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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시작 1,1-5.8ㄴ-10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4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5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 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태 23,17-18)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깜박 놓쳐버리곤 합니다.
물론 더러는 방법상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한 발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 발을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체(몸)이고, 무엇이 용(활용)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자칫 그렇지 못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위선자요 눈 먼 인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
(마태 6,33)
그것은 '누가 옳으냐? 누가 잘하느냐?' 하고, 서로를 따지고 계산하고 심판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인격적인 관계에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일이나 능력 중심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이나 사랑 중심으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본질로의 삶, 곧 “실상 필요한 한 가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게 합니다.
곧 금인가?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인가?
예물인가?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인가?
하느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인가?
일을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1코린 2,2)라고 할 수 있는 본질을 위한 투신의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오도자는 아닌지>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어제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셨습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문을 여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불행하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문을 잠가 자기들도 다른 이들도 못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겁니까?
베드로는 어떻게 하길래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그들은 어떻게 하길래 하늘나라 문을 잠가버리는 겁니까?
그런데 어제도 봤듯이 하늘나라 문을 여닫는 것은 근본적으로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하늘나라 문을 잠가버린다는 말입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이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을 길이라고도 하시고, 목자라고도 하시고,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도 하시지요.
그런데 길이요 목자요 문이라고 하심이 다 하늘나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시고, 하늘나라로 이끄시는 목자시며,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문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성인들은 양들을 주님이라는 간선도로로 이끄는 지선이고, 그래서 양들을 하늘나라로 이끌고 하늘나라의 문을 통과하게 하는 데 비해, 그들은 주님을 목자가 아니라 베엘제불이라고 함으로써 주님을 따라가지도 못하게 하고 주님을 하늘나라의 문이 아니라 지옥문이 되게 하는 거겠지요.
또 다른 관점, 곧 사랑과 율법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늘나라는 사랑이신 하느님의 나라이고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가는 나라인데, 율법 중에서 첫째가고 둘째가는 계명인 사랑보다 다른 계명이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으로써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하늘나라의 길을 오도하는 것입니다.
오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잘못된 길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길을 가본 사람은 잘 알 것입니다.
갈림길에서 이쪽으로 가야 하는데 다른 길로 인도하면 오도하는 것입니다.
천국의 길, 사랑의 길이 아닌 율법의 길, 미움의 길을 가게 하면 그것이 오도 중에서도 최고의 오도이며, 자신도 불행해지고 다른 사람도 불행해지게 만드는 길이겠지요.
아무튼, 오늘 우리는, 아니 저는, 내가 오도자가 아닌지 돌아봐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눈먼 인도자>
한때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띠를 두르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확성기를 틀어놓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을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갑니다. 예수를 믿으십시오!"
열성을 가지고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올바로 믿어서 꼭 구원을 얻기를 희망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
(이사 29,13-14)
우리가 이런 책망을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마태 23,16)라고 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덜 중요한 것을 더 중요한 것보다 더 중시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내신 주님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해야 하고, 그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마태 5,33-37) 해야 합니다.
주님께 대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보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나쁘기로 말하면 좋은 것보다 훨씬 더 나쁘기도 합니다.
열심이 지나쳐서 고약한 광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느님을 등에 업고 자기를 내세우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 짐만 지우게 됩니다.
그릇된 신심에 빠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걱정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빗대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마태 23,4) ‘그들의 말은 귀담아 듣고 다 실행하고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내세워야 하지만 죄와 벌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지옥의 공포로 몰아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위선자로 지목되어 야단을 맞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사람에게 희망을 주어야지 절망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본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것은 좋으나, 진심 어린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그 화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기에 앞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눈떠야 하겠습니다.
온갖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자비는 영원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눈먼 인도자: 규칙만을 강조하는 자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법 체계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법인지, 무엇이 덜 중요한 법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어 사람들이 작은 계명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며 정작 더 중요한 사랑과 정의, 자비와 의로움 같은 법은 잊게 만듭니다.
그들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충실하지도 못하며,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며,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전의 황금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성전에 거하시는 하느님이신데도 말입니다.
또 제단 위의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하지만,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보다 황금을 더 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이러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보다 황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성당을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은 조립식으로 지어도 20~30년은 거뜬합니다.
사실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건물이 아닌 사람들 안에 사십니다.
제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자리가 거룩해져서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보다 더 큰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해 성사를 한다고 할 때 우리가 보속을 하지 않으면 마치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가 씻기는 것은 우리가 하는 보속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값 때문입니다.
소 신부와 호랑이 신랑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신부는 호랑이 신랑에게 샐러드만을 주었습니다.
샐러드는 몸에 좋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신랑은 샐러드만 먹으며 점점 인내력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고기를 물어옵니다.
하지만 소 신부는 자꾸 고기만 물어오는 호랑이 신랑이 밉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서로 상대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법에 매몰되어 정작 상대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을 알아주면 모든 법은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법만을 강조하면 마음을 잃습니다.
영화 ‘위플래시’(2014)에서 플레처는 자신의 음악적 위대함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가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믿는 매우 존경 받고 동시에 두려운 음악 강사입니다.
앤드류는 음악, 특히 재즈에 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 드러머입니다.
그는 최고가 되고자 열망하며 플래처 밑에서 학생이 됩니다.
플래처의 극도의 규율과 완벽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앤드류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복과 개인적인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듭니다.
플래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앤드류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고로 몸이 아픈데도 연주에 참여합니다.
결국 앤드류도 학교에서 퇴학 당합니다.
플래처는 법과 같습니다.
그 법을 지키면 분명 위대한 드러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드러머가 되려는 이유는 행복 때문입니다.
플래처는 그 사랑과 행복을 포기하게 하면서 길을 잃게 만드는 못된 선생입니다.
언제나 목적을 위해 법 만을 강요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사들은 율법의 디테일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운다고 합시다.
운전을 잘하기 위해 차의 조작법과 스킬을 열심히 배웁니다.
그래서 운전을 잘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잘해서 사고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운전의 정신은 안전입니다.
세세한 규정이나 규칙에 집중하다 보면 그 정신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가게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때 그 사람들이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돈을 주면 술을 사 마시기 때문에 돈을 갚으라고 하며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한 것인지 걱정을 합니다.
이런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모든 법은 그 만든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통해 당사자의 마음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잘못된 인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치중하게 하여 그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게 되어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율법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하느님은 지금 나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를 자주 자신 안에 계신 성체께 여쭈어야 합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때로 말씀은 나를 위로하고 일으킵니다. 나를 살게 하고 웃게 합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회심자(回心者)의 대표 인물인 성 아우스티노 주교 학자(354~430) 기념일입니다.
그의 인생 여정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습니다.
갖은 우여곡절과 반전을 거듭했습니다.
그의 전기를 읽다 보면 마치 한 편의 흥미진진한 대하 드라마를 보는 느낌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생애는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인지, 그분께서 얼마나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분인지, 그에 비해 한 인간 존재는 얼마나 나약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반면에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생애는 그토록 나약한 대죄인도 하느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에서 성덕으로, 어둠에서 광명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 좋은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년 아우구스티노의 지혜와 재능은 출중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탁월한 달란트는 오랜 세월 동안 올바르게 활용되지 못했습니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꿈꾸며 살다 보니 오로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 대학과 로마, 밀라노에서 수사학과 역사학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쳤지만, 안타깝게도 마니교 이단에 푹 빠져 하느님을 등지고 짙은 어둠 속에 젊은 시절을 낭비했습니다.
아우구스티노에게 회심의 은총을 불러일으키는데 계기가 된 한 은혜로운 만남이 있었으니, 당시 밀라노 교구 암브로시오 주교님이었습니다.
조금씩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가면서 자신의 비참함과 한심함을 자각하게 된 그는 어느 날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들이냐?
배우지 못한 사람들도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저리 노력하고 있는데, 나름 배웠다는 우리가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
마침내 방황을 거듭하던 아우구스티노에게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찾아온 것입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다가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입니다.
“들고서 읽어 보라! 들고서 읽어 보라!”
방으로 들어온 아우구스티노는 탁자 위에 놓여있는 성경을 들어 펼쳐보았는데, 그의 눈에는 로마서 13장 13~14절의 말씀이 확 들어왔고, 그 구절은 마치 벼락처럼 그의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
때로 성경 말씀 한마디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 성경 말씀 한 구절은 성경 바깥으로 걸어 나옵니다.
나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옵니다.
내 안으로 들어와 내 심연의 장소에 머뭅니다.
나를 꾸짖고 내 삶을 휘젓습니다.
나를 위로하고 일으킵니다.
나를 살게 하고 웃게 합니다.
그 말씀 한마디로 아우구스티노의 삶을 180도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지난 삶을 처절하게 가슴치고 뉘우칩니다.
보속하는 마음으로 남아있는 삶을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의 부끄러운 죄와 과거를 아무런 가감 없이 적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향해 베푸신 하느님의 큰 자비도 덧붙여 그 유명한 고백록을 저술합니다.
고백록으로 인해 삶을 바꾼 사람들의 숫자는 하늘의 별들보다 더 많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불행하여라, 위선자들아!>
오늘 복음 말씀에서 “불행하여라.”는 “불행하게 될 것이다.”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또는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불행’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또는 구원받지 못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확정된 일을 예언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 회개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위선을 버리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몰라서’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얻지 못해서’ 못 들어갑니다.
‘위선’은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도 속이려고 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자신도 속인다는 점입니다.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누가 비판하면 자기는 위선자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진실하게 잘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위선자들은 옳고 그름을 판단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탐욕대로 옳고 그름을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위선이 위험한 것이고,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스스로 나팔을 부는 자들입니다(마태 6,2).
위선자들은 진심으로 기도하지는 않고,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기도하는 척 하는 자들입니다(마태 6,5).
위선자들은 단식과 같은 신심 행위들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자들입니다(마태 6,16).
위선자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자들입니다(마태 23,3).
위선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자들입니다(마태 23,12).
위선자들은 겉은 깨끗하게 보이는데 속은 전혀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마태 23,25-28).
하느님 나라는 진짜로 좋은 나라이고, 지옥은 겉으로만 좋은 나라일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사는 동안에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 대가로 겉으로만 좋은 나라로, 즉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위선자들은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게 되면, 그곳을 하느님 나라로 착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위선자들은 자격을 얻지 못해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지만, 사실 그것은 그 자신들이 ‘안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고, 또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의 문과 길을 거부하면서 그쪽으로 안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엄하게 꾸짖으셨는데, 그들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예수님의 경고는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넓게 생각하면 모든 신앙인들이 해당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빛과 소금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자기들만의 잘못된 생각을 진리인 것처럼 내세우면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아닌,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이끌고 가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잘못된 길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은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하느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자기 혼자서 죄 짓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마저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으로 만드는 것은 ‘남을 죄짓게 하는 죄’, 즉 대단히 큰 죄가 됩니다(마태 18,6-7).
위선자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몰라서 따라가는 것이니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할 이들이 있겠지만, ‘모른다는 것’(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자체도 죄가 됩니다.
만일에 주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상황이라면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경로로 주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이 전해져서, 주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을 들었고, 알고 있는 상황이라면, 위선자들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칭찬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들의 선교활동은 주님을 위한 일도 아니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일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일도 아니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위선자들이 자신들의 선교활동으로 개종하게 된 사람들을, 자신들보다 더 나쁜(더 지독한) 위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배움의 여정 - "우리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다">
공부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참으로 참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공부는, 배움은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결코 절망하지 말고 힘차게 하루하루 주님의 평생 학인이 되어 공부해야 삽니다.
배워야 삽니다.
너나할 것 없이 삶의 배움터에서 초보자의 정신으로, 경청과 겸손, 용기와 실행의 정신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어야 졸업인, 살아 있는 한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은 시국에, 나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동요 부르기보다는 침묵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강이 되어 시냇물 소리 들으며 시냇가를 걷습니다.
“꼭 하늘 비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깨어 끊임없이, 한결같이
찬미 노래 부르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고 싶다
찬미는 저렇게 하는 거다."
참으로 좌절이나 실망이나 절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진정한 소망일 것입니다.
참으로 배우는 겸손의 자세로 마음을 열면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매일 강론 쓰는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밤시간은 저에게는 참 좋은 배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주일 바티칸에서 삼종기도후 복음을 바탕한 교황님의 강론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행로에서 혼자가 아니다.
살아서 우리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는 현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시니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위 요지와 같은 강론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8.31-9.4일까지 몽골 사목 방문에 즈음하여 “나는 모두에게 한 형제로서 몽골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더불어 희망하기(Hoping Together)”란 여정의 모토도 멋졌습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교회공동체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1독서 테살로니카 교회는 예수님 사후 20년후 바오로의 열심한 선교로 시작한 50년대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이보다 훨씬 뒤인 80년대에 세워진 유대 개종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의 마태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저주라기보다는 예수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위선적 행태에 대한 주님의 탄식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좋은 행복선언이 아니라 불행선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으로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당대는 물론 작금의 교회지도자들, 신자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분별력의 지혜를 상실한,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앞서 테살로니카 초대 교회의 모습은 참 순수하고 아름답고 이상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의 증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신망애와 인내의 참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대목도 우리에겐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바로 우리는 바오로와 그 일행이 테살로니카 교회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는 신도들의 환대와 또 이들이 부활하시어 곧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한 갈망에 감동된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인지요!
마태복음의 교회 공동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위선자들 같은 지도자도 꽤 많았던 마태복음의 교회같습니다.
오늘은 어제 성녀 모니카에 이어 그 아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배울것이 무궁무진합니다.
참 길다 싶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나눕니다.
성인은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합니다.
약 1600년 전 분으로 향년 75세로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일컫는 교회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인 성인은 플라톤, 칸트와 더불어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로 진리의 연인이라 불립니다.
현재까지 성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철학자나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성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타는 사랑'이었습니다.
쾌락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야말로 불꽃처럼 사랑한 성인으로 그의 생애는 '진리를 향한 구원(久遠)의 불꽃'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도 성인을 자신의 첫 스승으로 인정했습니다.
토마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은 위대하고 온전한 교과서나 어딘가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회심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이래서 성인의 작품은 극적이고 아름답고 살아있습니다.
성인의 획기적 전환점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와의 만남이요 이어진 회심입니다.
“집어서 읽어라(Tolle,lege)!”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펴 읽은 로마서 23장 13-14절 말씀에 회심한 성인은 나이 32세,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세례를 받습니다.
그 이후 시편 7장을 읊으며 선종까지 참 가열찬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고 성인의 업적은 불가사의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애의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온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임이라 부르고 “임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임안에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다.”고백하면서 고백록을 시작합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로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그 진리를 만나자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고백했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헌신의 여정을 살았습니다.
성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되는 고백도 감동 자체입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옥에 티도 있듯이 프랑스 신학계의 거두, 하느님의 종 한스 우리스 폰 발타사르의 성인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아우구스티노의 결함이라면 구원역사의 형평성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담에 집중함으로 은총신학이 원죄신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성인의 심판개념이란 오롯이 원죄로 정향되어 있어서 장차 오실 구원자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부께서 모든 심판 권한을 넘겨주신 바로 그 구원자 말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지옥에 대해서 단언한 그 모든 지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신국론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구원받을 이의 수보다 멸망할 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 말은 무책임한 하나의 신학적 타락이다.”
이런 부정적이 면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위대함은 영원합니다.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각주라 한다면 가톨릭 신학은 아우구스티노의 각주라 하기도 합니다.
성인의 주옥같은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바로 이에 근거히여 제가 늘 강조해온 '좋은 선택-훈련-습관'이란 영적도식의 진리입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마라.”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기쁨이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온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여기서 연상되는 제가 참 좋아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의 정도도 그러하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겸손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듣고 배워야 할 삶의 스승들을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끊임없이 한결같이 듣고 배워 용기있게 실행하는 데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은혜를 청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독서는 테살로니카 전서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서간은 신약의 27권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여행을 하였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최초의 편지가 테살로니카 전서입니다.
저는 지난번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테살로니카를 방문하였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한 큰 도시였습니다.
2000년 전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3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방인들의 박해입니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혈연관계, 사회적 관계를 끊어 버리고 자기들만의 배타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자 주위 이방인들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로 보아 박해하였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모내어 박해 중에 동요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굳건히 살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신문사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독자의 수는 줄고, 인쇄비용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은 ‘전자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합니다.
두 번째는 ‘재림 지연’ 문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심판관으로서 재림할 것임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을 보기도 전에 주변의 동료 교우들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질문은 ‘죽어버린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어 버린 형제들이 언제가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보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또 살아 있는 자기들도 ‘주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지금의 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쯤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재림 시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재림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기에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너희는 깨어 기다려라.”
많은 이단들이 주님의 재림을 특정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특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방탕한 생활’ 문제입니다.
종말이 꼭 올 것이라고 믿었던 종말론 열광론자들은 현실의 책임과 윤리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임박한 재림 안에서 테살로니카 교우들 중 일부는 일상적 삶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종말이 곧 올 것이기에 일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면서 남의 도움에 의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손으로 일해 충당하며, 조용히 살고, 자기 자신의 일에나 신경 쓰도록 권고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은 음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군대 있을 때입니다.
제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을 마침표로 만들면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도 교구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신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사목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오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이 땅의 사제들과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병으로, 경제적으로, 가정 문제로, 직장의 일로, 사람과의 관계 등등의 이유로….
힘든 이유는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이 이유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한두 가지로 힘든 것은 오히려 다행이 아니겠냐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아무 문제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다가오면 갖게 되는 감정이 억울함이라고 합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까요?”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짓습니다.
이 억울함과 함께 다가오는 감정이 바로 후회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저 사람을 내가 왜 만났을까?”, “돈이 뭐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등의 후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자기 삶의 불행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상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온전히 자기 것을 바라보면서 문제를 뒤섞지 말아야 합니다.
“너 때문이야.”라면서 괜한 분노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온전히 바라봐야 문제의 해결점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은 행복해 보인다는데 정말로 그 ‘남’이 행복한 것일까요?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뒹굴며 사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까?
그 방에서는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니 걱정도 없고 어려움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을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열심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음보다 더 주님께 간절하게 원해야 할 것은 열심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위선자들이고, 눈먼 인도자이며, 어리석고 눈먼 자라면서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도 열심히 지켰고, 단식과 자선과 기도도 전혀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열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심’은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면서 그 길에 많은 이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에 열심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위선자이고, 어리석고 눈먼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열심’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열심’을 말입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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