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표교 ~ 조선 세종때 청계천에 가설한 돌다리였다.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로 이곳에 이전했으며. 2005년청계천 복원 당시 원래
자리에 다시 놓으려고 했으나, 복원된 청계천의 폭과 수표교의 길이가 맞지 않아 옮겨지지 못했고, 복원된 현재 청계천 자리에는
수표교 이미지를 살린 다리를 가설해 놓았다.
국립극장 좌측으로 오르는 산책로. 300여 미터 가면 우측 목제 계단길로 다시 이어지는 성곽길이 나타난다.
그냥 편안하게 산책하시려면 좌측산책로를 통해 N타워, 팔각정으로 가시면 됩니다. 국립극장 옆 버스 승차장에서는 N타워로
가는 버스들이 정차합니다. 요즘 역사탐방 겸 건강 차원에서 옛서울 (한양) 성곽길을 답사하거나 오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포토 포인트가 마련되어 있어 시내 전경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남쪽면 남산산책길에서
남산의 소나무 숲 전경. 꽤 운치있어 보입니다. 봄엔 남산 산책로가 벚꽃터널로 장관이죠.
N타워. 방한했던 외국인들이 '서울의 관광 Spot 추천지' 1위에 랭크된 곳이 되었습니다. 입장료가 꽤 하죠.
한강 넘어 멀리 관악산이 보입니다.
남산 팔각정에서
시간관계상 오늘은 성곽길을 오르지는 않았지만, 장충동을 출발 반얀트리호텔 (옛날 타워호텔)
옆을 경유해서 도로를 횡단 남산 국립극장옆을 지나 다시 좌측편 남산 산책로에 진입해 약 300
미터 걷다가 다시 우측 계단으로 오르는 성곽길을 선택해도 됩니다. 참고로 다음에 남산쪽 서
울 성곽길 가실분을 위해 관련 지도 사진을 올려봅니다. ( 서울 성곽길중 가장 많은 분이 찾는
곳은 성균관대 후문 와룡공원 방면에서 숙정문으로 올라 청와대 뒷편 산에서 창의문으로 내려가
는 코스입니다.)
성곽길 지도 ~ 관련 웹페이지에서 상세 안내지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장충체육관 뒷편 골목길로 진입 신라호텔 외곽과 반얀트리 호텔을 지나 국립극장 옆으로 올라가는 길 안내한 지도
흥해시면(興海始面) 이란 글이 각인된 돌 모습 < 경북 흥해에서 차출된 백성들이 쌓았다는 표시이다>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태조는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이듬해인 1396년 서울성곽을 쌓았다. 농한기인
1∼2월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000명을 동원했다. 주로 영호남과 강원·평안·함경도에 거주하던 사람
들이었다. 경기·충청·황해도 거주민들은 바로 전 해에 궁궐 공사에 차출됐기 때문에 면제됐다. 압록강과
두만강 지역도 국방의 임무를 고려해 동원하지 않았다. 당시의 공사로 서울성곽은 북악산∼낙산∼남산
∼인왕산 등 이른바 내사산(內四山)을 잇는 총 길이 18.6㎞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몇 달 뒤 가을 농한기
인 8∼9월에는 7만9400명이 동원돼 49일간 2차 공사를 벌였다. 이때는 봄에 쌓지 못한 동대문 구역을 완
공하고, 성곽의 통로인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지었다.
당시 태조는 성곽을 지으면서 ‘포악함을 막아 백성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태조가 대외적으로는 외적의 공격을 막는 기능을 하는 한편 대내적으로는 국토를 지키는 조형물로서 조
선의 상징물로 삼았다고 분석한다.
서울성곽의 축조 시기별로 확연한 기술 차를 느낄 수 있다. 태조 5년(1396)에 축조된 성벽은 언뜻 봐서
도 엉성한 느낌이다. 큰 메주만 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세종 4년(1422년)의 성벽은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면서 사이 사이에 잔돌을 쌓았다. 숙종 30년(1704년)에 쌓은 성벽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모습이다. 2자x2자의 석재를 정사각형에 가깝게 규격화해 튼튼하게 쌓았다. 태조 때와 비교해 300년이
흐르면서 축적된 기술을 보여 준다. 서울성곽의 성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글자가 많이 새겨져 있다. 이
는 누가, 어느 구역에서 일했다는 공사 실명제의 흔적이다. 천자문이 새겨진 구간은 태조 때 쌓은 구간이
고, 도나 현의 이름을 새긴 구간은 세종때 쌓은 구간이다.
세종 4년(1422)에는 대대적인 보수·정비 공사가 진행됐다. 1∼2월 38일 동안 전국에서 32만 명이 동원됐
다. 당시 서울의 인구가 10만 명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공사였다.
천자문이 적혀 있는 것은 성벽 축조 당시 공사 구역을 표시한 것이다. 서울성곽은 처음 쌓을 때 전체 5만
9500척을 600척으로 나누어 총 97 구역으로 구획하고 천자문 순서로 표시했다. 북악산 정상에서 天地玄
黃(천지현황)의 天(천)자로 시작해 낙산·남산·인왕산을 거쳐 弔民伐罪(조민벌죄)의 弔(조)자로 끝난다.
성벽 구역 곳곳에는 辰字終面(진자종면·진자구역 끝지점)이나 崗字六百尺(강자육백척·강자구역 600척)
같이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도나 현의 담당 지역을 표시했다. 위 새겨진 흥해시면
(興海始面)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다.경상북도 포항시 흥해에서 온 백성들이 축조한 곳임을
나타낸다. 이런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돼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9. 29일 감상한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 줄거리
전직 테니스 선수 토니(Tony Wendice: 레이 밀런드 분)는 부자인 아내 마고(Margot Wendice: 그레이스
켈리 분)와 결혼한 뒤, 테니스를 그만두고 사업가로 그럭저럭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아내가 옛 동창이
자 추리 소설가인 마크(Mark Halliday: 로버트 커밍스 분)와 사랑에 빠지고 사업조차 곤경에 처하자 아내
의 유산을 노리고 청부살인을 계획한다.
그는 감옥에서 나와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는 옛 친구 스완(C.A. Swan/Captain Lesgate: 안소니 도슨 분)
을 끌어들여 마고를 죽이도록 계획을 꾸미고 자신은 알리바이를 위해 연적 마크와 함께 사교모임에 참석
한다. 그러나 마고는 자신을 목 졸라 죽이려는 스완과 격투를 벌이다 엉겁결에 바느질 가위로 그의 등을
찌르고, 스완은 뒤로 넘어지면서 가위에 깊이 찔려 숨지고 마는데.....
토니는 교묘하게 아내를 살인범으로 몰아가고 마침내 사형언도를 받게 되자 그녀의 재산을 멋대로 쓰고
다닌다. 그러나 마고의 애인인 마크와 형사반장(Inspector Hubbard: 존 윌리암스 분)이 사건 전말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살해된 남자의 침입 경로를 끝까지 추적하던 중 결정적인 증거물인 현관 열쇠의 비밀을
알게 된다. 결국 이들은 남편이 모든 일을 꾸며낸 장본인이라는 것을 밝혀낸다.......
그레이스 켈리 이야기
고상하고 우아한, 그러면서도 도도한 매력으로 '그레이스'라는 이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그레이스 켈
리(Grace Kelly)'.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모나코의 왕비, 그리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영
화 같은 삶을 살았던 세기의 미인이었다. 1950년 스무 살에 연기를 처음 시작하고 서부 영화의 고전
하이 눈〉에서 보안관으로 분한 게리 쿠퍼의 아내 역을 맡아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레이스 켈리. 이후 5
년 동안 〈다이얼 M을 돌려라〉 〈나는 결백하다〉 〈상류사회〉 등 다수 작품에 출연했다. 짧은 연기 경
력에도 1954년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었다. 영화 촬영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
던 그녀는 26살 되던 1954년 화보 촬영을 위해 프랑스 남부 지중해의 모나코를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서
당시 왕자 신분이었던 레니에 3세를 만나게 된다. 그레이스를 보고 한 눈에 반한 레니에 3세는 12캐럿
다이아몬드 반지를 건네며 청혼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미련없이 은막을 떠났다.
왕비의 길을 걷게 된 켈리. 그녀는 공주 캐롤라인과 앨버트 왕자, 스테파니 공주를 차례로 낳으며 모나코
국민의 한없는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1982년 불의의 자동차 사고로 삶을 마감하게된다. 그 죽음에 얽
힌 음모 이야기도 많은 사람들의 화제를 모았다.
"나는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는 그저
아름다운 한 여자로 기억되고 싶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만인의 연인에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왕비가 됐
던 그레이스 켈리. 영화 〈백조〉는 그녀가 왕비가 되기 직전의 작품인데 그녀의 삶과 흡사한 내용으로
흥미롭다.
레니에 왕과 그레이스 켈리
첫댓글 혹시나해서 접속했는데 역시나 임다.스피드에 너무 너무강합니다.서울온지 13년만에 매일 남산탑만 바라보다 오늘 팔각정에 올랐네요^^영화도보고 친구들 고마워~
낭만에 대하여 좋슴다.서울구경 이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