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디아의 믿음과 헌신 16:11~15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귀신의 방해와 바울의 축사 16:16~18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
[오늘의 말씀 요약]
배 타고 마게도냐의 첫 성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 일행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습니다. 주님이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의 마음을 여시니 그와 그 집이 세례받고 바울 일행을 그 집에 머물게 합니다. 점치는 귀신 들려 주인들에게 이익을 주는 여종에게서 바울이 예수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습니다.
----------------
루디아의 믿음과 헌신 16:11~15
바울 일행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즉각 순종합니다. 그들은 배를 타고 마게도냐에서 첫째가는 도시 빌립보에 도착합니다. 빌립보는 주전 4세기 마게도냐 왕 빌립이 점령한 후 그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 회당이 없어 바울 일행은 기도하려고 성문 밖 강가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여자들을 만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 가운데 루디아가 있습니다. 그는 두아디라에서 생산되는 자주색 옷감을 마게도냐에 판매했습니다. 자주색 옷은 주로 귀족이나 부자들이 입었기에 루디아는 많은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주시니 그와 가족이 모두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에게 거처를 제공합니다. 루디아는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입니다.
● 더 깊은 묵상
루디아는 어떤 여인이었고, 바울 일행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나요?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내가 지원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
귀신의 방해와 바울의 축사 16:16~18
기도처로 가던 바울 일행은,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종을 만납니다.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16절)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주인들’이라는 표현에서 그 여종을 이용해 돈벌이를 하는 주인이 여러 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종은 바울 일행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신분과 사역이 어떠한지를 외칩니다. 귀신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압니다. 그러나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대신 복음 전도를 방해합니다. 이에 심히 괴로움을 느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냅니다. 이로써 예수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복음 전도는 예수님 이름과 그분의 사역을 세상에 전하는 일입니다.
● 더 깊은 묵상
귀신 들린 여종은 바울 일행을 향해 어떤 말을 외쳤나요?
예수님 이름의 권세와 능력을 선포하며 내가 담대히 행할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하나님, 그 길의 끝이 사망인 줄도 모르고 달려가던 제 삶에 말씀으로 찾아와 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떤 유혹과 방해가 있어도 복음에 빚진 자의 심정을 잃지 않게 하소서. 복음 사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돕고 섬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오늘의 찬송(새 497 주 예수 넓은 사랑)
----------------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복음의 시작은 아주 미약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여인들이 모인 기도처에서 시작하여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며,
루디아의 회심으로 온 가족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세례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시작의 시발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로 아시아와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막으신 하나님께서 바울의 일행을 마게도냐 지방 빌립보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섭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해 봅니다.
우리로 인하여 온 가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계획이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교회가 견고히 세워지는 계획이 이루어지길 소원합니다.
나에게 적용
복음의 통로가 되어 우리에게 맡겨 주신 땅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그들 가운데 어떤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기대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보도록 하자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보여 주시고,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심에 감사를 올려 드리도록 하자
----------------
1.하나님은 정확하시다(11-15절)
하나님은 정확하십니다. 바울 일행의 계획은 아시아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 길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감사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바울에게는 아무런 계획도 없습니다. 그저 인도하심을 따라서 순종할 뿐입니다.
그들은 무작정 마게도냐 지방으로 가게 되는데 그 첫 성에서 부터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이 나타나게 됩니다. 빌립보 성에 들어갔을 때 놀랍게도 루디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자신들의 거처 문제까지도 책임을 지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갈 때도 그 끝에 어떤 일이 있을지를 몰라서 어려워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 막연할 때도 있고 결과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될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정확하게 인도하십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편인가?
2.귀신을 쫓아 냄
귀신들린 여종이 바울을 알아보고 괴롭혔습니다. 놀라운 것은 귀신은 하나님의 사람을 바로 알아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방해하기 시작합니다. 한 번에 끝나지 않습니다. 여러 날 동안 바울 사도를 괴롭히게 됩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사람을 방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히게 됩니다. 마귀의 속성은 우리가 넘어지는 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지금 바울을 괴롭히는 귀신은 바울이 그곳을 떠나게 하고자 날마다 괴롭혔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연약함으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힘들어서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하게 마귀의 의도를 안다면 담대하게 대처하게 될때 마귀는 항복하고 우리에게서 떠나가게 됩니다.
오늘 바울사도는 영적인 본질을 바라보고 그 아이속에 있는 마귀를 내어 쫓음으로서 믿음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묵상하기
나는 사단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6~18절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가다가 만난 귀신 들린 여종은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면서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요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라고 외쳐대며 복음 전파를 훼방합니다. 이 일로 바울은 심히 괴로워하다가 결국 귀신을 여종에게서 내쫓습니다. 여종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그 의도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옳은 듯 들리는 간교한 말로 우리를 넘어뜨리고 복음 증거를 방해하는 마귀의 궤계를 잘 분별할 수 있도록 깨어 기도합시다.
------------
마게도냐 첫 성 빌립보에서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에서 비두니아로 올라가려고 하다가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을 경험하고 환상을 통해서 마게도냐로 갈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로 직행해서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으며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지금 이 선교 팀에 합류해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상세하게 지형이름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사모드라게로 직행했다고 하는데 이 사모드라게는 정상이 1,524m까지 치솟아 있는 바위섬이었다고 합니다. 바울 일행은 아마 여기서 하루 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네압볼리에 도착했다고 하는데 이곳은 마게도냐 지경의 항구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드로아에서 네압볼리까지 이르는 여정은 240km나 되는 엄청난 길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240km 정도야 차로도 그저 몇 시간이면 주파하는 시대입니다.
빌립보라는 이름은 주전 4세기경에 마게도냐의 빌립이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 도시는 약 200년간 헬라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헬라적인 색채로 짙게 착색이 되어 있겠습니까? 우리는 불과 36년의 일제를 거쳤음에도 일제의 잔재 때문에 지금도 고생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 도시는 헬라적인 성향이 너무나 강한 도시였습니다. 헬라적인 성향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헬라철학이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수 없는 신들입니다.
이들에게 유일신은 이상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기 전 1세기 말엽에는 로마 식민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라고 하는 나라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지만 문화적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즉 헬라제국의 영향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국제어는 헬라어였습니다. 코이네 헬라어입니다. 그런데 이 마게도냐라는 도시는 로마의 한 주였습니다. 그리고 마게도냐는 네 개의 소도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네압볼리에서 오다보면 첫 번째 만나는 도시가 빌립보였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누가가 이 도시 출신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 일행은 아마 이 도시에서 몇 주간 머물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13절의 본문을 함께 살펴보기 전에 먼저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당과 기도처의 관계입니다. 쉽게 말하면 회당이 없는 곳에 있는 것이 기도처다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만은 아닙니다. 원래 회당이 구성되려면 성인 남자 10명의 정족수가 채워져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소아시아에서 전도했던 1차 전도여행에서는 바울이 전부 회당에서 설교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지역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전도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마 처음부터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기대했다면 대 실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회당도 없는 도시라니요. 더구나 이 말은 이곳 사람들이 구약에 대해서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게도냐로 가면 뭔가 엄청난 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라고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이 기대했다면 그들은 최악의 전도 여행을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1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마게도냐 지경 첫 성인 빌립보에 도착해서 수일을 유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에 도착해 보니 무슨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는커녕 수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일을 보내다가 안식일이 다가왔습니다.
자, 그런데요? 회당이 없는 곳에서 사도 바울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예배를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기도처라도 있는가 찾는데 몇몇의 여성도들이 기도처에 모여서 예배를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멀리 바다건너 빌립보! 로마가 다스리고 있고 헬라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이곳에 경건한 이방인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이 기적이 아닌가요?
도무지 이들이 뭐가 아쉬워서 당시 사람들 모두가 저급한 신이라고 생각했을 하나님을 믿었겠습니다.
더구나 그 몇몇의 여성도들이 자신들끼리 안식일을 지키겠다고 모여서 예배를 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래서 함께 말씀을 상고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해 보아도 청운의 꿈을 품고 마게도냐로 왔다면 그 꿈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들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자주장사 루디아
그런데 그 모임에 두아디라 출신의 루디아라는 여성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루디아가 어떤 사람인가를 좀 살펴보겠습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장사라고 불렸다는 것은 그의 출신이 두아디라 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남편을 여의고 혼자 염료 장사를 하는 여성입니다. 부자입니다. 사업가입니다.
빌립보의 큰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성격도 호방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루디아 댁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돈 많은 사람 전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 사람들은 아쉬운 것이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교회에도 그저 헌금이나 하고 적당히 대접이나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는 못하고 그저 사업을 하듯이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정황이라는 것이 유대교를 믿는 것이 그렇게 쉬운 상황도 아니었고 보편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더구나 회당도 없는 헬라문화의 본산인 마게도냐에서 안식일에 예배하러 기도처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예사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그가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그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그럽니다.
그리고 루디아는 그 길로 자신을 포함한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그 집은 한계가 분명한 말이 아니어서 가족까지 다 포함한 것인지 직원들만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원들을 세례 받게 하면서 자식들을 빼놓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어렵지 않은 추측을 통해서 그의 온 집이 다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가족들과 직원들은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던 듯이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을 모셔서 말씀을 듣게 하고 세례를 받게 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대단히 강단이 있는 여성입니다. 사실 가족들이라고 해서 쉽게 신앙적인 문제를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더구나 직원은 말 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례를 받게 했다는 것은 루디아가 미치는 영향이 그 만큼 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루디아가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대로 집을 교회로 드립니다.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들어와 유하라”고 합니다.
참 대단한 뱃심입니다. 왜요? 이 루디아 댁은 과부 아닙니까? 무슨 소문이 어떻게 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집을 공개한다는 것이 여러분 겪어 보시면 알지만 쉽습니까? 어렵습니다. 불편합니다.
더구나 말만한 남정네들 여럿이 묵어간다는 것은 대단한 불편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축복을 받습니까?
빌립보 교회의 모태가 여기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빌립보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여성에게서 바울과 같은 동질의 정서를 느낍니다. 한 번 회심하면 물, 불을 안 가리는 사람들..... 참으로 하나님 나라는 회의하는 자들에 의해서 확장되고 열려졌던 것 같지 않습니다. 미친 사람들, 복음에 미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지고 확장되었습니다.
뒷날 이 빌립보 교회와 루디아는 바울 선교의 훌륭한 후견인이 됩니다.
행16:4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그랬습니다. 이미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예배당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빌4:15절을 보십시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여기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대박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비두니아를 포기하게 하시고 마게도냐로 가게 하셨으니 놀라운 역사를 보여주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잘못되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트려 버리기에 충분합니다.
우선 빌립보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그저 수일동안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리고 나서는 불과 몇몇의 여성도들이 모여 있는 기도처에서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한 가정이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봅니다. 우리는 늘 엄청난 역사를 꿈꾸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한 사람을 통해서 빌립보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대박을 꿈꾸지만 하나님은 수일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우리는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서 커다란 대 집회를 꿈꾸지만 하나님은 기도처에서 몇몇의 여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루디아를 통해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고 뒷날 바울의 사역에 없어서는 안 될 후견인으로 세우십니다.
비두니아를 꿈꾸는 우리에게 마게도냐로 향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나 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시는 분입니다. 내 인생에 대해 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아는 세계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사도 바울 일행을 생각지 않은 곳으로 인도하셔서 그곳도 하나님의 복음이 필요하며 준비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두니아를 포기하고 마게도냐로 순종하는 것은 어렵지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엄청난 열매가 그를 기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루디아와 또 점하는 여종과 간수가 빌립보 교회의 개척 멤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만나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내가 세운 계획이 혹 빗나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있었던 일들입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환영해준 빌립보가 아닙니다. 한 사람 루디아를 만났고, 이제 귀신 들려 점하는 여종과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만납니다. 하나님이 마게도냐에서 만나기를 원하셨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세운 계획, 우리가 꾸는 꿈은 하나님께서 꾸시는 꿈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꺼운 마음으로 내가 세운 계획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얻은 결과가 비록 루디아와 점하는 여종과 간수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성생활을 잘 관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앞서간 많은 믿음의 선진들 가운데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 사람들은 전부 스스로 자신의 영성을 관리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 시간을 스스로 갖고, 성경을 신실하게 묵상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큰일을 한다는 것은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 정신에 충만한 사람이 큰일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사고가 될 경우가 더 많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이렇게 자신의 영성 생활을 잘 관리하기 위해 기도하러 가는데 사고가 터집니다.
성경은 그 길에서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만났다고 말씀합니다. 이 여종이 주인에게 가지는 의미는 단지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귀신들린 여자가 바울을 만나자 그들을 따라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원래 이 용어는 유대인들은 야훼에게, 그리고 헬라인들은 제우스에게 사용했던 최고의 존재를 나타내는 용어였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구원이라는 주제가 아주 인기 있는 주제였으므로 그 여종이 바울 일행을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교사들로 환호하면서 맞이한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악한 영이 하나님의 사자들을 인정하여 소리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공생애를 사실 때는 그런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귀신들린 여자의 이런 모습은 복음을 마술적인 것으로 바꾸어서 복음을 가릴 수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귀신이 영험하다는 반증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귀신은 누구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이켜서 구원을 얻지 않습니다. 오히려 괴로워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이 점하는 여종의 이런 행동은 사도 바울 일행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힘들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닙니다. 본문에는 여러 날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점하는 사람이 자신의 본업을 내팽게 치고 사도 바울 일행만 따라다녔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겠습니까? 이건 확실하게 복음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사도 바울 일행입니다.
그런데 점하는 여종이 더 떠들고 다닌다면 이것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능력이 없어서 괴로워한 것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본문의 괴로워했다는 말은 “노여움을 터트렸다”라든지, “울화를 터트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이 어지럽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련한 여종의 상태로 인해서 슬퍼했고 실로 분개했습니다.
그리고 이 달갑지 않은 상황에 어떻게 행동할까 고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는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로마령의 헬라철학의 본산지입니다.
아마 그래서 바울은 더욱 조심스러워 했는지도 모릅니다. 아직 빌립보의 분위기도 잘 모르고요.
어쨌든 당혹스러워 하던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후에 있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이것을 예상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점하는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 일행을 저자(market place)로 끌고 갔습니다.
사람들이 들끓는 시장 통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리고 상관들에게 데리고 가서는 자신들의 속생각과는 전혀 다른 미사여구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 귀신들린 여종이 그 날뿐만 아니라 여러 날을 연속하여 바울 일행의 신분과 할 일을 폭로하여 바울이 무척 당황했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심히 괴로워한 이유를 한글 번역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의 사역의 성격을 홍보해 준 것과 같아 고무적인 것이라도 볼 수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헬라아 원어상 그 말들은 판연히 다른 뜻이기 때문입니다.
즉, 여종이 말한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 아닌 헬라인들의 최고 신인 ‘제우스’ 신이고, ‘구원’도 예수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 아닌 다신론적종교에 근거된 구원의 개념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복음에 대한 정반대의 것으로, 귀신들린 여종이 떠들면 떠들수록 도리어 바울이 하고자 하는 사역을 훼방하게 되는 격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당황한 것으로, 단순히 분노한 것이 아니라 여종의 달갑지 않은 행위에 대한 거부반응입니다. 결국, 그 내용은 비 복음적이고, 그 선포는 악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사악한 세력의 방해 공작인 것입니다.
마케도냐인의 환상으로 선교방향을 바꾼 바울입니다. 하지만 막상 빌립보에 가 보니 하나님의 큰 역사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강가에 여인들의 기도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겨우 복음을 전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 후 길을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을 만난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입니다. 그때 바울은 어떤 액션을 취하지 않습니다. 일련의 사건들로 미루어 보아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에 맞추기 위함입니다. 만약 귀찮다고 피하거나 그리고 빌립보에 비전이 없다고 다른 곳으로 갔다면 빌립보에서의 그 엄청난 주님의 역사는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곧 그 일로 투옥되고, 감옥 문이 열려 쇠사슬이 풀이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죄수들이 도망가지 않은 역사는 더 더구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간수와 그 집안이 구원받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고난 받는 줄 뻔히 알면서도 피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빌립보로 바울 일행을 불렀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하나님이 맞는다면 하나님께서 그곳의 일을 책임져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고 나선 영광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고 나서 구원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는 그런 점을 체험하였기에 어려움이 찾아오자 피하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 있는 곳에 답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그림을 보여주십니다. 바울은 작은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릴 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붓을 듭니다. 일단 몸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뜻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할 줄 몰라 일단 작은 일부터 순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자 하나, 둘 성과가 보입니다. 그렇게 그는 몸으로 작은 그림을 그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큰 틀을 잡아 주시면 사람은 그렇게 그리면 됩니다. 혹시 잘 못 그렸어도 괜찮습니다. 수정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는 할례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시킵니다. 큰 본질인 복음을 위해서 작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융통성 있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그림은 틀입니다. 방향입니다. 섭리와 인도하심을 믿으며 사람들이 그리는 그림은 작은 그림입니다. 각자의 그림들을 말합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몸을 던져 작은 그림을 그렸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그림은 머리에서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계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평생 그의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입니다. 상상하고, 따지고, 더 좋은 것을 기다리다 보면 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 틈새에 무언가 끼게 마련입니다. 합리적인 생각, 이해타산, 자녀들, 재정 문제 등 등입니다. 때로는 땅 짚고 헤엄치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결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복음을 전하는 그에게 선교의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저 하늘나라의 큰 그림은 이 땅에서 그린 우리의 작은 그림으로 완성됩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며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주님의 얼굴을 그려 봅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는 그림은 작은 그림으로, 이제라도 작은 그림을 성실하게 그려나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현재의 에게해를 건너서 사모드라로 직행하여(11)
네압볼리에 가고(11)
빌립보에 이른다.(12)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였다.
유럽 땅의 첫 성에 발을 디딘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곳에서도 하나님은 역사 하신다.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을 만난다.(13)
역사적인 만남이 또 이루어진다.
루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한 여자를 만난다.(14)
여인의 이름까지 기록되어 있다. 루디아이다.(14)
빌립보에서 바울의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된 최초의 유럽인이다.
자색 옷감 장수 였으니 아마도 매우 부자인 것 같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마리 양과 같은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바울을 마게도냐로 빌립보로 이끌어 오시는 것 같다.
유럽의 첫 열매가 되는 루디아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15)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15)라고 강권한다.
안디옥에서 시작된 2차 선교 여행중이다.
마가의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고 서로 갈라섰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길리기아, 더베,루스드라, 마게도냐 빌립보에 와 있다.
빌리보에서 유럽 최초의 교인이자 여자 사업가인 루디아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바울의 일행이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한 여인을 만난다.(16)
1. 이 여인은 귀신들린 여인이다.(16)
2. 점으로 그 주인을 이하게 하는 자다.(16)
개인적으로 착취를 당하고 있는 여인 인것 같다.
이 여인이 바울과 일행을 좇아와서 소리를 지른다.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17)라고 한다.
바울이 행하는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
하루 이틀 소리 친것이 아니고 여러날 계속해서 이와 같이 소리친다.(18)
바울이 심히 괴로워 했다.(18) 그래서 귀신에게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에게서 나오라(18) 하니
귀신이 즉시 나아온다.(18)
성전 미문에서 베드로가 했던 말씀과 동일하고
루스드라에서 나면서 앉은 뱅이를 일으킨 말씀과도 능력에서 동일한 말씀이다.
귀신이 떠나가고 해방되면 참으로 좋아 해야 할 터인데
세상은 그렇지를 않다. 오히려 반대의 일을 당한다.
--------------
바울이 성령을 따라 마게도냐 빌립보에 가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을 찾다가 강가에 모인 여인들에게 전도했는데,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전도를 따르게 하셨습니다 루디아가 믿음으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그때 기도처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는데, 바울 일행을 따라오며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여러 날 소리 질러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다
바울이 괴로웠던 것은 우선은 귀신에 잡혀 종노릇하는 소녀가 불쌍했고,
또한 빌립보는 안식일에 기도할 회당도 없는 반유대적 지역이었는데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표현으로 바울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시끄럽게 공표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일로 처벌 받을 때에 헬라인이었던 디모데와 누가는 처벌을 피했지만,
유대인이었던 바울과 실라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행16:20)
그러나 바울은 자기에게 닥칠 고난이 충분히 예상되었지만 담대히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행16:18)
사실 귀신 내쫓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이었습니다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막6:13)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이 권능를 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마10:1)
또한 믿는 자의 표적 중 첫째였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막16:17)
그렇다면 지금은 어떨까요?
인본주의 과학적 사고라는 미명 아래 귀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합니다
그래서 귀신에 대해서 말하는 우리를 조롱하며 미개인 취급합니다
그럼 과학이 발전했으니 귀신이 숨었을까요?
오히려 때가 마지막이라 더 많은 귀신이 더 발악하고 있습니다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12:12)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검으로 더욱 무장해서 무식한 세상이 뭐라 조롱하건 귀신을 제어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2~17)
-------------------------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바울 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습니다.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습니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렀습니다. 이곳은 마게도냐 지방의 첫성이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환상을 보고 이곳에 왔습니다. 자신을 도우라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보고 왔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해달라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 것을 기대하고 왔습니다. 그는 적어도 환상 중에 본 한 사람은 나와서 영접해줄 것을 기대하고 왔습니다. 바울이 유럽 개척과 큰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왔지만 아무도 그를 (welcome!) 피켓을 들고 환영해 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환상 속의 손짓하던 사람도 없었습니다. 내가 혹시 환상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어떻게 거대한 유럽을 개척할 것인가 막막하였을 것입니다. 환상은 컸지만 현실은 광야와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수일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 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처할 곳도 없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회당도 없어서 기도할 곳도 없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어떻게 빌립보 개척 역사를 시작하였습니까?
(기도처를 찾아 복음을 전한 바울)
13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바울일행은 아무일도 할 수 없을 때 기도할 곳을 찾으러 강가로 나갔습니다.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많지 않아서 회당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회당이 없을 때는 주로 강가에서 기도하였습니다. 바울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고자 하였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 일행이 기도하러 간 그곳에 여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습니다. 자매님들이 모이면 대개 좀 시끄럽습니다. 세 사람만 모여도 접시가 엎어졌다 뒤집어졌다 하다가 깨진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로 인하여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할 수 없자 그는 모인 이들에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여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전에는 주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이제는 강가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당시 여자님들은 수에도 넣지 않을 만큼 무시받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자들을 존중히 여기고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러한 바울을 통해 우리는 개척 역사를 감당하는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바울은 기도로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에 갔을 때 회당이 없어 복음 전할 환경이 안 된다고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회당도 없고 강당도 없지만 기도로서 환경을 극복하고자 했고 강가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여자들에게 복음역사를 감당했습니다.
보통 환상을 본 후 큰 환상 때문에 구체적으로 역사를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환상을 현실화하지 않으면 환상은 망상으로 끝나고 맙니다. 우리가 이런 현실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기도하고 한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구체적으로 학과공부를 하고 어학을 정복하기 위해 한 단어 한 단어를 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바울을 어떻게 축복하셨습니까?
(루디아의 마음을 여신 하나님)
14절을 보십시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여러 자매들 가운데 한 자매가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강가에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하는 한 여자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는 물질적으로 넉넉한 사람입니다. 국제감각이 있었습니다. 루디아가 마게도냐에서 오라고 부른 그 사람처럼 보입니다. 바울의 구체적인 순종을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셨습니다.
마음을 여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은 빌립보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이요. 나가서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세계선교의 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결국 바울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한 사람은 바로 루디아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기도하러 가는 것을 통하여 루디아에게 인도하셨습니다.
파불로스타 오선교사가 성경선생을 보내달라는 백일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은 안요셉 선교사님을 유엔에서 스페인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파불로스타오 선교사님의 마음의 문을 여시가 스페인 개척을 이루셨습니다.
(루디아 집의 가정교회)
15절을 보십시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루디아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는 만약 나를 주를 믿는 자로 알거든 나의 집에 유하라고 강권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의 문이 열리자 집의 문도 열어주었습니다. 루디아는 바울 일행에게 숙식을 제공하고자 하였습니다. 자신의 집을 교회로 내놓았습니다. 루디아는 사랑이 넘쳤습니다. 물질로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사생활을 희생하면서 가정을 교회로 제공하였습니다. 바울은 루디아의 집을 가정교회로 삼아서 빌립보에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루디아 한 사람을 복음의 동역자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중에 보면 그 가정에 예수 믿은 형제들도 모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적인 여종 루디아 한 사람의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거대한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습니다. 그의 가정은 house church가 되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기도하러 가다가 고통하는 여종의 귀신을 쫓아내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곳에서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찬송하자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간수와 죄수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고난 중에 찬송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시 기도하러가는 바울)
16a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바울은 루디아 한 사람을 얻은 후에 다시 할 일이 없었습니다. 빌립보에는 회당이 없었습니다. 그는 회당을 중심으로 역사를 섬긴다는 고정관념을 깨기 어려웠습니다. 바울은 이때도 다시 기도처로 기도하러 가고 있습니다. 빌립보에 와서 처음에도 기도처를 찾았고 지금도 기도하러갑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기 전에 항상 기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처음 한 것은 기도처가 있는가 알아보고 기도하러 간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기도하러 갈 때 루디아를 만나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또다시 기도하러 갈 때 귀신들린 자를 만나서 귀신을 쫓아낼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도 기도할 때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복음 역사를 방해하는 귀신)
16b,17절을 보십시오.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은 기도하러 가다가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쪽집개 점을 쳐서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볼 때 점쟁이는 귀신이 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은 그 여종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린 여종은 심히 괴로웠습니다. 그는 바울을 따라다니며 바울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맞는 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종이요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입니다 귀신도 맞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바로 더러운 귀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따라다니며 매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귀신은 바른 말을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주의 종을 괴롭힙니다.
그들은 그곳에 복음 전파의 사역을 안정적으로 행하던 때, 귀신들린 한 여종이 그 사역 한가운데에서 소리 지르며 평소 그녀를 통해 점을 치며 돈을 벌도록 했던 이들 앞에서의 행동과 다른게 엉뚱한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바울은 그 귀신 쫓는 일을 했을 때 일어날 후폭풍을 알았기에 매우 괴로워하면서도 결국 그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어쫓아 그녀에게 하나님의 자유가 임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고 그분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줄 믿었으므로 그 어떤 일에도 더 이상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모든 악한 길에서 돌이키고 맡겨주신 일을 넉넉히 감당하며 전진하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마태복음 6:7-8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저희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저희가 두려움에서 떨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이길 수 있음을
바울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마음을 땅끝까지 전하는 주님의 제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선하신 뜻을 땀 흘려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모든 필요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 고통받고 있는
주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의 다시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하고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주어진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는
주님의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