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とくがわ いえやす)
출생-사망 : 1543.1.31 ~ 1616.6.1.
오카자키[岡崎]의 성주(城主)였던 무장(武將)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오와리국[尾張國] 지타군[知多郡]의 호족 미즈노 다다마사[水野忠政]의 딸
오다이노 타다[於大の方]이다.
정실부인인 쓰키야마 도노[築山殿]를 포함하여 20명의 배우자들을 맞이하여
11남 5녀를 얻었다.
그 외에도 유자(猶子, 성씨를 바뀌지 않고 입양하여 후견하는 형태로 양육하는 자녀) 1명,
양자(養子) 3명, 양녀(養女) 18명을 자녀로 들였다.아버지인 마쓰다이라 히로타다는 마쓰다이라 다케치요[松平竹千代,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명]가 세 살 때 이혼했으나
처가인 이마가와씨[今川氏] 집안의 원조를 얻기 위해
여섯 살 난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를 이마가와씨 집안에 인질로 보냈다.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는 인질로 가는 도중 당시 이마가와씨와 적대관계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아버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에게 붙잡혀
오다씨[織田氏] 집안의 인질이 되었다.
그리고 2년 뒤 오다씨가 이마가와씨와 강화[講和]를 맺으면서
마쓰다이라 다케치요는 다시 오카자키성으로 돌아갔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쓰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에 다시 인질로 잡혀갔다.
인질로 있는 동안 1556년 요시모토[義元]의 ‘모토[元]’을 따서
‘마쓰다이라 모토노부[松平元信]’라 개명하고
다음해인 1557년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로 이름을 고쳤다.1560년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패하면서
이마가와씨 집안이 멸망하자 오카자키성으로 돌아갔다가
1561년에 오다 노부나가 측에 의탁하고 이름을 ‘마쓰다이라 이에야스[松平家康]’로 고쳤다.
그후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부야스[松平信康]를 오다 노부나가의 딸 도쿠히메[德姬]와
혼인시킴으로써 오다 노부나가와 사돈지간이 되었다.
1564년 종교폭동을 진압하고 이마가와씨의 잔존세력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면서
세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1566년 ‘마쓰다이라’라는 성을 ‘도쿠가와[德川]’로 바꾸었고
이때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1582년 6월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일시적으로 대립하였으나 곧 화해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정적들을 토벌하는데 일조하였다.
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이즈[伊豆] 지역을 포함한
간토[關東] 지방의 지배권을 부여받아 약 250만석의 영지를 경영하는 다이묘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후 거처도 에도[江戸]로 옮기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공을 들인 일본의 동부지방 경영에 매진하였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한 조선출병 때도 조선으로 출병을 나갔던
다이묘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군사는
일본 본토에서만 지원했기 때문에 경제적 힘을 축적할 수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
5다이로[五大老]의 한사람으로서 나이다이진[內大臣, 내대신]으로 승진한 후
1592년부터는 5다이로의 수석(首席)을 차지하면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그러던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포함한 5다이로에게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를 보좌하고 충성할 것을 약속받고
1598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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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5다이로의 세력 균형마저 깨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심복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사전에 눈치 채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먼저 공격해 오도록
1600년 6월 아이즈[会津]로 출정하는 척하며 빈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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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시다 미쓰나리가 군사를 일으켰고 같은 해 9월 회군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세키가하라[関ヶ原]에서 맞닥뜨렸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8만 5천의 서군(西軍),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10만 4천의 동군(東軍)이
격렬한 전투를 벌였으나 서군은 대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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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의 주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고
가담한 88개 가문의 다이묘들을 멸망시키고 5개 가문의 다이묘들을 감봉시켜
총 634만석의 영지를 몰수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로 일본의 전국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1603년 고요제이천황[後陽成天皇]의 명을 받아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이 되었고,
전국의 다이묘들을 직접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에도막부[江戸幕府]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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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60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생전에 한 약속대로 손녀 센히메[千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보내
자신에게 반감을 갖고 있는 세력들을 무마시키려 했다.
1605년 쇼군의 지위를 아들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시즈오카[静岡]의 슨푸[駿府]에 기거하면서 스스로 ‘오고교사마[大御所樣]’라
칭하였다.
형식적으로 정치에서 물러났으나 실권은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 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일개 다이묘로 전락하였음에도 아직 그를 따르는 다이묘들이 많다는 것을 우려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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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도요토미씨 집안의 재정을 고갈시킬 생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생전에
추진하다가 지진으로 붕괴되어 방치된 교토[京都]의 호코지[方廣寺]
대불(大佛)을 재건하도록 종용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에 대한 효심으로 대불 재건에 착수하였고
수년에 걸친 공사로 도요토미씨 집안의 재산은 바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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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씨를 멸망시킬 기회라고 생각하고
1614년 8월 ‘종명사건(鐘銘事件)’을 일으켜 공격의 구실을 만들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4년 10월 곧바로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성으로 갔다.
그러나 난공불락의 요새로 유명했던 오사카성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10만의 병사만으로도 끄떡없었다.
12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강화(講和)를 제안하였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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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강화 내용에 포함되어 있던 ‘오사카성의 바깥 쪽 해자를
흙으로 매울 것’이라는 조건을 이행한다는 구실로
오사카성의 안쪽 해자까지 모두 메우고 성루를 파괴하였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급기야 1615년 초에 “히데요리가 야마토[大和]나 이세[伊勢]로
물러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 안에 있는 낭인(浪人)들을 추방하라”고 제의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이를 거부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5년 4월 30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사카성을 공격하였다.
이미 요새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오사카성은 쉽게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자결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오사카 전투’라 불리는 이 두 차례의 전쟁으로
도요토미씨 집안은 완전히 멸망시켰다.도요토미씨를 멸망시킨 후 1615년 7월 7일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를 제정하여
다이묘들이 세력 확대하거나 연합하는 일을 제한하고
군사적 행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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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천황에 대해서도 겉으로는 존중하였으나 실제로는 천황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우려하여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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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제법도가 공포되고 10일 후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발표하여
천황과 공가 세력의 일상생활까지 규제하고
그나마 유지하였던 의례적인 권위도 제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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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교토에 교토쇼시다이[京都所司代]를 두어 천황과 공가세력의 움직임을
집중적으로 감시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금중병공가제법도를 발표한 지 7일 후 일본의 주요 사원에
‘제종본산본사제법도(諸宗本山本寺諸法度)’를 내렸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법도를 통해 사원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사원은 종교적인 행사만을 수행할 수 있도록 감시하였다.한편 경제적 이익을 위해, 해외 무역에는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1607년 먼저 조선에 국서(國書)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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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이 제시한 제한적인 무역조건을 수용하여 무역을 지속하였으며
중국과의 무역도 중요시하여 난징[南京]과 푸젠[福建] 지방의 상인들과 교역하였다.
서양과의 무역에도 호의적이었고 동남아시아까지 교역의 영역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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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양과의 무역을 촉진하려는 의도로
크리스트교가 유입되는 것까지도 묵인하였으나
일본 내에 크리스트교신자가 급증하고 자신의 측근 중에서도 신자가 많아지자
위기감을 느꼈다.
1612년 막부 직할령에 크리스트교 금지령을 내렸는데
이는 에도막부가 내린 최초의 크리스트교 금지령이었다.
1614년부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교토, 오사카 등 에도막부의
주요 직할 도시에서 크리스트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로써 많은 신자들이 신앙을 포기하였고 일부는 마카오와 마닐라로 추방되었다.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나이가 들어서도 매사냥을 즐기는 등 원기가 왕성하였으나
도요토미씨 집안을 멸망시킨 이듬해인 1616년 초부터 병을 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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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3월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으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6월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