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먹은 장미
봄을 시샘하는 추위가 5월 중순까지 성깔을 부리는 탓에 울화통이 터진 장미꽃봉오리가 느슨해진 틈을 타 활짝 피었다. 시간에 쫓겨 립스틱을 쓱 발라버린 젊은 여자의 빨간 입술 색처럼 올봄 장미꽃색깔은 도도하거나 깊은 맛이 없어 보인다.
장미꽃이 수많은 꽃들을 제치고 여왕의 자리를 차지하듯, 어느 곳에서든 세련된 모습이 돋보였던 여자, 기쁘면 화끈하게 기쁘고 슬프면 후련하도록 슬퍼했던 색깔이 짙은 여자, 서서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아파트 담장위로 일시에 벌어진 빨간 장미꽃을 보며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다. 그와 소식이 끊어진 지도 7년이 지났다.
첫인상이 어지간히 눈 높아보였던 그녀가 낯선 곳에 이사와 외로운 것이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것일까, 외로움의 피신처를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냉큼 아래층인 우리 집으로 놀러왔다.
안경 낀 날카로운 눈매가 보통이 아니겠구나 싶었는데, 의외로 싹싹하고 거칠 것 없이 말을 섞는 품새가 의뭉한 성격은 아닌 것 같았다. 도시적인 외모와 학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편의 유명세까지, 평범하게 살고 있는 우리 집 수준으로는 잘 만난 이웃이었다. 그녀는 아침마다 내 남편 차가 주차장에서 보이지 않으면 번개처럼 내려왔다.
“가스 불에 커피 물 좀 올려줄래요?”
내가 낯선 사람과 빨리 익숙하지 못해 너스레를 떨었던 처음 부탁이었는데, 이후로 커피 타는 일은 그녀 몫이 되었다. 나보다 젊고 잘난 여자를 부린다는 그런 우쭐한 기분 때문이었을까, 눈만 뜨면 나를 찾아와 커피를 끓이는 탓에 커피 한통이 한 달 만에 바닥을 들어내도 아깝지 않았다.
우리는 날마다 홀짝홀짝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속말을 섞어갔다.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얇실한 입술이 커피 잔을 밀어내며 사근사근 말을 쏟아내면, 같은 여자가 봐도 참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나와 열 살 차이가 났다. 차이가 있는 만큼 어떨 때는 서로 어긋나고 서운해 하다가도 먼저 다가와 커피를 타는 게 그녀였다. 당연하게 부비고 살아야하는 피붙이처럼 내 딸아이들도 자기 몫처럼 챙겼다.
먹을 것이든 비싼 물건이든 아깝지 않게 내 앞에 풀어놓으면서도 생색내는 그런 짓 따위는 맘에 두지도 않는 여자. 내가 고급 음식점에서 VIP대접을 받으며 맘껏 먹을 수 있는 즐거움도 그녀 덕분이었고, 외국원정에서 돌아오는 그녀의 남편이 우리 집 선물은 빠뜨리지 않고 챙겨오는 것도 그녀의 배려였다.
어찌 보면 나는 마음을 베푸는 쪽이고 그는 물질을 베푸는 격이었다. 나의 무엇이 그토록 좋았을까? 그녀는 남편이 소속되어있는 농구팀과 관련된 인사와 만나는 일 외엔 별반친구가 없었다. 부끄러운 속을 쏟아내어도 새나가지 않는 나를 만나면서 그나마 친구들과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내가 외출이라도 하는 날은 돌아올 때까지 베란다에서 연인처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내 생활 속에 깊이 들어앉아 있는 그녀가 귀찮아졌다. 슬쩍 이사할 생각을 비치거나 싫은 내색을 하면 벌컥 화를 냈다가 서운해 했다가, 예민하게 성질을 부렸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바람막이가 없어지는 두려운 반응 같았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친정 빚 때문에 남편 모르게 속을 끓이며 매달 이자 메우기에 숨 가쁘게 살고 있는 터였다.
숨기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도 친정 일 만큼은 대충 말하는 것 같아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발 없는 말이 천리에서 달려와 귓속말을 해댔다. 그녀가 사방에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마 위에 올라 너덜너덜 해져가는 꼴을 지켜보고만 있자니,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면 앞 뒤 안보고 덤벼들었을 그녀에게 내 몸 다칠까봐 사리고 있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녀의 행동반경도 좁아지고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빈병에 꽂힌 장미꽃처럼 시들하게 앉아있으면 그대로 모가지가 꺾어질 것 같아 조심스레 뜨거운 커피를 내밀었다.
그녀가 신용을 잃어가자 벌레 먹은 장미가 건드리면 우수수 떨어져버릴 초라한 꽃잎처럼 절벽으로 내몰리는 무서운 기류가 느껴졌다. 그녀역시 남아있는 기력마저 싸잡아 쓸어버릴 야멸친 폭풍을 맞을 것인지, 피할 것인지 몸살을 하고 있었다. 인격이 떨어지면 인간의 이성도 간단해지는 것 같았다. 멀리 도망칠 생각을 슬쩍 나에게 비쳤다.
사랑하기 때문에 같이 물에 빠져 죽는 연인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던 나였다. 같이 빠져 죽는 그런 심정이 뭔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아무리 빚진 죄인으로 여러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을지라도, 우리가 서로 주고받았던 정만큼은 지켜주고 싶었다.
나는 그녀에게 멀리 떠나갈 비행기 티켓을 내밀었다. 떠나는 날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올 때, 푸슬푸슬해진 장미꽃 이파리가 흩날리는 신음소리만 들렸다. 빚진 죄인으로 주홍 글씨를 달고 살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구름 속으로 무사히 사라지기를,,, 우리는 그렇게 10년을 부비고 살았던 무서운 이별을 했다.
그녀가 떠나버린 뒤로, 나는 어느 누구도 나의 장미꽃으로 품지 않았다. 오늘 저 아파트 담장에 핀 빨간 장미꽃을 보며 그녀가 새삼스레 생각나는 것은, 낯선 곳에 이사와 짐을 풀고 있는 내가 많이 외로웠던가보다. 그녀도 어느 낯선 곳에서 이삿짐을 내릴 때, 나처럼 문득 내가 그립지는 않을까.
2014. 에세이스트 53호
첫댓글 정이 많은 김선생님 장미 가시에 찔리셨군요.
가시에 찔린 통증도 이제는 그립답니다.
깊어가는 삶과 관계의 너울을 섬세한 여인의 마음으로 비춰 그려주셨네요. 다시 읽어 보게하는 훌륭한 글입니다.
김범송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이번 작품은 유독 마음을 울렸습니다. 친구를 상한 장미에 비유하며 마음 아파 하는 선생님의 고운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다시 알고 보니 선생님이 더 좋아집니다. 누구나 마음 속에 상처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마는 그 상처가 더 깊어질까 내 놓지도 못하고 끙끙 앓게 마련이지요. 그 상처가 깊어질새라 다독이며 지켜봐 주신 마음에 대신 고마웠습니다.
그러면서 그 장미가 부러웠어요. 그런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살아 갈 힘이 나잖아요.
다시 봐도 좋은 작품,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람이 뚝 자르는 구석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때가 많았지요.
이제는 누구에게 쏟아 줄 정도 달리네요
좋게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