된 영화가 연이어 나오면서 이 기간에 불교의 성장세는 과히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영화계에서는 지속적으로 『메트릭스(Matrix)』,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등과 같이 불교적 사상을 내포한 영화들을 연달아 출시하였고, 출판계에서도 불교에 관한 서적들을 꾸준히 출판해내었으며, 그것들은 이내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결국 각계각층의 불자들의 노력으로 이러한 결실을 이끌어내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하다. 셋째 佛法의 廣大無邊性이다. 이렇듯 불자들의 꾸준한 노력에 힘입어 서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의식 속에서 서구인들은 正見을 갖추게 되었고, 이 정견으로써 바로 불교야말로 자신들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총체적인 위기란 우선 과학의 발달로 인한 종교의 비지성적인 면이 부각된 점, 종말론의 허구에서 비롯된 종교적 위기, 자원고갈과 생태계 파괴에 따른 지구환경의 위기,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변화로 인한 현대사회의 위기, 개인의 삶과 인생에 대한 내적 충족감의 결핍에서 오는 자기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물리과학의 발전이 둔화됨으로 인한 미래 사회의 방향상실과 그에 따르는 제반 학문의 방향성에 있어서의 혼동 등을 언급할 수 있다. 서구인들은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바로 불교에서 보았으며, 명상수행을 하는 등 일상생활 속에서 불교를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禪 특히 『금강경(金剛經)』을 중심으로 한 禪經에 드러난 과학적 사상을 고찰함으로써 과학 특히 현대물리학을 중심으로 한 자연과학과 선의 회통을 시도하면서 그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선과 현대과학의 회통은 선의 응용성을 확대시키며, 자연과학에서는 미래연구의 방향성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제1장에서는 선과 서양의 만남을 이해하며, 제2장에서는 선과 현대과학의 만남에 대하여 살펴보고, 제3장에서는 『금강경』을 중심으로 禪經에 드러난 禪思想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며, 제4장에서는 선과 불교를 과학적으로 접근 이해하려는 과학계의 최근 동향에 대하여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 제5장에서는 앞으로의 연구과제에 대한 제안과 결론으로 마무리 지었다.
2. 선과 과학의 만남
2.1. 선과 과학의 비교
선을 과학과 비교하자면 먼저 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을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과 상관없는 내용을 선에서 찾으며 과학과 비교하고자 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 정의하는 禪은 다음의 두 질문에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내용으로 한정 한다: 우주 森羅萬象의 實相은 어떠한 모습인가?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을 어떻게 하면 여실히 볼 수 있는가? 이러한 의문은 곧 자연과학의 話頭로서, 인류의 지성사와 함께 탐구되어 왔으며, 수많은 종교와 철학, 혹은 사상과 학문 분야에서 이러한 의문에 나름대로의 답을 구하고자 인류는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서구인의 한 방편으로써 눈부신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하여 현대사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쳐온 현대과학과 함께, 무한한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불교가 오늘날 함께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이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과학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 즉 자연의 진리를 구현하고자 진리를 탐구하는 자신들(즉, 과학자들)을 철저히 자연에 투영하여 인간을 포함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자연을 상정하고 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자연에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공간과 시간, 그리고 물질의 기본양인 길이와 질량이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 속에 탐구하는 대상과 내용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우주의 근원을 밝혀내고자 한다. 우주의 근원을 알면 우주의 진화 과정과 우주의 현재 모습 또한 알 수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가능한 멀리 떨어져있는 우주 현상들을 관측하고 이해하여 우주방정식을 만들고, 이 우주방정식을 풀어서 우주 초기 상태를 역으로 풀어가야 한다. 둘째 물질의 근원을 밝혀내고자 한다. 물질의 근원을 알면 우주 내부의 모든 물질의 형성과정을 알 수 있다. 또한 물질의 근원과 함께 물질 현상들을 이해하고자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물질의 운동방정식을 풀면 물질의 모든 운동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다. 우주 내의 만물만생의 모든 물질들의 근원을 알아내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물질들을 쪼개어 나가는 방법을 택하였는데, 쪼개진 입자의 내부구조가 없을 때까지 쪼개는 일을 반복하여야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分子, 原子, 核子, 그리고 쿼크(quark)에 이르기까지 물질의 많은 부분을 알아왔으나, 최근에는 내부구조가 없는 근본입자라는 예측에서 벗어나 물질의 근본단위가 끈(string)이라는 초끈이론이 대두되었다. 셋째 생명의 근원을 알고자 한다.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동식물들, 그리고 우주 내의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과 그 이후의 변천과정을 이해하기 위하여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발견하게 되고, 나아가 유전자의 발견과 그 역할까지 밝혀내는 단계에 이르렀다. 또한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생명과학의 발전으로 현재에는 체세포로 생명복제까지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러한 세 가지 연구 대상과 목표는 서로 독립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주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물질의 이합집산이 일어나며, 또한 이러한 물질의 형성과정 속에서 최초의 생명체가 우주 안에서 탄생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학에서는 이러한 과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서 가까운 인간의 경험적 자연현상으로부터 점차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가면서 물질적 자연현상을 하나씩 밝혀 나아간다. 대부분 과학자들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들과 연구에 영향을 주는 어떠한 권위나 전통 혹은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노력한다. 과학의 발전사에서 우리는 심지어 종교의 권위나 사상 혹은 과학내의 기존의 이론조차도 이러한 과학자들의 치열한 탐구정신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아 왔다. 또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그릇된 견해나 감정의 이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數學이라는 철저한 논리적 언어를 사용하고, 실험이나 관측이라는 철저한 객관적 방법을 사용하여 과학적 업적을 구현하여 왔다. 이렇게 구현된 과학적 업적은 자연히 객관적이고, 논리적이며, 보편적인 가치를 갖추게 되며, 나아가 반복적 실험이나 관측으로 검증이 될 때는 사실(fact)로서 그 가치를 보유하게 된다. 이러한 가치를 보유하게 되면 과학적 진리는 완료형이라고 볼 수 있으나, 그 이전까지는 진행형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선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을 구현하기 위하여 이것을 추구하는 求道者의 내면의 마음자리에 우주 삼라만상을 철저히 투영하여 우주 삼라만상을 포용하는 本來不動의 法性 또는 보편적인 佛性을 상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에서는 인간의 경험적 자연현상이나 물질적 현상세계의 모든 형상이 있는 물질을 『金剛經』에서 이르듯이 “凡所有相 皆是虛妄” 즉 무릇 모든 모습은 거짓되고 헛된 것으로 보며, 또한 “모든 유위법은 꿈, 아지랑이, 물거품,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갯불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라고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선에서는 형상의 물질세계는 실상이 아님을 철저히 체득(體得)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하여 형성된 모든 煩惱妄想과 無明業識 혹은 固定觀念을 다스리고 타파하며, 심지어 殺佛殺祖의 가르침으로 거침없이 깨달음의 세계로 곧장 들어가도록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參禪修行을 한다. 이렇게 하여 깨우친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에서 여실히 볼 수 있는 우주 삼라만상의 실상은 절대적이며 완전한 가치를 가진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밝힌 선의 진리, 불교의 진리는 완료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선의 비교를 통하여 선과 과학의 회통을 시도하기 전에 먼저 불교와 과학의 비교를 살펴보자. 우리는 흔히 대중매체에서 불교와 과학의 비교를 강조한 나머지 과학과 불교를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불교는 과학이다.’라는 명제를 간혹 쓰기도 한다. ‘과학은 불교적인가?’ 혹은 ‘불교는 과학적인가?’ 하는 명제의 진위를 살펴보자. 먼저 ‘과학은 불교적인가?’하는 문제를 ‘과학적 진리는 불교적 진리와 동일한가?’라고 이해한다면, 그 대답은 ‘과학은 불교적이기도 하고 비불교적이기도 하다.’ 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의 진리 중 완료형은 불교의 진리와 동일하나, 진행형은 불교의 진리에 미치지 못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불교는 과학적인가?’하는 문제도 같은 해석을 적용하면, 대답은 ‘불교는 과학적이거나 잠재과학적이다.’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의 진리는 모두 완료형으로,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과학의 진리 중 진행형이 완료형으로 전개되어 가면서 과학의 진리가 불교의 진리와 동일하거나 동일하게 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므로 잠재과학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과학자가 (불교를 충분히 이해한 후) 과학의 잣대로 불교를 재단할 때, 불교학자는 (불교의 잣대로) 그것을 불교적[옳은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고 비불교적[그른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즉, 과학은 불교적이기도 하거나 비불교적이기도 하다. 같은 논점으로, 불교학자가 (과학을 충분히 이해한 후) 불교의 잣대로 과학을 재단할 때, 과학자는 (과학의 잣대로) 그것을 과학적[옳은 것]이거나 잠재과학적[옳은 과정]으로 판단하게 된다. 즉, 불교는 과학적이거나 잠재과학적이다.
2.2. 선과 과학의 만남
위에서 언급한 논점으로 보아 과학과 선을 간단히 비교하여 보았다. 이러한 비교를 바탕으로 하여, 우선 불교를 과학적으로 접근해 가는 것에 대하여 몇 가지 고찰이 필요하다. 과연 불교가 과학이라는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불교의 모든 영역에 불교적으로 접근할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불교의 모든 영역을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불교의 영역은 제한되어 있는데, 이것은 논리적이고 반복적인 실험 혹은 관측으로 검증 가능하여야 하는 과학의 방법론적 특징 때문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과학적으로 접근할 수 없는 불교의 영역은 비과학적이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을 초월해 있다는 뜻으로 초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깨달음의 경지는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으나, 즉 과학의 방법론을 초월해 있으나, 깨달음의 전후에 발생하는 깨달은 자의 신체적 변화는 의학적으로 관측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의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輪廻論에서 來生은 과학의 연구대상이 될 수 없지만, 過去生은 과학 연구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물질계의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나 그 원리의 이해에 대한 불교의 敎說은 같은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론과 비교할 때 과학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때에도 불교의 교설을 기술하는 언어와 과학의 이론을 기술하는 언어의 차이로 인하여 면밀한 논리적 비교보다는 결론이나 주요 관점에 대한 大義的 비교가 가능하며, 같은 자연현상이라도 불교나 과학의 견해나 관점의 차이에 대한 補正 또한 비교의 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모든 보정을 충분히 검토한 후, 과학적으로 접근한 불교교설에 대한 과학자의 이해는 불교적일 수 있거나 비불교적일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과학자의 불교교설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불교적이라면, 불교학자들에게는 이들의 과학적 이해로써 불교의 현대화를 진행할 수 있겠다. 만약 이러한 과학자의 불교교설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비불교적이라면, 과학자들은 해당되는 과학적 진리에 대하여 재고하거나 연구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 과학을 불교적으로 접근해감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는 과학의 업적을 서술하는 언어 즉 수학적 표현과 실험 내지 관측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어려움은 과학 내부에서조차 존재하는 것으로 과학적 의사소통에서 보편성과 객관성 그리고 논리성을 확보하는 대신 난해성이라는 장애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여 과학의 업적들을 일상 언어로 충분히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면, 이것을 불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과학의 모든 영역이 이론적으로 불교의 대상이 되며, 불교의 방법론이 매우 유연하고 다양하여 방법론 자체에 의한 제약으로 접근할 수 없는 과학적 영역이 뚜렷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불교학자가 충분히 과학을 이해하였다면, 이렇듯 불교적으로 접근한 과학에 대한 불교학자의 이해는 과학적이거나 잠재과학적이다. 만약 불교학자의 과학에 대한 불교적 이해가 과학적이라면, 불교학자는 불교를 더욱 정밀하게 가꾸어 갈 수 있으며, 과학자는 이들의 이러한 불교적 이해로 과학의 지평선을 넓혀 갈 수 있다. 만약 불교학자의 과학에 대한 불교적 이해가 잠재과학적이라면, 과학자는 이들의 이러한 불교적 이해로 과학연구의 진행방향에 대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과학과 불교의 두 분야의 상호접근과 이해가 가져올 수 있는 예측 가능한 이익에 대하여 살펴보자. 불교를 과학적으로 이해함으로써 과학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익은 불교에서는 설명되어 있으나 과학에서는 아직 연구되지 않아 예측 불가능한 분야에 대한 미래 과학의 방향성을 예측할 수 있으며, 또한 일상 경험의 차원을 넘어선 자연현상에 대한 동일한 결론을 양 분야에서 도달하였다면 불교적 방법론, 특히 禪修行을 수용하여 과학의 혁신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성공적으로 일어난다면 무위법 즉 정신적 진리에 집중하여 온 불교와 유위법 즉 물질적 진리를 추구하여온 과학의 실제적인 융화가 일어나 물질과 정신이 더불어 발전하는 인류 지성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 갈 것이다.
또한 과학을 불교적으로 이해함으로 발생되는 이익은 물질계의 자연현상에 대한 불교적 설명이 좀더 정밀하게 보완될 수 있으며, 현대사회를 이끌어 온 과학이라는 새로운 창구를 통하여 불교의 현대적 이해의 측면에 큰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 이로서 불교를 현대사회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불교의 현실 응용성이 증대되므로 불교의 下化衆生을 통한 인류의 정신적 발전과 안위가 더욱 용이하게 발전할 것이다.
실제적으로 불교와 과학이 언제 만난 적이 있는가? 불교학자와 과학자가 진지하게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수용하는 만남이 있었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최근 대략 1990년경 이후에 대하여서는 제5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 이전에 대하여서는 불교승려나 불교학자가 간혹 미래 지향적인 입장에서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할 수는 있었으나, 과학을 불교적으로 접근한 예는 좀더 정밀한 자료연구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과학자가 불교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시기는 양자역학(量子力學)의 성립과정에서 발생한 논쟁이 과학 내부에서 해결되지 못한 채 논쟁이 계속되는 무렵이나 특수상대성이론이 발표되고 이 이론에 대한 많은 비판과 논쟁을 거치면서 과학자들에게 이 이론이 수용되어 가는 무렵이라고 추측되어진다. 이 부분에서도 좀더 정밀한 연구가 요구된다. 불교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과학자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인슈타인인데 그는 불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인간의 욕망이나 목표가 덧없음을 느끼면서, 동시에 자연과 인간사유 세계의 숭고함과 경이로운 이치를 느낍니다. 인간의 존재는 자신을 일종의 감옥으로 표현하면서, 동시에 인간은 우주를 하나의 심오한 전체로 체험하기를 원합니다. ....불교는, 우리가 쇼펜하우어의 훌륭한 저술로부터 불교를 배워왔듯이, 우주적 종교 감각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를 대표하는 종교적 천재들은 바로 이러한 종교 감각으로써 구별되며, 거기에는 敎理나 인간의 상상이 만든 神이 없으므로, 그러한 것을 중심으로 가르치는 교회도 없습니다.”
“미래의 종교는 우주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神을 초월하고, 교리나 신학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물질적 자연세계와 정신세계를 모두 포괄하면서, 물질적 자연세계와 정신세계의 모든 경험으로부터 발생하는 종교적인 감응과 이러한 세계들을 포괄하는 의미 있는 단일체에 기반을 두어야 합니다. 불교가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대답입니다. 만일 현대과학의 요구에 부합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입니다.”
위에서 논의한 불교와 과학의 만남에 대한 논점을 아인슈타인의 불교에 대한 언급에 적용하여 보자. 불교를 과학적으로 접근한 아인슈타인의 언급은 (불교학자의 판단에서) 불교적이지 않으면 비불교적이다. 만약 그의 언급이 불교적이면 그의 언급은 불교에서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비불교적으로 판단되면 그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만약 그의 언급이 불교적이면, 그의 과학적 진리는 완료형이며 불교학자는 그의 언급을 불교를 서술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 만약 비불교적이라면, 그의 과학적 진리는 진행형이며 그는 자신의 과학적 진리의 연구 방향성에 대하여 (불교학자의 지적에 따라)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3. 선과 과학의 상동성(相同性)
보편적 진리의 추구: 불교와 과학의 만남의 당위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양 분야의 서로 같은 점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우주만물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처럼 불교 또한 우주만물의 실상을 구현하는 점에서 서로 같다. 같은 목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이름으로 과학자와 求道者는 그들의 치열한 삶 속에 서로 닮은 점들이 있음을 보게 된다. 그들은 보편적 진리를 如實知見, 즉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였을 뿐이라는 점에서 같다.
부처님께서 깔라마(Kalama)라는 마을을 지나실 때 이 마을 사람들이 각기 다른 종교인들이 이 마을에 와서 자신들의 말이 진리라고 주장하니 어떻게 진리를 구별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부처님께 묻자, 『Kalama Sutra』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단지 뜬소문으로서 따르지 말라. 단지 전통으로서 따르지 말라. 단지 남의 말로서 따르지 말라. 단지 자신의 경전과 비슷하여 따르지 말라. 단지 생각으로서 따르지 말라. 단지 추정으로 따르지 말라. 단지 외관으로 따르지 말라. 단지 자신의 생각과 같다고 따르지 말라. 단지 수용할 만하다고 따르지 말라. 단지 존경 받는 스승이라고 따르지 말라. 어떤 것이 불건전하고, 그릇되고, 나쁘다고 스스로 알면 그것을 버릴지라. 또한 어떤 것이 건전하고, 유익하다고 스스로 알면 그것을 받아들여 따를지라.”
위의 부처님 말씀은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지침으로 진리 밖에 어떠한 것도 귀의처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일관되어 부처님께서 열반하시는 순간에도 『열반경』에서 “自燈明法燈明”으로 진리의 등불로 자신의 등불을 삼을 것을 설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求法者들은 종교나 국가 혹은 사회의 모든 권위, 심지어 스승의 권위마저 부정하고, 종교나 사회의 전통이나 관습들을 결단코 타파한다. 뿐만 아니라 개인의 선입관, 고정관념, 망상과 감정, 탐욕과 욕망 같은 것들을 철저히 放下着하도록 한다. 이런 구도의 태도는 부처님의 6년간 雪山苦行으로부터 면면이 이어져 禪宗에서 慧可大師의 斷臂로 더욱 강조되었다. 또한 臨濟義玄은 『臨濟語錄』에서 “구도자여! 진리의 견해를 얻고자하면 단지 다른 사람의 미혹함을 받지 말라. 안팎으로 만나는 대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여라.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권속을 만나면 친척권속을 죽여라. 이러할 때 벗어나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아 마침내 뚫어 해탈하여 자유자재 하느니라.”고 일갈하였다.
淸虛休靜의 『禪家龜鑑』에서는 참선수행자의 세 가지 마음가짐에 대하여 강조하였는데, 첫째 大信心, 둘째 大憤心, 셋째 大疑情이다. 수행자가 어떠한 권위나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마음가짐이 대의정으로서 이것은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진리를 구하기 위한 의심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대신심이 없으면 이러한 의심만으로 진리의 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길을 찾았으면 그 길을 가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대분심으로 수행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행자의 마음가짐은 그대로 과학자들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으로 원용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익숙한 언어로 첫째 대의심, 둘째 대확신, 셋째 대열정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수행자의 구도정신은 과학자들의 진리 탐구정신과 일맥상통하며, 과학자들의 진리 탐구정신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사례는 다음과 같다: 절대적인 종교의 권위를 가지고 천오백년을 넘게 이어온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집어엎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자신이 만든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찰하여 지동설을 주창하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 神이 모든 생물을 창조한다는 창조론을 부정한 다아윈의 진화론, 시간과 질량 그리고 길이와 같은 기본 물리량이 절대적이라는 고정관념을 타파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보편적 진리의 실천: 부처님께서 2500여년전 인도의 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우주의 구석구석을 가지 않고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도 우주 삼라만상 유루 무루의 모든 실상을 여실히 보시고 아셨다.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나아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생명들도 똑같이 깨달아 부처가 될 수 있는 능력이 본래 갖추어져 있음을 “一切衆生 悉有佛性”으로 설하셨다. 뉴턴이 300여년 전에 영국의 한 사과나무 아래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주의 모든 천체들을 가지 않고 보지 않고 만지지 않고도 형상을 가진 모든 우주 천체들의 운동원리를 밝혀내었다. 뉴턴의 萬有引力의 법칙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여 밝혀낸 과학자와 수행자는 보편적 진리의 이치를 이해하고, 만인의 이익을 위하여 그것을 만인에게 교화하고 만인들과 함께 실천하려는 공통점을 가진다.
불교에서 수행자의 이러한 실천태도는 “上求菩提 下化衆生”의 정신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며, 하화중생의 실천방식은 곧 “自利利他”에서 잘 드러난다.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45년 동안 길에서 중생들을 교화하신 부처님의 삶 자체가 진리의 실천이었다. 녹야원에 계실 때 비구대중이 50여명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께서 하신 유명한 전도선언에서 이러한 실천의지를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을 설하라. 또한 원만 무결하고 청정한 梵行을 설하라. 사람들 중에는 마음에 더러움이 적은 자도 있거니와,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惡에 떨어지고 말 것이며, 그들이 법을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도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베라의 세나니가마[將軍村]로 가리라."
3. 禪과 現代科學思想
3.1. 생물관
선에서 보이는 중생의 분류는『금강경』에서 나타나는 “구류중생(九類衆生)”으로 존재하는 일체중생의 분류를 아홉 가지 즉, “所有一切 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有想非無想”으로 나누었다. 이에 비하여 과학에서는 생물의 오류(五類)분류 즉 어류, 조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 다섯 가지로 한다. 과학의 분류에는 다아윈의 진화론(進化論)을 바탕으로 생물의 진화발달 과정이 비슷한 유형끼리 분류한 것이다. 즉 신체의 발달정도인 척추와 심장 그리고 허파의 발달정도로 분류한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생물분류의 기본 지식을 가지고 금강경의 분류방법을 접근하여 보자.
첫째 구류중생 중 처음 사생(四生)분류 즉 난생, 태생, 습생, 화생의 분류에는 불교의 윤회론(輪廻論)을 바탕으로 중생의 생사(生死)과정이 비슷한 유형끼리 분류한 것임을 볼 수 있다. 먼저 윤회론과 진화론의 양이론을 좀더 정밀하게 이론적으로 상호 관련성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진화론은 윤회론을 배척하지 않고 윤회론은 진화론을 배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진화론에서 윤회론을 수용하면 생사를 거듭하면서 진화하는 좀더 포괄적인 진화론으로 발전할 수 있으며, 윤회론에서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좀더 긍정적인 윤회론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바탕이 되는 양이론이 서로 상충되지 않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둘째 각각의 관점으로 지구상의 생물을 분류한 사생분류와 오류분류는 분류상 완전성(completeness)을 획득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각각 상호 호환(互換)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생분류는 오류분류가 보유하고 있는 이론적인 분류상의 가치를 가지는 동등한 분류라고 할 수 있으므로,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구류중생에서 사생분류를 제외한 다섯 분류 즉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의 분류를 편의상 오차(五次)분류라고 부르자. 이것은 사생분류와 달리 우주 내에 존재하는 중생의 차원(次元)에 따라서 분류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척추도 허파도 심장도 없는 외계생명체가 UFO를 타고 지구에 왔다면, 과학에서는 이러한 외계생명체를 분류할 수 있는 항목이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오차분류의 하나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차분류는 ‘잠재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과학자들이 미래에 연구하여 밝혀내어야 할 과제라는 것이다. 현재 과학에서는 외계생명체의 존재의 증거와 교신의 가능성에 많은 시간과 연구비 그리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만약 이러한 분야의 과학자가 (불교학자의 도움을 받아서) 오차분류를 이해하고 수용하면 자신들의 연구방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3.2. 물질관
선에서의 물질관은 『금강경』에서 나타나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으로 “무릇 모든 모습은 모두 거짓되고 헛되느니라. 만약 모든 모습이 모습 아님을 본다면 곧 여래를 볼지니라.”와 마찬가지로 “모든 유위법은 꿈, 아지랑이, 물거품,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또한 번갯불 같은 것이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에서 드러나 있다. 여기에 우주 만물을 보는 명제가 들어있다. 이러한 형상을 가진 물질에 대한 견해는 경전의 도처에 비슷한 내용으로 밝혀져 있는데, 가장 대표적이고 많이 회자되는 것이 바로 『반야심경』의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다.
과학에서의 물질관은 그리스의 자연철학에서 나타난 原子論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한 원자론자들은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물질의 최소 단위이며, 창조도 파괴도 불가능하며 크기와 모양 그리고 질량이 서로 다른 원자들로 우주 내의 모든 유기체를 포함한 물질들이 형성되었다고 믿어왔다. 이러한 물질관은 현대과학에서 쿼크가 발견되기 전까지 그리고 양자역학이 발전되기 전까지는 큰 변화 없이 수용되어져왔다. 그러나 쿼크가 발견되면서 원자의 기본 개념이 약간의 수정이 불가피하였고, 그 정도는 원자론의 큰 줄기에서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쿼크의 내부구조는 입자가 아니라 끈(string)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밝혀져 물질관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더구나 양자역학에서 물질과 파동의 이중성이 드러나자 물질을 꼭 물질로만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밝혀진 것처럼 물질이 곧 에너지이라는 사실도 물질관에 변화를 주었다. 현재 과학자에게 물질의 근원에 대하여 묻는다면 물질의 근원은 지금까지 알려진 과학적 사실에 비추어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줄”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물질관을 바탕으로 금강경의 물질관을 접근하여 해석해 보자: 우주의 모든 물질은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공(空)[혹은 여래, 여래장]이다. 실체가 아닌 물질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물질을 허상으로 보아라. 실체인 공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공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하게 보아라. 우리는 이것을 불교의 물질관으로 편의상 색공불이론(色空不二論)이라고 명명하자. 색공불이론을 좀더 간략하게 다듬으면 “모든 물질의 실상은 공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 이론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면 첫째로 모든 물질은 실체가 아니다 라고 하는 명제에 대하여 과학은 동의한다. 그리고 실체가 아닌 물질을 허상으로 보라는 가르침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이 이론의 전반부인 여기까지는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러면 모든 물질의 실체는 공이라고 하는데,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한 공은 어떻게 검증하며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 공을 허공(虛空)이나 무(無)로, 혹은 양자역학적 진공(眞空)으로 해석하거나, 특수상대성이론적 에너지로 이해하는 노력을 하기도 한다. 이 후반부에 대한 과학적 이해는 미래 과학이 더욱 연구하여 규명하여야 할 과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후반부는 ‘잠재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4. 현대과학계의 불교에 대한 동향
4.1. 국내 과학계의 동향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자연과학 중에서 물리학을 중심으로 과학자들의 불교에 대한 동향이나 학술 활동을 간략히 살펴보자. 생명공학, 의학, 대체의학과 한의학, 임상심리학과 같은 분야의 학자들이 불교와 교류하는 활동은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현재 『한국물리학회(The Korean Physical Society)』의 공식적인 분과에서는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활동분과가 없으며, 불교학과 공동으로 주최한 공식 학술회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한국물리학회』의 학술지인 『새물리』에는 불교와 관련된 논문이 발표된 기록이 없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 물리학계뿐만 아니라 국제 물리학계의 공통적인 현상으로 간주되어 진다. 그러나 상기 학회의 홍보잡지 『물리학과 첨단기술(Physics & High Technology)』에서 2001년 1-2월 호의 특집 『현대물리학과 과학사상』에 게재된 다섯 편의 논문 중에서 불교와 관련이 있는 논문은 두 편으로, 이 두 편만이 현재까지 이 잡지에 실렸다. 양형진의 『물리학을 통해 보는 불교 중심의 사상』과 김용운의 『카오스와 동양사상』이 그것이다. 2000년 3월에 창립된『한국선학회』의 학술지 『한국선학(韓國禪學)』창간호에 양형진은 『불교와 과학에서의 평등과 차별, 중도』을 발표하여 불교계와 과학계의 학술교류를 시도하였고, 2001년 『과학으로 보는 불교의 중심사상: 산하대지가 참빛이다.』(장경각)를 출판하였다. 또한 소광섭은 계간지『과학사상』의 1998년 가을 제26호에 『대승기신론의 자연관』을 발표하였고, 1999년 『물리학과 대승기신론』(서울대학교 출판부)을 출판하였다. 김성구는 불교계신문에 『반야심경과 물리학』이라는 글을 1996년에 연재하였으며, 박광서는 오히려 불교 사회활동에 꾸준하다. 그리고 천문학자인 이시우는 『천문학자와 붓다의 대화』(종이거울)를 2003년에 출판하였다. 이들의 대불교 활동은 아직 불교학계와 과학계를 연결시키는 주도적인 입장에는 도달하지 않은 듯하다. 이외에 일부 물리학자들과 과학철학이나 과학사를 전공한 국내의 몇몇 학자들이 주로 과학철학적인 입장에서 과학을 접근하되 아직 불교와의 연결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
4.2. 국제 과학계의 동향
국내 과학계의 동향에서 살펴보았듯이 국제 과학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주류의 움직임은 극히 개별적이어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국내는 주로 불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종교 활동에 기반을 두면서 지적탐구를 겸한다고 한다면, 국제는 지적탐구의 경향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개인의 종교적 성향과 지적탐구로서 불교에 접근하는 서양과학자들 중 일부는 서양 철학자들과 지성인들로부터 불교에 대한 관심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일부의 과학자들, 특히 명상에 의한 심리적 신체적 변화와 관련된 분야인 의학과 심리학 계통의 과학자들은 라즈니쉬나 마하리쉬와 같은 인도 요가명상가들로부터 명상에 대한 관심을 가진 후 이들 요가명상의 단체가 급격히 쇠퇴한 후 불교로 그 관심을 이어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1987년 신경과학자인 프란시스코 바렐과 아담 잉글이 『과학과 불교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달라이 라마에게 토론을 요청하여 첫 토론회가 인도의 달람살라에서 비공개로 개최되었다. 첫 토론회 직후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마음과 생명 연구원(Mind & Life Institute)』을 미국 코네티컷 주 루이스빌에 창립하였고, 이 연구원을 중심으로 『불교와 인지과학(1987)』, 『불교와 신경과학(1989)』, 『감정과 건강(1990)』, 『수면, 꿈 그리고 죽음(1992)』, 『새로운 물리학과 우주론(1997)』등을 주제로 10차례 비공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마음 탐구(Investigating the Mind)』라는 주제로 2003년 9월 13-4일 제11차 토론회를 첫 공개토론 학술회의로 개최하였다. 신경과학과 심리학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들인 카네기 멜론 대학의 마릴느 베르만, 프린스턴 대학의 조나단 코헨, 위스콘신 대학의 리차드 데이비슨, 하바드 대학의 하버드 길버트, 스테판 코슬린, 버클리 대학의 대쳐 컬트너 등 심리학 교수와 MIT 공대의 낸시 캔위셔 등 두뇌 및 인지과학교수, 그리고 프랑스 생물학자로서 티벳 승려가 된 메츄 리차드, 티벳 승려들과 달라이 라마 총 26명이 MIT 공대내 크레스기 강당에서 모여 1200여명의 학생들과 학자, 불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교와 과학의 첫 공식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과학과 불교의 협력과 조화가 증진”되기를 바라는 달라이 라마의 개회사를 이어 MIT대 찰스 총장은 환영사에서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두뇌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질 때 인류의 정신적 행복도 증진될 수 있다”고 화답했다. 학술토론 중에 MIT 공대의 두뇌 및 인지과학 낸시 캔위셔 교수는 “심리학자와 불교학자들의 마음 탐구 방식의 유사함에 놀랐다.”고 언급하며, “불교와 과학처럼 동떨어진 분야가 서로 만나 성과를 거뒀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출 수 없다”고 말하였으며, 산타 바바라의 알랜 월러스 연구소장은 “사고와 행동의 인지, 조절능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열쇠가 불교에 있다”고 강조하였다. 조나단 코헨 교수는 “현재까지 서구과학은 인간이 ‘두뇌의 CEO’인 줄 알았다. 오늘 토론을 통해 인간은 ‘아주 불안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 궁전 안의 힘없는 왕’임을 알았다”고 말하였으며, MIT 공대 분자생물학 에릭 랜더 교수는 “지금 미국인들은 체육관에 가서 매일 운동을 하는데, 50년 후 미국인들은 매일 명상을 하게 될 것이다”고 예견했다.
상기 연구원은 2005년 11월 8-10일 미국 와싱턴에서 제13차 겸 제2차 공개토론 학술회의를 『2005 마음 탐구: 명상의 과학과 임상응용(Investigating the Mind 2005: The Science and Clinical Applications of Meditation)』라는 주제로 존 합킨스 의대와 죠지타운 의대의 공동주관으로 개최한다. 그리고 그동안 비공개로 개최된 토론 회의록을 모두 7권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예를 들어, 1997년 회의록은 『새로운 물리와 우주론(The New Physics and Cosmology)』(옥스포드 대학 출판부)으로, 1995년의 회의록은 『자비의 통찰(Visions of Compassion)』(옥스포드 대학 출판부)로 출판되었다. 상기 연구원이 거의 유일하게 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불교와 과학과의 학술활동인데,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된다. 불교계에서 학문으로나 수행으로 과학자들과 토론하고 수용할 수 있는 불교인들의 단체가 동서양의 지성인들을 이끌면서 정신과학과 물질과학을 조화롭게 발전시키면서 인류의 발전을 이룰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으리라 생각된다.
5. 결어
과거 약 15년 동안 현대 서양사회에서 불교의 성장세는 가히 혁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와 서양의 만남을 살펴 보건데 이러한 최근의 현상들은 일시적인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알겠다. 현대 서양사회의 지성인들 중, 일군의 과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불교에 대하여 토론을 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불교와 과학의 만남으로 비롯된 그들의 활약과 결실이 기대된다. 흔히 ‘불교가 과학적이다.’라든가, ‘과학은 불교적이다.’라는 말의 진위(眞僞)를 어떠한 입장에서 볼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살펴보았으며, 또한 불교와 과학의 만남이라는 학술적인 의미를 이론적으로 고찰하여 보았다. 불교와 과학의 만남을 이론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우리는 양 분야의 만남에 대한 당위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만남을 통하여 불교는 교화(敎化)의 현대적 창구를 마련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불교의 응용성을 높여갈 수 있고, 과학은 미래의 연구방향에 대하여 불교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불교의 방법론을 원용할 때 과학의 혁신적 발전을 이룰 수 있겠다. 우리는 동양의 정신문화의 핵심인 불교와 서양의 물질과학의 중심인 자연과학이 서로 만나 정신과 물질이 마치 인간의 몸과 마음처럼 조화롭게 발전되어 인류의 발전에 함께 이바지하기를 고대한다.
현재의 불교와 과학의 만남의 단계는 초기 단계로 불교의 정신적 영향을 측정이나 관측이 비교적 용이한 의학과 관련된 과학 분야가 주를 이룬다. 점차적으로 이들의 연구가 결실을 맺게 되면 좀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 분야로 만남이 펼쳐지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만남의 발전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는 불교계의 적극적이고도 지속적인 대화노력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양 분야의 상호접근이 이루어져 불교의 과학적 이해와 과학의 불교적 이해가 학술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음이다. 불교의 과학적 이해의 한 시도로서 『금강경』에 드러난 과학적 사상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노력들이 다양한 경(經)과 론(論)을 통하여 이루어질 때 불교의 과학적 사상을 불교 전체적인 입장에서 체계를 잡아 갈 수 있겠다. 이렇게 쌓여간 연구 업적들은 과학자들의 연구지침에 지대한 영향을 주리라고 의심치 않는다.
첫댓글 감사하게 탐독 하였습니다.그리고 금강경 독송을 하는 습관을 지켜 갈 수 있는 계기가 됨을 다시한번 감사드리고 성불하시기 바랍니다.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