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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룻기의 말씀 2,1-3.8-11; 4,13-17
엘리멜렉의 아내
1 나오미에게는 남편 쪽으로 친족이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엘리멜렉 가문으로 재산가였는데 이름은 보아즈였다.
2 모압 여자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들로 나가,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는 사람 뒤에서 이삭을 주울까 합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그래 가거라, 내 딸아.” 하고 말하였다.
3 그래서 룻은 들로 나가 수확꾼들 뒤를 따르며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 가문인 보아즈의 밭에 이르게 되었다.
8 보아즈가 룻에게 말하였다.
“내 딸아,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
여기에서 멀리 가지 말고 내 여종들 곁에 있어라.
9 수확하는 밭에서 눈을 떼지 말고 있다가 여종들 뒤를 따라가거라.
내가 종들에게 너를 건드리지 말라고 분명하게 명령하였다.
목이 마르거든 그릇 있는 데로 가서 종들이 길어다 놓은 물을 마셔라.”
10 그러자 룻은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말하였다.
“저는 이방인인데, 저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고 생각해 주시니 어찌 된 영문입니까?”
11 보아즈가 대답하였다.
“네 남편이 죽은 다음 네가 시어머니에게 한 일과 또 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고향을 떠나 전에는 알지도 못하던 겨레에게 온 것을 내가 다 잘 들었다.”
4,13 이렇게 보아즈가 룻을 맞이하여 룻은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가 룻과 한자리에 드니, 주님께서 점지해 주시어 룻이 아들을 낳았다.
14 그러자 아낙네들이 나오미에게 말하였다.
“오늘 그대에게 대를 이을 구원자가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신 주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에서 기려지기를 바랍니다.
15 그대를 사랑하고 그대에게는 아들 일곱보다 더 나은 며느리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이 아기가 그대의 생기를 북돋우고 그대의 노후를 돌보아 줄 것입니다.”
16 나오미는 아기를 받아 품에 안았다.
나오미가 그 아기의 양육자가 된 것이다.
17 이웃 아낙네들은 그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나오미가 아들을 보았네.” 하고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가 다윗의 아버지인 이사이의 아버지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나는 스승을 찾고 있는가?
이제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P. 이제민)
그러니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아니,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는 가르치되, 언행이 일치하는 자, 말씀을 성취하는 자일 것입니다.
곧 가르침으로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실행함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자일 것입니다.
둘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이요, 남에게 보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자일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
(마태 23,10-1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생각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 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 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
(에페 6,6)
선한 열매는 손과 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행동하는 데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 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 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
(에제 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 4,5)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정성껏 하느님 마음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실천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웃 복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우리나라입니다.
이 세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상호 존중하며, 이웃 간의 평화를 지향하는 기품있고 양식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국격은 바닥인 데다, 천박하고 폭력적이며, 기본적인 양심도 없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이다지 가까이 있는지?
언제는 군사력을 동원해서 이웃들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될 침략과 약탈, 폭력과 살상을 밥 먹듯이 자행하던 일본이었습니다.
그들의 야수 같은 폭력성으로 인해 주변 국가들이 입은 피해는 천년 만 년 동안 싹싹 빌어도 부족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염수 방류를 통한 또 다른 폭력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일본이라는 나라는 인류 역사 안에 대대손손 가장 자신들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집단, 민폐의 끝판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초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정도만 다녀도 이건 아니라는 것을 다 아는 사실인데, 백주대낮에 너무나도 당당히 지구촌 마을의 공동 우물인 바다에, 자기 집에서 발생한 냄새 진동하는 폐수를 퍼부은 일본은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대죄인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저자들의 머릿속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이 없는지?
대체 머리는 장식품으로 달고 다니는 것인지?
자신들에게 가장 큰 독이 될 오염수를 자신들의 영역에다 자랑스럽게 퍼붓는 꼴은, 마치 열 명이 먹기 위해 라면을 끓인 큰 냄비에 바보 얼간이 같은 한 사람이 침을 뱉은 형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살아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먼저, 가장 큰 규모의 피해를 입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입니다.
지구상 수많은 나라들 가운데 가장 앞장서서 방류를 막고자 애를 써야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합심해서 목숨 걸고 막지 못한 우리 역시 역사 앞에 대죄인입니다.
그런데 방류 저지를 위해 제일 선두에서 깃발을 들어올려야 할 사람들의 태도를 보십시오.
경천동지할 노릇입니다.
우리 수산업 종사자들은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울부짖고 있는데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들은 괜찮다, 걱정하지 마라, 안심하라는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 널리 유포하고 있습니다.
일본 수상 입장에서 이보다 더 감사한 일이 다시 또 있을까요?
자기들이 싸질러놓은 오물, 자기들 영토에 묻어 놓든지, 저장해 놓든지, 하는 것은 강아지나 고양이들도 다 하는 행동인데, 그것조차 못하는 사람들이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이젠 늦었다고, 이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해서는 안 될 사안 같습니다.
어떻게든 인류 공동 우물인 바다를 악의 무리요 인류의 적인 그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 할 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신랄한 표현을 다 사용하시면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강하게 질타하십니다.
듣고 있노라면 가슴이 섬뜩해질 정도의 뼈 때리는 표현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마태 23, 5-7)
일본이라는 나라도 똑같은 것 같습니다.
나름 지구촌 사람들 앞에서 G7 회원국, 선진국이라며 어깨에 힘 딱 주고 꼴값을 떨고 있습니다.
입만 열면 평화, 자유를 외치지만, 뒤꽁무니로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기를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저들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요즘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저들의 부끄러운 행동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인류를 굽어보시어, 좋은 해결책을 선물로 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 사람에게 다가 오시는 하느님 - 예수 그리스도>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시편 92;3,5)
‘하느님을 찾는 사람’임과 동시에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삶에 지쳤을 때 사람을 찾는 하느님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더불어 힘을 받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노래한 저의 '하늘'이란 오래전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 1997.2
무려 26년 전 시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끼며 많이 나누는 시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나무같은 삶에 지쳤을 때 즉시 호수가 되어 가까이 찾아 오신 하늘이신 주님을 담자는 것입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바로 어제 금요강론 주제처럼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예수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ㄴ)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제 금요강론 교재중 여러 주옥같은 말씀을 나눕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찾고 있는 또한 당연히 누릴 권리가 있는 그 행복은 하나의 이름과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나자렛 출신 예수님이십니다.”
역시 아어지는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반가운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어, 우리의 친구이자 형제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우정의 대상이자 형제애의 대상이 되신 예수님이란 고백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바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뜻합니다.
블레즈 파스칼 철학자의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인간이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답인 이런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 평생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고 무지와 허무속에 방황하다 죽는 이들은 얼마나 많겠는지요!
그러니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 참나를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저절로 나오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희망과 기쁨,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은 하느님의 세 스타일을 언급했는데, 친밀함(closeness), 연민(compassion), 부드러움(tenderness)이요,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참삶이 되기 위한 방법을 배웁니다.
오늘 시공을 초월하여 존엄한 인간 품위의 삶을 위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구체적 모습입니다.
첫째, 진실한 삶입니다.
진실한 삶 자체가 구원입니다.
위선, 거짓, 허영의 반대가 진실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또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는 허영의 헛된 위선적 삶을 단호히 청산하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그들의 행실을 따라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의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을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정말 깨어 살지 않으면 이런 허영의 본능적 삶에 휩싸일 수 있습니다.
둘째, 겸손한 삶입니다.
겸손의 반대가 교만의 무지입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자 지혜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교만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겸손입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은 일체의 우상을 배격하고 참으로 겸손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지 않도록 노력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의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모두 형제다!”, 흡사 인간 평등의 대헌장 선언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이런 자각에 투철할 때 겸손한 삶이겠습니다.
셋째, 섬기는 삶입니다.
복음의 절정이 섬기는 삶입니다.
섬김의 중심에 주님이 계십니다.
섬기는 삶의 모범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섬기는 삶이 바로 겸손한 삶입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단 하나 섬김과 종의 영성뿐입니다.
이를 요약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교만으로 올라가는 이는 낮아지고 섬김과 겸손으로 낮아지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는 역설적 진리를 보여줍니다.
우리에게 권위와 직무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뿐일 것입니다.
이런 복음적 가치관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관으로 세속의 지도자들로 확산되는 분위기입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 역시 섬김의 삶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섬김과 더불어 성인의 중용의 영성이 빛납니다.
섬김의 학원에서 평생 섬김의 여정중인 평생 섬김의 학인들인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섬김의 배움터에서 영원한 초보자임을 또 깨닫게 됩니다.
어제에 이어지는 오늘의 룻기도 재미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진실하고 겸손하신, 섬기시는 하느님의 구원 섭리가 은혜롭게 계시됩니다.
하느님은 자신을 닮은 진실하고 겸손한 섬김의 참 좋은 사람 룻을 참 좋은 보아즈와 짝을 맺어 주시고 오벳이란 아들을 낳게 하시니 오벳은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가 되고 이 족보에서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이 탄생하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평생 배워야 할 주님을 닮은 존엄하고 품위있는 삶을 위해 진실한 삶, 겸손한 삶, 섬기는 삶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이 또한 자발적 선택과 훈련, 습관화에 해당됩니다.
부단히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삶을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하자는 것입니다.
어제 강론에서 강조한 참 좋은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위해서도 하느님 중심의 진실하고 겸손하고 섬기는 삶이 바로 결정적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진실과 겸손, 섬김의 삶에 충실하므로 참 좋고 아름다운 삶의 스토리와 콘텐츠를 만들어 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분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
(시편 128,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에서 5년간 교포사목을 마치고 한국을 귀국하는 신부님의 송별회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캠핑가고, 자전거 타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렇게 한분 한분 귀국하는 신부님들을 보내고 보니 이제 저의 차례도 멀지 않았습니다.
송별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술’입니다.
며칠 전에 술에 관련된 단어를 읽었습니다.
‘수작(酬酌)과 짐작(斟酌)’입니다.
한국의 음주문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술잔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이 술을 마신 후에 술을 권하는 것을 수작(酬酌)이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작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흑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수작 부린다고 합니다.
더 부정적인 말로 표현할 때는 그 앞에 ‘개’라는 단어가 붙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것저것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무에는 관심이 없고 취미활동에만 전념하면 이 또한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어린 수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술잔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살펴보고 따라주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저도 술자리에서는 ‘짐작’을 잘 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워지면 바로 채워주곤 합니다.
성격이 급한 것도 제가 짐작을 잘하는 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짐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작의 달인이십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미리 방을 예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못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짐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 못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날이 오면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짐작도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짐작도 못한 대사제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 술자리에서 짐작은 잘하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는 짐작도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과 보아즈는 따뜻한 마음으로 수작하였고, 배려와 관심으로 짐작하였습니다.
롯은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보아즈는 그런 롯이 밭에서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짐작하였습니다.
수작과 짐작이 만나서 롯과 보아즈는 결혼하였고, 이 가정을 통해서 다윗이 태어났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수작을 하지 못하고 수작을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짐작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1970년대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식 축구 코치 헤이든 파이는 원정팀이 사용할 라커룸을 분홍색으로 칠하게 했습니다.
‘계집애 같은 색’으로 적들의 남성적 저돌성을 악화시키겠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했을까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 뒤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키닉 스타디움은 원정팀의 무덤으로 악명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색깔 하나에도 영향을 받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 점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척합니다.
색깔 하나만으로도 승패가 결정될 정도로 나약한데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겸손을 강조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 존재에 대한 큰 믿음을 갖출 수 있으며,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서만 나의 이웃과 함께할 가능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잘난 채 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철저하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팔아서 자기를 더 높이려고만 합니다.
이런 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위선자라고 꾸짖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느님에 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말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말씀만 하시고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시지 않은 것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보고 따라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를 높이려고만 했습니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있을까요?
인간의 나약하고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도 커지는 것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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