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우리교회 김대식 형제의 글입니다.
십자가 마을에 종종 올라오는 글 중에 하나를 옮겨 놓습니다.)
내가 이해 되는 것만 믿고파 하는 가짜 믿음
유대인의 믿음은 곧 유대인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다.
즉 자신들이 선택한 여호와 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선택 할수 조차도 없는 예수님이 오니까 죽여버린다.
왜냐 자기들의 이해력 밖의 말만 하셨기 때문이다.
자기가 믿을 만 하고 자기가 이해할만 하고
자기가 선택해서 믿는 것은 다 가짜다.
예수님이 선택해서 뽑힌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선택으로써 예수님을 쫏는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선택 때문에 자신들이 도리어 버린다.
내가 선택하는 것은 곧 내가 버릴 권리도 있게 되는 것이다.
도저히 믿겨지지 않으면서도 아무리 거부하고 거부해도 믿을수 밖에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 의 용서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시몬아 시몬아 라고 세번 묻는 것은 내가 내 선택으로 분명히 버렸건만
도저히 그 사실에서 벗어날수 없는 죄책감에서 벗어날수 없음을 자신이 자인 하면서도
믿겨지지 않는 일이 그분의 사랑이 3번씩이나 확정 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내가 도저히 안 믿겨지는 방식으로써만 일하시고
내가 안 믿겨 지고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것만 골라서 믿겨지도록
걸림돌을 넘어 오신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의 결과로 나타난 새피조물인 나이다.
더 이상 내가 믿을 만 해서 믿는 것(선악)은 없는 세계이다.
내가 이해해서 나온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에게서만 나온 피이기 때문이다.
그 피란 제물 되심이다.
내가 절대로 될 수 없는 제물되신 순종이 그분에게서만 나오는 믿음이요. 나의 믿음은 제물 되어 본적도 없으면서 믿음으로 도배하고픈 탐심뿐이요 내 믿음의 정당성이다.
남을 위해 제물 되어 본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순종이 나올수 있으랴
그러나 내가 믿음직 스러워 하는 것은 그래도 속든말든 내 믿음 뿐이며
그 믿음을 비켜가는 믿음만을 펼쳐서 도저히 안 믿겨지는 믿음으로만 쳐들어 오신다.
결국 내 믿음을 부수시면서 다가오시는 것이다.
내가 가장 믿음직 스러워서 손 놓지 못했던 믿음이 박살 나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이 다가오는 순간이다.
그것도 날마나 날마다 나를 죽이면서 말이다.
그래서 나온 질문이다.
(요 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 21: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요 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 사랑은 지독하게 나를 원치 않는 곳으로만 몰고가는 참 믿음이요
내가 믿고파 믿는 믿음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만 가게 될 것이다.
이 자신만만한 예수님의 영의 믿음이
내가 믿고파서 믿을려고 골라서 믿는 믿음을 늘 지우면서 승리하신다.
당하는 기쁨만 남았을 뿐이다.
그래야
제물 되신 앞 뒤 다 끊어짐을 당해도 상관없는 사랑이
도저히 납득이 안되고 이해불가인 사랑이 왕노릇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