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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 16:1~5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4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5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 가니라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봄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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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칭찬받는 제자요 아버지가 헬라인인 디모데에게 바울이 할례를 행한 후 그와 함께 다니며 여러 교회를 견고히 합니다. 성령이 아시아 선교를 막으시고 비두니아행을 허락하지 않으시자, 바울은 드로아로 갑니다. 그는 건너와서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곧 마게도냐로 떠나고자 힘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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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함 16:1~5
바울은 1차 전도 여행 때 방문했던 곳을 들러 교회를 견고하게 합니다. 그는 루스드라에서 형제들에게 칭찬받는 디모데를 만납니다. 유대인 어머니와 헬라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디모데는 유대인과 이방인 전도에 적합한 인물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려가고자 그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할례는 구원의 방편이 아니지만, 유대인을 상대할 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복음 전도를 위해 비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바울의 선교 정신을 보여 줍니다(고전 7:18~19). 이후 바울은 여러 도시를 다니며 예루살렘 공회에서 정한 규례와 이방인도 복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방 교회에 전합니다. 바울 일행의 수고로 교회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해 갑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효과적인 복음 전파를 위해 비본질적인 것에서 내가 유연함을 보일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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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봄 16:6~10
바울의 전도 여행을 이끄시는 분은 ‘성령’입니다. 바울은 아시아로 갈 계획을 세우지만, 성령이 이를 막으십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어 무시아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비두니아로 가려 하는데 ‘예수의 영’(7절)이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을 ‘예수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가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밤에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냐로 건너와 자신들을 도와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의 환상입니다. 환상을 통해 바울은 자신을 마게도냐로 이끄시는 하나님 뜻을 확신합니다. 하나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인도하심에 한 걸음씩 순종하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바울이 마게도냐로 가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내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실까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제 기준을 고집했던 교만함과 무지함을 용서하소서. 복음이 전해진다면 기꺼이 제 계획과 자유를 포기할 수 있는 성숙한 신앙을 갖게 하소서. 막힘이 있을 때 더욱 기도함으로 하나님 뜻을 분별하고 따를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소서.
오늘의 찬송(새 191 내가 매일 기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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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개인적 적용
1.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멈추기도 하고, 나아가기도 하면서, 그분의 계획과 뜻을 따르도록 하자
2. 복음의 통로가 되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땅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보도록 하자
3.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시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를 올려 드리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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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가 필요하지 않다는 교회의 공식적인 인증이 있은 후에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지속적으로 할례의 불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겉모습으로 복음을 들을 기회를 놓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기에 담대하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합니다. 바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밖에 없었습니다.
현재 교회의 문제는 많은 경우에 복음은 약하거나 희미하여 짬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관행이나 형식의 문제로 심한 대립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굳게 잡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내가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길 소원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도 바울의 전도 여행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막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순종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떤 길을 걸어가는 여정 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불평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을 마치고 지나 보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역사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힘으로 풀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매 순간 간섭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섭리를 지금 당장 이해하기 힘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보면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임을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순교의 피로 얻은 디모데]
1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바울은 일차 전도여행 지역을 다니며 은혜의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렀습니다. 루스드라는 바울이 죽었다가 살아난 곳입니다. 바울은 핍박받은 루스드라를 갈 때 감정과 몸이 트라우마로 인하여 거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의지적으로 루스드라에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에게 디모데라는 아주 좋은 제자를 주셨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4,5절을 보면 디모데는 눈물이 많았습니다. 그는 마음이 순수하고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그는 거짓없는 믿음을 가진 진실된 자요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줍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순교신앙으로 얻은 제자입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요 아버지는 헬라인입니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녀를 유대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칭찬받은 디모데)
2절을 보십시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자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았습니다. 디도서에 보면 형제에게 책망받을 것이 없는 사람, 곧 칭찬 받는 자를 장로나 감독으로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 평판도 중요합니다. 나중에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됩니다.
(디모데를 제자로 삼은 바울)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함께 선교여행을 떠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를 복음의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복음역사를 감당코자 할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믿음의 동역자를 얻는 일입니다. 바울이 개척하면 디모데는 그 교회를 맡아서 양육합니다. 복음역사는 아무리 능력이 많아도 독불장군처럼 혼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사무엘 선교사님께는 배사라 선교사님을 비롯하여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복음역사를 섬길 때 반드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복음역사를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비결은 동역자를 얻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동역자를 얻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소신을 포기한 바울)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므로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하게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할례하지 않은 디모데로부터 복음 듣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그들은 디모데가 할례를 하지 않았음으로 이방인 취급하였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하지 않아도 구원 받는다는 소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복음 진리를 위해서 할례를 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와 심하게 싸웠습니다. 이런 소신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예루살렘 교회에도 다녀왔습니다. 바울은 할례가 구원과는 관련이 없다고 굳게 믿고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디도에게는 할례주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2장 3절)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할례를 반드시 할 필요가 없다고 결의하였습니다. 그는 각 교회에 그 규례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고자 디모데에게 할례를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기 위해서 자신의 소신에서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디모데를 이방인과 유대인들의 지도자로 키우고자 하는 비전이 있었습니다. 구원의 조건으로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할례를 할 수 있는 자유함도 있어야합니다.
바울은 소신이 있었지만 그 소신은 복음을 위한 소신이었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자유가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소신을 지키기도 하고 복음을 위해서 소신을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절을 보면 바울은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되고, 율법 아래 있는 자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이는 아무쪼록 그리스도 안에서 몇몇 사람을 구원코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도 신세대를 얻기 위해서는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어야합니다. 본질적인 것이 아닌 경우는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미국 사람에게는 한국문화를 고집하지 말고 미국 문화를 존중해야합니다. 그러나 제자 양성을 할 때는 성경적인 문화를 가르쳐야합니다. 우리가 문화를 수용하되 복음의 핵심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지키는 보수적인 교회가 성장합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
4절을 보십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바울은 여러 성으로 가며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이 할례를 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확신을 갖고 신앙 생활하도록 도왔습니다. 다만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최소한의 율법을 갖게 하였습니다. 목메어 죽이는 것과 음행, 피흘리는 것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구제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굳게 서가는 교회)
5절을 보십시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니라”
바울이 은혜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하여졌습니다. 교인의 수가 날마다 늘어났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알 때 교회는 굳게 섭니다.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숫자가 늘게 하십니다. 은혜의 복음이 교회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시는 성령님]
6절을 보십시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바울은 아시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북쪽의 비두니아 본도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말씀 전하는 것을 도우시나 때로는 성령께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이실 때도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열매도 없었고 안 좋은 일만 계속하여 생겼습니다. 버스를 타면 펑크가 나고 걸어가면 피곤하여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갔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성령께서 일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여 예루살렘 전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환상을 보여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을 회심시켰습니다. 그 성령께서 이제는 바울의 전도 방향을 막으시고 새로운 곳으로 전도의 방향도 인도하십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는 바울)
7절을 보십시오.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바울 일행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였으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폭설설, 파업설(소수유력설), 차표 한 장 손에 들다 분실설(단독무력설)이 있습니다. 바울이 음식을 먹으면 체하고 설사가 났습니다. 또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면 혀가 잘 돌아가질 않았습니다. 바울은 성령이 막으실 때 바나바와 싸워서 그런가 하며 자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도하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고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아시아 선교 열정에 사로잡혔을까요? 바울은 1차 선교여행을 통해 갖게된 아시아 사람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이들은 우상숭배와 마술과 음행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을 돕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개척정신도 충만했습니다. 무시아에 이른 바울은 흑해 바로 밑쪽인 비두니아로 가고자 했습니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가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결코 뒤로 물러 설 줄 모르는 불굴의 투사입니다. 그의 인생 철학은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였습니다. 그는 "안 되면 되게 하라. 막힌 길도 뚫어라" 외치며 계속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영이 이것도 허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영과 바울의 영적인 씨름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상하게 계속 bus를 놓치고 또 타면 거꾸로 가는 것을 탔습니다. 오랜만에 바르게 가는 것을 탔는데 이제는 또 펑크가 났습니다. 운전사는 "돈을 돌려 줄 테니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막고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막으실 때 제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역사의 주체자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전도의 길을 여시기도 하시고 막으시기도 합니다.
대개 복음역사의 주관자를 단체나 개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 하나님은 리빙스톤이 중국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아프리카로 인도하셨습니다.
(도와 달라는 마게도냐 사람)
8,9절을 보십시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은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막으시자 이번에는 북쪽으로 가지 않고 서쪽인 드로아로 내려갔습니다. 바울은 두 번이나 길이 막히자 북쪽으로 가는 것이 마음에 거리끼고 확신이 안 생겼습니다. 드로아로 내려간 바울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께도 sorry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시아 선교를 하고자 하는데 왜 막으시는가?" 답답한 마음으로 몸을 뒤척이다 잠이 들었습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울이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울에게 직접 나타나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실라에게는 환상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계선교의 총감독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해서 바울의 선교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환상은 인간의 한계에서 찾아옵니다. 환상은 우리가 최선을 다할 때 찾아옵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밤에 나타나서 그에게 청하여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환상 중에 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 있었습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에 시커멓고 힘이 하나도 없고 두 눈이 쑥 들어간 유럽인이었습니다. 그는 서서 빼빼 마른손을 흔들며 계속 간청했습니다. "바울 목자님, 마게도냐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제발 도와 주세요!"
마게도냐 사람은 헬라사람입니다. 정신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에서는 철학자를 만나지 않고는 거리를 거닐 수 없을 만큼 철학자가 많았습니다. 또한 이들은 로마의 물질문명 속에서 풍요롭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이들은 문화인이요 지성인이며 선진국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영적으로 메말라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배가 고파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면의 불안으로 점을 치기 때문에 점쟁이 재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미신과 악령에 지배당하며 온갖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도 알지 못하는 신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허탄한 것을 좇으며 허무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허무하기 때문에 쾌락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아덴에는 쾌락을 추구하는 에피큐로스학파가 있었고,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명 이상의 매춘부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쾌락에 빠진 후에는 죄의식과 악령에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천국에 가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복음 전해주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사죄의 복음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목자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자를 찾는 시대)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의 로마, 미국은 세계 각 나라에서 유학생들이 몰려드는 선진국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겉은 마치 에덴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속은 소돔, 고모라 같이 부패해 있습니다. 유명 스타들은 AIDS로 죽어가고, 클린턴 행정부는 게이들이 군복무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하였습니다. 또 이전의 Bush 행정부가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할 만큼 많은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어 몽롱한 상태에서 흐느적거리며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시오" 하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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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획을 내려놓은 바울)
10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바울은 이 환상의 의미가 마게도냐 사람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인도하신 것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합니다. 우리는 누가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제자 누가를 얻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최선을 다하는 것을 받으시고 누가를 바울에게 동역자로 주셨습니다.
비을은 곧바로 순종하여 마게도냐로 떠나고자 힘썼습니다. 바울은 즉시 자기 청사진을 버리고 마게도냐로 떠났습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아시아를 개척코자 했기 때문에 미련을 두고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침없이 순종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버렸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방향을 민감하게 좇았습니다. 바울은 마치 군인과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에 언제든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자기 욕심이나 사심이 없었고 순수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누가가 합류함)
또한 여기서 우리는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누가가 선교팀에 합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연약한 질병을 아시고 하나님은 누가를 주치의로 붙여주셨습니다. 바울이 최선을 다할 때 그 열매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주 좋은 제자 누가를 얻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을 로마 감옥에까지 따라가며 복음을 배웁니다. 그리고 유명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합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나 열매가 없을 때 하나님은 동역자를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에게 강하심을 드러내주시는 분이십니다.
(세계 선교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성령께서 바울을 왜 마게도냐로 인도하셨습니까? 성령께서는 바울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큰 뜻을 두고 계셨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아시아에 머물게 되면 더 이상 복음이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하고 흑해에 가로막혀 버립니다. 세계선교를 위해서 유럽으로 가는 길이 옳습니다. 그곳에는 언어도 통일되고 길도 나있었고 민주적인 곳이었습니다.
인간의 계획이 아무리 좋더라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미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눈은 시공간적인 제약이 있습니다.
. 이사야 55장 8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이렇게 바울이 계획했던 것보다 더 큰 뜻을 두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 길을 계획해도 그 걸음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우리 ubf를 인도하신 하나님)
성령의 역사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영적 그린베레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선교지인 북한과 모슬림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복음 전도자에게 필요한 유연함과 민감함” 여성민 목사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로 인한 심한 갈등으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이 데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를 때 거기에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여자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으로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여러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는 청년이었습니다.
훗날 바울은 디모데를 만나 끝까지 함께 동역한 신실한 동반자가 됩니다.
그는 깨끗한 양심과 거짓 없는 눈물과 믿음을 보이는 신실한 사역자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깨끗한 양심과 순수한 눈물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 때 그 지역의 유대인들이 그가 헬라인의 아들임을 알고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합니다.
그들이 여러 성을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 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납니다.
성령께서 바울과 디모데에게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가서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을 때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는데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청합니다.
바울은 그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마게도냐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알고 지체 없이 떠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2차 선교여행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바꾸게 됩니다.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명확한 메시지로 각 교회에 복음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 아시아와 유럽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처럼 우리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과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소명을 이루어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과거의 삶 그리고 지금의 모든 삶들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과정이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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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처음부터 맡기고자 하는 땅으로 이끌기 위해 그의 길을 남쪽 아시아 지역이 아닌 북측을 관통하여 무시아를 지나 서쪽 해변가 드로아로 인도하셨고 그곳에서 마케도니아인의 환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선택하신 주님께서 바울의 인간적인 뜻을 꺾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끌어가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언제든 더 깊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받으며 장차 다가올 더 어려운 고난도 이기게 하는 성령의 능력을 더하게 하게 위함이었습니다. 겸손과 순종으로 앞서가시는 여호와 닛시,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 아래 오늘도 담대하게 걸어가는 거룩한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구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 사도행전 9:15-16
7울28일 인천대공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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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과 디모데의 섭리적인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5).
1차 전도여행 중 루스드라에서는 전도의 열매에 대한 언급 없이 바울이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했었지만(행 14:8~19), 하나님은 여기서 새로운 열매를 준비하셨습니다.
그 열매는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에 가장 소중한 영적 아들인 디모데였습니다.
아마 사도의 루스드라 방문 때 디모데의 경건한 유대인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다시 루스드라를 방문한 바울에게 자신들의 손자요, 아들인 디모데를 맡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거의 죽는 것을 본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디모데를 바울의 손에 맡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혈육을 복음의 사역을 위해 드리는 그들의 신앙을 바울은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기억했습니다(딤후 1:5).
디모데의 아버지가 헬라인이었기에 바울은 논란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바울의 루스드라 사역은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가 생각하는 결과를 주시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때에도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이외에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전달했는데, 그 결과 교회들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믿는 자의 수도 날마다 더해지는 역사가 있었습니다(5). 이 말로써 누가는 아시아에서의 복음 사역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복음이 유럽으로 확장되었는지 기록할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계속 복음을 전하려던 바울 사도의 계획은 성령님의 주도로 막히게 되고, 바울은 유럽으로 이끌려가게 됩니다(6~10).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님께서는 바울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6). 여기에서 아시아는 오늘날 터키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가리킵니다. 성령님께서 막으시는 것을 인식한 바울은 계속 다른 곳으로 가려고 시도해보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7).
성령님은 예수의 영으로 불립니다. 바울이 터키 서부의 항구도시 드로아에 이르자, 하나님께서는 바울에게 바다 건너 마게도냐 사람이 와서 도와달라고 부르짖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했고, 유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10).
바울 일행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아시아에서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6~8절 성령께서 아시아 전도의 문을 닫으시고 유럽 전도의 문을 여십니다. 바울 일행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기 위해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선교의 기획자요 파송자일 뿐 아니라, 선교의 방향을 조정하고 완급을 조절하시는 인도자입니다. 그러니 예기치 못한 사역의 방해나 지연, 중단은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안내표지일 뿐 실패는 아닙니다. 주저앉지 말고 주의 뜻을 물으며 주저 없이 나아가십시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9,10절 바울 일행은 마게도냐의 환상을 ‘유럽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뜻으로 인정하고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의 결정과 순종은 당시 복음의 불모지인 유럽의 복음화를 통해 인류사에 큰 획을 긋는 위대한 행보였습니다. 말씀과 상황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도움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살필 때 할 일이 주어지고 나아갈 곳으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잊히고 방치된 복음의 사각지대는 어디이며,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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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전도 여행은 비록 바나바와 다투면서 시작했지만 비교적 순조로웠습니다.
루스드라는 첫 번째 전도 여행 때 말씀을 듣다가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기적이 있었던 곳입니다.
이 사건으로 그곳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와 허메라고 하면서 신으로 섬기려고 해서 한바탕 헤프닝을 벌였던 지역입니다. 그러다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초인해서 돌로 쳐서는 죽은 줄 알고 성밖에 버렸던 지역이 바로 루스드라입니다.
그런데 그 루스드라에서 누구를 만납니까? 디모데를 만납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5년이 지나서 다시 그 지역에 가 보았더니 유대교를 믿던 디모데라고 하는 청년이 아주 훌륭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자라있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신앙과 성품이 욕심났습니다. 순종의 사람이었고, 말씀에 잘 훈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 디모데를 함께 동역하기 위해서 할례를 받게 하고 여행에 합류시켰습니다.
그리고 사역은 순조로웠습니다.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졌으며 믿는 무리의 수가 날마다 더해졌습니다.
얼마나 행복한 전도자들입니까? 바울은 당초에 계획했던 대로 데베와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계속 여행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막으시고 전혀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좌절된 계획
본문 6-7절입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아니하시는지라”그랬습니다. 본문에는 연거푸 두 번 성령이 못하게 하셨고 허락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10절에 의하면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그랬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우리가’라고 쓰고 있습니다. 즉 누가 자신도 이 여행에 합류하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바울이 몸이 너무 자주 아프니까 의사 누가를 아예 전도 여행에 합류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성령께서 막으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으로 족합니다.
다만 성령께서 아시아, 즉 바울이 원하는 곳에서 전도를 계속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도 바울 일행이 아무 생각 없이 전도 여행에 임한 것이 아니라 어디 어디를 가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전도 여행 떠날 때 어디 어디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기도하면서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열정을 가지고 비두니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려고 계획을 하고 있는데 연거푸 두 번이나 좌절된 것입니다. 아시아에서 못 전하게 하셔서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의하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그랬습니다. 비두니아로 가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런 경우에 당면했다면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방해를 놓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계획이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대략 세 가지의 반응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열정만 있고 성품 훈련이 잘 되지 않은 분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어떤 반응입니까?
“에이! 전도고 뭐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지. 내가 무슨 전도를 한다고....
하나님의 일도 좋지만 이렇게는 못하겠네. 도대체 내 생각하고 맞아야 일을 해먹지.”하면서 그만 두는 경우입니다.
사실 이런 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하고 별 상관없이 일을 시작하고 진행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땅에는 이런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뭐든지 내 마음대로 되어야 봉사도 하고 섬기는 일도 한다는 겁니다. 하다가 조금이라도 비위에 거슬리면 “에이, 나 안해!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하는데. 하나님 때문 아녀!
그런데 하나님이 지지해 주지 않으니 난 못해. 결국 하나님 손해지 뭐!!”하는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성도가 보여서는 안 되는 가장 저급한 형태의 모습입니다. 인격 훈련, 성품 훈련을 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열정만 가지고 봉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일을 해도 많은 사람을 상처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예상되는 반응은 무력감에 빠지는 경우입니다. “아! 도저히 힘들어서 못 하겠다” 하면서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나 같은게 무슨 전도를 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아마 마가 요한이 이런 사람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소극적인 사람들에게 많이 보이는 경우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제시하신 마게도냐는 너무 두렵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포기하고 좌절감과 실망감에 빠져 사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도 나타나는 형태는 다르지만 처음 사람과 흡사합니다. 내 인생! 시간,
삶이 다 주님의 주권에 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사람의 반응은 이런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제시된 새로운 길 - 마게도냐
예상되는 세 번째 경우는 어떤 반응입니까?
이 경우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 주인공 바울의 반응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바울이 대단히 목적 지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 번 일을 추진하면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뒤를 돌아보는 법도 없습니다. 일단 옳다 생각하면 불처럼 밀어붙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나바와도 다퉜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바나바와 다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지요.
본문 9절입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가로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아!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과는 아주 다른 지역입니다. 생소한 곳입니다. 아직도 처음 전도 여행에서 겪었던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선을 넘나들던 그 어려웠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라니요. 그곳은 헬라 문화권의 본산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전했던 곳보다 훨씬 더 어려울 수 있는 곳이 바로 마게도냐 지역입니다. 멀기도 훨씬 멀고요.
그런데 본문 10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그랬습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곧’그랬습니다.
즉시 순종했다는 것이지요. 힘썼다는 말은 시도했다는 말입니다. 바로 마게도냐로 갈려고 움직였습니다. 왜요? 하나님이 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의 삶! 나의 존재이유가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주신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방향 전환을 했습니다
내가 원했던 곳과는 전혀 다르고 멀고 힘들고 어려운 곳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바두니아는 잊어버렸습니다. 미련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로 가기 위해서 전략을 짜고 배편을 알아보고 비용을 충당합니다.
그랬을 때 헬라철학의 본산지인 마게도냐에 복음의 열풍이 불어 닥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반응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이 동원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시간대를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인간적인 조급함 때문입니다.
인간은 길어야 100년을 못살고 죽지만 하나님은 과거나, 현재, 미래가 함께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나의 조급함은 하나님의 시간에 대한 불신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더디고,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크십니다. 이것을 인정하고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신앙 인격이 성숙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극단적인 행동도 불사하지 않는 태도는 “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불신합니다”라고 신앙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날마다 이런 갈등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는데 하나님 내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고 애쓰는데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저는 마게도냐로 못갑니다. 저는 비두니아가 더 적성에 맞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정신이 있으신 겁니까? 없으신 겁니까? 도대체 여기 투자한 시간과 에너지가 얼만데 마게도냐로 가라는 것입니까?
선 한 일에 끼어든 교묘한 인간의 욕망!!! 이것을 잘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은 조급하고 무례합니다. 비인격적인 방법을 동원합니다. 순종하지 못합니다. 절대로 비두니아를 포기하지 못합니다. 끝까지 내 고집과 내 생각만을 이야기하다고 종래 다시스로 도망치는 요나처럼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우리의 계획! 우리의 욕망!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두렵고 힘들지만, 정말 마음이 무겁고 어렵지만 마게도냐로 걸음을 옮겼을 때 그곳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서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비두니아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을 경험하고 환상을 통해서 마게도냐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해서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으며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지금 이 선교 팀에 합류해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상세하게 지형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사모드라게로 직행했다고 하는데 이 사모드라게는 정상이 1,524m까지 치솟아 있는 바위섬이었다고 합니다. 바울 일행은 아마 여기서 하루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압볼리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마게도냐 지경의 항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 이르는 여정은 240km나 되는 엄청난 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240km 정도야 차로도 그저 몇 시간이면 주파하는 시대입니다. 그리고 배도 이제는 속도가 향상되어서 아마 차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이 길이 엄청나게 먼 길이었습니다. 더구나 잘못 풍랑이라도 만나는 날이면 그야말로 대책이 없는 상황입니다. 지금처럼 배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네압볼리에서 빌립보까지는 16km입니다. 아마 이 정도 거리라면 걸어서 갔을 것입니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주전 4세기경에 마게도냐의 빌립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는 약 200년간 헬라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헬라적인 색채로 짙게 착색이 되어 있겠습니까? 우리는 불과 36년의 일제를 거쳤음에도 일제의 잔재 때문에 지금도 고생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헬라적인 성향이 너무나 강한 도시였습니다. 헬라적인 성향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헬라철학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 없는 신들입니다. 이들에게 유일신은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기 전 1세기 말엽에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라고 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지만 문화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즉 헬라제국의 영향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제어는 헬라어였습니다. 코이네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냐라는 도시는 로마의 한 주였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는 네 개의 소도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네압볼리에서 오다보면 첫 번째 만나는 도시가 빌립보였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누가가 이 도시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일행은 아마 이 도시에서 몇 주간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13절의 본문을 함께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당과 기도처의 관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회당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 기도처다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원래 회당이 구성되려면 성인 남자 10명의 정족수가 채워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아시아에서 전도했던 1차 전도여행에서는 바울이 전부 회당에서 설교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1차 전도여행지였던 소아시아 지역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정착해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가장 먼저 세우는 것이 회당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당을 지어놓고 그 회당을 중심으로 이사를 와서 도시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큰 회당이 있는 곳에는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도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회당 주변에 있어야 안식일에 차를 타거나 마차를 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모든 생활의 중심이 회당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적극적이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유대인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안식에는 회당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안식일은 지켰습니다. 그래서 회당으로 모여듭니다.
그런데 빌립보 지역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전도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마 처음부터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기대했다면 대 실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회당도 없는 도시라니요. 더구나 이 말은 이곳 사람들이 구약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게도냐로 가면 뭔가 엄청난 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고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기대했다면 그들은 최악의 전도 여행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대박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비두니아를 포기하게 하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으니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잘못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트려 버리기에 충분합니다.
비두니아를 꿈꾸는 우리에게 마게도냐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나 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시는 분입니다. 내 인생에 대해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아는 세계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도 바울 일행을 생각지 않은 곳으로 인도하셔서 그곳도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하며 준비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두니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열매가 그를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루디아와 또 점하는 여종과 간수가 빌립보 교회의 개척 멤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만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할례 받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갈5:2)
그런데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행16:3)
이런 일 때문에 대적자들은 바울이 이중적이라고 비방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이중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다 할례 받든지 다 할례 받지 말든지 하라고 합니다 세상 법은 정형화된 죽은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은 법이 아니라 산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육의 사망의 법이 아니라 영의 생명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3:6)
그러므로 우리는 법이 아니라 성령의 부르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고전7:18)
왜냐하면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6:14)
그래서 바울은 항상 성령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에도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옳게 보였지만 성령이 막으시면 그만 두었고,
비두니아에도 전도하러 가는 것이 옳게 보였지만 성령이 막으시면 멈추었습니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행16:6~7)
반면에 비두니아 행을 막으신 성령께서 환상을 통해 마게도냐를 도우라고 말씀하시자 즉시 마게도냐 빌립보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법이나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을 따를 것이 아니라,
오직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행하기 원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갈5:16),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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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바울이 디모데를 만나다(1절)
바울이 실라와 함께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르렀을 때 아주 귀한 만남을 하게 됩니다. 바울은 나중에 자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되는 디모데를 만나게 됩니다. 디모데는 아버지는 헬라인이요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어릴때부터 많이 공부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의 만남은 선교적으로나 또는 영적으로 아주 유익한 만남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 주변에서 함께 믿음에 힘쓸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큰 은혜입니다. 나의 주변에 나와 함께 믿음에 동역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사하며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일을 이루어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묵상하기
내 주변에 복음으로 함께 섬길 자들이 있는가?
2.성령님의 인도하심(6-7절)
우리가 선한 목적을 가졌다고 하여도 철저하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확인해야 합니다. 자칫 나의 생각과 열심이 앞서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바울 일행은 오늘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지만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그들의 앞길을 막으시고 그들의 길을 돌려놓았습니다. 온 세상을 더 크게 통찰하시는 성령님께서 그들의 길을 다르게 인도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우리의 지식과 생각과 계획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항상 그분의 계획과 그분의 영적인 인도하심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아시아의 길을 막으신 것은 결코 아시아에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어서가 아니라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먼저 유럽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선교는 우리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철저하신 주권에 의한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항상 우리의 삶의 길을 선택하고 나아갈 때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그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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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선교 여행은 1차 선교 여행에서 무단으로 이탈해 버렸던
마가라고 하는 한 선교사를 데리고 가느냐? 데리고 가지 않느냐?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서로 갈라서는 아픔이 있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고향인 구브로 섬으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바울의 고향인 길기기아로 갔다.
오늘은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복음의 전도가 스데반의 순교와 핍박으로
확산되기 시작해서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안디옥에 이르렀고
안디옥에서 바울의 1차 2차 3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계선교가 시작되는데
오늘은 역사적인 안디옥에서 유럽으로의 복음의 확산이 되고 있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 이른다.(1)
1차 전도여행 때에 이곳에서 생명을 잃은뻔한 적이 있는 추억의 장소이다.
하나님이 준비한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디모데이다.(1)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다.
하나님의 좋은 군사였던 자이다. 바울의 영적 아들이요. 하나님을 경외한 인물이다.
바울에게서 개인적인 서신 2편을 받았으니 바울의 각별한 사랑을 받은 자이다.
모태로부터 신앙을 가진 자였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에게 일찍 신앙을 가진 자였다.(딤후1:5)
디모데에 대한 소개가 있다.
어머니는 믿는 유대여자이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였다.(1) 다문화 가정 출신이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이다.(2) 부럽다.
바울과 함께 일을 하게 된다.(3)
유대인을 위하여 할례를 받았다.(3)
예루살렘 회의에서 할례 문제로 심각한 토론이 있은 후 였지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유대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성경이 설명을 한다.
바울에게 참으로 훌륭한 믿음의 동역자를 주신 하나님
만남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시고 관계의 축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한다.(6)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6)
무시아 앞에서 비두니아로 가고자 하나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는다.(7)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다.(8)
말씀은 간단한데 거리로 따지면 수천km나 되는 거리이다.
현재의 터키 지역을 거의 다 거쳐서 에게해와 흑해 입구 쯤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인다.(9)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한다.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9) 할렐루야.
역시 바울은 영적인 인물이다.
왜 성령이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했는지 바로 깨닫는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신줄 깨닫는다.(10)
계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순종은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 하나님은 환상을 통하여 바울에게 말씀하셨고
바울과 실라 누가와 디모데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해서 움직인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겨 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의 증인으로 우리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주님의 인도하심만을 따라 나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디로 이끄시던지, 주님을 전하는 자가 되고,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에 합당한 삶의 모습을 실천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를 통로 삼아 주님께서 크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길 소망합니다.
저희들은 그저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 증인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리고,
주님 안에서 더욱 더 성장하고 성숙해져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