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임금이 그의 딸인 정의공주에게 하사한 삼전도에 슬픈 역사의 흔적인 삼전도비가 서 있다.
송파구 잠실 역 근처에 있는 석촌호수는 불과 몇 십년전까지 강물이 넘실대던 한강이었고. 그 자리에 삼전도라는 섬이 있었다.
봄을 화사하게 물들이던 벚꽃이 가을 단푼으로 물들어 ”가을을 모든 나뭇잎들이 꽃이 되는 제 2의 봄이다.“라는 알베르 까뮈의 말을 연상시켜주는 석촌호수는 말 그대로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소설가 이호철 선생이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소설을 썼던 때가 1960년대인데, 지금도 이만 원도 아니고 만원인 서울의 석촌호수,
고려 말의 문신인 한종유韓宗愈의 별장이 있었던 이곳을 세종 임금은 그의 딸인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였고, 공주는 그의 아들 안빈세에게 주었다.
그 삼전도를 조선 초기의 학자인 정인지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경도京都는 뒤에 화산華山을 지고, 앞으로 한강을 마주하여 형승이 천하에 제일간다. 중국의 사군자士君子들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오면, 반드시 시를 지으면서 놀며 구경하다 돌아가는데, 동쪽 제천정에서부터 서쪽으로 회우정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 간에는, 공후귀척公侯貴戚 들이 많아 정자 누대를 마련하여 두어 풍경을 거두어 들였다.
동쪽 편에는 또 토질이 좋고, 물과 풀이 넉넉하여 목축에 적당한데, 준마가 만 필은 되는 듯 바라보기에 구름이 뭉친 것 같다. 그 가운데의 높은 언덕은 형상이 가마(釜)를 엎어 놓은 것 같으며, 그 위에 낙천정이 있는데, 우리 태종 대왕이 선위 하신 후에 편히 쉬시던 곳이다.
남쪽으로는 큰 장에 임하였으며, 저자도 작은 섬이 완연히 물 가운데에 있는데, 물굽이 언덕이 둘리고, 흰 모래. 갈대숲에 경치가 특별히 좋다. 세종대왕이 정의공주에게 하사하였으며, 공주가 또 작은 아들 안빈세에게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강가를 좋아했고, 그래서 중국의 사신들은 한강에서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음을 알 수 있다.
10리 평평한 호수에 가랑비 지나갔는데,
긴 피리 소리 갈대꽃 사이로다.
금 솥의 국 맛 조화調和하던 그 손으로
지금은 낚싯대 메고 석양녘 모래 터로 내려온다네.
이곳 삼존도에 병자호란이 끝난 3년 뒤인 1639년(인조17) 에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가 세워졌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항복하는 수욕(受辱)으로 백성들이 어육(魚肉)을 면하였던 사실을 대청황제공덕비에 담아 세우게 된 것이다.
우리민족 치욕의 기록인 삼전도비의 비신(碑身) 높이는 나라안에서 가장 큰 395cm, 너비는 140cm이며 사적 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수와 귀부를 갖춘 큰 비석인 이 비의 양면에는 왼쪽은 몽고(蒙古) 글씨로 오른쪽에 만주(滿洲)글씨로 그리고 앞쪽에는 한문으로 자경 7푼의 해서로 새겼으며 비액(碑額)은 전서(篆書)로서 비문(碑文)은 이경석(李景奭)이 전(篆)하였다.
서로 글을 짓지 아니하려고, 글씨를 쓰지 아니하려고 하다가 세워진 비, 그러나 이 비의 역사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자 한강물 속에 빠뜨려 버려졌던 것을 1913년에 고적이라는 명목하에 건져 다시 세웠다가 해방 후에는 민족의 치욕적 비석이라 하여 쓰러뜨려 땅에 묻어버렸다. 그 뒤 1963년에 문교부에서 파내어 이곳에 옮겨서 세운 뒤 사적101호로 지정되었다. 서인과 인조가 지나친 대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지지 않고 광해군이 추구했던 실리주의 노선을 제대로 이어갔다면 두 번에 걸친 전란 뿐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중국과 맺어왔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형제관계를 유지하면서 국가적 힘을 비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한 치 앞조차 헤아릴 수 없는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역사는 어떤 형태로 굴러갈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삼전도가 있던 석촌호수를 걷는 사람들은 마냥 행복해 보였고, 단풍은 곱고도 고왔다.
2025년 11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