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시 두 편은 문학의 전당에서 나온 석여공의 시집 <잘 되었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비 오고 눈 오고 안개 낀 지리산 백무동 계곡에 사는 신선들은 외입 가고 없었다. 동안거에서 풀려난 고담사 주인은
함양 가시고 당신 없이도 오는 손님 따뜻하시라고 차 방 아랫목에 불 지펴둔 안국사 주인은 부산 가시고 눈 쌓여 아이
들 슬러시 같이 녹은 대웅전 마당 아래 차를 세우고 차방에 들어 뽕차를 먹었다.
차 맛이 안개 맛이다. 차방의 찻상을 마주하고 우리는 무릎걸음으로 찻상머리 비집고 앉은 지리산을 보았다. 안개
가 지리산을 낳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그만 죽고 싶었다.
내 안에서 열반하는 / 석여공
내가 차를 먹는 것은 무슨 커다란 바위를 불러 앉혀놓고 익지도 않는 법문을 하기 위함이 아니다. 다관 뚜껑을 열고 그
안의 찻잎들끼리 숨죽이고 나누는 옛적 녹록한 꿈에 대한 뒤척임을 듣는다거나 몸 풀어 제 몸 속의 섬유질 질기게 잣는
마음들 나누어 나도 따라 칭칭 누에고치처럼 그 마음 안에 고요하기 위함이다.
누가 만들었네, 누가 주었네 하는 차에 묻은 인연의 마른 검불도 털어내고 오로지 물때꼭지에서 뜨겁게 내뿜는 맑은 방
사가 즐겁기도 하거니와 목젖을 타 넘어가는 은밀한 그것이 찔끔, 눈물 나게도 고마운 일이라 다만 입 다물고 온몸으로
차향을 회향하는 코 끝 가파른 절벽에 꽃 피듯 좌정하고 나앉아, 깊이 그 산에 가라앉아 있고 싶기 때문이다.
잘 만난 인연이라도 바람결에 거슬어진 쑥대머리 되기 십상인데 잘 못 만난 인연이야 얼마나 맵고 쓰라리랴. 눈물겨우
랴. 잘 만났으니 잘 이별하자 하였어도 어디 이별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 눈물이던가. 잘 살아야 잘 죽는 것이라, 그렇게
잘 살다 잘 죽어야 하는 것이 전생의 틈바구니에서 다 갚지 못하고 짚신짝처럼 끌고 온 것이라면 한 세상 꽃 같이 구름 같
이 잘 사는 일 밖에 더 없는 것이 행복 아닌가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차를 먹는 것은 잘 살다 잘 죽기 위하여 내 몸에 공양한 여러 것에서 나는 삿된 향기 모두 다비시키고, 꾸
역꾸역 날개처럼 돋아나는 속절없음도 열반시키고 갈대의 빈 속이라거나 풀피리의 젖은 속이라거나 보고 싶은 것들끼리
서로 마주 보기 위하여 들여다보는, 멀기도 하 멀고 깊으디 깊은 마음 안의 구멍들, 궁극의 구멍들, 환하여 그것들 환하여
더 어둡지 않게 열어주기 위함이다. 아주 즐겁게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차가 내 안에서 열반한다 말 할 수 있겠다.
첫댓글 내가 차를 먹는 것은......... 감사함 올립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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