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있는 망상만 해결하면 우리는 영원한 밝은 마음으로 영원히 살아간다. 망상을 해결하는 두 가지 분류가 있는데, 우리한테 번뇌망상 있는 걸 그릇 닦듯이, 거울에 먼지 닦듯이 싹다 없애 치우고 밝은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분류는 성문 연각이다. 성문 연각의 소승인은 나한테 번뇌망상 있는 걸 싹 다 없애 치우고, 나한테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 하나 있어서 그거를 얻어야 되겠다고 닦는다. 물로 말하면 정수기에 물을 거르듯이 걸러내는 걸 한다. 그게 소승의 성문 연각이 닦아 들어가는 방법이다. 대기대용의 최상승을 가진 그런 분류는 번뇌망상을 싹 닦아내고 아는 게 아니고, 번뇌망상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일체를 있는 그대로 바로 본성을 깨달아 안다. 그게 다르다. 닦아내야 된다는 그런 분류에서는 중생세계라는 게 끊임없이 이어나가고 창조돼 나가기 때문에 계속 닦아야 된다. 그리고 깨끗하고 밝은 것이 별도로 있는 걸 또 취해야 된다. 그런데, 최상승의 대기대용을 가진 사람은 중생세계에 있는 번뇌망상을 싹 없애치우는 게 아니고, 있는 그대로 그 속에서 바로 본성을 알아차려서 깨닫는다. 그게 바로 "그는 곧 나요, 나는 그가 아니다" 하는데서 해결이 다 된다는 거다. 닦을 게 없다. 그걸 알은 사람은 망상이 일어나고 안 일어나고 그런 자체도 없다. 또 그런 게 있다 하더라도 아무 관계를 받지 않는다. 별 수천 가지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아무 관계를 안 받는다. 그래서 조주 스님에게 묻되, "어떻게 번뇌망상을 다 없애겠습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너는 번뇌망상을 다 없애서 뭘 하려고 하느냐?" 물었다. 모든 것이 "그는 곧 나요, 나는 그가 아니다" 하는 여기에서 딱 해결이 되는 거다. 이 사람은 그때부터는 아무런 관계를 안 받는다. 나는 곧 그가 아닌 걸 알았기 때문에 어디에 있어도 절대 거기에 물드는 게 없다. 거기에 구속을 안 받는다. 최상승의 대기대용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잠깐만에 돼 버리는 거다. 이게 소승인과 다르다. 그래서 닦지 않고 바로 알아버린다(不修頓悟). 알고 보니까 아주 쉽다. 그래서 자다가 코 만지기처럼 쉽다는 거다. 이 볼펜을 들고 흔드는 이놈은 볼펜인가 볼펜이 아닌가? 이걸 "볼펜이다" 했을 때는 둘이 아니고 나다(☞그는 곧 나다). 근데 "볼펜이다" 하고 말하는 이놈을 돌이켜 보니까 이거 하고는 관계없다(☞나는 그가 아니다). 모든 만상의 모양에서 뛰어나 있는 거라서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거라. 그걸 바로 알은 사람은 그때부터 안 속는다. 그게 돈오(頓悟)다. 그 당처를 뭐라고 하느냐 할 때, 흐르는 물은 아무리 앞에 돌, 가시나무 등이 있어도 걸림 없이 흘러가고(流水不碍石茨林), 흰구름은 청산에 걸리지 않고 가더라(白雲不碍靑山峰).번뇌망상이 아무리 많이 있다 하더라도 관계없다는 거다. 왜 그걸 닦아 없애 치우려 하는가? 수천 수만 년 계속 닦아서 어쩌자는 것인가? ('24.05.05 학산 대원 대종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