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생명 말씀(2018.7.15.) 말씀/ 누가복음 19:12-27
주를 위해 남기는 삶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15-16)
지난 번 색소폰 동회회 모임 가지면서 이성식 장로님이 부른 ‘우리 이 땅에’라는 복음 성가 가사를 보면서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우리 이 땅에 몸으로 태어나 무슨 일 하다가 무엇을 남기랴. 우리의 인생을 누가대신 살아주나 너와 내가 남남으로 주 앞에 설 때에 우리 무엇으로 주님께 드리랴. 혹은 긴 인생, 어떤이는 짧은 인생. 그러나 누구도 영원히 살수 없네. 천국이 없다면 인생이 이란 허무한 것. 너와 내가 영혼으로 만날 수 없다면 우리 이별을 어떻게 견디랴... 우리 인생은 누구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남이 내 인생 다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 가야할 길이 있고, 그리고 남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짧은 인생 마치고 주 앞에 설 때에 우리 과연 무엇으로 주님께 드리냐는 것입니다. 인생은 그냥 살아서는 안 되고 남기는 자로 살아야 함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한 주일도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1년도 잠시 잠간 금방인데 이 세상에서 뭣 좀 한다고 잠깐 한눈 팔다보면 정말 아무 것도 남기는 것 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영국의 극작가이며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쓰여 있는 글처럼 말입니다. 혹시 그 묘비에 무어라고 쓰여있는지 아시나요?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도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겠습니다.
김태관씨가 지은 장자를 만난 기쁨이란 책을 읽다보면 ‘물 위에 쓴 이름’이란 글이 있습니다. 영국의 천재시인 존 키츠는 폐결핵에 걸려 스물 다섯 젊은 나이에 요절했는데... 친구에게 자기 묘비에 이렇게 새겨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여기 물 위에 이름을 새긴 사람이 잠들다” 그런데 그 묘비명은 바라는 대로 되지 않고 군더더기가 더해졌습니다. “이 묘비에는 젊은 영국시인의 유해가 묻혀있다. 죽음의 자리에서도 고뇌했던 그의 묘비에 이런 말이 새겨지기를 원했다.... 그 이름을 물 위에 새겨 지워지기를 바랬지만 결국은 사람들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새겨 놓았습니다. 동물들은 한 세상 살다 가면 끝나지만 유독 인간은 죽음 후에도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집착이 강합니다. 묘에다 비석 세우는 것으로 성이 안 차서 심산계곡 유명관광지에 가보면 어느 틈엔가 이름을 새겨 놓습니다. ‘영자 다녀감’ 천하 명산이라고 하는 금강산 지금은 철책이 가로막혀 못 가지만 연암 박지원의 글을 보면 거기도 바위마다 이름이 빼곡이 새겨져있어 마치 공동묘지 같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발승암 기문’이란 글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금강산 골짜기에 들어서자 엣 사람과 요즘 사람들이 이름을 바위에 써 놓은 것이 보였다. 큼지막한 글씨로 깊이들 새겨놓아 작은 틈도 없었는데 마침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장터와 같기도 했다. 옛 날에 새긴 이름에는 이끼가 덮혀 있고, 새로 쓴 이름은 붉은 글씨가 환히 빗났다” 사람들은 이렇게 백년도 못가서 잊혀질 이름을 부질없이 심산유곡에 새겨놓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름을 남기려 집착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님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7-20절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하고 보고하자 주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너희들이 한 큰 일들보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허영이 아니라 정말 사람들이 세상에 한번 태어났다면 이름 석자 반듯이 남겨야 된다는 것입니다. 금강산 바위가 아니라 천국의 생명책입니다. 지난번 팔영산에 가보니 깊은 바위동굴 속에도 이름이 새겨져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 소용없습니다. 유명 관광지 명산 바위, 신문 잡지 이름 올라가면 뭐 합니까? 세상에 이름을 날려도 천국의 생명책에 이름일 기록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행입니다. 계시록 20장도 보면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생명책이 있어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책에 이름이 없는 자들은 불 못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15)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남겨야 할 한가지라면 생명책에 이름 남기는 것입니다. 누가 기록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누가복음 본문을 보겠습니다. 19:11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그렇게 므나를 맡긴 후에 돌아와 은화 준 종들이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묻습니다.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합니다. 그 둘째도 와서 말 합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15-19절) 합니다. 장사를 하여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룁니다.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이 종은 주인을 심지 않는 곳에서 거두는 악한 주인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아에 장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한 므나를 땅에 묻어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는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였습니다.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었지만 주인이 주인의 말을 듣고 충성한 자아게 더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2-27절). 본문에서 주인이 종을 칭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기었기 때문입니다. 남기는 것은 처음부터 주인의 뜻이었습니다. 그 주인의 마음을 알고 열심히 수고해서 남겼으니 주인이 칭찬을 하고 더 큰 일을 맡겼습니다. 한 므나를 가져온 종을 책망한 이유는 장사를 하지 않고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본래 마음이 굳은 사람이 아닙니다. 불의 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인을 불신하였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왕 됨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을 위해서 아무런 수고도 남기지도 못했습니다. 그 종은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고 결국 끌어내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주인은 한 므나를 땅에 묻어둔 종에게 이렇게 말 합니다. “왜 은행에라도 맡겨서 작은 이자라도 발생하게 하지 않았느냐?” 요즘 같으면 은행 이자 얼마나 됩니까? 그런데 그 작은 이자라도 남기기를 바라는 것이 주인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 합니까? 그냥 세상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귀한 생명의 은혜를 입고 그냥 왔다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무엇을 하던지 어떤 일을 하던지 왕 되시고 주인 되신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우선 공부에 전념한다고 합니다. 또 우선 사업에 전념해서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생각 합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주님을 위해 남기는 삶을 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믿음으로 살지 않고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이루고 성공해도 낮중에 남는 것이 없게 됩니다. 막상 성공하고 출세해도 후에 보면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믿음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을 때도 믿음으로, 가꿀 때도 믿음으로, 거둘 때도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믿음의 기초 위에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야 주님을 위한 좋은 열매를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17절에 이렇게 말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많이 드리고 남길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욕심 때문에 그게 안 됩니다. 오히려 차라리 믿음으로 사는 가난한 자가 적게 가졌어도 힘써 드림으로 많은 것을 남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연보하는 것을 보시고 가난한 과부가 부자보다 더 많이 헌금했다고 하신 것도 그 의미입니다. 주님을 위해 남기는 첫 째 법칙은 처음부터 믿음으로 , 먹던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처음부터 주님 영광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법칙은 주님과 소자들을 위해 적시에 투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한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비싼 향유 한 옥합을 부은 사건이 나옵니다. 그 가격이 2000만원 호가 하는 비싼 향유라서 제자들은 허비했다고 책망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여인이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오히려 그녀 편에 역성을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인의 일도 전하여 알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것은 향유의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심지어 제자들도 몰랐지만, 여인이 그 장사를 위해서 그 향유를 썼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필요 적시에 쓰는 것보다 더 큰 가치는 없는 것입니다. 비용 산출에 보면 가성비라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값이라도 최대의 가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외국에서 싸게 물건을 사왔는데 여기서는 구할 수 없는 아주 귀한 물건임이 입증될 때 그 값은 백배 천배로 띌 수 있습니다. 목마른 예수님이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은 기름 10드롬 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배고파서 죽어가는 자에게 떡 한 덩어리는 금 한덩이 보다 가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한 믿음의 가정들에게 잘 하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하는 것은 곧 주님께 하는 것이며 생명 사업에 투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깨어있는 자에게 기런 기회가 오는 것이지 물질적 여유가 생겼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이런 기회가 왔을 때 그런 호기를 놓치지 말고 적시에 투자하려면 평상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6:9절 에서는 불의한 세상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세상 재물을 쓴다면 세상 말로 최고의 남는 장사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법칙은 값을 것이 없는 자를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금전이나 무엇인가를 투자 할 때 아주 실리적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 또는 그렇게 할 때 나에게도 잘 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 합니다. 그것은 남는 장사가 아니고 본전치기입니다. 그렇게 섬기는 일은 은근히 기대를 하게 되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설령 기대하는 대로 다시 값음을 받으면 주님께 상 받을 일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4:13-1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래서 이왕 대접하려면 값을 것이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은 없고, 맹인 저는 자들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꼭 장애인들만 대접하라는 뜻은 아니지만 늘 주님의 마음으로 차별 없이 해야 나중에 주님이 값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값아주셔야 진짜 남는 장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론 나의 섬김과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 나중에 잘 되서 고맙다고 대접을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작은 것이라도 정성으로 감사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또 일부러 성의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받겠다고 거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받을 생각보다는 베풀고 나누고 주는 삶을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삶임을 잊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결론은 주님을 위해서이던,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이던 베풀고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주는 것이 남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최고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심 없이 사랑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해야겠지만 어쨌던 주는 것이 남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섬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는 가난할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큰 부자 인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먹는 것이 남는 것이다 하고 열심히 먹고 마시고, 또 땅이 남는 것이라고 땅을 사고, 집이 남는 것이라도 대궐 같은 집을 사지만 이 세상에서 자기를 위해 쌓아두는 것은 단지 짐입니다. 다 썩고 쇠하고, 좀 먹고 아니면 누가 흠쳐가서 나중에는 남는 것 없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는 것만이 자기 것이다.’
서울에 둘째 동생이 음식 장사를 합니다. 원칙은 국산을 쓰는 것입니다. 김치도 직접 담그고, 고춧가루 양념들 국산, 돼지 갈비도 국산입니다. 그리고 조미료도 안습니다. 그런데다 음식 값도 쌉니다. 지금도 아침 점심 식사는 백반이 5,000원입니다. 정직하게 음식을 정성을 다하는데다 싸니 단골손님들이 많이 생기고, 전국에서도 등갈비를 먹으로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일하는 아주머니들 다른 가게보다 더 잘 준다고 합니다. 방송도 여러번 탔습니다. 늘 바쁘지만 많이 남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행복하다고 합니다. 가게 늘리고 싶은 마음이 없느냐고 물으면 없다고 합니다. 제가 그럽니다. 그래 욕심을 내지 말라. 네가 최선을 다할 수 있는 만큼만 하거라. 그리고 남는 다는 것이 돈만 아니라는 것을 알거라. 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음식 먹고 행복하고, 좋아한다면 그게 남는 것이다. 그리고 음식으로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 섬기기도 하고, 고마워하고 그게 다 남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주님의 마음으로 하며 너로 인해서 예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난다면 그보다 많이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느냐? 덕분에 오빠도 네 덕을좀 보지만... 행복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니까~
세상에서도 남는 장사는 무엇인가 다릅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능력을 발휘해서 많이 벌어들이면 많이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장사법칙이 다른 점은 줄수록 베풀수록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욕심이 아닌 주님의 마음으로 하는 것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적게 가진 자도, 적은 능력을 력을 받은 자도 큰 일을 하고 많이 남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맡겨주신 므나가 다르고, 또 은사가 다르지만 묻어두지 않고 잘 사용해서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이 짧은 세상 살아가면서 이윤을 많이 남겨 하나님께 영광 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