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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 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오늘은 ‘세례자 요한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오히려 고난을 받았습니다.
만약 그가 의로운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고난을 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의로운 이의 무고한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미리 보여줍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고난’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필리 1,29 참조).
어찌 보면 한 푼 춤 값으로 팔려버린 그의 목숨은 마치 은전 30냥에 팔리게 될 예수님의 목숨처럼 억울하고 무참한 죽음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머리는 베었어도, 그의 소리는 벨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혀는 잠잠하게 만들었지만, 그가 외치는 진리의 소리는 가라앉힐 수가 없었습니다.
예언자의 소리는 가로막는다고 가로막히는 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극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한편에는 눈치와 체면에 눈이 가려진 부패하고 부도덕한 권세가인 헤로데와, 음모를 꾸미며 악의에 찬 헤로디아와, 허영심에 찬 그의 딸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진실하고 의로운 세례자 요한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불경스러운 네 가지 죄악을 봅니다.
권세가의 파렴치한 생일잔치, 소녀의 음탕한 춤과 그 어머니의 악의에 찬 음모, 임금의 무모한 맹세입니다.
그리고 그 맹세는 결국 무고한 의인의 죽음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올가미에 걸려 넘어진 이는 의인이 아니라 폭군이었습니다.
악인의 혀는 결국 자신이 쳐놓은 덫에 걸려 넘어지고, 의인의 혀는 영광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을 떠올리면, 금세기의 의인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떠오릅니다.
그는 히틀러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당시의 국가 교회를 탈퇴하여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고, 히틀러의 암살계획에 연루되어 나치에 의해 사형 당했습니다.
그는 '고난에 관한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이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까닭이다”
그렇습니다.
그는 '하느님 의식'을 세상 속으로 가져온 바람에 고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묘비명에는 그가 <옥중서간>에서 썼던 이런 말이 적여 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말씀을 위하여 바쳤으며,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 말씀을 가르쳤다”
그는 참으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되, 예수님처럼 죽음을 통해 가르쳤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월이 흐를지라도 폭군의 죄악을 고발하는 의인의 외치는 소리는 계속될 것입니다.
비록 혀가 잘려도, 온몸이 혀가 되어 외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숨 막히게 외치고 있는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소리는 교종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 ‘남을 위해 우는 법’을 빼앗아 가버린 이 시대에, ‘남을 위해 우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해 우는 법’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혀가 진정으로 사랑하여 울게 하소서.
눈물 흘리는 이들의 소리를 듣고 울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마르 6,25)
주님!
제 혀가 거짓을 꾸미지 않고, 진실 되게 하소서.
타인을 뭉개지 않고, 자신을 뭉개어 내어주게 하소서.
제 혀가 어둠을 가르는 불혀가 되고, 진리를 밝히는 말씀의 쌍날칼이 되게 하소서!
헛된 맹세로 덫에 걸려들지 않고, 침묵에 묶어 두어도 의로움을 외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의 심장을 지닌>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는 예언자라면 떨지 말고 주님께서 명령한 것을 전해야 한다는 말씀인데, 우리 교회는 세례자 요한의 순교 축일에 이 예레미야서를 독서로 읽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이런 예언자였고, 그래서 순교했다는 뜻일 겁니다.
예언자란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하느님께 파견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브리엘과 라파엘 천사처럼 그렇게 파견된 존재가 아니라 쓴소리를 해야 할 사람이나 집단에게 파견된 존재입니다.
가브리엘이나 라파엘 천사가 좋은 소식의 전달자라면, 예언자는 듣는 이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 그것도 하느님 말씀을 전달하는 존재이고, 그러니만큼 평소 하느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늘 역행하던 자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지금 하는 나쁜 짓을 멈추지 않고, 고치지 않으면 미래에 불행해질 것이라고 예언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나쁜 짓을 할까요?
그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이고 세상 권력에 흠뻑 취한 자들입니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 돌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주무르다 보니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 하고 하느님이 두려운 줄 모르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심장이 센 자가 아니면 이들 앞에서 떨리고 하느님 말씀은커녕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떨지 않으려면 강심장을 가져야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려면 하느님 심장을 장착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심장에는 용기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심장에는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에 대한 연민이 먼저 있습니다.
이들이 당신 말씀을 듣지 않는다고 분노를 터트리시거나 포기해버리셨다면 하느님은 예언자도 파견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아직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있으시기에, 벌을 주시기 전에 곧 분노를 터트리시기 전에 지금 하는 짓을 멈추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언자라면 이런 하느님의 심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언을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예언을 해야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사람이기도 하고,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회개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예언해야 함을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매일 정답만 얘기하지 마시고 다른 얘기할 수 없나요?
참 답답합니다.
정답은 저도 알고 있는데 실천하려고 하니까 왜 나만 손해를 보며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고 기다릴 만큼 기다렸는데 아직도 저 모양이니 어쩌면 좋습니까?
정답을 알고 있는데 다른 것을 요구하면 어찌합니까?
물론 뒤집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결국은 그리로 가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말이죠.
성경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은 흔들릴 수 있고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에서 해답을 얻어야 명확합니다.
그리고 해답을 얻었으면 그리 사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고, 가슴이 아프고 억울해도 인내하면서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천상에 보화를 쌓고 위로받아야 합니다.
헤로데는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여러 차례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고 요한은 결국 목이 베어지는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요한은 바른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로운 죽음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육으로는 죽었지만, 그의 의로움은 끊임없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육적인 죽음과 영적인 죽음을 동시에 마주하게 됩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그였지만 몹시 괴로운 마음으로 요한의 목을 베어 오라고 명하였습니다.
생일잔치에서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것을 주겠다’고 맹세까지 하였고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요한의 머리를 갖다 달라’는 그의 청을 물리치지 못하였습니다.
생일 파티에서 한마디 약속한 것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취중에 한마디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정말 얼마나 말을 조심해서 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무모한 권력을 내세우지 않고 참된 권위를 회복해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약속이 잘못되었으면 거두어들여야지, 위신 체면 때문에 덮어버리면 결국은 파멸을 만나게 됩니다.
의인의 삶은 영광스럽게 기억되고, 자기의 영달과 안전을 지키려 급급해하는 사람은 결국 패배한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사실 일상 안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밑지고 손해를 보는, 불이익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뜻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승리자로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헛된 장담을 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 좋지 못한 감정들을 몰아내고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사람이 있다면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요한처럼 어떤 처지나 상황 안에서도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 제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당신께는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입술보다는 발걸음이 더 좋은 기도가 되게 하소서.”
(토마스 머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떠해야 할까?>
오늘은 요한 세례자가 수난당하고 죽임을 당한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헤로데는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춘 것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요한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는 죽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약속을 했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왕이 아니라 노예였습니다.
세상의 시선 때문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방식대로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살로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춤을 잘 추고 자신의 상품을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헤로디아도 노예였습니다.
쾌락과 돈과 권력의 노예였습니다.
헤로데에게 붙어있기 위해 그것을 비판하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은 다 가진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세상에 속한 이들이었습니다.
오직 요한만이 세상 것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 뜻에 봉헌하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죽음을 면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도 않았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다 이루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것이 믿는 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크게 세 가지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죽음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숨넘어가는 소리로 “내 돈 2억 갚아, 임마!”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칩니다.
모두가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삶과 완전히 별개로 여깁니다.
두 번째는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라 여깁니다.
저희 할머니는 임종 마지막 순간에 어머니가 성당 나가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란 이름으로 대세를 받으셨습니다.
저희 고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불교를 믿으셨고 끝까지 하느님을 믿기를 거부하셨지만, 마지막 순간 대세를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된 경우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은 죽음을 삶과 별개가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삶에서 실천해오던 하느님 뜻을 죽음과 연결합니다.
부활이 보장되어 있기에 죽음도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도구로 죽음을 이용합니다.
요한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가면서도 며칠 동안이나 설교했다고 합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라이언을 구하러 왔던 주인공은 죽어가면서 라이언에게 “잘 살아야 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라이언은 평생 자신을 위해 죽은 사람들 때문에 못 살 수가 없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그들의 무덤 앞에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여보, 나 잘 살았지?”
이런 이들은 죽음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할 줄 안 사람들입니다.
전태일도 근로기준법전을 끌어안고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라며 죽었습니다.
누구는 자살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떤 관점에서는 자기 죽음을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보았던 가장 감동적인 죽음은 어떤 자매님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방학 동안에 이태리 본당에 실습을 나갔는데 어떤 분들이 한 자매님을 가리키며 저분이 말기 암 환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아 귀여겨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의 여름에 다시 갔는데 그분이 병원에서 돌아가시기 직전이라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님과 함께 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왠지 저를 기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장례식 때는 시골 본당이 가득 찼습니다.
그분은 3개월 산다고 암 선고를 받았는데 3년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픔을 호소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분은 항상 오늘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이웃에게 정성을 다하였습니다.
그분이 죽기 직전이라는 것을 안 사람들은 그 자매에게 모두 감동하였습니다.
그분에게 도움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죽음을 이용한 분입니다.
죽음이 삶의 일부였고 그래서 그분의 삶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먼저 자신이 왕임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왕이 아닌 하느님 자녀인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는 이 세상이 멸망해도 영원히 삽니다.
그러니 왕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영향은 주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받으면 어떻게 자녀를 교육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예언자의 면모가 있어야 합니다.
요한의 죽음은 이 지상의 노예로 사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으로 세상이 진리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교육적이어야 합니다.
또한 사제임이 드러나야 합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이 죽인 요한이 아니냐고 두려워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죽음으로 헤로데를 그리스도께 오게 하였습니다.
물론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자기 선택입니다.
그러나 돌아가시면서 자녀들에게 꼭 성당 다니라고 한 마디는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원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확신 속의 순교>
하느님 움직임의 특징은 철저하게도 하향성(下向性).
그냥 계셔도 좋으련만 굳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셔서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과 어울리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대체로 반대입니다.
철저하게도 상향성(上向性)입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역,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조역으로서의 삶, 조력자로서의 삶, 주변인으로서의 삶, 선구자로서의 삶, 예언자로서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감독, 또는 작가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 드러내는 것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이 확실히 뜨도록, 작품이 잘 나오도록, 무대 아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 지녀야할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 부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예언자치고 고통이나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흡사한 방법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안정이나 평화라는 단어는 꽤 낯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왕의 치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향해 쓴소리를 수시로 남발한다는 것은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세례자 요한의 죽음>
세례자 요한이 한 일은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증언한 일(마르 1,7-8), 그리고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회개시킨 일입니다(마르 1,4).
당시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마르 1,5)
그러나 기득권층 사람들은 요한의 회개 선포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마르 11,31).
헤로데와 헤로디아와 헤로디아의 딸도 요한의 회개 선포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마도 그들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같은 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세속의 권력자가 하느님의 예언자를 죽인 일에 대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의 예언자가 살해당하는데도
보고만 계셨을까? 살인자들에게 천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단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살인자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셨다.”
베드로 사도가 종말의 심판을 설명한 말을 헤로데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2베드 3,9)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죄를 비판한 일도 ‘회개 선포’에 속한 일이고, 그 두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그것은 헤로데와 헤로디아 같은 죄인들도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헤로데는 나중에 왕의 자리를 빼앗기고 헤로디아와 함께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죽기 전에라도 회개했을까?
그것은 모릅니다.
어떻든 그들도 하느님의 심판대에 섰을 텐데, 그 심판의 결과는 회개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죽기 전에라도 회개했다면 멸망을 피했겠지만,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했다면 멸망 쪽으로 갔을 것입니다.
복음서 본문의 표현만 보면, 헤로디아만 요한을 죽이려고 했고, 헤로데는 요한을 보호하려고 애쓴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헤로데는 처음부터 요한을 죽이려고 붙잡아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의 여론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어서 여론의 움직임을 지켜보려고 한 것이고, 헤로디아는 성급하게 요한을 곧바로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헤로디아를 헤로데가 말리면서 기다리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도대체 왜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세례자 요한을 미워했을까?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요한 3,20)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헤로데와 헤로디아는 요한의 비판이 듣기 싫었고, 요한의 입을 막으면 자기들의 죄가 덮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악한 생각이기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이기도 합니다.
예언자가 진리를 말하면, 그 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죄와 악을 꾸짖는 예언자를 박해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박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헤로데의 생일잔치에 참석한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은 당시 그 지역의 고위층 사람들이었고, 여론을 주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일 때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범죄를 막거나 반대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까?
마음속으로는 헤로데가 큰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헤로데의 권력이 무서워서 침묵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대해서 아무 관심도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그 일에 동조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든지 간에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 살인죄의 공범들입니다.
악행을 보면서도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구경만 하는 것은 그 악행을 함께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그 악행에 가담하지 않았다.” 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오늘날에도 악행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방관하거나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침묵하는 다수 때문에 독재자들이 마음껏 독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래 쏟아진 모든 예언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이 세대가 져야 할 것이다.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어 간 즈카르야의 피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루카 11,50-51)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지옥(地獄)같은 세상에서 천국(天國)의 삶 - 하느님 중심의 삶>
“하느님, 이 나라를 구하소서!”
날마다 새벽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님 성심상 앞을 지날 때마다 작금의 백척간두(百尺竿頭), 누란(累卵)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주십사 바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의 삶은 어떻게?
답은 오직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개념을 분명히 이해 하고자 사전에서 지옥과 천국을 찾아봤습니다.
*지옥;1.(불)중생이 지은 죄업으로 죽어서 간다고 하는 지하의 세계. 나락 2.못견딜만큼 괴롭고 참담한 형편이나 환경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
*천국;1.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다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다는 영혼이 영원히 축복받는 나라. 천상에 있다고 믿는 하느님이 다스리는 나라. 2.하느님이 다스리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 3.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 또는 그런 상황.
실제 인터넷 사전에서 찾아본 지옥과 천국의 설명입니다.
죽어서 가는 지옥이, 천국이 아니라, 이미 현세에서 시작되는 지옥이요 천국입니다.
참으로 지옥같은 세상에서 천국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은총과 더불어 비상한 노력과 훈련이 있어야 함을 봅니다.
탐욕의 본능대로의 삶이라면 거기가 지옥입니다.
상대방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각자도생, 나혼자만이 살겠다는 이들이 있는 곳이 지옥입니다.
극심한 분열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곳이 지옥입니다.
한반도 땅, 남북 분단과 분열에 이어 남남 분열도 극단으로 치달으니 참 우려스럽습니다.
하느님이 끊임없이 시도하는 바 일치와 통합이요, 악마가 끊임없이 시도하고 즐기는 바 분열입니다.
참으로 분열을 시도하는 자라면 그가 악마입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것이 가장 큰죄입니다.
좌우의 균형과 조화를 통한 일치와 통합이지 서로 대결과 배격으로 원수처럼 분열하라 있는 좌우가 아닙니다.
좌우이전에 공감대를 이뤄야할 상식과 예의, 나라 사랑, 법의 준수, 정의와 평화입니다.
참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절실한 시절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어제 열심한 믿음의 자매와 주고 받은 메시지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주위에 지인들이 많이 아프네요.
제 나이가 그렇겠지만 슬프고 아픈 일들이 더 많네요.
삶을 열심히 살다보면 나이가 들어 어느덧 아파오고 그러다 생을 마감하고...
이런 삶을 사는 저희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생각조차 못할 일이지요!”
“공감합니다.
고해인생이 적나라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중심의 믿음으로 축제인생을 살도록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분투의 노력을, 훈련을 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너무 힘든 세상, 아픈게 정상일 것이나 파이팅! 용기를 내어 주님의 전사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궁극의 중심이요, 희망이요, 의미요, 빛이요,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눈이지요.
바로 주님을 잃어 뿌리없이 표류와 방황이요 죄도 병도 많은 것입니다.
모든 병은 마음의 병, 영혼의 병에서 시작됩니다.”-
어제는 참 고맙고 반갑고 기쁜 날이었습니다.
만5개월 동안 뇌졸중으로 재활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하여 서서히 정상적으로 생활하게 된, 무려 25년 동안 제 강론집은 물론 시집을 복사, 제본해다 준, 참 한결같은 믿음의 자매와 병원 외출후 귀원하는 도중 잠시 만나 함께 식사한 잊지 못할 날이었습니다.
만남 후 자매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오늘 하느님 중심의 스토리와 콘텐츠 풍부한 참 기분 좋고 유쾌한 날이었습니다!
그대로 천국체험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니다.
날로 더욱 주님 안에서 영육으로 건강해지리라 믿고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천국은 선택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으로 행복을, 천국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최상의 삶의 방법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스토리와 콘텐츠도 형성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자리에 그 무슨 우상을 놓아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자리에, 세상이, 돈이, 재물이, 영화가, 명예가, 건강이, 사람이, 권력이 자리하면 그대로 그 늪에 빠져, 그에 중독이 되어 악마가, 괴물이, 야수가, 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닙니다.
악마는 하느님 중심을 잃었을 때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사람들이 삶의 중심을, 길을, 희망과 꿈을, 빛을, 진리를 보는 눈을 즉 가치관, 역사관, 국가관, 정치관, 교육관, 결혼관, 인생관, 세계관 등 끝없이 이어지는 이런 보는 눈인 '관(觀)'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관(觀)' 앞에는 '올바른'이란 말마디가 반드시 위치해야 합니다.
역사의식도 시대정신도 없고 열려 있는 지평이 아닌 닫혀진 폐쇠된 근시안적 지평과 시야입니다.
지식은 산더미처럼 많은 데 통찰할 수 있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이 없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잃음으로 자초한 재앙입니다.
이래서 죄도 많고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순간 얼마전 칼럼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지옥이 텅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왕자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하지만 이제 이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돼야 한다.
여기가 지옥이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보십시오.
오늘 복음 장면은 온통 악마들의 출몰을 연상케 합니다.
그대로 '죽음의 잔치'를 상징합니다.
악마는 하느님 중심을 잃어 탐욕, 질투, 분노의 노예가 되어 살 때 인간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 모두 사람이라 하지만 하느님 중심 부재의 악마요 괴물들입니다.
이런 이들의 삶이라면 스토리도 콘텐츠도 있을 리 없습니다.
오직 참사람은 금욕가, 순교자, 은수자들의 아버지, 마지막 예언자,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성 요한 세례자 의인 하나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과연 하느님 중심의 참삶인가 묻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부재보다 큰 불행이자 재앙은 없습니다.
악마들의 승리인 듯 하지만 궁극의 승리는 하느님께, 파스카의 예수님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가 절묘합니다.
오늘 복음(마르6,17-29)의 '죽음의 잔치'에 이어지는 복음, '오천명을 먹이시다'라는 장면은 '생명의 잔치'(마르6,30-44)를 상징하니 오늘 복음과의 대조가 참 극명합니다.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명, 지옥과 천국, 악마들과 참사람들의 대조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중심의 생명의 잔치가 벌어졌고 모두가 배불리 먹었다 합니다.
복음의 세례자 요한과 한쌍을 이루는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그가 예언자의 소명을 받은후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기 위한 주님의 교육이 참 철저합니다.
지옥같은 세상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 믿음으로 온통 완전무장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대로 날마다 영적전쟁터에 출전(出戰)을 앞둔 우리를 향한 말씀같습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당신의 성령으로 완전무장하여 당신의 용감한 전사로, 말씀의 전사로, 평화의 전사로 세상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저는 이 말을 신학생 때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80년대는 저항과 탄압의 시대였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요구는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은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런 저항의 과정에서 꽃잎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하였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는 공권력에 의해서 사망하였습니다.
공권력은 강하고, 저항의 힘은 약해 보였지만 깨어 있는 시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성취하였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자유와 민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도 ‘쇄신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매주 식당의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연구하였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토론하였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신학생들의 열정을 이해하셨고, 후원해 주셨습니다.
어느덧 4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신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앞서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공권력은 강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서 세례자 요한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느님나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칫 뜨거운 불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였을까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섬김, 봉사, 희생, 나눔,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지난주에 있었던 휴가 때, 경상도에 있는 수목원을 방문했습니다.
모든 것이 예약제였는데, 입장이나 그 안에서의 식사도 예약해야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가격도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책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고는 관심이 갔고, 올해 첫 휴가인데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다녀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약간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런 곳을 혼자 가는 사람이 있을까?’, ‘다들 누군가와 함께 올 텐데 나만 혼자 가면 어색하지 않을까?’, ‘식사 가격도 상당하던데, 나 혼자 가는데 이렇게 비싼 식사를 하면 사람들이 흉보지 않을까?’ 등의 생각들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뭐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 저는 대단하지도 또 중요하지도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제게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좋은 곳에서 굳이 대단하지도 않은 사람까지 신경 쓸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 점을 생각하니 그저 저에게만 집중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나’에게만 대단하고 중요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자유를 존중하면서 아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고, 힘들어도 그곳에서 멋진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남 눈치보다 내 눈치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눈치는 주님 눈치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남 눈치 보느라고 정작 주님 눈치를 신경 쓰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합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그는 헤로데 임금의 불륜을 질책하다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간계로 순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몇 명의 사람들을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서 요한 세례자의 참수를 명하는 헤로데 임금,
잘못된 자기 행동을 질책하는 요한 세례자를 제거하려는 헤로디아,
그리고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명령이라면서 따르는 헤로디아의 딸,
마지막으로 죽음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외치는 요한 세례자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요한 세례자가 가장 불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요?
그 어떤 사람도 헤로데, 헤로디아, 헤로디아의 딸이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눈치만 보았을 뿐, 주님 눈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남 눈치 보느라 정작 주님 눈치는 신경 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안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치를 보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때, 하늘 나라에서 특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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