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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 22,19-23
주님께서 궁궐의 시종장 세브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19 “나는 너를 네 자리에서 내쫓고, 너를 네 관직에서 끌어내리리라.
20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나는 힐키야의 아들인 나의 종 엘야킴을 불러
21 그에게 너의 관복을 입히고 그에게 너의 띠를 매어 주며 그의 손에 너의 권력을 넘겨주리라.
그러면 그는 예루살렘 주민들과 유다 집안의 아버지가 되리라.
22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23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 11,33-36
33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34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가 그분의 조언자가 된 적이 있습니까?
35 아니면 누가 그분께 무엇을 드린 적이 있어 그분의 보답을 받을 일이 있겠습니까?”
36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6,13-20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극성스런 태풍과 장마비도 지나갔습니다.
가을의 길목입니다.
결실이 영글어 갈 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무엇이 영글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말씀전례의 핵심단어는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이방민족들에 대한 신탁 중에서 세브나에 내린 심판의 끝부분입니다.
세브나는 앞 절에 따르면, 히즈키야 임금 시대에 궁궐을 관리하는 시종장이었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 하는 권력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관직에서 내쫓으시고, 힐키야의 아들인 엘야킴에게 권력을 넘겨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 22,22)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3,7-8)로 표현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로마서 9-11장의 마무리 부분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로마 11,36)
여기에서는 세 개의 전치사, 곧, (그분) ‘에게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시고, 만물의 길이시며, 만물의 목적이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만 속한 것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생각하느냐?”(마태 16,13)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당시 제 2성전 유다이즘에서 메시아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진 임금이나 사제 혹은 예언자로서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16,16)으로 표현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느님과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 곧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계시의 ‘신앙 위’에 세워질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오늘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는가?” 하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묻는 것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과 기준이 아닌, 아니 오히려 반대되는 관심과 기준을 지니신 예수님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의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체제와 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듯이,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질서를 허물어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섬김으로서 서로를 먹여 살리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시고 실천하셨기에, 우리도 또한 이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질문은 나는 지금 기존의 질서와 가치와 행동양식에 여전히 머물러 살고 있지는 않는지, 또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를 액면 그대로를 보게 하고, 마치 부자청년의 경우처럼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게 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는 천국의 열쇠지기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마태 16,19)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다시 말해서 하늘나라의 문을 열게 해주겠다고 하시는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좋은 뜻인 것 같기는 한데 그 뜻이 무엇일까요?
하늘나라의 열쇠가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의 자물쇠도 있다는 것이고,
그 열쇠가 베드로에게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를 여닫는 권한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내가 아무리 잘살아도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열어줘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나의 구원이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 구원이 주님께만 달려 있다는 것이 우리 믿음인데, 베드로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말이 아닙니까?
그리고 베드로에게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기는 한 겁니까?
없지요.
하느님 없는 베드로에게 그럴 능력과 자격이 없는 것은 너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신원을 베드로가 안 것은 인간의 머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하늘나라 열쇠를 위임하시지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나라 열쇠를 위임하시는 것이고, 하느님의 지혜를 받고 힘을 받는 사람에게 위임하십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자기를 머리를 믿고 자기 힘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나라 열쇠를 맡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열쇠를 베드로에게 위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베드로 한 사람에게 맡기신다는 뜻이 아니라 당신이 베드로를 반석 삼아 세우신 교회에 맡긴다는 뜻이며, 그것은 교회의 일원인 우리에게도 맡기신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복음 다른 곳에서 너희가 무엇이든 이 세상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고 주님께서도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그러니 이것은 베드로 한 사람의 영광이 아니고 교회 일원인 우리 모두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위임은 책임입니다.
주님의 위임이 우리에게는 책임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당신의 책임을 우리에게 떠넘기려는 뜻은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은 당신과 우리의 공동책임이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또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한 당신 사명을 마치시면서 당신을 대신하여 이 사명을 계속 이어갈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나라를 여닫는 대표 책임을 베드로에게 맡기시고, 베드로의 신앙을 이은 교황들에게 맡기신 것인데, 우리도 천국 열쇠 지기의 책임에 공동참여하고 있다는 책임감을 지녀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셨고,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나는 주님을 어떤 분으로 모시고 있는지 성찰하고, 아드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주님의 연장으로 쓰임 받음에 감사하며 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뜬소문에 뭐라 하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자주 다른 사람의 얘기를 하기를 좋아합니다.
좋은 얘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얘기를 더 즐깁니다.
소위 ‘신상털기’도 합니다.
속마음은 감추고 남의 이야기에 기대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기도 합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 하고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신이 나서 의견들을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것은 남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 질문을 하며 제자들의 마음을 건드렸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다른 사람들 얘기 말고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는 대로 너희의 행동이 드러날 것이라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단숨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는 말씀은 ‘네가 공부했던 교육이나 문화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해야 은총이기도 합니다.
“아버지 예수님을 고백할 은총을 저에게 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은 베드로의 즉각적인 응답을 인정하시며,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시몬에게 주신 ‘베드로’라는 새 이름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가 방금 드러낸 신앙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고, 하느님의 아드님은 이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 곧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교회는 항상 베드로의 믿음 위에서,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로 삼으신 그 믿음 위에서 전진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시몬은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서 반석이 됩니다.
시몬의 능력 위에 교회를 세우라고 말하지 않고,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세우라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두 번째 질문에 이어 이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듣습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각자는 이 물음에 답해야 합니다.
이론이 아니라 신앙이 녹아든 대답, 삶이 녹아든 대답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당신은 00무엇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지금까지 구약의 사람들이 갈망하던 하느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 구세주(그리스어), 메시아(히브리어; 기름부음 받은 사람)라는 고백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혹은 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이라고 고백했는데, 그들과는 다른 분,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구원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정체를 아느냐고 묻는 질문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이냐?’ 를 묻는 것이기도 하고, 그에 따른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녀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작은 몽당연필’로 표현하였습니다.
글씨를 쓰시는 분도, 무엇을 쓸지 생각하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나는 그저 그분 손에 들린 작은 도구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를 쓰시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 생활 초기에 환시를 통해 “너는 누구냐?”는 한 소년의 질문을 받게 되는데 “예수의 데레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꼬마에게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그에 대한 소년의 대답은 “데레사의 예수다.”였습니다.
우리의 고백은 어떤 고백일까요?
예수님께서 나에게 ‘너는 누구냐?’ 했을 때 당당하게 ‘저는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무개 입니다.’ 라고 할 수 있나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화답해 주실까요?
‘그래, 나는 네가 사랑하는 너의 예수다’라는 응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미사 안에서 거양성체 때 마음속으로 기도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영광 받으소서.
자비 베푸소서. 용서하소서.
저는 당신의 종입니다. 연장으로 써 주소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저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쓰고 안 쓰고는 그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고 선언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이 감싸고 있었기에, 아버지의 사랑이 품고 있었기에 행복했습니다.
우리의 여정에도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에 마음을 여는 한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것 자체가 행복한 일입니다.
시련과 역경 안에서도 모두가 나를 버린다 해도 주님을 차지하면 행복합니다.
나의 주님을 바로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를 알아보면, 내가 하느님의 백성이며 교회이고, 하늘의 열쇠를 받게 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2절 이하에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사도들의 후계자가 주교이고 그 주교들의 협력자가 신부입니다.
그리고 신부는 주교의 위임을 받아 사목권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은 후에 또다시 범하게 되는 잘못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성사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권리의 보장책입니다(차동엽).
“이 성사를 고백성사라 하는 것은, 사제 앞에서 죄를 자인하고 고백하는 것이 이 성사의 핵심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은 의미로는 이 성사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죄인에 대한 자비를 알아 뵙고 찬미하는 하나의 ‘고백’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교리서).
사람은 감각적인 존재이고 보이지 않는 마음을 감각으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느끼도록 해주셨습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서한다’는 것을 단순히 말해 주는 것보다 그 용서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의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사제의 음성을 통해 “당신의 죄는 용서 받았습니다.” 라는 선언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혼자서 회개하며 주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다’ 하는 것보다 고해성사를 통해 받는 은총은 훨씬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제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고해성사는 단순히 인간에게 고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함께하는 하느님의 자비에 나를 온전히 맡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고백성사는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입니다.
오늘 1독서의 말씀을 보면, 주 하느님께서는 엘야킴을 불러 특별한 소명을 줍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나는 그를 말뚝처럼 단단한 곳에 박으리니, 그는 자기 집안에 영광의 왕좌가 되리라.”
(이사 22,22-23)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당신의 사람을 선택하여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주신 하느님, 그리고 그 외 아드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길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을 믿으려 하는데 잘 믿어지지 않아요? 그 이유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는 눈을 지닌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하늘 나라 열쇠를 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알아보는 눈, 곧 믿음은 우리 능력이 아닌 성령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마태 16,17)
하늘 나라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쫓겨난 이유가 죄를 지었기 때문이고 죄가 용서되면 다시 하늘 나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곧 성령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2-23)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령이 주님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라고 하십니다.
곧 내가 죽지 않으려 하는 이는 성령을 받아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마르틴 루터도 “인간이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가?”라며 죽기를 거부하여 교회에 주어진 죄를 사하는 권한을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이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베드로는 자기 뜻을 죽이고 물 위를 걷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분 주고 받느냐의 수를 세느라고 정신이 팔려 그 사람들 사이로 지나가는 고릴라를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 욕망이 한쪽에 빼앗기면 다른 것은 볼 수 있는 힘을 잃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를 믿으면 하느님을 믿을 힘을 잃습니다.
믿고 싶지 않아집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하느님께 한 번만 세상을 보고 싶다고 소원을 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부엉이 한 마리를 불러 낮에는 눈이 필요 없으니 그 소경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보게 된 소경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밤에도 눈을 부엉이에게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부엉이는 먹이를 먹을 수 없어 죽었고 그때 소경의 눈은 흐려지다 영영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내 안에 성령께서 살아나십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믿음이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이 살아나는 만큼 교회의 성사는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체를 영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에 불과하다면 인간의 본성에 사로잡혀 성령의 불이 꺼지고 맙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하였습니다.
선악과를 자신이 차지하여 스스로 주(인)님이 되고 선악과를 먹어(육체적 욕망) 스스로 창조자가 되며 사람을 심판하여 스스로 심판관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 될 수 있는데 다른 하느님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을 때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셨겠습니까?
계셨습니다.
그러나 볼 수 있는 눈을 잃었습니다.
자아를 긍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소유욕-성욕-지배욕이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를 살리기 위한 욕망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욕망이 있다면 주님의 뜻, 곧 사랑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덜 가지고 절제해야 하며 겸손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뱀의 욕망과 반대됩니다.
따라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려야만 함을 압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따름은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인식하고 그분께서 우리도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불러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있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저주와도 같습니다.
더는 돈을 좋아할 수 없고 더는 여자에 끌릴 수 없으며 더는 다른 이들보다 높아질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싶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자신을 버려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잘 믿어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십자가에 봉헌함 없이 우리를 하느님처럼 만들려는 분을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끝도 없이 긴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던지시는 두 가지 질문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질문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예수님 시대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그분이란 존재는 많은 경우 호기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그분께로 몰려갔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 예수님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줄 심심풀이 땅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그분께로 다가갔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 그분은 자신이 부딪친 현실적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줄 해결사였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들 그분께로 다가갔습니다.
이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두 번째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베드로 사도가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언제나 부족했던 제자, 그래서 흔들리던 베드로 사도였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정답을 꼭 집어 말합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그토록 학수고대해왔던 메시아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분은 당신 아들 메시아를 파견하신 하느님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분은 베드로 사도 안에 늘 살아 숨 쉬고 계시며, 그와 늘 동행하시던 스승이었습니다.
어쩌면 베드로 사도의 마음 안에 예수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이미 가족보다 더 친밀한, 연인보다 더 가까운 그런 존재였습니다.
이런 베드로 사도였기에, 그가 그리도 나약했지만, 그가 그리도 과격했지만, 그가 그리도 부당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막중한 사명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처신은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마구 흔들렸습니다.
늘 불안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저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나약한 존재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십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을 따라나선 길에 숱하게도 갈팡질팡했습니다.
오락가락했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십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지닌 다양한 인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토록 잦은 실수와 방황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제대로 꿰뚫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큰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열렬히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거듭되는 배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있었습니다.
끝도 없이 긴 어두운 터널 속에서도 오직 예수님만을 죽기살기로 붙들고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신앙고백, 증언>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는 말을 할 때, 예수님을 향해서 그 말을 하면 그것은 ‘신앙고백’이 되고, 사람들을 향해서 그 말을 하면, 그것은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신약성경에는 베드로 사도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또는 증언이 네 번 나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 16,16)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8-69)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
(사도 2,3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
(사도 4,12)
앞의 두 번은 예수님을 향해서 한 말, 즉 신앙고백이지만, 그 신앙고백을 복음서에 기록한 것은 사람들을 위한 일이기 때문에, 사실상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신앙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의 질문과 베드로 사도의 고백을 세상 사람들의 질문과 사도들의 답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가?
왜 예수님을 따르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분의 제자가 되었고, 그분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도(신앙인들도) 세상 사람들의 질문에 그렇게 증언해야 합니다.
“당신들은 왜 성당에 다니는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쳐서 자신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 그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사도들은 순교자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삶과 죽음을 보고서 그분들의 증언이 진리라는 것을 믿고 있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온 삶으로 믿음을 증명하는 생활’,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인의 삶은 믿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삶’이 믿음 없는 세속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그 믿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뽑으셨음을 확인해 주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인간적으로 얻은 지식이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과 그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일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셨을까?
복음서에는 자세한 설명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베드로 사도만의 뛰어난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은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하신 일과 비슷합니다.
성모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성모님만의 뛰어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메시아의 어머니로 선택되셨고,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을 ‘복되신 분’이라고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 “너는 행복하다!” 라는 말씀도 “너는 복되다.”인데,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선택은, 또는 부르심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특별히 선택하신 일은 베드로 사도의 응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 응답은 곧 ‘믿으려고 노력한 일’,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일,’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숨을 바쳐서 믿음을 증언한 일’ 등입니다.
신앙고백과 증언으로 좁혀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성령의 인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설명합니다.” (1코린 12,3).
우리가 하는 신앙고백과 증언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공부해서 얻은 지식을 말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들입니다.
원래 신앙인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고(1코린 1,2), 신앙생활은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당신의 십자가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말하지 말라는 뜻이고(마태 17,9), 진정한 신앙고백은 부활신앙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오! 하느님” -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하느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
(시편 86,6)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
독서의 기도 초대송 후렴의 하느님 찬미로 하루를 활짝 연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제 참 좋아하는 성가 둘은 둘 다 “오!”로 시작됩니다.
“오! 아름다워라”와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가입니다.
만일 언젠가의 제 장례미사 때에는 입장성가와 퇴장성가는 이 두곡을 부탁해 두고 싶습니다.
강론과 또 묘비명이 가능하다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애송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4개 본당 꾸리아 간부들 40여명의 하루 수도원 피정을 지도했습니다.
모두가 참 아름답고 성실해 보이는 밝고 환한 모습들이었습니다.
파견미사 전 잠시 둘을 공지했습니다.
“입당성가는 못했고 퇴장성가로는 애국가를 부릅시다.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가 들어있어 성가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주님의 제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합시다.”
지난 주일 미사 강론 때 애국가를 부른 이후 두 차례의 단체피정 때마다 애국가를 부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가사를 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얼마나 숙연한 분위기인지 모두가 한마음, 한사랑의 애국자처럼 느껴졌습니다.
1절까지 기대했는데 무려 2절까지 불렀고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나라도 국민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가사 중 동해는 일본해로 바뀌었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애국가 가사는 어떻게 되고, 독도는 어떻게 되나 하는 언짢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일간지 둘은 1면 톱기사와 첫째 사설은 둘 다 “독립영웅 흉상 철거하는 육사”라는 제하에 이념이나 정파를 떠나 올바른 역사관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립영웅은 누구나 아는 일제치하에서 나라독립에 몸바쳤던 홍범도 장군, 지청전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의 다섯분 애국자분들입니다.
요즘 몇 번 미사 중 이런저런 착잡한 마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애국가를 부르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피정 대표자가 보내준 사진도 참 아름다워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모두 활짝 웃는 모습이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사진처럼 사세요!”
답신을 보냈습니다.
웃으면 꽃같은 참사람 얼굴인데, 똑같은 얼굴도 분노나 두려움, 걱정으로 이그러져있으면 괴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처방전에는 꼭 “웃어요!”라는 스탬프도 찍어 드립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덕담의 메시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곳 그 자리에서 누구나 환대하시는 울 신부님!
신부님의 사랑과 겸손, 넉넉한 성품은 그 자체가 저희에게는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존재 자체가 저에게도 위로가 치유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서로서로에게 위로와 치유가 되도록 합시다.
그러나 궁극의 위로자요, 치유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오, 하느님!-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첫째, 성부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과의 만남보다 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어제 피정중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한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의무임을 강조했습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고, 수도자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수도자의 기도는 하느님의 일이니, 하느님은 수도자의 존재 이유임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느님을 빼버리면 말 그대로 허무와 무지의 어둠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감동인지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적이 있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기념미사는 생략되지만 성녀 모니카(331-387)의 기념일이고, 내일은 성녀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마지막 아드님에게 주신 유언도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신비에 젖어 살았던 성녀 모니카입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전에 네가 기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천주께서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성녀를 위로한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녀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만고불변의 조언도 우리에겐 감동입니다.
둘째,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합시다.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백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너희와 언제나 함께 있겠다.” 확약하신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성자 예수님은 답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성자 아버지께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고백을 대변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믿음이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감격에 벅찬 예수님의 축복을 가득 받은 베드로이지만 이후의 행적 또한 우리에겐 분발의 노력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게 합니다.
곧장 주님의 길을 막음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호된 질책에 또 후에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고, 부활후 발현하신 주님은 세 번 연거푸 베드로에게 약속을 받아 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믿음의 고백에 이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부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성자 예수님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두 가르침도 잊지 못합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를 사랑합시다.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삼중신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 후 주님의 격찬이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의 반석이라 불리게 된 베드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께 실현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의 절대적 권능을 베드로에 위임함으로 당신의 권능에 합류시킵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여기 그가 가리키는 바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의 엄청난 일을 그대로 베드로에게 위임하여 자신의 구원섭리에 동참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우리 역시 또 하나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께 합류하여 주님의 교회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황님의 호소가 절절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수호하십시오.”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교회를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교회사랑, 미사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를 깊이 하시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서 걷게 하시고, 제 마음을 이끌어 주사,
당신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시편 86,11)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미국에서 ‘새만금 잼버리’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1991년 이미 고성에서 잼버리를 개최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또한 이미 오래 전에 개최하였던 경험이 있었기에, 평창 동계 올림픽도 차질 없이 진행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잼버리 정도의 국제 행사는 넉넉하게 치러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은 ‘손님’을 환대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식은 안타까웠습니다.
‘폭염, 해충, 습지’라는 삼종세트가 청소년들의 축제인 잼버리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늘이 없는 가운데 50,000명가량의 청소년들이 체감온도 40도가 넘는 곳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배수시설이 잘 안 되는 습지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습지에는 각종 해충들이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태풍 ‘카눈’까지 한반도에 상륙하면서 새만금에서 조기 철수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폭염을 피해서 몇몇 국가는 새만금 현장에서 철수하였습니다.
한국을 찾은 세계 청소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준비의 부족으로 대한민국의 ‘국격’이 떨어진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미 1년 전부터 ‘새만금 잼버리’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바다를 매립해서 만든 간척지이기에 배수시설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면 습지로 변하는 곳이니 반드시 배수시설을 확보하라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폭염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전기를 끌어들여서 선풍기나 에어컨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습니다.
얼음을 충분히 확보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해충이 많으니 충분한 방역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그에 따른 예산도 확보해야 한다는 조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준비하는 쪽에서는 이런 지적과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행사의 주체 도시인 전라북도는 중앙 정부에서 예산 지원을 적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중앙 정부는 전라북도가 준비를 소홀히 했다고 하였습니다.
말로는 폭염대책, 배수대책, 방역대책이 잘 되고 있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2023년 ‘새만금 잼버리’는 기쁘고 즐거운 한바탕 축제가 아니라, 폭염과 해충과 습지에서 살아야 했던 생존게임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습니다.
그 교회는 저승의 세력도 능히 물리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열쇠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는 지친 이들에게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는 희망이 되었습니다.
근심과 걱정에 빠져있는 이들에게는 용기와 담대함을 주었습니다.
노아의 방주가 홍수에서 사람을 살렸듯이 교회는 공동체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받았던 천국의 열쇠는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사’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죄를 사함 받습니다.
견진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를 받습니다.
고백성사를 통하여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됩니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습니다.
병자성사를 통하여 치유의 은사를 받습니다.
혼인성사를 통하여 성가정을 이룹니다.
성품성사를 통하여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을 선발합니다.
이렇듯이 ‘성사’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천국의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기고, 천국의 열쇠를 주셨듯이 제가 속한 서울대교구의 주교님은 제게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맡겼습니다.
저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운영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제게 매주 발행되는 가톨릭평화신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셨던 천국의 열쇠와 같습니다.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습니다.
저의 사명은 천국의 열쇠이며 밭에 묻혀있는 가톨릭평화신문을 전하는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지면에는 보물이 많습니다.
교황님의 근황과 교회의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다.
미주한인가톨릭 공동체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을 알 수 있습니다.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매주 발행되는 가톨릭평화신문을 2시간에 걸쳐서 읽습니다.
제가 신문사 사장이라서 읽는 것도 있지만 가톨릭평화신문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LA 성 아그네스 성당의 교우 분들에게 가톨릭평화신문이라는 보물을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은 여러분들을 천국으로 안내하는 천국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하셔서 부디 많은 보물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을 구독하셔서 천국의 열쇠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 신자들을 한마음 한뜻이 되게 하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 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갑곶성지에 있을 때, 식기 세척기를 하나 마련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거지가 힘들기도 했지만, 성지를 떠나 다른 사목지로 이동한다는 말을 듣고 후임 신부를 위해 좋은 식기 세척기를 마련해주고 싶었습니다.
식기 세척기가 도착했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디자인도 좋고 세척력도 너무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알록달록한 세제 캡슐은 정말로 신기하고 편했습니다.
이 조그마한 캡슐 하나로 그 많은 그릇이 깨끗하게 된다는 사실이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하나를 들었습니다.
이 식기 세척기 캡슐로 인해 6세 미만의 아이들이 심각한 중독 사고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세척된 식기에 세제 성분이 남아서 그런 것일까요?
아닙니다.
글쎄 세제 캡슐을 맛있는 사탕으로 오인하고 먹는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예쁘고 실용적인 모양이었지만 아이에게 치명적이었기에, 미국 소비자 동맹에서는 캡슐형 세제 이용을 완전히 중단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좋아 보이는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좋아 보인다고 반드시 유익한 것이 아님을 삶 안에서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신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보입니까?
솔직히 많은 규제와 의무 수행 문제로 인해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좋은 것이며,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순간적인 만족, 나의 욕심을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곳이며 참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즉 구원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실 때, 유다 사회는 단순히 예수님을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도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을 향한 큰 기대가 있었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지배로 힘들어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위로를 전달해 줄 예언자로 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위로만 주는 예언자로서 당신을 바라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기에,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정답을 이야기하지요.
그리스도는 예언자와는 전혀 다른 호칭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러 온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하나가 아닌, 하느님의 구원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바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과 함께 하기에 교회는 기뻐하며 희망을 품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과연 어떤 분으로 고백하고 있을까요?
예언자만도 못한 자기 욕심만을 채워줄 그리고 자기 생각만을 다 들어주는 한 명의 종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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