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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ream Phil 원문보기 글쓴이: Dream Phil
2013년12월8일 대림 제2주일(인권 주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3,1-12)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고 예언한다. 이사이는 다윗의 아버지다. 이 가문에 주님의 영이 머물고, 정의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몸에 신의의 띠를 두른 이, 무뢰배를 내리치고,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는 이가 나올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제2독서).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한다. 그는 이사야가 ‘오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라고 말한 사람이다(복음).
무엇보다 먼저 사람을 소중히
-양승국 신부-
권고사직, 명예퇴직이란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대규모 감원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다룬 특집 프로그램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혼났습니다.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의 장년들이 일찌감치 일손을 놓아야만 하는 분위기가 보편화된 우리 사회 현실을 확인하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한창 일해야 할 아까운 인재들이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이곳저곳 기약도 없는 일자리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잠시 화면에 소개된 한 퇴직자 가족의 쇠락 과정은 참담했습니다.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한 가장은 경험부족으로 빚만 잔뜩 지고 행방불명되고 맙니다. 남은 부인과 아이들은 죽을 죄인처럼 이리저리 쫓겨다니다가 마침내 달동네에 둥지를 트지만 금융회사 직원들의 추적은 집요하기만 합니다. 비가 오는 날, 엄마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빚쟁이들로부터 머리채를 붙잡힌 채 길바닥에 내팽개쳐지기가 부지기수였답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시절을 되돌아보지만 마치 전생(前生)에 있었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뿐,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지옥 같은 현실을 견디다 못해 엄마는 아이들과 동반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엄마, 말 잘 들을 테니, 제발 죽이지 말아요. 행복하게 같이 살아요"라고 외치는 아이들 절규에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 벌써 네번째랍니다(KBS 특별기획, '한국사회를 말한다' 참조).
오늘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우리를 향해 외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김태훈수사
시작기도
주님, 회개로 이끄시는 당신의 초대를 알아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Lectio)
마태오 복음사가는 오늘 말씀을 ‘그 무렵에’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시간을 지칭하는 단순한 표현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출현이라는 구원 계획의 중요한 한 부분을 다루면서 특별한 계시의 시기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사건을 언급할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스바 1,15; 아모 9,11; 즈카 12,3-4; 이사 10,20) 이스라엘 안에 예언의 목소리가 끊긴지 수백 년이 지나 이제 하느님께서 침묵을 깨시고 세례자 요한이라는 중개자를 통해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시는데, 요한의 행동과 말 안에 바로 종말론적 특성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엄청난 반향을 얻은 선구자 요한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합니다. 이 메시지는 예수님이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실 때의 메시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마태 4,17) 이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각각의 개인으로 보기보다 그들을 통해 당신 백성을 이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엿보게 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 하느님 나라라 함은 예수님이 이 땅 위에 오심으로써 인류가 체험할 수 있게 된 하느님의 통치와 축복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온전히 나타나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 자체를 하느님 나라와 동일시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표현을 쓸 수 있습니다. 곧 ‘가까이 왔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띠는 뉘앙스는 이미 행위가 과거에 이뤄졌고 그 효과가 현재에도 계속 이어진다는 것인데, 예수님은 이미 오셨고 사람들 가운데 계속 현존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이분의 오심을 통해 일찍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셨고 예언자들을 통해 예고되었던 축복의 황금시대가 그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활짝 열리게 됩니다.
이 축복의 시대는 오늘 1독서에서 묘사된 피조물 전체의 평화로 특징지워집니다. 종말론적인 구원의 때에는 모든 것이 달라지고 더 이상 궁핍과 울부짖음, 투쟁이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분이 오셨을 때 천사들은 그분이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실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루카 2,14) 하지만 이러한 평화를 외적인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은 마음과 삶을 변화시켜 주시는 평화의 하느님을 자신 안에서 체험합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부분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느님의 초대를 받아들인 사람만이 그 평화를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빌려 쓰고 있는 세례자 요한에게 회개는 하느님의 구원에 참여하기 위한 필수적인 길이고 이 길은 단순한 참회 예식의 참여를 뛰어넘어 근본적인 삶의 응답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 선행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중개자들을 통해 정화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초대 불응이라는 단순 사실 그 이상의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곧 그는 하느님의 적대자가 되고 그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내립니다. 그분과 함께하지 않는 자는 그분을 반대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2,30)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에 거부감을 느낀 나머지 세례받기를 거부한 다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 대표적인 예(21,25)이며 그들은 예수님의 적대자가 됩니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하느님의 종말론적인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모든 이에게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내려오신 이 새 시대에는 회개에 기초한 새로운 마음, 새로운 삶이 필요하다고 역설합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고 그리스도께 속한 이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주장한 사도 바오로의 메시지(로마 2,28-29; 갈라 3,7.29)와 통합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그분의 오심을 준비하는 우리 각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우리를 회개의 삶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초대에 온순히 순종할 때 우리는 새로운 성령강림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나날이 태어나시는 예수님을 체험할 것입니다.
묵상(Meditatio)
회개는 언젠가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 할 우리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동사가 말해 주듯 ‘회개하다 ב는주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행동을 끊임없이 그분께로 향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기도(Oratio)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에페 2,14)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 대림절
-서공석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출현과 그분의 설교 및 예수님에 대한 그분의 예고 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 운동에 일시 가담하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오복음서(11,7-14)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요한을 극찬하셨습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도 훌륭한 사람’, ‘여자 몸에서 태어난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인물’,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 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보다 더 훌륭하다고 사람들이 오해할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이 세례 받은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합니다. 동시에 그들은 “주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라.”(40,3)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파견된 요한이라고 해석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이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요한과 예수님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고 싶은 초기 교회 공동체의 뜻이 담긴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요한의 입을 빌려 ‘그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라고 선언하게 하는 것도 그런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요한은 종도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요한은 그 시대 팔레스티나의 세례운동가들 중 한 분입니다. 그 시대에는 다양한 세례운동들이 있었습니다. 물에 몸을 잠그거나 씻으면서 죄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신심운동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그 시대 유다교 기득권층의 가르침과는 달랐습니다. 율사들은 오로지 율법준수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 고집하였습니다. 성전의 제관들은 오로지 성전 의례의 준수만이 올바른 신앙생활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그 시대 세례운동가들은 그들을 비판하면서 세례운동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요한이 그들을 비난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말로 시작하여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또 그들에게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이 하느님 앞에 어떤 특권을 주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원(起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출신지방, 출신가문, 출신학교, 취득한 자격증 등은 모두 우리 기원의 한 면을 말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랑하며 사는 우리들입니다. 요한은 그런 기원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느님 앞에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이고 실천이라는 말씀입니다.
요한의 세례운동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삶을 바꾸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을 찾아가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자기 삶을 바꾸고 새로운 실천을 약속하면서 세례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도 삶을 바꾸는 회개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은 다소 위협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속에 던져진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하느님의 삶을 배워 실천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6).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나 비를 내려 주십니다.”(마태 5,45). 하느님의 자비를 본받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에 광야는 하느님을 만나는 곳(호세 2,16 참조)입니다. 요한의 복장은 구약성서(2열왕 1,8 참조)가 전하는 엘리야 예언자의 것입니다. 요한은 음식도 많이 절제하였습니다. “요한이 와서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사람들이 말한다.”(마태 11,18)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살던 방식을 따랐습니다. 요한의 가르침은 그 당시 유다교 사회에서 유례를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사람을 아끼는 것이었지만, 그분의 삶은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있어서 요한과는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특수 복장을 하지도 않으셨으며, 그 시대 유다교가 요구하던 단식에도 충실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식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유대인들로부터 지적 받기도 하셨습니다(마르 2,18).
예수님은 사람들과 함께 사셨습니다. 하느님은 성전 안에만 혹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과만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벗어난, 성지순례, 철야기도, 제물봉헌, 계명 준수 등에만 계시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 한가운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사람들과 주거를 달리하거나 복장을 달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사는 현장을 외면하고 율법 혹은 규칙만 생각하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자비롭고 용서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은 그 자비와 용서의 원천(源泉)으로 살아 계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바였고, 그것이 성령이 오셔서 우리 안에 실현하시는 일입니다.
지금은 대림절입니다.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입니다. 회개는 대단한 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회개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분의 자비를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고 요한은 오늘 복음에서 말합니다.
회개는 새로운 실천을 낳습니다. 하느님이 아버지로 함께 계시기에 그분에서 비롯된 실천입니다. 하느님이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기에 우리의 이웃을 형제자매로 보면서 하는 실천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웃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우리가 버리고 외면했던 이웃에게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시선으로 다가가는 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 우리는 분하고 억울할 때, 또 사람을 미워할 때, 자유를 쉽게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숨결로 살아계시며 일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그 숨결 따라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자유를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회개는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새로운 실천이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