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1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창세 15,1-12.17-18
복 음 : 마태 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느 형제님의 고민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의 상황이 좋지 않아서
인원 감축을 해야 하는데 누구를 정리해야 할지가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두 명 중 한 명을 정리할 생각인데, 한 명은 일을 잘하기는 하지만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아서 불편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일은 그렇게 잘하지 못하지만
사장인 자신에게 잘 맞추면서 일을 하기에 편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와 함께하겠습니까? 가게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전자의 일 잘하는 사람이 좋겠지만, 사장인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라면
후자의 사장에게 잘하는 사람이 좋을 것입니다.
즉,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느냐에 따라 선택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사장에게 잘 맞추면서도 일을 잘한다면 어떨까요? 평생 같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듯 좋은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다른 이로부터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 자신의 자리에서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고,
이것이 곧 나를 위한 활동이 됩니다. 나의 행복을 가져오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을 살기를 원하실까요?
건강한 삶일까요? 건강하지 못한 삶일까요? 기쁘게 사는 삶일까요? 힘들게 사는 삶일까요?
우리에게 늘 사랑을 주시는 분이기에 이분께서 우리의 어떤 모습을 원하시는지는 분명합니다.
건강한 삶이고 기쁘게 사는 삶입니다. 이 긍정적인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당한 물과 햇빛, 그리고 가지치기를 비롯한 관리를 제대로 할 때 좋은 열매도 맺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몸을 관리하는 데에도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 몸을 통해 좋은 열매가 생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쁜 열매만을 맺는 그 나무를 계속해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모두 잘라 불에 던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좋은 열매를 맺는 삶만이 바로 구원의 길,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으며 또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함께하길 원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발전이 곧 하느님을 위한 진정한 봉헌이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어제 <복음>인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과 넓은 문‘’ ‘비좁은 길과 널찍한 길’을 대조시키면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
이스라엘 공동체의 분란을 일으키는 이들 중에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신명기>에서는 거짓 예언자들이 초래할 위험에 대해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예언자나 환몽가가 나타나 너희에게 표징이나 기적을 예고하고
그가 말하는 표징이나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너희는 그 예언자나 환몽가의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주 너희 하느님을 따르고 그분을 경외해야한다.”(신명 13,2-6)
사실, 예언자들은 하느님 백성들이 세상의 유혹에 빠져 하느님을 배반했을 때,
그들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느님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회개하여 하느님 앞에 바로 서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예보나 윤리 생활에 대한 교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렸고,
진리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을 선포하였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예언자인지 거짓 예언자를 ‘양’과 ‘이리’의 표상으로 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니
겉의 옷차림을 보지 말고, 속마음을 보라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기준을
‘행실로 맺는 열매’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5)
사실,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를 가리는 ‘양과 이리’, ‘나쁜 열매와 좋은 열매’의 표상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드러내줍니다.
당신이 ‘참된 목자’로서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고,
또한 ‘구원의 열매’라는 좋은 열매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사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을 새로운 모세로서 “참 예언자”로 제시하고 있는 맥락에서 보면,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마태 7,15)라는 말씀은
곧 “참 예언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라는 반어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저희의 삶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나는 참 예언자인지, 나는 좋은 열매를 맺고 있는지,
혹 우리의 삶이 열매를 맺기보다 풍성한 잎이나 아름다운 꽃으로 치장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헛열매를 맺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저는 거짓 예언자이고 싶지는 않지만, 거짓 예언자처럼 겉모양을 꾸미고 있을 때도 많습니다.
저는 참된 예언자는 아니지만, 참된 예언자 행세는 곧잘 합니다.
제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며,
그래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의탁하여 살아갑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자신의 화려함을 버릴 때 열매는 맺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마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맺는 열매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매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자신이 따 먹으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실은 바로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데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 삶이 당신 진리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때깔만 그럴싸한 열매가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으로 속이 꽉 찬, 좋은 열매 되게 하소서!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마태 7,17)
주님!
잘려 불태워지기 전에, 가지를 자를 줄을 알게 하소서!
위선의 껍데기 옷을 벗고, 기만의 숨겨둔 살을 도려내게 하소서!
치장하여 꽃을 피우기보다, 행실로 열매 맺게 하소서!
그럴싸하게 때깔을 꾸미기보다,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당신께 붙어 양분을 얻고,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브라함에서 우리에게까지 이어진
거대하고 풍성한 "좋은 나무"를 관상하게 해 줍니다.
제1독서는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시는 대목입니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5-6)
아브람을 칼데아 우르에서 이끌어내신 주님께서
늙은 나이에도 아직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무수한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지요.
실제로 주님의 아들 약속에 아브람이 웃었고(창세 17,17 참조),
18장에서는 사라가 웃었다고(창세 18,12) 성경 저자는 가감 없이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주님을 믿었습니다.
당신 백성에게 땅을 베풀어 주시고 그 땅을 돌볼 무수한 후손까지 마련해 주시려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었던 것이지요.
아브람의 믿음이 그 자신을 의롭게 합니다.
어떤 행위나 지향 이전에 믿음으로 의로움을 획득한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이로써 주님께서 이 세상에 믿음을 뿌리로 한 튼실하고 풍성한, 좋은 나무를 심으십니다.
아브람에서 시작된 이 나무는 처음에는 혈연과 민족을 통해
무성히 가지를 내고 잎을 드리우며 열매를 맺다가,
"때가 차자"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접목된(로마 11,17-24 참조) 거대한 나무로 성장할 것입니다.
복음은 나무와 열매 이야기입니다.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마태 7,17)
예수님께서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를 구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거짓 예언자들이 민중을 현혹하고 착취하는 일이 횡행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 하느님의 믿음의 자녀라면 같은 나무의 가지인 형제와 이웃을 위험에 빠트릴 리 없으니,
열매를 잘 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20)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비롯된 나무는 좋은 나무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좋은 나무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지요.
충실히 믿음을 견지하며 하느님을 섬김으로써 의롭게 되어
좋은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면 좋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복음 환호송)
좋은 열매를 맺는 또 다른 조건은 주님께 "머무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른 담화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라고 하시며
포도나무와 가지의 표상으로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설정해 주셨지요.
우리는 좋은 나무인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그분에게서 양분과 수분과 사랑의 DNA를 공급받아
우리 존재의 자취와 행위를 통해 열매를 맺는 가지들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저를 포함해 우리 모두 "믿음"과 "머무름"으로 좋은 나무이신 주님께 꼭 붙어 있기를 바랍니다.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거룩하고 선한 양분이 우리를 거쳐 좋은 열매로 맺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열매가 이 세상을 조금 더 밝게, 조금 더 선하게, 조금 더 진실되게,
조금 더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그 좋은 열매가,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이고 그리스도의 형제임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소박하고 사려깊은 걸음걸음마다 좋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 주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들과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사제복장을 하고 갔습니다.
예전에는 일반복장도 하였지만, 지금은 사제복장이 자연스럽고 편합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입니다. 옆 좌석에 있던 형제님이 제게로 와서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저는 기꺼이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물을 주고 갔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함께 식사하였던 형제님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도 사제복장을 하면 예물을 받을 수 있겠네요?”
저도 웃으면서 형제님에게 말하였습니다.
“사제복장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제복장 뒤에는 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답니다.”
사제복장 때문에 모임에서는 좋은 자리를 앉곤 했습니다.
사제복장 때문에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기도 했습니다.
사제복장 때문에 비싼 차를 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제복장의 진정한 의미는 어두운 밤을 밝히는 등대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새벽이 오기까지 망루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는 독서에서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두 가지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땅’입니다.
모세오경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땅을 얻기까지 이집트에서 힘든 노동을 했습니다. 광야에서 40년간 보내야 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받았던 ‘십계명’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자손의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축복하리니, 너의 후손은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은 100세에 아들 이사악을 얻었습니다.
모세오경은 하느님이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 12지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예언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고난의 순간에는 하느님의 위로를 전하였습니다.
교만의 순간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도록 충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가지의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느님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나라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나라는 밀과 가라지가 같이 자란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나라에 가기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 섬기는 사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하느님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주신 복음을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마귀를 쫓아내었고, 병자를 고쳐주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하느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인들은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우리들에게 ‘나무와 열매’를 말씀하십니다.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고 하십니다.
좋았던 나무도 거름을 주지 않고, 관리를 소홀히 하면 나쁜 열매를 맺게 됩니다.
나빴던 나무도 정성을 다하고, 거름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면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밀과 가라지’는 밀은 계속 밀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는 늘 가라지가 아닙니다.
밀처럼 자란 사람이 가라지와 같이 변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이 자란 사람이 밀처럼 변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거짓 예언자: 양의 옷차림을 한 게걸든 이리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든 이리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란 어떤 말씀을 전하여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넓게는 우리가 모두 예언자들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과 행동으로 타인에게 분명히 영향을 주고 살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명한 야구선수가 은퇴한 후 강연을 다닐 때 교도소에서도 강연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연 중 야구를 하다 남의 집 유리창을 깼을 때
힘이 좋아 훌륭한 메이저리거가 될 거라고 칭찬 받은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 수감자가
“저희 아버지도 언젠가는 제가 감옥에 갈 것이라고 하셨죠.”라고 말했습니다.
피카소는 어머니에 대해
“저희 어머니는 ‘네가 성직자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고,
군인이 되면 장군이 될 것이며, 정치인이 되면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죠.
그런데 저는 화가가 되었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각자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언해 준 말을 믿고 그 예언을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좋은 예언자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주위에 강력한 좋은 예언자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들을 어느 정도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그런 거짓 예언자들을 감당할 힘이 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이상한 예언을 하는 이들을 빨리 떠나야 합니다.
아니면 그 이리들에게 잡아먹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람을 굳이 선별해서 만나야 할 때 선별기준이 될 것입니다.
2015년 6월 14일 사람들의 관심 속에 애정과 후원을 받아 오던
한 모녀의 페이스북 계정에 이상한 게시물이 포스팅됩니다.
“그녀는 죽었다.”
딸이 엄마를 살해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지난 2005년 8월 미국 남동부에 초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상륙했습니다.
가장 큰 손해를 입은 지역은 뉴올리언스였습니다.
폭우로 제방이 붕괴하면서 도시 대부분이 물에 잠겨 1,800여 명이 목숨을 잃은 정말 대참사였습니다.
이 모녀도 피해 이재민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뉴올리언스 정부 임대 주택에서 살고 있었는데
허리케인으로 집이 파괴되면서 갈 곳을 잃게 된 것입니다.
엄마 디디 블렌챠드는 24살의 나이에 남편을 만나서 임신과 함께 결혼하였지만
딸 집시가 태어나기 한 달 전 이혼을 합니다. 결국, 엄마 혼자 양육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딸이 태어난 지 3~4개월쯤 됐을 때 엄마 디디가 보니
아이가 잠을 잘 때 이상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고 그때 이후 집시는
잘 때마다 산소마스크를 착용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집시가 7살이 되었을 때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이 사고의 후유증으로 근육위축증이라는 장애를 얻게 됩니다.
아이는 걷는 것을 포기하고 늘 휠체어를 타야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시는 백혈병, 천식, 간질 같은 크고 작은 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청력에 시력까지 좋지 않아서 항상 보청기와 안경을 착용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음식마저 삼키지 못해 소장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서만
겨우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병약하게 아이가 성장하다 보니 엄마 디디는 딸이 10대가 되어서도
정신연령이 7살 수준이라면서 딸에게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위급상황이 생길 걸 대비해서 약 꾸러미를 들고 다니며
정말 헌신적으로 아이를 돌봤습니다.
그러다 보니 엄마는 당연히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보조금에 이전 남편이 매달 보내는 양육비를 가지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허리케인으로 집마저 잃어버린 겁니다.
이 모녀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각종 구호단체의 러브콜이 쏟아졌습니다.
특히나 그중에 일명 사랑의 집짓기로 유명한 한 단체가 손을 내밀게 되면서
모녀를 위해 미주리에 작은 집을 하나 마련해 줍니다.
몸이 아픈 집시를 위해 휠체어가 갈 수 있게 경사로도 있고
또 따뜻한 목욕을 할 수 있는 욕조까지 집안에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모녀는 감사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뉴스 인터뷰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엄마 디디는 누구보다도 딸을 자랑스러워했고, 집시 역시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엄마밖에 없다면서 인터뷰 내내 서로를 향한 애틋함이 넘쳐흘렀습니다.
이런 모습의 모녀를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졌고
그들을 위한 선행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2015년 페이스북 계정에 난데없이 올라온 포스팅이
바로 “그녀는 죽었다!”였던 것입니다.
결국 경찰이 밤 10시쯤 모녀의 집안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경찰들이 침실로 들어선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엄마 디디가
잔인하게 칼에 찔린 채 침대에 엎어져 있었고
휠체어만 덩그러니 남은 채 딸 집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경찰이 들이닥친 곳은 집시의 남자친구 닉의 집이었습니다.
이때 집시는 놀랍게도 두 발로 걷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정밀진단 결과 집시는 어떤 건강상의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집시가 남자친구 닉에게 더는 못 견디겠다며
엄마를 죽여달라 사주한 것이었습니다.
닉은 종신형을 받고 집시는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왜 그런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고 묻는 경찰들의 말에 집시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했다면 누가 믿어줬을까요?”
무려 20년간 이어진 엄마의 폭력을 통한 사기극은 그렇게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출처: ‘14년간 장애인 딸과 엄마의 애틋한 '거짓사랑'’, 유튜브 채널, ‘디바제시카’]
집시의 엄마는 좋은 예언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딸을 이용해 돈을 벌었습니다.
돈에 미치면 딸까지 그렇게 이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짓 예언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세상 것을 좋아하면 그 사람은 100%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딸의 처지에서는 엄마를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도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세속적인 사람인지 아닌지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잘 모르겠다면 나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피면 됩니다.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넌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 예언자입니다.
하지만 나의 능력을 규정해버리고
“넌 나 없이는 안 돼!”라고 말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것을 통해 상대를 이용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 말에 속아 그 사람에게 의지하게 되면 안 좋은 결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거짓 예언자를 구별할 때 그 ‘열매’를 보고 구별하라고 하십니다.
열매는 마지막에 맺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맺으려는 목표입니다.
지금 나에게 해 주는 것을 보지 말고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보라는 말입니다.
그저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인지
그것을 통해 어떤 다른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인지 보라는 말입니다.
거저 주며 행복한 순수한 사랑이 목적이 아닌 모든 말과 행위들은
늑대의 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거짓 예언자에 속지 말고 거짓 예언자도 되지 맙시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