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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평야
송화강과 요하강이 가로지리는 광할한 만주 평야에는 대한제국이 직접 운영하는 대규모 농장들이
산재해 있다. 대명부 광동성 주변에 조성된 농장과 함께 국영 2대 농장 지대로 손꼽히는 만주 농장은
병역 대상자였으나, 징집되지 못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경작되었다.
벼 2모작이 가능한 화남 농장과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만주 농장 역시 연간 벼 생산량과
옥수수 생산량이 일본부 전체에서 생산하는 양과 비슷했다.
매년 천붕들이 날아다니며 거름을 뿌리는 것으로 시작된 농사가 한 고비를 넘기며 조생종 벼들이
꽃을 피우며 들판을 온 통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공군과 농사군의 경계가 사라지는 곳이 이곳 심양 공군기지에 배속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어 왔지만 정말 이럴 줄 몰랐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위치나 확인해. 이것도 훈련의 연속이야.”
심양에서 이륙한 천붕이 복합비료가 희석된 물 비료를 가득 싣고 송화강 상류로 이동하고 있었다.
부조종사인 윤형식 중위는 심양 공군기지에 배속된 이후 단 한차례의 군사용 비행을 한 기억이 없었다.
오늘도 윤형식 중위는 아침 일찍 일어나 폭탄 창에 비료를 가득 싣고 심양 비행장을 이륙해
장춘 부근에 있는 옥수수 농장 상공에 도착해 목표 지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 왔습니다. 지상에서 신호가 올라옵니다.”
농장 군데 군데에 널려져 있는 마을에서 신호탄에 올라왔다. 1킬로 평방미터를 흥건히 적셔줄
비료를 가득 실은 폭탄 창이 열리더니 긴 대롱 10개가 기체 밖으로 삐져 나왔다.
“윤중위 열어”
선임 조종사의 명령 아닌 명령에 윤중위가 부조종사 왼편에 있는 빨간 단추 10개를 차례로 눌렀다.
이어 오른쪽에 있는 녹색 단추를 누르자, 대롱에서 비료가 쏟아져 내렸다.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는
천붕에서 뿌져진 비료들이 넓게 흩어지며 어린 옥수수들을 살 찌웠다. 몇 십분 만에 비료 주기를
마친 천붕이 고도를 올리며 하얀 뭉게구름을 너머로 사라져 갔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에서는 비료주기가 끝나자,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와 농장으로 향했다.
아무리 정밀하게 비료를 뿌려대도 꼭 빠트린 부분이 있기 마련이여서, 그런 곳을 찾아 농민들이
손수 비료를 뿌렸다.
“다음 농장은 어딘지 한 번 볼까 ?”
윤중위가 하루에 3번을 기본으로 짜여진 비행표를 들어 장춘130이라 표시된 칸에 동그라미를 그리고
뒤로 한 장 넘겼다. 다음 달까지 빡빡하게 짜여진 비행표는 그를 짜증나게 만들었다.
“이번 달은 비료, 다음달은 농약 그리고 다다음달은…”
중얼거리는 윤중위를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던 이용만 소령이 통신 주파수를 만지작 거리며 주파수를
고정했다. 이내 지지직 거리는 잡음이 섞인 관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중위는 비행표를 바닥에
내려놓고 송수신기를 머리에 썼다.
“천붕050호는 고도 3000미터를 유리하고 032 방향으로 접근하라.”
“알겠다. 천붕 050. 고도 3000, 032”
“모든 천붕에게 알린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도와 속도 방향을 유지하라.
주변에 동료기가 몰려있으니, 항로를 이탈하지 말아라.”
“무슨 일이지 ? 여태 이런 적이 없었는데”
오늘 같은 일은 이만용 소령이 이곳에서 근무하는 지난 3년 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특이한
상황이었다. 멀리 비행장 활주로가 눈에 들어왔지만, 관제사는 계속해서 선회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신형 천붕들이 연신 착륙하며 활주로를 차지 하고 있어서, 이소령 기체에게는
착륙명령이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우와. 신형 천붕입니다. 매끈하게 생겼네요. 나도 저런 걸 타야 되는데. 얼마나 좋을 까.
비행기 타는 맛이 새록새록 나겠다. 내 차례는 언제나 올려나 ?”
주기장에 천붕 050을 집어 넣고 조종실에서 내린 윤중위는 사령부 건물까지 가는 동안
연신 고개를 돌려대 중얼거렸다.
“탁”
이소령이 신형 천붕에서 내린 조종사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윤중위 머리를 쥐어박으며 저만치
걸어갔다. 머리를 감싸 안으며 자리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던 윤중위가 머리를 문지르며
이소령에게로 달려갔다.
“충성. 소령 이만용외 1명 임무를 완수하고 복귀했기에 보고 드립니다.”
“충성. 수고했네. 쉬었다가 11시에 조종사 회의실로 모이게.”
연대장은 보고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서둘러 손을 저었다.
그만 나가보라는 연대장의 손짓에 이 소령이 몸을 돌리다 말고 질문을 했다.
“무슨 일 있습니까 ?”
“회의실에서 다 들을 이야기야. 공군성에서 이동명령이 내렸네.
심양기지 전체가 옮겨갈 모양이더군 한시적이긴 하지만”
“어디로 말입니까 ?”
“모스크바. 그만 나가봐”
“충성.”
연대장실을 나온 이소령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모스크바로 전출에 마냥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윤중위의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천붕050 같은 구형 기체까지 이전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신형 천붕이 이동하는 것으로 유추하면 모스크바에서는
폭격 임무를 맡을 공산이 컸다.
농작물을 키우던 자신이 이제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 머리 위에 폭탄을 쏟아 부어야만 했다.
공부에 떨어트렸던 폭탄보다 더 잔인한 폭탄을 자신이 손수 떨어트려야 했다.
“전역 신청을 해야겠어”
이만용은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를 중얼거리며 자신의 사물함 앞에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울한 표정의 거꾸로 된 이만용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단기3959년(1626) 여름 발틱해 단치히 항
카르파티아에서 발원하여 1068킬로미터를 쉼 없이 달려와 발틱해로 흘러 드는 비스와 강.
평평한 나라에 흐르는 모든 물을 하나로 모으는 강이기에 그 하구에 거대한 삼각주가 만들어져 있고,
내륙으로 3킬로미터를 거슬러 올라가 발틱 최대의 무역항 단치히가 자리잡고 있다.
12세기 이래 한자 동맹의 비호아래 발전을 거듭하던 단치히는 대한제국 러시아부와의 무역이 활성화
되면서 더욱 번창했다. 폴란드를 거쳐 단치히로 운송된 수많은 물품들이 단치히 항에서 배에 실려
영국이나 프랑스로 운송되었기에, 단치히는 발틱해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유일한 항구였다.
그런 단치히 항구가 대한제국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급격히 침체되기 시작했다.
“전쟁이 빨리 끝나야지. 이거야 원. 이렇게 계속 되다가는 신대륙으로 이민을 가야 할지 모르겠어 ?”
단치히에서 하역인부로 일하고 있는 오스카는 일거리가 갑자기 줄어들자 입에 풀칠하는 것이
걱정스러웠다. 바로 옆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지금 당장 닥친 내일 끼니 걱정이
더 큰 시름으로 다가왔다.
“지금 그런 거 걱정할 때가 아냐 ?”
“그럼 뭘 걱정해야 되나 ? 이렇게 일거리가 줄어들면 결국은 새끼들 먹이기도 힘들어질 텐데.
먹고 사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나 ?”
“이곳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몰려오고 있다는 거야. 단치히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고 ?”
“에이 설마 하니. 이번 전쟁은 폴란드가 러시아 땅을 차지하고 내놓지 않아서 일어난 건데.
아무 상관없는 이곳을 공격하겠나 ? 이곳은 자유도시이긴 하지만 엄연히 신성로마제국의 비호를 받고
있는 곳이라고. 한자동맹이 유명무실해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을걸 ?
아직 한자동맹 맹주님도 건재하고 말야. 이빨 빠진 호랑이라지만 호랑이는 호랑이잖아.
스웨덴왕국이 대한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뤼베크 영주님이 스웨덴과 친하긴 하지만
단치히가 공격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진 않겠지. 지난날 대한제국 때문에 당한 수모도 있고….. ”
오스카가 하역 일을 하면서 주어들은 이야기를 주섬주섬 이야기하며
동료 얀에게 동의를 구했지만, 얀은 딴 생각을 하는지 대꾸가 없었다.
“얀 ? 그렇지 ?”
“응 ? 뭐가 ? 신대륙으로 이민가는거 ?”
오스카가 어깨를 툭 치자, 얀이 되물었다. 오스카는 이야기를 다시 하려다 그만 두었다.
자기가 이야기를 해놓고도 다시 똑같이 하려니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더구나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여기 저기서 주어들은 이야기들을 이해하기에는 오스카가 머리가 따라주지 않았다.
“그냥 해 본 소리지. 이민은 무슨. 죽으나 사나 이곳에서 살아야지. 전쟁이 끝나면 다시 배들이
들어오고 그러면 한결 살기가 쉬워지겠지.”
“난. 차라리 대한제국이 이곳을 점령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야 ? 최소한 먹을 거 걱정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 일전에 러시아에서 온 상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대한제국이 다스리는 나라는 천국이야.
천국”
“다 똑같지 무슨 얼어죽을 천국은… 대한제국도 귀족이 있을 거 아닌가 ?
귀족 놈들은 그저 놀고먹다가 심심하면 우리 같은 놈들 두들겨 패는걸 낙으로 삼는 놈들인데,
대한제국 귀족이라고 다르겠어.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신부님이 그러시는데 모스크바에는 길게 늘어진 괴물이 있다더군. 동그랗게 생긴 다리를 수십 개나
가지고 있고, 한번에 수백 명씩 사람들을 잡아먹고는 먼 동쪽나라로 갔다는데 잡혀먹는 사람들이
찍소리 못하고 제 발로 걸어서 뱃속으로 걸어간다니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그런 괴물을 군인들이 밤낮으로 지키고 숭배한다는데 무시무시해.”
오스카는 몸 사래를 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무렴 그러기야…. 아무튼 오늘도 들어오는 배가 없나 보이”
“땡 땡 땡”
“벌써 저녁이 다 되었나 ?”
아침, 저녁으로 울리던 종소리가 벌써 울리고 있었다. 부두에서 넘실대는 파도 너머로 돛단배가
나타나길 기다리던 오스카와 얀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손을 놓은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서 이대로 집에 가려니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땡땡땡”
“오늘 종소리가 좀 이상하네. 종치기가 힘이 넘쳐나는구만”
은은하게 울려 퍼지던 종소리는 이내 숨가쁘게 소리를 전달하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울리는 종소리에 오스카가 교회 종탑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건물 벽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개가 언덕 쪽으로 저절로 돌아갔다.
“그러게…. 오스카 이건 비상종 소리야. 뛰어 ?”
얀이 소리치며 달려가자, 오스카도 종소리의 의미를 알아채고는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침에 먹은 것이 부실한 오스카는 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아서인지 갈수록 뒤쳐졌다.
얀이 도시 중앙에 자리잡은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와 있었다.
“자유 시민들은 들으십시오. 대한제국 함대가 이곳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모두들 무기를 들고 지정된 곳으로 신속히 모이기 바랍니다. 위대한 단치히의 단결된 힘을 보여주어
저들이 경거망동을 하지 못 하도록 해야 합니다. 더불어 노동자들에게도 알린다. 그대들의 삶의 터전을
누구에게 맡길 참인가 ? 자신의 가족들은 스스로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 서둘러라. ”
단치히 수비대장이 광장에 모인 자유 시민권자들과 그 아래 계급인 노동자들에게 소리치며 다가오는
위험에 맞서 싸우길 호소하고 있었다. 설마 설마 하며 사태를 주시하던 시민권자들이 수비대장과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집으로 달려갔다.
“헉헉. 큰일이야. 큰일”
오스카가 헐레벌떡 뛰어와서는 얀 옆에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부두에 나올 건가 ?”
“그래야지. 일단 가족부터 피신 시키고”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
오스카의 물음에 얀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물어본 오스카나 얀은 부두에 나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자신이 빠진 것을 누가 알고 나중에 배신자라고 낙인 찍힐 것을 우려한 얀은 자신의
親舊에게도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오스카도 그러했다. 중앙 광장을 빠져 나와 단치히 시 외곽
끝자락에 있는 집에 들어간 얀은 부인과 애들을 불러모았다.
“전쟁이 났어. 우선 우린 이곳을 떠나야 할 지도 모르니 짐을 싸도록 해.”
세간 살이라야 몇 개의 수저와 냄비가 전부지만, 얀 의 부인은 이불이며 옷가지들을 챙기며
작은 보따리들을 만들어 냈다. 꽁꽁 칭여 맨 보따리 서너 개가 만들어질 무렵 귀에
낯익은 소리와 낯설은 소리가 교차되며 들려왔다.
“펑.펑.펑.”
“꽈광. 꽈꽈광”
수비군에서 대포를 쏘는지, 공격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미 교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포성은 단치히를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대한 제국 발틱 함대에서 발사된 포탄들이
단치히 시내 곳곳에서 떨어지며 시커먼 연기와 빨간 화염을 뿜어냈다. 붉은 혀를 낼름 거리며
주변을 태워버리는 화염 속을 사람들이 용케 피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만 가자. 서둘러”
“이것만 챙기고요”
얀 의 부인은 마지막으로 보리 빵 몇 개를 보따리에 쑤셔넣고 간난아이를 들춰 멨다.
얀은 사내아이를 가슴에 안고 뒤를 한번 바라보았다.
썰렁한 집안이 어지럽혀지자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오스카 그 親舊는 빠져 나갔으려나 ?’
‘강을 건널 수 있을 까 ?’
비스와 강을 건널 수 있을지 생각하던 얀은 이내 강을 건너는 것을 포기하고,
반대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강을 건넌다면 갈 곳이라고는 기껏해야 그디니아 아니면
슈제첸 뿐이었지만, 그곳에 가더라도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리리 대한제국이 점령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 괴물에 대한 소문이 사실은 아니겠지’
짧은 시간동안 여러 가지를 생각한 얀은 부인의 얼굴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얼굴에 핏기라곤 없었지만 그에게는 너무도 사랑스러운 부인이었다.
“난 북쪽으로 갈 생각이오. 괜찮겠소 ?”
“네”
“그럼 갑시다.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앞만 보고 갑시다.”
얀은 창문을 열고 주위를 살폈다. 도망치는 중에 수비대나 기병대라도 만나면 낭패를 당할 수 있었다.
한 떼의 기병들과 사람들이 우르르 광장을 향해 달려가더니, 이내 거리는 한산해 졌다.
아직까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지 못 한 사람들은 문을 걸어 잠근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14시 해안 포 발견. 거리 1000”
“14시 1000”
발틱 안쪽에 있는 신항 조선소에서 만들어진 일천 톤급 초계함 6503함 갑판에 계속해서 새로운 포격
제 원이 포술장에게 전달되었다. 6503함 갑판에 장착된 75미리 함포 3문이 순차적으로 사격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해안가에 배치돤 해안포를 차근 차근 파괴시키며 비스와 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는 6503함 전면에는 100톤급 소형 함이 중 기관포를 양안으로 집중시키며 이동하고 있었다.
“기함 주포를 좀더 뒤로 밀어 달라고 요청해 주십시오”
포술 장이 함 교와 연결된 수화기를 들고 화력 지원 요청을 하느라 잠시 갑판으로 나온 사이
포탄 하나가 날아와 강물위로 떨어졌다.
“펑. 철썩. 쑤어오”
“이런 개새끼들. 발포.”
14시 방향에서 날아온 포탄이 6503함 근처에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켜 갑판으로 강물을 밀어 올렸다.
바닷물이 섞인 짭짤한 물에 흠뻑 젖어 버린 포술 장이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아주 약간만 정확했어도
포술장은 부상을 면치 못 할 뻔 했다. 가슴속 두려움을 고함소리와 함께 질러버리자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는지 다시금 포술 장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살폈다.
“피우웅”
발틱함대 기함인 2418함에서 발사된 127미리 함포탄이 하늘을 가르며 단치히 시내로 날아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포물선을 그리며 죽음의 탄을 가득 품고 날아가는 포탄은 언제 보와도
포술장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저런 포탄을 날려보면 소원이 없겠다.’
잠깐동안 상념에 잠겼던 포술장은 앞서나간 소형함에게서 새로운 재원이 들어오자 즉시 함포각을
산출하며 발포 명령을 내렸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함포사격에 저항하는 해안포는 차례차례
침묵했고, 6503함은 느리지만 꾸준히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내 단치히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자, 포술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3킬로미터를 거슬러 오는 사이
위험한 지근탄이 여럿 있었지만, 단 한 발도 맞지 않고 단치히를 공격할 수 있는 거리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못 내 자랑스러웠다.
“함장이다. 접안 시설을 제외한 모든 구조물을 파괴하라”
“네. 함장님”
함교에서 새로운 명령을 하달 받은 포술 장이 각 포반장과 연결된 수화기를 집어 들고 소리쳤다.
중 기관포와 6503함의 부포가 쉴새없이 포격을 해대고 있어서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포반장은 들어라. 지금부터 할당 구역을 정해준다.
포반장 재량 것 사거리 내 모든 목표물을 파괴하도록. 이상”
포탄에 직격당한 목조 건물들이 화염에 휩싸이며 불타 올랐지만, 석조 건물이 대다수인 단치히는
발틱함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크게 망가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해안포를 잠재우고 더 이상
거리낄 것 없는 6503함의 함포 공격에 사거리 내에 있는 모든 건물들이 차례차례 무너지고 있었다.
“해병대를 보내 부두를 장악하도록”
안사엽 대령은 후미에 쳐져 있던 해병대 투입을 명령했다. 선발대 병력 300명이 탑승한 고무보트
50대가 일제히 항적을 내며 6503함을 앞질러 나갔다. 해병대 병력이 나타나자 소형 함들이
고무보트 전대 양 옆으로 길게 늘어서 엄호 사격을 시작했다.
“두드드드드”
해병대대를 이끌고 있는 안종순 중령은 고무보트가 부두가로 접근하면서 몸을 더욱 숙였다.
소형 함에서 기관포로 부두 안쪽을 과도하게 휩쓸고 있었지만 모를 일이었다.
지독한 포화를 피해 단 한 방을 노리고 있는 놈이 있을 지도 몰랐다.
“몸을 밀착시켜라. 총구는 전방. 움직이는 것은 무조건 사격하라”
만사불여 튼튼이라는 믿음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안종순 중령이 모자를 눌러썼다.
검은 보트위로 두 눈만 반짝이던 해병대원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보트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부두 밑으로 다가간 대원들이 부두를 올려다 봤다. 굵은 나무와 판자로 만들어진 부두는 수면 위에서
대략 1.5미터 올라가 있었다.
“올라가”
출렁이는 보트 위에서 대원들이 저마다 쇠꼬챙이가 달려있는 밧줄을 던졌다.
순식간에 부두에 올라간 대원은 범선을 묶어 놓았을 나무 기둥에 그물 사다리를 걸었다.
대략 3미터 간격으로 박아져 있는 기둥을 연결하고 그물 사다리를 걸치자 대기하고 있던 대원들이
부두 위로 올라왔다.
“가자. 돌격 앞으로. 신속하게 안전지대를 확보한다.”
대한 제국 교범에 의거 핵심안전지대 반경 3킬로미터를 확보하기 위해 일차 상륙군 300명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부두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무방비 상태의 부두를 장악한 일차 상륙군은
2차 상륙군이 올 때를 기다리며 서둘러 지휘소를 만들어 갔다.
주변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로 대충 사방에 담을 둘러친 지휘소에 통신장비가 설치되고
조악하게 만들어진 탁자 위에 단치히 주변 지도가 놓여지자, 훌륭한 야전 지휘소가 만들어졌다.
“지휘소에서 통제하겠다. 3중대는 현지점에서 300미터 더 진격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보고하라.”
안종순 중령은 1차로 상륙한 3중대 병력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이 본부중대 병력을 동원해 부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대병력이 속속 부두로 들어와 단치히 시내로 스며들어갔다.
“대대장님. 공병대가 출발했습니다.”
“그래. 예정보다 빠르군”
안종순 중령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후 5시를 향해 초침과 분침이 작은 원을 그리며 돌아갔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병대가 도착해서 부두시설을 점검하고 보완 수리를 마치면
6503함이 접안을 시도하고, 소형함들의 엄호를 받으며 유류와 탄약 보급함이 거슬러 오게 되어 있었다.
“2중대 수색대 적과 조우. 다수의 기병과 보병 혼합 부대가 부두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함포 지원 요청. 좌표 120 / 890”
안종순 중령은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좌표를 지도에서 찾아내고 가장 가까운 부대의 위치를 찾았다.
마침 2중대 수색대와 근거리에서 이동 중인 소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함포가 날아가기 대략 이분정도가 필요했다.
“3중대 3소대에게 수색대 후퇴를 엄호하게 하고, 각 부대의 전진을 멈추게 해.
수색대가 조우한 적을 포위 섬멸하도록. 그리고 저기, 저 건물 옥상에 기관총 거치하고.
야간 전투에 대비하도록. 강 반대편으로도 병력을 배치하고….”
안종순 중령은 수색대가 조우했다는 적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는 오늘 밤을 무사히 보내는 것에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었다.
수색대가 후퇴하면서 사격을 하는지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오늘 밤만 넘기면 한 시름 놓는 건가 ?”
그가 받은 명령은 간단했지만 중요했다. 단치히 항구를 접수하고 내려오고 있는 유류 보급기지를
건설, 방어하기만 하면 되었다. 리가를 출발한 기계화 사단은 늦어도 이틀 안에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원정군에서 가장 많은 기름을 소모하고 있는 기계화 사단을 위해 4군에 배속된
해병 여단 전체가 항구 점령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피우웅”
기함과 6503함에서 발사된 포탄들이 귀성을 지르며 하늘을 갈랐다.
포탄들이 연이어 날아가 건물너머로 사라졌다.
“헉헉헉”
오스카는 가족들을 피신시키는 와중에 경비대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창을 들고 광장을 가로 질러갔다.
기병대는 이미 앞서나갔고, 그 뒤를 오스카 같은 반 강제 지원병들이 허겁지겁 따라갔지만 말 속도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뒤에서 감시하는 수비대만 아니면 금방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잘못하면 수비대에게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허기진 배 때문인지 유난히 발걸음이
무거운 오스카는 대열 최 후미에서 헐떨거리며 간신히 본대를 따라갔다.
“펑펑”
“꽈광”
“피하라, 포탄이 떨어진다.”
광장에서 부두로 뻗어있는 길 위로 눈 먼 포탄들이 날아와 터졌다. 주변 건물이 포탄에 맞아 생긴
돌 파편들이 지원병들을 휩쓸어갔다. 기병대 꽁무니를 잡기위해 무작정 달려가던 지원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했다. 삽시간에 부상병들의 절규와 시체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계속 움직여라. 겁먹지 마라”
알프레도가 간신히 말을 진정하고 지원병들을 향해 소리쳤지만, 도시 빈민층이 태반인 지원병들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얼굴에는 죽음의 공포가 짙게 드리워져 있어서
모두들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있었다.
“탕탕탕 타타타탕”
몇 분이 흘러도 꼼짝 않던 지원병들은 새롭게 울려대는 총포소리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앞서 나갔던 수비대장이 황급히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그 뒤를 수십 기의 기병이 따라왔다.
알프레도는 자신에게로 오는 수비대장에게 어찌된 일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수비대장은 말을 멈추지도 않고 그의 곁을 지나쳤다.
“알프레도, 당장 병력을 수습하여 후퇴하라”
“탕타타. 탕”
골목을 돌아 나오던 대한제국군이 이쪽을 발견하고 사격을 해댔다.
미처 대응할 틈도 없이 대한제국군은 엄호를 받으며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후퇴. 모두들 영주성으로 후퇴. 도망가는 자는 가만두지 않겠다. 후퇴하라”
적이 침공했다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 후 줄곧 달리기만 했던 지원병들이 이번에는 살기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장 뒤쳐져 있던 오스카는 숨을 고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동료들은 부상자들을 남긴 체 저 멀리 도망치고 있었다.
‘어떻게 한다. 지금 나갔다간 영락없이 당할 텐데…’
낙오된 오스카는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따뜻한 스프 한 접시 마음대로 먹이지 못 할 지언정,
그에게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가족들이 있었다. 한 참을 꼼짝 않고 숨어있던 오스카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가까워지자 등골이 오싹해지며 마음속으로 신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기도가 통했는지 생소한 말소리가 이내 멀어져 갔다.
대한제국군이 뒤로 물러난 후에도 오스카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모두들 갔겠지. 그럴 거야. 아니야 어디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릴지도 몰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고민하던 오스카는 팔 다리에서 전해오는 통증에 신경이 쓰였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팔,다리의 통증을 느끼지 못 하고 있었는데 긴장이 풀리면서
점점 고통이 심해졌다. 다행히 피는 흘리고 있었지만, 심각한 부상은 아닌 듯 했다.
실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 번 거리던 오스카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뭔가 쫓아오는 것 같은 생각에 뒤를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불길처럼 일었지만 무작정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길 한참. 눈앞에 자신의 집이 보이자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단기3959년(1626) 여름 발틱해 단치히 항 북쪽 100킬미터 지점
4군 1군단 기계화 사단은 모든 병력이 탈 것을 이용해 이동하고 있었다. 기동로가 확보되면 하루에
200킬로미터도 전진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가지고 있는 4111 기계화 사단은 장갑차 여단 2개, 포병연대,
보병연대를 주축으로 통신대대, 공병대대, 수색대대, 수송대대를 예하부대로 두고 있었다.
천마-1로 무장한 1 여단과 천마-3으로 무장한 2여단, 천포를 주축으로 포병연대 그리고 각종 장비를
가지고 있는 사단답게 하루에 소모하는 기름양이 엄청났다.
“새로운 둥지를 마련했다는 전문입니다. 주변 정리가 미흡해서 진입시 유의하라는 첨언이 있습니다.”
“그런 놈들 신경 쓸 것 없어. 두더지들이야 밟고 지나가면 되는 거고, 외곽을 맡고 있는 부대에게
불필요한 인명피해를 줄이라고 하게. 싸움을 걸어오는 놈들이야 인정 사정 둘 필요 없지만,
왠만하면 접근만 막으라고 말야.”
“네. 알겠습니다.”
천포를 개량해 만든 지휘차량에서 천마-2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4111이라는 번호가 쓰여있었다.
바로 옆에는 통신대대가 운용하는 통신차량이 지휘차량과 나란히 기동하고 있었고,
그 후미에 보병연대가 탑승한 수송차가 줄지어 달려왔다. 부대 전체 이동속도는 시속 20킬로미터를
넘지 않았지만 꾸준히 이동하고 있었기에 단치히까지는 앞으로 5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저기 움직이는 것들은 뭐야 ?”
망원경으로 사방을 둘러보던 사단장이 들판을 지나가는 사람의 형체를 쫓고 있었다.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피난민처럼 힘겨워 보였다. 등에는 짐인지 아이인지 모를 것을 짊어지고 있었다.
“피난민으로 추측됩니다. 붙잡아서 조사 할까요 ?”
“그래. 수색대대에게 명령을 내리게. 단순한 피난민이면, 먹을 것이나 던져주고 오라고 하고”
명령을 받은 장갑차 하나가 속력을 높여 대열을 이탈하며 목표물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목표물과 장갑차와의 거리는 갈수록 좁아져 금세 따라 잡혔다.
장갑차 후문이 열리고 분대병력이 우르르 내려와 겁을 잔뜩 먹고 있는 목표물을 둘러쌓다.
장갑차장 박춘수 하사는 기관총을 돌려 그들을 겨누고 수색대대 본부와 통신을 시도했다.
“단순한 피난민으로 보여집니다. 어린아이 둘에 그의 부모로 보이는 남녀 도합 4명입니다.”
“어디서 온 사람들인가 ?”
“단치히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랍니다.”
“단치히 ? 언제 ?”
“이틀 전이랍니다.”
“이틀 ? 이틀에 100킬로를 달려왔단 말야 ?”
“그래서 그런지 행색이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할지 알려 주십시오 ?”
군인도 아닌 일반인이 하루에 50킬로를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어쩐지 미덥지 않았다. 대대장은 그들을 좀더 심문할 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대대장은 박춘수 하사를 호출했다.
“물과 먹을 것을 건네주고 귀환하게.”
박춘수 하사는 대대장의 명령에 얼굴이 퍼졌다. 자칫 이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면
그로서는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춘수 하사가 통역병에게 그대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통역병의 말을 전해들은 피난민 가족은 반신 반의 하며 박하사를 바라보았다.
“야. 초병장. 물통하고 먹을 것 좀 걷어서 줘라.
그리고 내 모포하고 신발 가져와. 아니 신발은 그냥 둬”
행색은 초라해도 허우대는 커서 자신의 신발이 맞지 않을 것 같았다.
초병장이 비상식량으로 지급된 말린 가래떡과 부식인 건빵 그리고 눈깔사탕 몇 봉지를 모포에
돌돌 말아 박하사에게 올려보냈다. 초병장에게 건네 받은 모포꾸러미를 피난민에게 던진
박하사가 이동명령을 내렸다.
“그만 가자. 이러다 낙오병 되겠다.”
얀과 그의 부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녹색 괴물 덩어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 했다.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던 사내아이가 뒤늦은 울음을 터트렸다.
숨막일 듯 한 긴장감이 한순간 무너지며 얀은 안고 있던 아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내에게 아이를 넘겨주고 모포를 끌어당겼다.
“이것도 먹는 건가 ?”
투명한 비닐 주머니 속에 얇게 썰은 가래떡이 가득 들어 있었다.
생전 처음보는 물건을 만지던 얀은 미끌 미끌한 감촉이 내키진 않았지만,
입에 대고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포장 비닐이 쭈우욱 밀려나더니 찌져지면서
안에 있던 하얀 가래떡이 우수수 쏟아졌다.
입속에 든 것을 우적 우적 씹던 얀은 이내 가래떡과는 사뭇 다른 비닐을 뱉어내고
가래떡만을 씹어댔다. 딱딱하게 굳은 가래떡이 서너조각으로 부서지며 침과 섞이자
말랑말랑 해졌다. 한참을 씹던 얀은 목구멍으로 넘기고 다시 땅에 떨어진 떡을 입에 집어 넣었다.
“그런대로 먹을 만 한데. 이거 먹어 보라구”
봉지를 그대로 밀어 주자 얀의 아내는 두어개를 집어내 입에 넣었다.
단치히를 탈출한 이후 줄곧 보리빵 한 개밖에 먹지 못했던 얀의 가족은 모처럼 곡기가 배속에 들어가자
평안함이 밀려왔다. 이미 대한제국 군인이 지났갔다면 앞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을 듯 보였다.
“이제 천천히 가도 되겠소. 그만 갑시다.”
대한제국군이 준 떡봉지는 3개가 더 있었다.
그거면 하루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고, 아껴먹으면 이틀이나 삼일도 가능했다.
대한제국 서울 단군 건물
경복궁 왼편 창경궁 뒤쪽에 대한제국 최고의 의결 기관인 단군이 자리를 잡았다.
단군은 천군부와 천인단 그리고 황실을 감찰할 수 있는 부서와 국책 사업을 조정하는 부서만을
갖고 있는 작은 조직이었다. 천인단과 천군부에서 파견된 인원을 제외하면
단군에 배속된 직원은 50명이 넘지 않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평안하셨습니까 ?”
“네. 안녕하셨습니까 ?”
백흥한과 윤치호는 정문에서 만나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둘 다 4분기마다 한번씩 열리는
정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점심을 마치고 바로 이곳으로 달려왔다.
정례회의는 단군인 신기철과 천군부 최고 의원회 의장 윤치호 그리고 천인단장 백흥한,
이렇게 3인만 참석하는 회의로 대한제국의 중.장기 계획을 조절하기 위해 열렸다.
단군 건물 3층에 있는 회의실에서 열린 2차 회의는 신기철 천군부 장관이 단군직에 오르면서
천군부의 명령권을 물려받은 최고위원회 의장의 정례 보고를 시작으로 언제 끝날지 모를 회의가
시작되었다. 각각의 자리에는 자신의 비서실과 직통으로 연결된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비서실에는 인원이 총동원되어 대기중이었다. 언제 무슨 자료를 요청할 지 몰랐기에
비서들은 초긴장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작전명 신들의 전쟁은 현재까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서양 봉쇄작전이 광범위하게
펼쳐지고 있으며, 조만간 유럽은 대양항해를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바르샤바에서 한차례 격돌이
불가피하지만, 바르샤바 함락은 큰 무리 없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공군의 이동배치도 마무리 단계입니다. 한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터키 함대가 궤멸되는 등
예상외로 고전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로 인해 로리앙에 가해지는 압박이 더욱 심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천군부내에서 추진하고 있는 개괄적인 보고를 마치자, 백흥한은 터키를 도와줄 것을 건의하고 나섰다.
터키제국에서 그라나다를 공격한 이래 줄기차게 협조요청을 받고 있는 천인단으로서는 천군부가
뒷짐만 지고 있는 것이 내심 못 마땅했기 때문이다.
“자칫 너무 많은 피해를 보게 되면 그 화살이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도와달라고 하는데 도와주지 않으면 괜히 미워지는 게 사람 마음 아닙니까 ?
더구나 그라나다 원정군이 전멸이라도 당한다면 이스탄블의 힘이 많이 약화 됩니다.
그렇게 되면 속국들이 터키제국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 그리스에서 이런 움직임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미 이란은 영국인의 조언을 받아 군제를 개편한 지 오래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흑해 주변 국들도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보입니다.
대한제국이 터키를 장악할 준비가 될 때까지 전쟁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백흥한 천인단장의 제의에 윤치호가 찬성하고 나섰지만, 신기철은 터키 원조를 주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직접적인 파병을 감행하면 힘의 균형이 깨질 우려와 함께, 이베리아 반도가 터키제국의
손에 넘어가면 자칫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수 있었다.
“이미 증기포함 5척을 지원했고, 총포탄을 지금도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자라 대한제국
젊은이의 피를 요구한단 말입니까 ? 남의 전쟁에 피 흘릴 이유를 제시한다면 고려해 보겠지만
현재로서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폴란드 전선에 집중할 때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터키가 당장 무너질 만큼 허약하지는 않습니다.
설령 원정군이 전멸하더라도 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 천인단장님 !”
“그렇긴 합니다. 그라나다 책임자가 터키 재상의 두 아들임을 감안한다면 그곳에는 타라한 황후의
복안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조약을 근거로 저쪽에서는 저희에게
파병을 계속해서 요청하고 있고, 과거의 전례도 있어서 거절하기가 곤란한 실정입니다. 무엇보다도
터키 황실이 우리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된다면, 터키와 유럽이 가까워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조약이라는 것은 상호 방위 조약이지 않습니까 ? 그리고 이슬람과 기독교가
손을 잡는다는 것은 기름과 물이 섞이는 것 보다 어렵습니다. 괜한 기우이십니다.”
백흥한과 윤치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신기철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6개월 남 짓 천인단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백흥한은 더 이상 이견을 주장하지 못하고 말문을
닫아야 했다. 사실 그 자신도 자신의 예측이 최악의 예측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번 8호 봉화사업 실패원인은 파악되었습니까 ?”
신기철은 천인단의 현안보고가 끝나고 나서 가장 궁금한 부분을 집고 넘어갔다.
천군부에서 가장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라면 통신위성과 제트 비행기의 실용화라 할 수 있었다.
추진체 개발이 한창이던 시절부터 추진된 인공위성 연구인 봉화사업은 실패에 실패를 거듭한 끝에
거의 성공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다.
“추진체 분출 제어기 이상입니다. 탑재 된 과산화수소 분출 계통에 약간의 문제점이 발견되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위성은 거의 완벽하게 결함 부분을 수정했으니 다음 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요 ? 참 아쉽습니다. 이번에는…”
신기철이 무척 아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끝을 흐렸다.
통신과 교통망을 얼마나 빨리 확충하느냐에 따라 지구를 단일권으로 묶을 수 있는 시기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점령지가 점점 확대되면서 유선을 통한 통신은 한계에 부딪힌 지
오래고, 점령과 통치 그리고 문화 침투를 위해서는 방송만한 것이 없었다.
폴란드 바르샤바
대한제국군의 진군과 함께 북부 폴란드가 대한제국군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연일 바르샤바에
전달되었다. 그때마다 지그문트는 북부 폴란드인을 매국노라며 분을 삯이지 못해 길길이 날 뛰었지만,
브레스트 마저 대한제국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디만큼 왔다더냐 ?”
“100마일까지 접근해 있습니다.”
스체르바츠끼 역시 담담하게 지그문트에게 대답했다.
“부아디수아프는 ?”
“우치를 지나 빈으로 향하고 있다는 마지막 전갈이 왔습니다.”
“100마일이라면 먼 거리는 아니군. 우리도 이제 그만 나가봐야겠군.
장군들과 연대장들은 다 모였다 던가 ?”
“그렇습니다. 폐하.”
전체적으로 초기 바로크식과 고딕식이 가미되고 로코코식이 첨가된 독특한 양식의 건출물이 로얄성을
왕실마차가 빠져 나왔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왕실대로는 지그문트의 여름 별장인 라지엔키궁으로
이어졌다. 웅장한 대리석 건물들이 마주보며 나란히 줄지어 있는 왕실대로를 근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왕이 탄 마차가 따그닥 거리며 지나갔다. 광장에 도열한 각급 지휘관들이 라지엔키궁으로 들어서는
마차를 맞이했다. 광장 왼쪽에는 성대한 만찬이 마련되고 있었다.
“보라 ! 여기 모여 있는 귀관들의 늠름한 모습을. 폴란드의 자존심이며, 자긍심인 그대들에게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님의 가호가 깃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명예로운 삶을 살다간 우리를
우리의 자손들은 자랑스러워 할 것이며, 그대들이 흘린 피 한 방울 한 방울은 우리의 땅,
우리의 형제 자매, 우리의 자식들을 살찌우는 밑거름이 되리라.
폴란드를 배신한 저 악마의 탈을 쓴 북부 영주들에게 가혹한 신의 심판이 내릴지니, 나를 따르고,
폴란드를 따르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님에 의지하는 우리들 앞에 오직 승리 뿐이다.
모두들 축배를 들라. 이는 나의 피와 살이요, 그대들 옆에 있는 동료의 피와 살이라.
이는 그대들 부모형제자매의 피와 살이니, 단숨에 마시고 나가 싸우라. 죽음을 두려워 마라.
내가 죽지 않으면 누가 죽겠는나 ? 내가 죽어 폴란드가 산다면, 난 기꺼이 골백번이라도 죽으리니.
오늘 우리가 한 날 한 시에 만나 축배를 들고 만찬을 먹음 수 있음을 감사하라.
그대들 앞에 차려진 성찬은 성모마리아께서 주신 것이니, 그대들 머리 위에 성령이 임하시리라.”
지그문트의 연설은 계속되고 있었다. 대한제국군은 3개 방향에서 시시각각 바르샤바를 옥죄어오고
있었다. 10만에 가까운 폴란드 군은 대한제국과의 결전을 위해 바르샤바에 몰려들었고, 여기에는
남부 영주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예 기사단이 참가하고 있었다. 이윽고 지그문트가 죽음으로서
폴란드를 지킨다는 맹세를 하고 술잔을 높이 들어 마시자, 지휘관들이 술잔을 들어 올렸다.
보드카가 가득 담겨진 술잔이 비워지자, 카르미에 대주교는 지그문트를 시작으로 일일이
지휘관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었다.
“출발”
대열 맨 앞에 선 지그문트가 마침내 대병력을 이동시키기 시작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10만 정예병이
바르샤바를 떠나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나온 시민들은 손을 흔들며 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에게 환호성을
질러댔다. 남편을 전장에 내보낸 한 여인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탐스러운 유방을 흔들어 댔다.
옆에 있던 여인은 눈물을 훔치고 치마들 들어 올렸다. 치부가 훤히 보이도록 치마를 올렸지만,
아무도 그녀들을 나무라지 않았다.
‘나는 당신 것이니, 죽지말고 승리해서 돌아와요’
대한제국군이 바르샤바에 들어오면 자신의 아내나 딸들은 대한제국 군대의 성 노리개가 될 수 있다는
무언의 암시와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여인의 간절한 소망이 온몸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바르샤바를
떠나 꼬박 하루를 행군한 폴란드 군은 비스와니강 지류를 방패 막으로 삼아 길다란 진지를 구축하고
다가오는 대한제국 군을 맞이할 채비를 갖추었다. 강폭이 불과 30미터가 조금 넘는 작은 하천이었지만,
대한제국군의 진격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강 남쪽에 진을 친 지그문트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대한제국군 기병대가 나타났습니다.”
깃발을 높이 쳐든 대한제국군 정찰대대병력이 강 언덕에 나타났다. 4군 5군단 기병사단인 4521사단에
배속된 정찰대대 숫자는 오백여기가 넘어보였다. 그 뒤로 자그마치 5만명의 대군이 몰려왔고,
후방 보급로를 책임지고 있는 6군단 병력을 합치면 십만이 넘는 대군을 막아야 했다.
“라도슬와프 백작에게는 소식이 있었나 ?”
“아직 없습니다. 연락병을 보냈으니 금일간 소식을 가지고 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도슬와프 백작은 빌뉴스에서 출발한 4121 기병사단과 빌뉴스 영주가 이끄는 반군을 막기위해
비아위스톡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지그문트가 바르샤바를 떠나기 전 대한제국군과 교전한다는
소식이후로 소식이 끊긴 상태였기에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단기3959년(1626) 폴란드 바르샤바 동북쪽 80킬로미터 지점 대한 제국 원정군 사령부
민스크를 출발한 이래 원정군 지휘부는 모처럼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기병대대가 비스와 강 지류를
건너던 중 폴란드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는 보고와 5군단 진군로에 대규모 적 진지가 발견되었다는
정찰보고가 계속해서 지휘 차량으로 흘러 들었다.
“봉황을 전방으로 보내 광범위한 정찰을 시도하고, 특히 강 상류 상황을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하게.
5군단은 도하작전 및 적 방어선 돌파를 위한 공격작전을 수립하고, 포병 여단 신속 전개.
주변 적당한 곳에 지휘소를 마련하도록.”
사령관의 명령이 예하 부대에 전파됨과 동시에 지휘 차량이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불과 한시간이 넘지 않아 공병 대원들이 주변을 정리하고 원정군 야전 지휘소를 설치하고,
주변에 보조 천막과 참호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되나 ?”
만들어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던 사령관이 지휘 차량을 나왔다.
“대략 8만에서 10만입니다. 그 중 기병은 3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작전 참모가 대답을 하며 사령관을 따라 나왔다. 통신 장비들이 지휘소로 옮겨지고, 차량들이 이동을
시작하자 주변에 흙먼지가 일었다. 멀리 동남쪽 하늘에 떠 있는 봉황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던
사령관이 소매 옷깃에 묻은 풀잎 하나를 떼어냈다. 궤도차량에 짓이겨진 잡초 이파리 하나가 바람에
날려 왔던 것 같았다.
“많군. 단단히 벼르고 있겠는데. 하천 상류쪽은 정찰이 끝났나 ?”
“네. 그렇습니다. 상류 10킬로미터 이내에는 조용합니다. 하천 흐름도 정상입니다.”
“그래. 다행이군. 기병사단과 6군단 보병사단을 교체 투입하게.
6131사단을 5군단에 배속시키고 5121 사단을 상류로 이동시켜 자체 도하작전을 펼치도록.
5121사단의 우회기동 시간을 산출해서 5군 김한석 장군에게 알려줘.”
대충 지휘소가 마련되자, 사령관이 지휘 천막으로 들어갔다.
하천을 경계로 대치중인 병력도가 그려진 전장 지도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한제국군은 길게 1자로 늘어선 모양을 하고 있는 반면, 폴란드군은 하천을 따라 넓게 퍼져 있었다.
그 길이가 족히 5킬로미터는 넘음 직 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한제국 군을 의미하는 파란색 깃발이
점점 옆으로 퍼져 나갔지만, 전 부대가 공격 명령을 수행하기 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한 듯 보였다.
“야간 전투는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는데…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군.”
얼렁뚱땅 시간은 오후 5시를 넘기고 있었다.
저녁 나 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피곤함과 몽롱함이 주변 공기 속에 섞여 떠다녔다.
생소한 지역에서 행군에 행군을 거듭한 원정군의 피로도는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었다.
“두두두두두”
김한석 소장이 이끄는 4521 기병사단 병력이 지휘부 오른쪽 2킬로미터 지점을 지나 본대 후위로 진영을
옮겨갔다. 하천을 넘나들며 폴란드 군과 소규모 교전을 펼치던 기병대가 휴식을 취한 후 동쪽으로
이동해갔다. 적 후방이나 측방을 공격하기위해 움직이던 기병대가 예정 도하지점이 가까워지자
부대 이동속도를 늦춰갔다.
“조용히, 조심스럽게 도하한다.
개별간격 5미터 소대간격 50미터를 유지하고 사주 경계를 철저히 하라.”
상류 하천은 수심이 깊은 곳 몇몇 지점을 제외하고는 말을 타고 건너기에 무리가 없었다.
선두를 맡은 3대대 1중대를 시작으로 사단 병력 팔천여기가 천천히 하천을 넘어갔다.
폴란드군 중군과는 15킬로미터이상 좌측과는 13킬로미터이상 떨어진 곳에서 도하를 시작한
4521 사단이 도하를 무사히 마치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연대장들은 집합”
아무런 방해 없이 사단 전체가 하천을 넘어오자, 김한석 소장은 연대장들을 한자리로 불러모았다.
야간 작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한석 소장은 각 단위 부대에게 전달 사항을 미리 알려주고자 했다.
야간에 어떤 돌발상황이 발생할 지 몰랐기에, 그는 여유가 있을 때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싶었다.
“앞으로 3시간 후 재 집결하여 이동한다. 그 동안 충분한 휴식을 취하도록.
야간전투에서는 무엇보다도 위치 보고가 생명이다. 우리는 적진 깊숙이 들어가기에 자칫 아군으로부터
오인 사격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지휘관들은 위치가 변동할 때마다 또는 10분마다 정기적으로 위치를
지휘실에 보고하도록. 특히 돌격개시 전, 꼭 위치를 확인하기 바란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의
작전지역을 벗어나지 말아라. 알겠나 ? 항시 돌발 상황에 대처할 준비를 하고 휴식에 들어간다.”
“네. 사단장님”
각급 연대장들은 김한석 소장이 건네주는 작전 지시서를 받아 들고 각자의 연대로 움직였다.
연대장들은 예하 대대장들에게 똑 같은 전달사항을 지시하고 전 병력에게 휴식을 명령했다.
작전시간과는 아직 5시간의 여유가 남아 있었고, 하루종일 돌아다녔기에
말이나 병사에게나 휴식이 필요했다.
폴란드 중군 지휘소
해가 지면서 폴란드 군 진영에서도 횃불이 하나 둘씩 피어 올랐다. 낮에 있었던 대한제국 기병대의
도하시도를 모두 막아낸 지그문트는 밤이 되면서 적의 움직임이 둔화되자, 적잖이 안심을 하고 있었다.
“적 기병대가 후방으로 빠진 듯 합니다. 기병대를 투입해서 야습을 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
“야습이라 ?”
기병군단을 이끌고 있는 크지노벡 야첵의 말에 지그문트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낮에는 하늘에 떠있는 봉황 때문에 내놓고 움직일 수 없었지만 밤에는 적의 이목을 속이기가 쉬웠다.
지그문트 역시 야습을 생각했지만 주저하고 있었다.
“이동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늘이 첫날밤이기에 적의 대대적인 공격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은 먼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휴식을 취하지 않겠습니까 ?
여러모로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어둠이라는 든든한 후원자도 있고 말입니다. 모든 것이 최적입니다. ”
“저도 크지노벡 아첵님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적이 여력이 있었다면, 벌써 공격하고도 남았을 거라
사료됩니다. 공격하는 게 좋습니다. 정찰보고에 의하면, 대한제국군은 지금 휴식에 들어갔습니다.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천막 안에서 잠을 자는 것으로 보입니다.”
보병군단장인 클로스 토마시 역시 기병군단장의 의견에 찬동하고 나섰지만, 지그문트는 여전히 결정을
망설였다. 대한제국군의 화력과 공격력을 몸소 느낀 그로서는 자칫 사자머리에 머리를 집어넣는
우를 범할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러웠다.
“대한제국군과 맞붙는다면 우리 군대는 산산조각 납니다.
천연의 방어벽을 버리고 공격으로 나선다는 건 우리의 기본 전략과 어긋납니다.
적에게 혼란을 주기위한 소수 병력을 동원한 야습이라면 모르지만, 대규모 공격은 무리입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군이 가지고 있는 철마를 부술만한 무기가 마땅치 않는 마당에
야습은 자살행위입니다. 야간 전투가 우리에게 생소한 방식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도 말입니다.”
유일하게 포병연대장인 제프와쿠프 미칼만이 반대의사를 표시하고 나서자, 다른 지휘관들이 그를
못 마땅한 표정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지만, 크지노벡은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인정합니다. 하지만 낮보다는 밤이 오히려 우리에게 유리합니다. 화력의 차이가 극명한 지금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밤이야말로 적의 이점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적들에게 시간을 주면
그만큼 우리가 불리합니다. 일단 기회다 싶으면 공격해야…
“경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지그문트는 결정을 내렸다는 듯 크지노벡의 말을 중간에서 잘랐다.
“전군에게 공격준비 명령을 내려놓도록 하고… 우선 야음을 틈타 기병대를 투입 시킨 후,
상황을 보면서 보병투입을 시도하겠으니 준비를 철저히 하시오.
그리고 은밀히 포대를 전방으로 이동 배치 하고. 아 참, 적 기병대 위치는 파악되었나 ?”
“아직 입니다. 후방으로 멀리 빼돌렸거나, 어디에서 숨어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도보 정찰은 거리상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병정찰을 감행하면 좋겠지만, 그걸 눈뜨고 볼 대한제국군이 아니었다. 하천을 따라 수십 마일까지
행해지고 있는 기병정찰과는 다르게 전방 정찰을 불과 몇 마일이 고작이었다.
“적 기병대가 크게 우회해서 우리 후방에 나타난다면…”
지도를 살피던 재상이 중얼거리자 모두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기분이 멍해졌다.
적을 공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썼던 크지노벡이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어냈다.
재상의 예상에 깜짝 놀란 지그문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빌어먹을. 전혀 생각지도 못했군.”
“정찰 거리를 두 배로 늘리고 적 내습에 대비할 수 있는 상비군을 중군에 대기시키시오.
포대도 따로 차출해서 배속시키고. 기동성이 뛰어난 포대로….
서두르시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소.
제장들 ! 우리는 죽기위해서 이곳에 왔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두들 떠난 막사에 홀로 남은 지그문트는 자신의 두 아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큰아들은 빈에서, 작은아들은 스톡홀롬에서 외로운 타향살이를 하고 있었다.
“성모마리아의 가호가 있기를… 성모 마리아님. 형제간의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폴란드 재상 스체르바츠키는 지그문트가 머무르고 있는 막사에 들어가려다 멈춰 섰다.
지그문트의 기도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고 있었기에 재상은 기도가 끝나길 기다리며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자신과는 상관없는 구경꾼처럼 수십만 개의 별들이 반짝이며 대평원을 굽어보았다.
곧 있으면 시작될 전투를 즐기는 관객들은 반짝이며 환호성을 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휴우”
쓸데없는 상념에서 깨어나며 길게 한숨을 쉬던 재상이 지그문트에게 허리를 굽혔다.
지그문트는 소리없이 막사를 나와 재상 옆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이 됩니까 ?”
“무슨 말씀이신지요 ?”
“아닙니다. 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문뜩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 일까 ?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 결정에 수십만의 병사들이 죽어나갈 수 있습니다. 살릴 수 있는 목숨을 말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언행을 보이고 있는 지그문트 폴란드 왕을 바라보며 재상이 몸 둘 바를 몰랐다.
그가 알기로 지그문트는 그렇게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폭군에 가까운 왕으로 농민이나 병사들의 안위를 생각하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모두들 폐하와 폴란드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입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심은 곧 저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그런가요 ?”
지그문트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10만 명의 병사들이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지만
고요하기만 했다. 적막한 평지를 밝히는 모닥불들과 횃불들만이 타닥거리며 타올랐다.
“마구간이 조랑말에게. 조랑말. 조랑말 나와라”
통신기에서 4521사단을 호출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의자에 앉은 그대로 선잠을 자고 있던 통신장교가 고개를 바짝 세웠다.
반쯤 코에 걸려있던 수신기를 고쳐 쓴 장명한 대위가 정신을 차리고 수신 단추를 길게 눌렀다.
“여기는 조랑말, 장명한 대위. 마구간 말하라”
“너 이 새끼. 뭐하고 있었어 ? 내가 얼마나 호출했는지 알아 ?”
호출이 울리자마자 응답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고함치는 통신대대장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함께 안도감이 혼합되어 있었다.
장명한은 자신이 얼마나 졸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머뭇머뭇 거렸다.
평소 같으면 통신대 대대장은 장명한 대위의 근무 태만에 대해 한바탕 했을 테지만
그것보다 더 급한 용무가 있는 지 상황전파만 하고는 통신을 끊었다.
“지금 시간부로 1급 경계령. 조랑말 이동 준비 명령. 10분 후 재교신 이상”
“1급 경계령. 조랑말 이동 준비. 10분 후 재교신 이상”
장명한은 서둘러 예하 연대 통신대에 상황을 전파함과 동시에 사단장에게 전령을 보냈다.
적진에 숙영하고 있었기에 4521사단 병력들은 대부분 얕은 잠을 자고 있었고,
“무슨 일이야 ?”
지휘소로 들어온 김한석 사단장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부대 이동시간까지 한 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총공격은 새벽 3시를 기해 예정되어 있었다.
“1급 경계령과 함께 조랑말 이동 준비 명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벌써 ?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
본대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미 짜여진 작계를 변동시킬 이유가 없었다. 김한석 소장은 조바심이 났다.
재교신 까지 7분이 남아있었지만 그 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각 연대장들은 정위치 보고하라”
“1연대. 대대 통신장비 철수 중”
“2연대. 병력 준비 중”
연대장들이 사단 본부에 이동 준비 상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명령 전파 초기 단계에서 그런지 대부분의 연대들은 준비상황이 미비했다.
명령 접수 후 10분 안에 이동 할 수 있는 기동성을 보유하고 있는 기병사단임에도,
야간이라는 점과 돌발 상황이라는 점이 합쳐서 시간이 두 배이 상 걸릴 듯 싶었다.
“조랑말 나와라. 지지익.자아악.”
잡음 섞인 무전이 들어왔다.
김한석 소장은 정명한에게서 통신기를 받아 들고 군단 사령부의 통신을 받았다.
“난 김한석이야. 무슨 일이야 ?”
“충성 ! 본대가 적 기병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현재도 교전 중이며 적의 전면적인 공격인지를 파악 중에 있습니다.
군단장님께서 통신을 원하십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모두들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지만, 적의 공격이 진행되고 있는 주는 꿈에도 몰랐다.
제한적 기습이든 전면 공격이든 원정군에게는 선수를 빼앗긴 것은 분명했다.
“준비는 다 되었나 ?”
5군단장 고수석 중장이 거두절미하고 김한석에게 물어왔다.
“아직입니다만 10분 후에는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래. 일단 대기 다음 명령을 기다리도록.
이쪽 상황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알겠나 ?”
“네. 사령관님. 그런데 정확히 어떻게 되 가고 있는 겁니까 ?”
군단장은 별일 아니라지만, 김한석에게는 모든 것이 궁금했다.
본대와 동떨어져 전투를 해야 하는 그로서는 가급적 많은 정보가 필요했다.
특히 지금처럼 돌발사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고수석 중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사단 규모의 적 기병대가 하천을 넘어와 공격을 시도했네.
동쪽으로 넘어왔으니 자네 진격로에도 적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지금 4511사단이 막고 있으니
곧 진압 될 거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적 보병이야. 도하를 시도한다면
자네가 움직일 시간이 없어지네 그래서 미리 준비시키려는 거야. 이만 끊네”
“알겠습니다.”
군단장과 통신을 마친 김한석 소장은 지휘소에 몰려든 연대장들과 참모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아무도 선뜻 질문을 하지 않았다.
“본대에서 전투가 진행중이다. 적 기병대가 우리 앞을 통과해 하천을 도하해 본대 좌측을 공격한
모양이다. 전면적 기습인지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 사단은 신속히
이동 준비를 끝내고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적이 이쪽으로 올지도 모르니 경계병력을 두 배로 늘리고
단대 간 위치를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상.”
“달이 뜰 때까지 대기하는 겁니까 ?”
“일단 그렇다. 하지만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선 조치 후 보고하기 바란다.”
연대장들이 지휘소를 빠져나가길 기다렸다는 듯 사단 본부중대 병력들이 우르르 몰려와 지휘소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주요 장비인 통신기를 마차에 실어 나른 것을 끝으로 지휘소 해체가 마무리되자,
쉴 곳을 잃어버린 사단장이 임시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보름이 한참 지난 밤하늘은
별들만 총총거렸다. 그에게 오늘 밤처럼 길게 느껴진 밤도 드물었다.
“언제 조명탄 준비되는 건가 ?”
4511사단장인 김진철 소장은 계속해서 군단 포병 여단을 호출했지만 들려오는 것은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적 기습이 발각된 지 불과 10분만에, 1여단이 포위 공격을 받고 있었다.
적은 기동성을 십분 발휘하여 1여단 병력이 채 천마에 탑승하기도 전에 공격해 왔다.
외곽 경비를 맡고 있는 경비 중대는 전멸한 것 같았다.
“사단장님 ? 2여단의 출동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 3여단은 방어선을 구축했나 ?”
“네. 천마를 진지 삼아 남북으로 총 2000미터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좋았어. 2여단장 호출해”
김진철 소장은 자신이 맡고 있는 구역으로 적이 기습해 들어왔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기계화 사단과 기병대간의 싸움이라면 이미 승패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그리 만만치 않았다. 초동 경계보고가 늦어지는 바람에 막사를
뛰쳐나와 천마에 탑승하는 도중에 기병대의 공격을 받은 1여단은 제대로 대응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명탄 기다릴 시간 없다.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2여단 출동.”
야간 오인사격을 우려해 조명탄 지원을 받으려던 김진철 소장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일단 영내에 들어온 적을 몰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원정군 좌측을 담당하던 4511사단 2여단 천마-4 수백대가 일제히 진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운전등을 켠 행렬이 길게 늘어서며 평원을 질풍처럼 달려나갔다.
“시속 20킬로미터를 유지하며 1여단 주둔지까지 이동한다. 아군과 적군을 잘 가려 공격하라.
차간 간격을 충분히 넓혀 상호 충돌을 방지하도록 이상”
천마-4에 탑승한 2여단 병력은 총안구를 열고 사격 준비를 서둘렀다. 앞 뒤에서 달리는 동료차량에서
나오는 차량등의 불빛에 의지한 시계는 겨우 20미터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덜커덩거리는 차체에 몸을
맡기고 장전을 하던 막리지 상병은 갑자기 총안구로 그림자가 휙 지나가자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쪘다.
“사격. 적이다.”
“드드드드”
단차장의 외침과 함께 천마-4에 거치된 기관총이 불을 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지를 나온지 5분만에 적 기병대와 조우한 2여단 천마들이 차간 간격을 더욱 넓혔다.
“3대대는 반전하라. 여단을 통과한 적 기병대를 따라잡는다.”
1여단을 통과한 기병대가 빠른 속도로 어둠 속에서 뛰쳐나와 2여단 진영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천마 정면을 향해 달려온 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2여단을 통과해 버려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자, 2여단장은 급히 3대대로 하여금 적 후미를 뒤쫓게 했다.
“드드드. 탕 타당”
3여단 2대대 3중대장인 문봉민 대위는 잔뜩 긴장한 체 전방을 응시했다. 모든 차량이 앞부분에 달린
전조등을 켜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전조등이 비추는 건너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중대장님 ? 대대 무선입니다.”
“충성 대위 문봉민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짧게 통신을 마친 문봉민 대위는 각 소대장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고는 자신의 제국소총을 들어 올렸다.
중대장이 된 이후로 제국 소총을 쏘아본 기억이 없었다. 2여단이 전투에 들어갔는지 전방이
시끄러웠다. 불빛들이 어지럽게 흔들리며 총성이 들리더니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사격”
여단장이 직접 전체 여단병력에게 사격 명령을 내리자, 본부 중대를 시작으로 여단 전체가 어둠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무작정 앞을 향해 발사된 총알이 3여단 앞으로 쇄도해 오던 폴란드 기병대를
덮쳐갔다. 지향사격이 불가능했기에 시도된 무식한 작전이었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타타당 타당 드드드”
천마-4 기관총 사수는 좌우로 15도 이내에서 기관총을 쏘아댔다.
순식간에 200발이 들어있는 탄박스 1개를 쏘아대고 총렬을 바꾸어 새로운 탄띠를 연결했다.
덮개를 닫고 노리쇠를 잡아당겨 일발 장전을 한 후 다시 사격에 들어갔다.
그가 받은 명령은 단순 무식했다. 사격중지명령이 있기까지 계속해서 쏘아대면 되었다.
탄피가 줄줄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10발마다 끼워져 있는 예광탄이 어둠을 가르며 앞으로 날아갔다.
“펑. 펑. 펑”
전투 개시 후 30분이나 지나서야 조명탄이 하늘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명탄이 늦게 지원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5군단 포병여단에 소속된 천포들이 고폭탄을 빼내고 조명탄을
집어넣는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지만, 측면 기습을 염두에 두지 않은 배치로 인해 4511사단을
지원할 거리에 있는 천포의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550 포병여단은 새벽에 있을 공격을
위해 동서로 길게 늘어져 있었고 모두들 고폭탄이 장전되어 있었다.
“사격중지. 사격중지”
조명탄이 터지면서 시야가 확보되자, 여단장의 사격중지명령이 하달되었다.
3여단 전방에 100여미터 지점에는 말과 인육이 만들어낸 긴 띠가 형성되어 있었다.
널 부러진 고기덩어리가 평원을 가득 메웠다.
피비릿내가 화약냄새와 섞여 묘한 향기를 풍기며 밀려왔다.
“히히잉”
“다다다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말이 처량한 울음을 터트리며 일어나려 하자, 잔뜩 긴장한 어떤 병사가
자동사격을 해댔다. 잔뜩 긴장해 있던 3여단 병력이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자 시체들이 들썩거렸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각급 분대장과 소대장들이 병력을 통제하고 나서야 겨우 사격이 멈췄지만 팽팽한 긴장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여단과 2여단을 통과하면서 적들은 일정부분 타격을 입었고, 3여단의 집중사격에
거의 괴멸된 것 같았다. 한동안 평원에 침묵이 감돌았다.
“4521사단이 다음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수석 중장은 기병사단을 움직일 것인지 말 것이지 고민했다. 공격 후방 지원을 맡은 4511사단이
적 야습으로 인해 발이 묶여버린 지금, 보병만으로 하천을 넘기에는 위험 부담이 컸다.
그렇다고 기껏 움직인 기병대를 뒤로 물리자니 공들인 것이 너무 아까웠다.
아침이 밝아오면 4521사단의 정체는 금방 탄로나게 되어 있었기에 기습은 불가능했다.
“군단장님 ?”
작참이 고수석의 최종 명령을 기다리며 군단장을 불렀다.
“자네는 야습에 참가한 적진에 보병이 있는 것 같은가 ?”
“아닙니다. 기껏해야 기병 몇 천입니다. 보병이 움직이기에는 너무 먼 거리입니다.”
“그렇지. 만약에 말야, 적 기병이 우리 후미에서 아직도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작참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소수의 병력이라도 사령부 영내에 들어오게 되면
5군단으로서는 골치 아플 것이 뻔했다. 4511사단을 우회하거나 보병사단이 빠진 자리를 파고 들면
예상외의 피해를 볼 수 있었다.
“그럼 4521사단에게 후퇴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밤 달은 언제 뜨나 ?”
“새벽 3시 무렵입니다. 아직도 2시간이나 남았습니다.”
하현달을 넘어진 달은 새벽녘에 잠깐 동쪽 하늘에 보였다 사라진다.
그 전에는 칠흑 같은 어둠 때문에 대병력을 움직인다는 것은 위험 천만이었다.
적진에서 야간 행군 중 매복이라도 걸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동시켜. 도보 정찰을 해서라도 안전을 확보하며 이동하라고 해. 공격은 예정대로 실시한다.
4511사단 3여단을 제외한 병력을 예정대로 이동시켜.”
“알겠습니다.”
작전참모가 작계에 변동이 없음을 전파하기 시작할 무렵 군단 사령부에 낯설은 포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곧 이어 5군단 사령부 직할 통신대대의 통신망이 사방에서 울어내며
적 보병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왔다.
“꽈과광 콰광”
“여기는 울타리 셋. 적의 대규모 포격이다. 산탄이다. 보병들이… 지원 바란다.”
다급했는지 경계에 투입된 중대장들의 보고가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고수석 중장은 사령부로 전해지는 통신을 들으며 어이없어 했다.
좀 전에는 기습을 허용하고 이제는 선공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지휘실에 모인 참모들도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 포대 발포.”
폴란드 포병대를 이끌고 있는 미칼만 연대장은 대한제국군 진영을 향해 계속해서 포탄을 날려댔다.
다. 미칼만 포병연대가 보유한 야포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포각 조절이 불가능한 원시적인
야포지만, 포도탄이란 산탄을 발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콰콰쾅”
“앞으로 100미터 이동. 신속히 재장전 후 발포하라”
총 120문의 야포 운용하는 미칼만은 서둘러 포대 위치를 이동시켰다.
보병들이 전진함에따라 포대도 이동되어야 했지만, 그것보다는 위치가 탄로 났기에
대포병 포격을 두려워했다. 다행스럽게도 대한제국군에서는 아직 포탄이 날아들지 않았다.
포대원들이 포를 끌었다. 세 사람이면 충분히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야포로 말 한 필이면
어디든지 끌고 갈 수 있었다. 단거리 이동이 주로 이루어지는 전투시에는 말보다는 사람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으악. 위생병. 위생병 ?”
공격준비를 서두르던 대한제국군 진영으로 일시에 200여발의 포탄이 날아들었다.
대한제국군이 보유한 산탄보다는 위력적이지 않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중앙에 집중된 포격은
대한제국군의 참호들을 무참히 유린하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수만명의 기.보병 혼성부대가 하천을 넘기 시작했다.
하천 바로 옆에서 4531 보병사단 병력의 눈에 비친 폴란드 군은 악마 같았다.
별빛을 타고 넘어오는 폴란드 병사들이 입은 옷들이 너울거리며 하천을 가득 메웠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을 테이지만 꾸역 꾸역 밀려드는 사람의 물결이 하천을 넘어왔다.
“사격. 계속 쏴라. 물러나지 마라”
“탕탕탕. 드드드드”
“펑펑펑”
“타타탕”
하천을 건너오던 폴란드 군들이 사격을 시작했는지, 이질적이 총성이 한 순간 가득 메웠다.
2연대 3대대 2중대 3소대 전방에 수천명의 병력이 몰려들었다. 선임하사 이완용은 겁이 덜컥 났다.
중대와 연결된 유선망은 어찌 된 일인지 불통이었고, 무선 통신망은 아무리 호출해도 응답이 없었다.
적 포격의 직격탄을 맞은 소대는 이미 반수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었다.
“2선으로 후퇴하라”
“안돼. 아직 후퇴명령이 없었다. 한 축이 뚫리면 다른 쪽도 뚫립니다.”
선임하사가 후퇴해야 한다고 나섰지만 중대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너덜너덜한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폴란드 군은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소대원들은 위치를 지켜라. 아직 후퇴명령이 없었다. 이완용 자리를 지켜라.”
소대장이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이완용은 이미 참호선을 올라가고 있었다. 제 2선으로 달려가는
이완용을 바라보던 이민영 소대장의 입에서 쌍소리가 튀어나왔다. 허리에 찬 권총을 빼어 든 이민영이
이완용을 겨냥하다 내려 놓았다. 이완용을 따라가려던 1분대원들이 엉거주춤 일어섰지만
이민영과 눈이 마주치자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았다.
“내가 살아 남는 다면 저 개새끼를 죽여버리겠어.”
“수류탄 투척. 통신병 상급부대 호출해 지급으로”
이십여명의 소대원들이 일제히 수류탄을 던지고 고개를 숙이는 사이
통신병이 중대와 대대를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2중대. 2중대. 진내포격이다. 서둘러 후퇴하라. 후퇴하라”
3대대장은 무전기를 들고 2중대를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대답이 없었다.
참호 1선에서는 빠르게 후퇴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유독 2중대 병력만이 유무선이 단절되어 있었다.
전령을 보내긴 했지만, 시간이 빠듯했다. 포병여단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포격을 시작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대대장은 시계를 바라보며 고개를 떨구었다.
포병여단이 마지막이라고 알려온 2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초의 오차도 없이 포탄들이 3대대장 머리 위를 지나쳐갔다.
곧 이어 포성이 들리더니 이내 포탄이 작렬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꽈 과광. 꽈광”
“연대 적 돌격에 대비하라. 적들이 제1선을 넘었다.”
연대장의 목소리가 무전기 속에서 앵앵거렸다.
전령이 제때에 도착했다 해도 중대병력 전부가 빠져 나올 시간이 없었을 듯 보였다.
“시팔. 지뢰라도 깔아놓는 건데”
대대장은 공격 시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지뢰지대를 설정해 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야습에 나선 기병대와 대한제국간의 교전이 벌어진 것을 지켜보던 지그문트는 흩어져 있던
보병 5만을 중앙으로 모아 공격에 들어갔다. 초기 포병대의 활약으로 하천을 수월하게 넘은
폴란드 보병군단 선봉부대는 대한제국이 설정한 제 1선을 뭉개고 있었다.
“1/2연대 장전. 3/4연대 공격. 공격하라”
몸소 마상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클로스 토마시가 군도를 빼들고 외쳐댔다. 대한제국 진영에서
날아온 포탄이 하천위로 쏟아졌다. 수 없이 많은 부하들이 쓰려졌겠지만,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전방의 불빛만을 향해 일제 사격을 한 폴란드 보병들은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갔다.
점점 동쪽하늘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피웅, 픽”
“이크”
대한제국군이 무작정 쏴대는 총알이 파베우 머리 위로 날아갔다.
파베우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시베크 파베우 2 연대장은 크라크푸 부근 지방 영주로
이번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소규모 지방 영주인 그는 항상 중앙 정치에서 소외되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북부가 대한제국에 넘어가고 역량있는 남부 영주들이 피살당하자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아직까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연대장님. 장전 완료했습니다.”
“그래. 연대 돌격. 3연대를 뒤따라간다. 서둘러라. 적들이 눈치채기 전에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전 전선에서 감행된 폴란드 군의 공격은 주공인 중앙을 제외하고는 제자리에서 사격만을 해대고
있었다. 재장전에 걸리는 시간을 만회하기위해 지그문트는 새로운 전법을 선 보였다. 그에 따라
연대 단위로 계획된 중앙 공격군은 돌격연대와 장전연대를 나눠, 공격연대가 대대별 일제 사격과
돌격하는 사이 뒤에 쳐진 연대는 장전을 하고 앞으로 이동해 갔다. 10미터 이동하고 대대 일제사격이
진행되는 방법으로 인해 그들 전방에 위치한 대한제국군은 참호에서 고개를 들기도 어려웠다.
“봉크장군. 기병대를 투입시키시오.”
지그문트는 다행히 자신의 전법이 먹혀 들자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밀어 붙이기 위해 적 기병대를 상대하기위해 남겨둔 이만의 기병대를 투입시켰다.
“네. 총사령관님”
크지노벡 아첵 기병 군단장을 대신하여 봉크 아첵은 짧게 대답한 후 부관들과 더불어 본영을 떠났다.
기병대 총 돌격을 알리는 나팔소리와 함께 이만기가 일시에 지축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야습나간 크지노벡 아첵 백작은 어찌 되었을까 ?”
지그문트는 야습에 나간 기병대가 전멸이나 당하지 않았을까 걱정이었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아직 적 철마가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첵 백작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고수석 5군단장은 시시각각으로 들려오는 전황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적은 광범위한 지역에서
공격해오고 있었지만 중앙을 제외하고는 전선이 그대로 유지 대고 있었다. 문제는 중앙으로 보낼
예비병력이 없다는 데 있었다. 4531사단이 막고 있는 중앙전선은 구멍이 숭숭 뚫려갔고,
2선을 지키기에도 위태로웠다.
“기갑여단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았나 ?”
“지금 2여단이 이동 중입니다. 측면에서 참호 1선을 차단할 계획입니다.”
“젠장. 원정군 사령부에서는 아무 연락 없나 ?”
“힘들 것 같으면 후퇴하라는 전문이 내려와 있습니다.”
김상태 대장은 가급적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으로 전투를 진행시키곤 했다.
그래서 후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병력손실이 예상되면 언제라도 후퇴해도 좋다는 명령을
장군들에게 내려놓고 있었다. 하지만 고수석 5군단장은 후퇴는 곧 패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후퇴는 절대 없다. 후퇴라니. 조금만 막으면 돼 곧 달이 뜬다. 4521사단의 현 위치는 ?”
“공격대기선에 거의 접근했습니다. 공지선 밖에서 대기중입니다.”
“그래 ?”
뜻밖이었지만, 아무래도 김한석 소장이 무리한 행군을 한 것 같았다.
“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각 연대에 반격 명령을 내리도록 10분후 정각 2시 30분에 총 공격에 들어간다.”
“군단장님 ?”
작참이 놀란 눈으로 군단장을 쳐다보았다.
중앙을 방어하기에도 벅찬 마당에 총공격이라니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고수석 중장의 명령은 단호했다.
“내 사전에 후퇴란 없다. 공격. 공격만이 살길이다. 적은 아무래도 중앙에 병력을 집중시킨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병력이 중앙으로 몰려들 순 없어 ? 우리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적은
병력을 집중시킨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양익은 방어병력이 거의 없다는 애기다.
중앙이 뚫리더라도 6군단이나 4231사단이 매우면 된다. 알겠나 ? ”
“부관 ?”
“네. 군단장님.”
“내 철모하고 소총 가져와”
5군단 지휘부가 적에게 포위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공격을 감행하겠다는 고수석 중장의 의지가
각 예하부대로 전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10분후 5킬로미터까지 확장된 전선에
골고루 배치된 천포여단이 고폭탄을 미리 지정된 지정좌표로 무차별 포격하기 시작했다.
“적 기병대가 중앙을 돌파하고 있습니다.”
“기병대가 ?”
고수석은 기병대 출현 보고에 벌떡 일어났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3여단 불러서 지휘부 주변에 철의 장막을 친다.
1여단 잔여병력은 즉시 이동해 3 여단을 지원하도록.”
4531사단 전방에 나타난 기병대는 제2선 방어선을 뛰어넘어 안으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5군단 지휘부를 위협할 만큼 저돌적으로 돌격을 개시한 폴란드 기병대는 4511사단 3여단이 정면을
막아서고 나서야 진격이 멈췄지만 기병대가 휩쓸고 간 지역은 아비귀환으로 변해있었다.
“사단장님. 돌격시간 입니다.”
“알고있어. 군단 사령부에 돌격시간을 통보하도록”
김한석 소장은 붉게 달아오르고 있는 북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포성과 총성이 어우러진 소리는
5군단 본대가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버틸만한 모양인지
군단 사령부에서는 공격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각 지휘관들은 지정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하라.”
“사단 거총”
“돌격”
김한석 소장이 주위를 다시 한번 하달하고 마침내 사단 전체 통신망에 돌격명령을 내렸다.
방금 떠오른 반달보다 조금 작은 달이 달빛을 대지로 뿌렸다. 김한석 사단장이 탄 말 안장에
장식된 색동이 달빛에 반짝거리고, 사단기가 바람에 펄럭거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드드드드”
제국 소총을 꺼내든 팔천명의 기병대가 폴란드 진영 우측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5분만에 3킬로미터를 내달린 4521사단 병력을 막을 폴란드 병력은 없는 듯 보였다.
3531사단이 중앙을 힘겹게 방어하는 사이 3532사단이 하천을 도하하여 공격에 들어갔다.
폴란드 진영 좌측을 공격하던 3532사단은 3531사단이 하천에서 3킬로까지 후퇴하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적의 대규모 반격입니다. 좌측과 우측에서 대한제국군이 공격해 옵니다.”
“우측이라니 ? 무슨 소리야 ?”
지그문트는 돌연 우측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는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찰정보에 의하면 대한제국군 좌측은 철마부대로 크지노백 아첵과 교전중이여야 했다.
“사라진 기병대 같습니다. 동쪽으로 크게 우회해서 돌아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후방 포병대가 공격 받고 있습니다.”
“상비군을 투입해. 포대는 뭐하고 있었나 ?”
대한제국군 기병대의 기동 전술을 방어하기위해 준비된 상비군은 이미 좌측을 방어하기위해
지원되고 있었다. 그들은 도하하고 있는 대한제국 보병들을 상대하느라 바빴고,
본영에 남은 병력이라고는 기껏해야 근위대 일천기가 전부였다.
“펑펑펑”
중군에 배치된 20문의 야포가 그제사 불을 뿜었지만,
4521 기병사단 대부분의 병력은 이미 최소 사거리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타타타탕”
“으악. 살려줘.”
“펑 꽈과과광”
사방에서 비명소리와 말발굽소리, 총소리가 뒤섞였다.
지그문트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분명이 전황은 자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조만간 승리를 거머쥘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폴란드군이 처한 상황은 오히려 역전되고 있었다.
‘적은 분명히 온 힘을 다해 중앙을 막아야 했다. 그런대도 중앙을 비워둔 체 공격에 나섰다.
함정에 빠진 것인가 ?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병력이 있는 것인가 아님 중앙은 텅 빈 것인가 ?
후방을 내어주고 적 중앙을 격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이런 저런 생각으로 머리를 굴리던 지그문트는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렇다. 내가 살려고 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어.’
“근위대장 ?”
“네. 폐하 ?”
“길게 말할 시간이 없다. 그대는 근위대 기사단을 이끌고 재상을 호위하여 전장을 빠져나가시오.
이번 전투를 승리할 지 패배할 지 모르겠으나 훗날 폴란드를 위해 그대들의 지식을 내 아들놈에게
전수해 주시오. 이건 내 마지막 명령이다. 성실히 수행하도록. 알겠나 ?”
“존명”
“폐하 ?”
갑작스러운 명령에 재상이 눈을 크게 뜨고 지그문트를 바라보았지만,
지그문트는 벌써 말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모두 들어라. 우린 살러 온 것이 아니다. 죽는 것을 두려워 마라. 돌격 앞으로”
지그문트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평원을 달려 하천으로 다가갔다.
그 뒤를 근위대 900여기가 그림자처럼 따라갔다.
남겨진 재상 스체르바츠키는 근위대장의 시선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떨구었다.
“윽”
어느새 재상의 오른손에는 단도가 들려있었고, 단도의 날카로움이 가슴을 지나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다. 스체르바츠키는 자신이 전장을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 때문에 무의미하게 100명의 기사단을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재상 ?”
“그대는 어서 지그문트 대왕을 호위하시오 ! ”
힘겹게 말을 끝낸 재상이 고개를 떨구자,
근위대장은 두 눈에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며 지그문트를 뒤쫓아갔다.
달이 떠오르자, 비로소 기관총의 제압사격이 제대로 먹혀 들기 시작했다.
줄기차게 총탄만 낭비했던 기관총 사수들은 적들의 숫자가 많음에 놀라고 있었다.
온 대지를 가득 메운 폴란드 병사들이 조준,제압사격에 우수수 쓰러졌다. 하지만 너무 숫자가 많았다.
“4531사단에서 더 이상 막기 힘들다는 전문입니다.”
계속해서 제파 공격을 당하고 기병대 공격까지 당하자, 4531사단의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방어망이 뚫리고 있었다. 2연대 병력은 백병전에 들어가 있었고, 다른 연대 역시 백병전을 준비했다.
참모들이 고수석 중장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월등한 화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대가
백병전을 할 이유가 없었다.
“2여단과 3여단을 진격시키고, 그 자리를 4561 여단에게 넘기도록. 그리고…”
내키지는 않았지만 고수석 역시 이번만큼은 지휘부를 뒤로 물려야 할 것 같았다.
“4531 사단을 뒤로 물려. 지휘부도 뒤로 물러난다. 원정군 사령부에 연락을 넣도록.
4521사단에게 공격방향을 바꿔서 적 후위를 물고 늘어지도록 하고.”
5군단에 속한 병력은 보병사단 2개와 기병사단, 기계화 사단이 각각 1개 거기에 포병여단과 특수여단이
각각 1개씩 이다. 5군단 특수여단인 4561 여단까지 전투에 투입 시킴으로써 고수석은 이제 더 이상
커낼 카드가 없었다.
“지독한 놈들. 포병여단을 분산시킨 게 실수로군. 포병여단을 한곳으로 모아 세력을 형성하라고 해.”
전투에 참가한 10만 명의 폴란드 군은 전혀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 했다. 이쯤 되면 항복하던가
후퇴 할 만도 한데, 죽음의 공포를 상실한 그들은 오직 앞으로만 내달렸다. 바로 옆에 있던 동료의
머리가 총탄에 맞아 터져나가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전우들의 피를 흠뻑 머금은 넝마가 빨간색으로
물들어갔고, 하천은 핏빛으로 변해갔다.
“너희들의 아들 딸들이 오늘을 기억할 것이다. 공격. 공격하라.”
지그문트가 악에 받친 소리를 질러대며 전장을 돌아다녔다.
그를 둘러쌓고 있던 기병 숫자도 많이 줄어 있었다.
대한제국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고, 폴란드군은 그 뒤를 쫓아가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행여 폴란드군이 멈출라치면 대한제국군이 공격을 감행해서 새벽 내내 평원에서 총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10킬로미터를 전진했지만, 만신창이된 폴란드 군은 대한제국군의 포위망에 갇혀버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전방에 배치된 4561여단이 후퇴와 방어를 적절히 구사하면서 폴란드군 을 깊숙이
끌어들이고, 4521기병사단이 다시 하천을 넘어 폴란드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좌측에 남아있던 기계화사단 2여단과 3여관이 본격적으로 포위망 형성에 들어갔다.
천포여단이 우측으로 세력을 형성하자, 동서남북으로 포위당한 폴란드군은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입니다. 병사들도 많이 지쳐있고, 해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총상을 입고 동여맨 천에서 아직도 피가 흘러나왔다.
토마시 보병군단장은 항복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폴란드군은 날이 밝아오면서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4531사단이 부대를 재정비하고 4561여단과 합세해 전방 방어선을 확고히 하자,
더 이상 폴란드군은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후회 없이 싸우지 않았습니까 ? 미친 듯이 말입니다.”
“그렇지 !”
지그문트 역시 토마시 마음을 읽어나갔다.
그의 주변에는 아직 이만명여명의 부하들이 숨을 고르고 있었다.
돌격명령을 기다리며 장전을 마친 병사들이 자신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을 대한제국군을 진영을
바라보았다. 폴란드군과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후퇴를 하고 있던 대한제국군의 진영에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그래도 항복할 수는 없네. 내가 항복하면 폴란드는 끝이야.
만일 내가 사로잡히게 될 것 같으면 자네가 나를 죽여주게 알겠나 ? 토마시 ?”
“총사령관님 ?”
“다시 한번 돌격을 준비하게. 마지막이 될지 모르겠군.”
동쪽 하늘이 훤히 밝아 있었다.
“4550 여단이 사거리 안으로 들어왔다는 보고입니다.
그리고 4631사단이 원정군 사령부를 방금 지나쳤다는 보고입니다.”
원정군 후미에서 따라오던 6군단 보병사단이 자신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포병여단이 이제 겨우 세력을 형성하고 포격을 할 수 있는 거리에 다다라 있었다.
“포병여단의 포격이 있은 직후 돌격에 들어간다. 각 예하 부대에 명령을 내려놓도록.
이곳에서 전투를 끝낸다. 아마도 저 속에는 지그문트 폴란드 왕이 있을 것이다.
특수여단에게 체포 조를 편성해서 침투시키도록”
힘겨운 싸움이었다. 5군단 전체 병력에 비하면 10만명은 그리 많은 적이 아니었지만,
불을 보며 달려드는 불나방 때문에 자칫 불이 꺼질 뻔한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전세가 완전히 5군단에게로 넘어 온지 오래 였다.
밝아오는 여명과 함께 드러난 폴란드군은 거대한 원형 포위망에 놓여 있었다.
그들에게는 항복 아니면 죽음밖에 없었다.
“펑펑펑”
평평한 땅의 나라 폴란드의 마지막 저항은 5군단 포병여단이 일제 포격을 시작하면서 점점
사그러들었다. 10분간 계속된 포격에 이은 사방에서의 돌격을 감행한 대한제국 유럽 원정군 5군단
병력은 저항하는 폴란드를 평원에 잠재우고 지그문트가 설정한 방어선을 넘어갔다.
5군단이 피해를 수습하고 6군단과 병력 교체를 위해 잠시 진군을 멈춘 사이, 빌뉴스 영주와 함께
4121기병사단이 비아위스토크를 거쳐 바르샤바 외곽에 도착했지만, 바르샤바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터키 이스탄불
“그래서 이번에도 거절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
“거절하는 것이 아니오라 본국에서 아직 훈령을 받지 못했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곧 좋은 소식이 올 것 입니다.”
“그것이 그 뜻 아니오 ? 내가 대한제국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데 아직까지 훈령을 기다리고 있다니
그 말씀을 믿으란 말이오 ?대한제국이 이렇듯 신의를 저버린다면 저희도 생각이 있습니다.
아시겠습니까 ? 대사 ? ”
타라한은 계속해서 주 터키대사 김영일은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다.
“그 말씀은… ”
김영일의 말을 끊은 황태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린 이쯤해서 이교도 놈들과 협상을 벌일 용의도 있음을 알아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대한제국과 터키제국과의 관계도 소원해질 수 있겠지요.
어제 토머스경이 다녀갔었지요 ! 알고 계시지요 ?”
토마스라는 사람은 영국 공사로 인도 공사를 거쳐 터키에 부임해 온 사람으로 영국 외교계에서는
동양 통으로 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과 터키가 밀월관계를 유지할 때는 황궁 근처에도
올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황태후를 만나고 갔다는 것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토마스 경이 런던에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습니다만,
황태후 마마를 뵈었다는 것은 금시 초문 입니다.”
김영일이 정색을 하며 짐짓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태후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비쳤다 사라졌다.
“그러셨군요. 아무튼 저는 대한제국에서 우리가 보여준 만큼만이라도 성의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황태후 폐하. 저희 대한제국은 조약에 의거 상호 호혜의 원칙 하에 양국간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번 전쟁에도 무상 원조로 얼마나 많은 총포탄이 전달되었는가를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움직이려면 엄청난 비용이 지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크레타 기지에 있는 군대는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본국에서는 아마도 그것을 우려하고 있기에 훈령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본국에서도 무슨 복안을 마련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부디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김영일 대사가 받은 훈령은 어떠한 형태의 파병도 불가하니 터키제국을 잘 설득시키라는 것이었지만,
황태후가 영국에 딴 마음을 품고 있다면 무작정 설득만 해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그라나다 원정군이 곤혹을 치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함대가 출항하기 전에 귀국의 확답을 들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비용문제라면 저희 쪽에서
어느 정도는 부담할 용의가 있습니다. 이점을 귀국에 꼭 양지 시켜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황태후 폐하의 하해와 같은 말씀에 감복할 뿐이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 싶은 김영일이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새롭게 신설되고 있는 함대가
출항을 하려면 아직도 2달은 족히 남아있었다. 그 전에 폴란드 전선이 안정화되고 4군에서 여유가
생긴다면 한번쯤은 터키를 도와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이스탄불에 비누공장을 세웠으면 합니다.
대한제국에서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비누 공장을 말씀입니까 ?”
김영일은 뜻밖의 제안에 그 숨은 뜻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뜬 금 없이 비누 공장이라니’
“그렇습니다. 일전에 써보니 새하얀 비누라는 것이 참 좋습디다.
향기도 좋고 모양도 이쁘고”
“아 ! 네. 알겠습니다.”
별로 큰일도 아닌 일을 자신의 확답을 들으려 하는 황태후의 의도가 궁금했다.
그런 것이라면 참사관에게 연통을 넣어도 될 일이었다.
김영일은 황궁을 나와 대사관저로 돌아오는 길 내내 비누 공장이 가지는 의미를 유추해 내려 했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것보다는 토마스가 더 걱정이군. 무슨 이야기가 오갔을 까 ?’
///코멘트에대한 작은 소견 ///
1. 야습과 기술력과의 관계 : 야습을 감행하는 것은 기술력과는 상관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성공여부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 기술력이 월등하면 야습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
기습이나 야습은 항상 모자라는 쪽에서 생각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입니다.
성공하느냐는 별개의 문제죠.
수비측의 기술이 월등하면 성공하기 힘들겠지만 불가능 하지는 않겠죠 ?
여기서 잠시 쉬어가는 말씀...
베트남전에서 대한 민국의 중대 전술기지를 베트콩 연대병력이나 2개
의 대대병력이 야습을 했지만
강력한 포병의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 파
병 중대를 이기지 못한 것은
베트콩의 전술적 미숙함과 대한민국 포
병 그리고 중대원들의
뛰어난 전투력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쾌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전투가 바로 짜빈동과 둑코전투입니다.
베트콩이 월등한 병력으로
포위공격을 감행했음에도 전술기지를 이기
지 못한 이유는 제가 생각하기에는
화력 및 병력 집중 실패와 대한민
국의 포병 세력에 대한 대책이 없었다는 것이 아닐런지.
(저의 짧은 소견이였습니다. 짧은 소견이라 부끄럽군요... 전문가가 아니라서)
첫댓글 감사해요~~~^~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