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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를 시기하는 사람들 17:1~9
1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2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3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4 그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5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7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8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9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주니라
성경을 배우려는 사람들 17:10~15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12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13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14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15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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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이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며 예수님을 전합니다. 많은 헬라인과 귀부인이 믿으나 유대인들은 시기해 소동을 일으킵니다. 베뢰아로 옮겨 말씀을 전하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함으로 말씀을 받고 성경을 상고합니다. 쫓아온 데살로니가 유대인들 때문에 바울은 아덴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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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전파를 시기하는 사람들 17:1~9
회당은 흩어져 사는 유대인의 모임 장소입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회당에 들어가 3주간 성경을 강론합니다(2절). 그는 구속사 관점으로 구약성경을 강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많은 사람이 믿고 따르지만, 어떤 유대인들은 그를 방해합니다. 아마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시기하는 회당의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불량배까지 동원해 바울이 가이사(황제)의 명령을 거스르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전한다며 선동합니다. 바울을 잡지 못하자, 그들은 야손과 형제들을 ‘읍장들’(로마 정부가 파송한 자치 단체장) 앞에 끌고 와 소란을 일으킵니다. 시기심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도 생명의 복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 더 깊은 묵상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시기심은 사람들과의 사이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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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배우려는 사람들 17:10~15
바울은 베뢰아에서도 먼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갑니다. 유대인들의 시기로 계속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선교 정책을 따라 유대인의 회당을 먼저 찾아갑니다. 이때 베뢰아 사람들은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그들은 성품이 너그러워서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받는 좋은 자세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 말씀을 간절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고,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묵상할 때 은혜를 경험합니다. 데살로니가의 강퍅한 유대인들은 베뢰아까지 찾아와서 방해합니다. 복음이 값진 만큼, 방해도 강하게 따릅니다.
● 더 깊은 묵상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강론에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베뢰아 사람들과 비교할 때, 말씀을 받고 묵상하는 나의 태도는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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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을 깨우치는 말씀 묵상
성경은 거울 역할을 한다. 성경을 통해 우리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실망할 수 있다. 성경은 자연적 상태에서의 인간 본성이 모두 악함을 분명히 계시한다(롬 3:10~12).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를 ‘전적 부패의 교리’라고 부르는데, 이 용어는 모든 사람이 최대한도로 악하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전체적으로 부패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죄로 더러워지지 않은 부분이 단 한 군데도 없다. 그래서 우리 존재 전체에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 단 하나도 없다.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 안에 기본적으로 악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비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우리 모두 죄의 더러운 영향을 받았다는 슬픈 현실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의에서 벗어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충격과 복수심에서 해방되게 한다. 또한 다른 사람 안에 죄가 있는 것처럼 내 안에도 동일한 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에 우리는 멈추어 서서 기도할 수 있다. 복수 대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도우심을 구할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나 성향이 아니라 신학의 샘에서 자비를 길어 올린 사람들은 무자비의 풍랑을 견디어 내고 자비로 반응할 수 있다. 말씀을 상고함으로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한 사람들은 자신도 언제든지 나쁜 결정을 내리고 무자비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신학이 있는 믿음 / 로니 커츠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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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사도행전 17장 11~12절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과 상고하는 자세로 하나님 말씀을 받았고, 그 결과 믿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상고'한다는 말은,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 검증한다는 법정 용어입니다. 자기 기준과 방식으로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려는 시대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것도, 연구하고 검증해 깨치는 것도 필요합니다. 말씀을 대하는 마음과 자세를 점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며 따를 때 부흥의 문이 열립니다.
성도가 반드시 지속해야 할 사역은 그리스도의 행하심과 그분의 말씀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 딕 루카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어떤 방해와 핍박도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저도 그 열심을 좇아 사람들의 반응에 위축당하지도, 우쭐대지도 않고 신실히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묵상하는 자리로 저를 이끄소서
오늘의 찬송(새 201 참 사람 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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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들고 그들을 찾아가서 복음에 대해 토론하고, 해석하고 증명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를 위해 열심을 다하시는 그분을 믿고, 담대히 발걸음을 내딛고, 주님께서 맡겨 주신 일들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자
- 주님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면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들에게 소홀함이 없도록 하고,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기도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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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쫓겨나는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당혹함을 느낍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복음대로 살려고 할 때 세상이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세상과 갈등이 없나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자로서 이제 복음에 합당한 능력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그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 앞에 놓여 있고 주어진 우리의 이웃을 생각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에 대한 바울의 열정과 베뢰아 사람들의 편견 없는 말씀에 대한 상고함이 만났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말씀으로 교회를 세워 가는 모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가 선포되고 그 말씀에 대한 깊은 탐구를 통해서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저희도 이렇게 매일 말씀으로 함께 묵상하고 삶 속에서 말씀을 통해서 고민하며 삶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이 기쁨을 우리만 누리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갖고 있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같이 소유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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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에는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세 지역 전도를 합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서로 특색 있지만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새 역사를 이루십니다.
(삼 주 성경을 가르친 데살로니가)
1.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여기서 우리가 그들이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을 볼 때 누가는 빌립보에 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는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렀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수도로서 정치, 무역,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데살로니가에는 빌립보와 달리 유대인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늘 하는 방식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세 안식일 곧 삼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삼주 동안에 큰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삼 주에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를 증거함)
3절을 보십시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데살로니가서를 참고로 하면 바울은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기초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인하여 해를 받고 죽으신 것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성서적 메시야를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고난이 없는 영광의 메시야였습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메시야, 경제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그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야관은 고난을 통해 영광을 얻는 메시야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왜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인가를 성경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증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 인생들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통하여 십자가의 복음, 죄사함의 복음, 부활의 복음, 은혜의 복음,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바로 성경에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영원하신 왕이십니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뜻을 풀어서 복음을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유능한 성경선생이었습니다. 선교 일선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복음에 확신을 가진 유능한 성경선생이 필요합니다. 복음 진리를 전하는 유능한 성경선생만 있으면 복음역사는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이것이 바울의 메시지의 주제였습니다. 그리스도란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신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 "네가 왕이냐?"는 질문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해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예수님은 세상의 정치적인 왕이 아니라 영적인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여 믿는 자의 왕이 되셨습니다.
영원히 살아계신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왕이 되시고 사랑이 되시고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령을 보내셔서 친히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기에 합당하십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생명의 구주요 살아계신 왕되심을 분명히 선포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인 것을 강론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믿는 자가 바울을 따름)
4절을 보십시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데살로니가에서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장 9)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5절을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복음이 말로만 그들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귀부인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부인으로서 귀걸이와 목걸이를 차고 밍크 코트를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겉으로 보기에 도저히 예수님을 믿지 않을 자들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임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숨은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단지 삼 주만에 데살로니카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시기하는 자가 핍박함)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바울을 잡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을 통하여 이방인 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있자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위축되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긍지가 지나쳐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교만하고 배타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예수님을 영접하고 배우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시장의 깡패들을 동원하여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그들은 방법적인 면도 불량하였습니다.
야손이 집에 침입하여 바울 일행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곧 예수를 가르친다고 하며 소동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핍박하였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영적 눈이 먼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인해 구원의 역사를 방해함으로 자기들의 죄를 채우고 하나님을 진노케 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2장14-16). 이를 볼 때 시기심은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큰 죄임을 배웁니다.
(야손을 범인 은닉죄로 고소함)
6,7절을 보십시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그들은 바울을 잡지 못하고 바울을 머물게 한 야손과 형제들을 잡아 읍장에게 끌고 갔습니다. 야손이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바울 일행을 집에 머물게 했다고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은 천하에 새로운 질서를 세웁니다. 그들은 야손을 범인 은닉죄로 고소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가이사의 명령을 거역하여 다른 임금 예수를 전하는 반역자라고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과 다른 왕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했습니다. 진리의 왕, 평화의 왕으로 증거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고소할 때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고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무리와 똑 같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도 시기하여 정치적인 문제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사단의 자식입니다. 사단의 속성이 시기하고 거짓된 것이고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을 전하면 어디에나 핍박이 있습니다.
(야손은 예수 믿고 손해봄)
8,9절을 보십시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무리와 읍장은 이들의 고소를 듣고 당황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이 죄가 없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읍장은 야손 일행에게 징역형을 선고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야손과 형제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야손은 예수님을 믿고 물질적인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베뢰아에 대한 소개)
10절을 보십시오.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바울이 밤에 데살로니가에서 도망하여 베뢰아로 갔습니다. 바울은 핍박의 때에 예수님의 말씀처럼 도망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뢰아에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습니다. 베뢰아는 데살로니가에 비하면 작은 도시였습니다. 시골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항상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당하면서도 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이 충만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유대인을 구원하고자 하였고 이방인 전도를 통해서도 유대인 구원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유대인 구원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소망임을 영접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번에도 유대인들의 많은 핍박을 예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뢰아에서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너그러운 사람들)
11절을 보십시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서 30분 떨어진 시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마음 밭이 좋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너그럽다는 것은 마음이 트인 자, 고결한 사람들, 교양적인 사람들이라고 다른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말씀이 그런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좋은 마음 밭을 갖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도 말씀을 잘 영접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을 보면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에 큰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그들보다 말씀 받는 자세가 더 좋았습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신사적이란 말은 마음이 넓고 고상한 인격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공동 번역에는 "마음이 트였다"고 번역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좁고 편협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반발심이 많고 자기 생각이 강하여서 마음이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여서 진리의 말씀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탁 트인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점에서 신사적이었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음)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은 간절히 사모(with great eagerness)하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영적 세계를 알고자 하는 영적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실망하고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들은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였습니다.
대개 말씀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에 영적 소원이 없고 자기 생각이 강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마음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들은 겸손하게 귀 기울여 말씀을 경청합니다. 이런 자들은 영적 비밀을 깨닫고 돌이켜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바로 이런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는 사람들)
베뢰아 사람들은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상고했다는 것은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성경을 연구하였다 찾아보았다는 뜻으로 다른 성경에 번역되어 있습니다. 탐구하는 마음, 깊이 생각해보는 마음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자세히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생각을 하며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한 받은 말씀이 과연 진리인가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를 확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학자적인 자세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그들의 자세는 참으로 진지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성경을 공부하였을 때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깨달은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말씀을 듣는 바른 자세)
베뢰아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하는 좋은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자의 자세도 중요합니다. 농사를 잘 지으려면 씨도 중요하지만 밭도 중요합니다. 똑같은 말씀이지만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서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심판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능력으로 역사하사 영적 비밀을 깨닫게 하십니다.
(베뢰아에서 믿은 사람들)
12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복음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데살로니카에서와 같이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도 적지 않게 많이 믿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하고 순종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을 믿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셔서 베뢰아에서 복음전하는 일을 친히 도우셨습니다.
(베뢰아에서 핍박하는 유대인들)
13-14절을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머물더라”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은 베뢰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변화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바울 일행을 시기하여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 와서 바울을 핍박하였습니다. 그들은 베뢰아에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였습니다. 바울이 과거 예수님 믿는 자를 원정하여 핍박하던 것과 같이 그들은 원정을 와서 핍박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참으로 비신사적이고 야만적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들이 바울만 먼저 배로 아덴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아서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양들을 도왔습니다.
(우리의 살아계신 왕 예수님)
우리는 말씀을 기초로 하여 예수님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합니다. 예수님을 우리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우리의 왕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초라한 모습으로 오십니다. 초라한 바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우리 교회에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라한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신 분명한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왕이십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기초로 예수님을 우리의 살아계신 왕으로 믿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실리와 디모데와 함께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를 하였습니다. 데살로니카 전도에는 누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실라와 디모데를 베뢰아에 두고 혼자 아덴에 이르러 예수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바울은 마치 혼자서 적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장군과 같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아덴에 이르러 디모데와 실라를 부름)
15절을 보십시오.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니라”
바울은 배를 타고 아덴(아테네)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누가는 데살로니가에 두고 디모데와 실라는 베뢰아에 남아 복음 역사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인도해준 사람들에게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에 있는 자기에게로 속히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역사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역자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울도 동역자가 있어야 함이 났습니다. 실라와 디모데는 아덴에는 오지 않고 바울이 고린도로 갔을 때 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전도할 때 실라와 디모데를 만나서 말씀에 붙잡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힘을 얻어 전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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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 시장 잡배들을 사서 소요를 일으켜 야손의 집에 들어가 바울 일행을 잡으려고 했으나 없자, 야손과 몇 성도들을 시의 관리들에게 고소했다는 말입니다. ‘저자’란 상점이 늘어선 시장의 고어로, ‘저잣거리’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흔히 무위도식하는 불량배들이 있어 유대인들은 그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제거하려고 한 것입니다. ‘읍장들’은 그 당시 데살로니가 행정을 책임지는 5명의 대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놓아 주니라’ - 시의 관리들이 당황하였지만, 야손과 성도들에게 보석금을 받고 석방했다는 말입니다. 사안보다 비교적 형량이 가벼운 것은 고발당사자들을 찾지 못했고, 그들로서는 이방인인 유대인들의 송사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후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지 않습니다. 무척 원했지만, 가지 않은 것은 야손과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당시 읍장들의 판결문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는 바울 일행을 집으로 초대하거나 그 도시로 다시 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보석금을 냄은 물론입니다. 여러 성도의 보석금이니 야손으로서는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부담이 큰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그들을 위해 다시는 갈 수 없으니 말입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은 절대 순탄치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고난과 핍박의 연속입니다. 특별히 동족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습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그들의 종교인 유대교 때문입니다. 그들이 믿고 있었던 모세의 율법 대신에 바울이 예수님을 전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바울은 굽히지 않습니다.
어떠한 위험이나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갑니다. 진리의 길, 가야 할 바른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도 마찬가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 길을 가야 합니다.
문제점들이 앞을 가로막을지라도, 유혹과 훼방이 있을지라도 가야 할 이유는 그 길이 진리의 길, 바른길이라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외길을 가려면 힘이 듭니다. 하물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길이 쉽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오늘 본문의 바울은 암바볼라,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그리고 아덴으로 이동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로마의 속령 3주를 관통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도 바로 그런 길일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이 인도하는 길입니다. 가는 길에 표적과 증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방향만 맞는다면 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만 있다면 가야 합니다. 양심에 걸려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 길은 우리 몸의 상태나 우리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간 길,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간 길이라 그렇습니다. 아파도 가십시다. 서러워도 가십시다. 동행자가 나타나지 않아도 가십시다. 도중하차 하면 종착역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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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기하는 마음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역시 먼저 회당에 들어가 전하였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행 17:4) 데살로니가에서의 전도도 큰 반향을 일으켜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회당에 모이는 사람들이 항상 읽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진지하게 읽고 있었고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바울이 전하는 그 복음에 빠르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그렇게 진리에만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진리가 아닌 수많은 주변적인 것에 의해 더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회당에서 가르칠 때 회당의 유대인들은 처음에는 일상적인 성경 가르침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전하는 것은 힘이 있었습니다.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분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회당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게 되자 시기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행 17:5)
특히 그들 중에는 영향력 있는 귀부인도 있었는데 그들이 바울의 말에 열정적인 반응을 보였을 때 회당의 주류였던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시기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할 수도 있습니다. 시기는 7대죄에서 두 번째에 위치하는 가장 만연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유대인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자 그 시기는 진리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성경의 메시야에 대해 생각하기 보다는 바울의 영향력을 줄이는 것이 목적이 되었습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행 17:7) 바울이 말하는 대로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그 분은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당연히 왕으로서의 고백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말하는 분이 메시야인지에 대한 진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참 나쁜 마음입니다.
시기는 어떤 진리보다 더 강합니다. 시기심을 갖게 되면 마음이 좁쌀보다 더 좁아집니다.
시기에 사로잡히면 어떤 진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시기를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안에서도 시기는 수없이 많이 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시기심을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2.너그러운 마음
데살로니가에서 쫓겨나온 바울은 이웃 도시인 베뢰아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행 17:12)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복음 앞에 반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선 데살로니가와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행 17:11)
앞서 데살로니가에서도 '경건한 사람들'은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유대인들중에 시기심 때문에 그곳을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베뢰아에서는 그렇게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곧 유대인들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 수용적 자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그러운 마음'이라는 것은 본래 '태생이 귀족적인'이라는 의미인데 또한 확대되어 귀족적인 마음, 관대한 마음, 열린 마음 등을 의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베뢰아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진리를 향한 수용적 자세로 진리에 반응하는지 아니면 아주 좁쌀같은 마음으로 듣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적인 것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는 오직 성경이 기준이 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인지를 따져보았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제발 따져보십시오. 설교가 성경에서 말하는 것인지 잘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설교를 듣는 가장 좋은 자세입니다. 따져보지 않고 아무것에나 '아멘'하는 것은 아주 나쁜 자세입니다. 말씀에 아멘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도 성경을 따저보는 성도가 무서워 말씀을 더 잘 준비하는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그것에 근거한 말씀 곧 성경에 합당한 말씀만이 설교가 되어야 합니다. 베뢰아 유대인들과 같은 자세가 없어 교회가 망하고 있습니다.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그것이 참으로 그러한지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교회는 성경을 상고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진리에 마음을 가장 많이 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신경을 쓰고 들으며 그것을 더 알기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진리, 성경에 마음을 아주 크게 활짝 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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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에서 심하게 고난 받고 모욕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복음 전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오늘은 현재의 발칸반도 지역인 그리스 지역을 두루 다니는 장면이 있다.
빌립보에서 출발하여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1)
데살로니가에 이른다.(1)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11) 베뢰아에서 아덴까지 이른다.(15)
데살로니가의 사역에 대한 설명이 있다.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한다.(2)
유대인의 회당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인가?
1. 그리스도가 해를 받았다는 것이다.(3)
유대인의 생각으로 메시야가 고난 받는 생각은 못했을찌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고난받는 메시야의 모습이였다.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어떻게 해를 받으셨는가?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내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도다.
2.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날 것을 증명했다.(3)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성경 말씀을 통하여 전하였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였을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일이 없으면 나의 믿음도 헛것이요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내가 가장 불쌍한 자일 것이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3.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 하신다.(3)
어떤 유대인들은 아직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대하던 메시야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과 예수가 메시야 이심을 전하는 것이다.
이런 복음을 전했을 분명하게 구별되어 지는 반응이 있었다.
1. 바울과 실라처럼 복음을 받아 드리는 무리와(4)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였다.
2. 시기하고 소동하고(6) 소리를 지르고 천하를 어지럽힌다.(6)
가이사의 명을 거역한다라고 반응하는 무리가 있다.(7)
복음 전한 것 때문에 내란음모죄, 대역죄로 몰릴 수도 있겠구나.
예수님도 빌라도 앞에서 바로 이런 죄목 '유대인의 왕'이란 죄명으로 처형을 당했는데.
바울이 베뢰아로 피신을 해도 거기까지 좇아와서 소동케도 한다.(13)
바울도 줄기차게 복음을 전하지만 사단도 끊질기다.
데살로니가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3주 만에 조용히 봇따리를 싸서
밤에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피신을 한다.(10)
베뢰아에서도 역시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한다.(10)
1.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였다.(11)
감정 충만해서 흥분하지도 경솔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았다는 말씀일까?
아무쪼록 복음에 대해 진지하게 신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2.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다.(11)
내가 말씀을 받을 때의 태도가 이랬으면 좋겠다.
바울이 참으로 훌륭한 복음 전도자였다면
베뢰아 사람들은 참으로 훌륭한 청중들이였다.
말씀을 들을 때 자세히 필기도하면서 귀담아 들었다는 것이다.
3.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11) 할렐루야.
베뢰아 사람들 참으로 멋있다. 날마다 QT를 했다는 말씀이고,
성경 연구를 했다는 말씀이다.
말씀의 진위 여부는 성경을 통하여 확증이 되어야 하는데
성경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 할 수 있을까?
전도자의 말만을 듣고 예수 믿는 신앙도 귀하긴 하지만 뿌리가 없다.
스스로 말씀을 잘 경청하고 연구하고 성경을 통하여 말씀을 맛보고 깨달아 가고
신앙으로 자리 매김 할 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견고한 신앙이 되는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한 결과들이 있다.
4.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았다.(12)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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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능력있는 복음전파(1-4절/10-12절)
바울 사도의 선교 행적에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 등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부분은 그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지 않으면 하루도 살 수 없는 영적 생명력을 소유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복음전파의 사명이 주어 졌습니다. 어느곳에 가든지 항상 먼저 복음 전파를 행할 수 있는 여건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돌아오게 하는 전도의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바울과 같은 능력 있는 복음 전파자인가?
2.끝까지 방해하는 사람들(5-9절/13절)
바울의 선교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끝까지 이 일을 방해합니다. 심지어는 바울과 실라가 그들을 피하여 베뢰아 지역으로 떠나갔지만 그곳까지 따라와서 복음을 방해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려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복음 전파를 막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는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이러한 시험을 넘어서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우리의 삶 자체는 마귀의 지속적인 방해를 받는 영적 전투임을 기억하고 항상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그릇된 일을 끝까지 고집하는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베뢰아(Berea, 현 베리Verria)는 데살로니가 서남쪽 75km에 떨어진 지역으로 그곳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고 그 지역 사람들의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과 좋은 성격 때문에 말씀의 전파가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에 있던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추적하여 결국 그에 이르로 다시 핍박했고 급하게 몇 수행할 사람들과 함께 바울을 먼저 아테네 보내게 됩니다.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도 그 말씀이 선포된 곳에는 반드시 교회가 서고 예수 그리스도가 힘 있게 전파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말씀이 씨앗이 되고 기도가 영양분이 되며 성령의 자라게 하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생명력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퍼져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건물이 중심이 되고 관습이 핵심이 되는 신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맡겨준 오늘의 사명을 감사로 담대하게 감당하는 주님의 제자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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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습관(17:1-4절)
그리고 이들은 빌립보에서 떠나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그저 한 줄로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이 길은 무려 150킬로가 넘습니다. 하루에 40킬로씩을 걸었다고 해도 4일을 걸어서 가야하는 거리인 것입니다. 더구나 무슨 교통수단이 발달한 때도 아니고 그저 하염없이 걸어서 가야하는 길이었습니다. 참으로 얼마나 많은 값을 지불하면서 전도 여행을 하고 있습니까?
동역자들과:전도습관
이렇게 데살로니가에 도착해보니까 회당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적지 않게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빌립보 보다 낫다는 증거이겠지요. 이 도시는 막 번창하는 상업도시였습니다. 그
런데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자기 규례대로 저희에게 들어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그랬습니다. 여기서 여러분 뭔가 이상한 것을 느끼지 않으십니까?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말씀을 강론한 것은 알겠는데 ’자기 규례대로‘라니요. 그렇다면 이 말은 바울 자신의 삶에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늘 하던 습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직역하면 습관입니다. “바울은 평소의 습관대로”라고 현대인의 성경은 이해하기 쉽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쉬운 성경에서도 “바울은 습관대로 회당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합니다. And according to Paul's custom(NASB), As his custom was, Paul went into the synagogue(NIV)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거룩한 습관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기도하는 습관... 참으로 사람마다 천양지차, 천태만상의 습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습관이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지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바울도 자기 나름대로의 습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습관입니까?
첫째는 안식일이 되면 무조건 회당으로 찾아가서 말씀을 증거 하는 습관입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기로 약속한 날입니다.
이 날 모여서 함께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서로 격려하고 함께 지어져 가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바울은 거룩한 습관을 따라 안식일에는 반드시 회당에 갔습니다. 가서 뭐했습니까? 회당장이 오늘의 성구를 읽습니다. 그리고 누구 이 말씀에 대해서 하실 말씀 없습니까? 물으면 일어나서 말씀을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합니다. 성경을 풀어서 예수가 곧 그리스도다. 참된 메시아다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다른 일 안한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말씀을 증거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사도 바울의 습관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자기 규례가 있습니까? 어떤 거룩한 습관이 있습니까? 아니면 어떤 잘못된 습관이 있습니까? 아침이면 기도로 하루를 깨우며 신실하게 성경을 묵상하고 하루를 여는 거룩한 습관! 그것은 우리의 일평생을 지켜주는 거룩한 습관이 될 것입니다.
좋지 않은 습관 시기, 질투(5-9절)
자신들의 입지가 형편없이 약해지고 설자리를 잃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드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이고 그 속에 참된 생명이 있고 하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였습니다. 세 안식일을 회당에서 강론하도록 놓아두었다는 것은 이들이 그 때까지 분명하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회당에 많은 돈을 기부하고 입지를 탄탄하게 해 주는 귀부인들이 요동하고 사람들이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달라져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처방을 내렸습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그럽니다. 여기서 주의하셔서 보셔야할 말이 ‘시기가 가득하여’입니다. 이 시기가 얼마나 고전적인 주제입니까? 예수님 당대에도 사도행전을 살펴오면서 반복해서 보게 되는 주제가 바로 시기였습니다.
시기의 특징은 복음을 듣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람들 역시 말씀은 귀에 들려오지 않습니다.종교적인 문제,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의 욕망의 문제가 핵심이지만 표면적으로는 나라를 위하는 애국자인양, 정치적인 문제로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고 떠벌입니다. 이 문제는 창세기부터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타락한 인간의 잘못된 습관입니다. 우리가 묵상했던 요한 일서에서는 가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인의 행동 동기가 자신은 악하고 아우의 행위는 의로웠기 때문에 시기 질투해서 죽였다(요일3:12절)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묵상은 거룩한 습관과 잘못된 습관이라는 관점입니다.
거룩한 습관을 사람을 살리는 습관입니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습관입니다.
반면 잘못된 습관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죽이는 습관입니다.
성경묵상이 거룩한 습관으로 자리 잡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신사적인 신앙(10-15절)
신사적인 신앙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고 우리 또한 베뢰아 사람들처럼 신사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복된 기회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베뢰아 사람
우선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그랬습니다. 먼저 베뢰아 사람들이 천성적으로 심성이 좋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는 “저 사람은 천성이 저래”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아주 게으르거나, 착한 사람에게 공히 사용하는 말입니다. 또는 부지런한 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씀하는 '신사적'이라는 말은 천성적으로 아주 심성이 좋고, 인간됨의 바탕이 좋다는 의미입니다.
첫 번째로 신사적이라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합니까?
신사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첫째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11절)"라고 말씀합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말씀을 집중적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큰 열심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다해서 듣더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을 다해서, 열심히, 주의를 집중해서 들었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말씀을 모든 거룩한 열정을 다해서 들었다는 말입니다.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서 들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야 삽니다. 그래야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성장할 수 있습니다. 가장 불행한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마음이 열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신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이것이 신사적인 것입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두 번째 신사적인 이유가 뭐라고 설명합니까?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1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집중해서, 온 마음을 다해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날마다 성경을 상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사적인 신앙입니다.
한 번 듣고 그냥 흘려보내는 모래시계 형 신앙이 아닙니다.
언제 말씀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스펀지 형이 아닙니다.
상고한다는 말은 아나크리노(ajnakrivnonte")는 영어로는 examining (NIV, NASB)입니다. 시험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시험했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성경을 의심하고, 성경을 시험하고, 성경을 비판하고 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성경을 알고 성경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지금 전하고 있는 이 사건과 성경이 어떻게 관련되는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관련되는가, 그것을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좀더 확실해 집니다. KJV은 searched the scriptures daily라고 번역했습니다. 그것이 그러한가하여 열심히 찾아보고 연구했다는 말입니다. 그냥 말씀만 듣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깊이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가 성경 묵상 할 때 적용과 흡사한 의미입니다. 묵상하고 적용하기 위해서 고민했다는 말입니다. 거룩한 근심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근심은 성경과 내가 처한 현실과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이 성경에 비추어서 나는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경을 상고하는 뜻입니다.
내 생활 속에서 어떻게 적용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을 믿고 사는 나는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할 때에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고민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사적인 신앙의 소유자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뭡니까?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그랬다는 말입니다. 꾸준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신사적인 것입니다.
한 번 왕창했다가 그만두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날마다 성실하게 날마다 꾸준하게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사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이들의 신사적인 모습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까?
12절입니다.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않다”고 했습니다.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진지하게 상고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집니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증명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연구하다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특별히 남자가 적지 않다는 기사를 눈여겨보십시오. 예나 지금이나 남자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사적인 사람들, 집중해서 듣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왜요? 말씀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반면에 아주 비 신사적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도 바울 일행이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여기서는 빌립보처럼 현실적인 유익의 문제로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시기해서 괴악한 사람들을 고용해서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아주 비 신사적인 사람들입니다. 모략과 술수를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디까지 따라왔습니까? 베뢰아까지 따라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이곳까지는 40킬로미터입니다. 몇 시간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찾아와서는 복음 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런 잘못된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저는 이런 에너지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반전시키기 위해서 없던 힘도 낼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기중심성은 이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 내영 속에서 발견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이겨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묵상은 거룩한 습관과 신사적인 신앙이라는 두 가지 단어로 요약되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베뢰아 사람들처럼
거룩한 습관으로 무장되어 매일을 살아가는 귀한 우리의 삶이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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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복음(17:1-4)
바울이 이방 도시에서 선교하는 방식은 일정합니다. 먼저 유대인의 회당부터 찾아갑니다.
바울이 이방 도시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유대인을 복음의 은혜에서 배제시키고자 함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상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주셨기에,
바울은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구원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 묵상 질문: 이방 도시를 찾아간 바울은 왜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 전파를 시작하나요?
- 적용 질문: 복음을 전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 있다면 무엇 때문인가요?
고난받는 야손(17:5-9)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지만,
어떤 이들은 복음을 거부합니다. 어떤 이들은 단지 자신이 믿지 않는 데서 끝나지 않고,
복음 전도자들을 훼방할 뿐 아니라, 그들을 돕는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칩니다.
시기심을 품은 유대인들은 바울 일행을 끌어내려고 찾다가 못 찾자 야손과 몇몇 그리스도인에게
로마 황제의 명을 거역했다고 누명을 씌웁니다.
예수님을 믿는 대가가 혹독합니다. 하지만 이 또한 복음의 길입니다.
- 묵상 질문: 예수님을 믿는 야손에게 가이사의 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을 씌운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 적용 질문: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으로서 감수해야 할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상반된 반응(17:10-15)
바울과 실라가 데살로니가를 떠나 베뢰아에서 복음을 전하자,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이를 알고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쫓아와 무리를 움직여
소동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퍼져 가는 복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박해를 피해 바울이 옮겨 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됩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핍박하고
반대한다 해도 하나님의 일은 꺾이지 않습니다.
- 묵상 질문: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어떤 태도로 대하나요?
- 적용 질문: 복음 전한다고 미움받을 때 무슨 생각을 하나요? 말씀 생활에 어떤 변화가 필요한가요?
오늘의 기도
고난을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 주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을 바라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소서.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매이지 않는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이 고난의 광야 학교를 잘 통과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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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라면 안식일마다 회당을 찾는 것이 관례입니다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행17:1~2)
여기서 "관례대로"는 헬라어로 "εἰωθὸς"(에이오도스)인데, "늘 하던 대로", "습관대로"를 뜻합니다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눅4:16) 바울도 관례대로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성경을 풀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가르쳤는데, 많은 이방인들이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정치적 선동질로 바울과 실라를 대적했습니다
이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밤에 베뢰아로 보냈는데,
거기서도 관례대로 유대인 회당을 찾아 성경을 풀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쳤는데,
거기서도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안식일에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모여서 성경을 배웠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도 베뢰아 사람들과 똑같은 관례가 있었고 똑같이 믿었는데, 말씀에 대한 열정과 믿음의 크기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더 너그러워서"(행17:11)
여기서 "더 너그러워서"는 헬라어로 "εὐγενέστεροι"(유게네스테로이)인데,
"고상한", "존귀한", "귀족 혈통의"를 뜻하는 "εὐγενης"(유게네스)의 비교급으로 "더 고상한"을 뜻합니다
지금도 똑같은 관례대로 교회 출석하고 똑같은 성경과 찬송가를 들고 다니지만,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말씀과 기도의 열정이 전혀 다른 것을 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더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악인을 고상하다 하지만
이제 곧 다시는 그들을 고상한 자라 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사32:5)
그러므로 우리는 고상한 자가 되어 항상 고상한 일에 서기 원합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사32:8)
그것이 뭘까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겨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베뢰아 사람들 같은
더 고상한 성도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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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를 격렬하게 반대합니다. 심지어 베뢰아까지 와서 핍박하지만, 박해가 거셀수록 복음은 더욱 힘 있게 전파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1~3절 바울은 유대인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 사건을 강론합니다. 구약이 예언한 메시아의 수난을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적용하여 ‘예수의 주 되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성경의 중심도, 복음의 핵심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일신 하나님만을 믿는 유대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4~9절 유대교를 믿던 많은 헬라인들과 귀부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3절)을 받아들이고 따르자, 유대인들은 시기합니다. 그래서 거리의 불량배를 고용해 야손(로마서 16장 21절)의 집을 급습하여 바울과 실라를 붙잡으려 했고, 야손과 몇몇 성도들이 반역을 선동했다고 모함합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이었고, 회심자가 아니라 추종자였습니다.
10~12절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만큼 간절했고, 성경을 통해 확증하고자 ‘날마다’ 상고할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진리를 다 아는 것처럼 오만하지도 않았고, 절반의 진리에 안주하지도 않았고, 새로운 진리에 뒷걸음치지도 않았습니다. 진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향해 열린 마음이 내게도 있습니까? 수동적이고 맹목적으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묵상하며 실천하고 있습니까? 성실한 묵상의 결과가 신실한 믿음과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10,13~15절 바울은 맹목적인 질투심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데살로니가에서 100km 떨어진 베뢰아로, 베뢰아에서 다시 육로로 320km 떨어진 아덴으로 피신합니다. ‘밤’을 틈타 황급히 피해야 할 만큼 상황은 긴박했고, 원정까지 와서 바울의 전도를 방해할 만큼 그들의 박해는 집요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고난을 직면할 때와 피해야 할 때를 잘 분별하며,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 복음 전파에 전력합니다. 복음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다른 두려움은 그분이 주신 사명에 자리를 내어주고 물러갈 것입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말씀 속에 담긴 주님의 메시지를 깨닫게 하시며,
풍성한 은혜로 우리의 삶을 돌보시고
갈 길을 이끌어주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걷는 발걸음마다 하나님의 빛이 전해지게 하시고
열리는 입술의 말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이 드러나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이 시간에도 열방 가운데 주님의 복된 소식 전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모든 걸음마다 지켜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질병과 전쟁, 기근과 핍박, 온갖 자연재해로부터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회복과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나라와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그 인도하심에 따라 순종하는 거룩한 제사장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