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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96년 2월 27일 최성덕 교무님 특강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에 이렇게 훈련받기 쉽지 않다. 다들 집에서 놀려고 하거나 외부에 가고 싶어하는 성향이 많을 때인데 이렇게 함께 훈련을 나게 되어서 좋은 것 같다.
<오늘의 이야기>
1. 독일 개척의 이야기
2. 유럽과 독일 사람들에게 여행을 통해서는 느껴보지 못한 배울 것들
- 현장에서 감격스러웠던 모습
3. 초발심자의 공부
□ 독일 개척사
ㅇ 독일의 문화적 충격을 받았던 점.
쾰른 유학생회(원불교 자녀들 중 쾰른에 있는 사람들)이 법회를 보았으면 하는 연락이 중앙총부로 갔다.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줄 모르고) 그래서 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300km정도를 달려서, 한달에 한번씩 가서 법회를 보았다.
유학생들과 법회 후 축구를 하고 사우나를 해야 하는데 보니 남녀 혼탕이었던 것이다.
수영장에서도 남녀 혼탕에 벌거벗고 수영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동네 목욕탕도 혼탕이었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이 다르다고 첫 번째로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이다.
교무가 되어서 있다가, 원광대학교 숭산 박광전 종사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분께서, 한달에 한번 정도는
“상덕은 학교에 오래 머물 생각 하지 말라”는 말씀을 내게 하셨다.
너 같은 사람은 일선을 나가서 활동해야지, 대학에 나 하나 받들고 있으면 안된다 하셨다.
당시 교당 풍토는, 교무님들이 생활이 어려워 대학에 오래 머물러 있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집에 있는 정토에게 총장님의 뜻을 이야기하고 바로 사표를 내었다.
그리고 고생 한번 합시다, 하였다. 그런데 국내 교화를 할 것인가? 국제 교화를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전팔근 선진님이 미국을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워싱턴에 가는 것을 준비했다.
그런데 이후, 한번 더 불러서 ‘미국은 사람이 있으니 유럽으로 가라’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고생할 수 있는 기본적 마음자세는 가족 간에 다 되어있으니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다. 전팔근 선진님 말씀은, 뉴욕은 LA에 이미 교무들이 나가 있으니, 아무도 발을 딛지 않은 유럽으로 가라는 것이다.
“나는 갈 수 있습니다,” 하고는 대신 나와 부총장님이 둘이 가서, 원불교를 할 수 있을지 아닐지를 독일 사회나 교민들을 보고 오자 하였다.
그런데 가서 보니, 간호사들, 광부들이 와서 있었고, 원불교를 모르더라, “원래 불교”인가요, 라고 물어보는 식이었다.
독일에 들어왔는데 확정적으로 교당이 잘 된다는 보장도 없고 마침 독일축제에 가서 사탕을 눈에 맞은 것을 계기로 참 눈물이 다 났다.
독일 수퍼마켓에서는 소꼬리가 개들에게 주는 음식이었다. 그것을 냄비에 밤새도록 고아먹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들어와서 10분 내로 여기를 떠나라 하였다.
그길로 짐을 꾸려서 한국으로 와서 독일에 갈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독일 비자를 기다려보는데, 1년간 기다려도 비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국내교화를 준비하고 있는데 보니 통일교 느낌 때문에 저어했던 것이다.
가족들도 1년간 짐을 다 싼 상태에서 기다려야 했다.
ㅇ 독일에서...
독일에 도착하니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더라.
도착 당일 작은 아파트를 구해서 들어갔는데, 그날 저녁 식구(정토, 아이들 셋과 교무님)들이 모여서 심고를 올리는데 다른 말이 없고 “사은님, 살려주세요” 하는 말밖에 안나오더라.
그러는 와중에 원불교라고 하니 사람들이 오기 시작해 7~8명이 왔다.
그 중 한 사람이 와서 입교를 하겠다고 하더라.
여기 와서 교화하는데 입교까지 하겠다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그런데 그 사람이 얼마 지난 후 갑자기 와서 입교를 취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무척 낙심하였다.
교도 하나를 입교시키려고 그 정성을 다했는데 원불교 교도증을 가져다 놓고 절하고 나간 것이다.
나는 그 집 주소를 찾아가서, ‘법명은 교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중앙총부 어른들이 주는 것이니 거두어주시고, 언젠가 원불교에 오고 싶다면 오십시오’라고 편지를 써 놓고 우체통에다 놓았다. 그리고 ‘법신불이시여, 이집 식구들이 다시 법명증을 가지고 교당에 오시기를 기도드립니다’라고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드렸다.
그러고 있던 얼마 후, 입교증을 두고 갔던 교도가 찾아왔다.
그리고 입교증을 놓고 간 뒤로 생겼던 일을 내게 이야기하더라.
꿈 속에 검정넥타이, 검정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집안에 위험한 일들이 나타나더라는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 나 좀 살려주십시오, 하고 다시 나타난 것이었다.
사실 내가 그 사람에게 저주를 하거나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 인간이니 미워는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때 그렇게 시멘트 바닥에 무릎꿇고 드린 기도를 사은이 들어주신 것이 아닐까 싶다.
어느 날은 독일 뢰벤스부르크 원법우 교우가 다니게 되었는데
아무리 입교를 하라고 해도 안하는 것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입교를 한다고 하는데
꿈 이야기를 하더라. 꿈 속에 사람들이 모여있는데 이름없는 나무가 있더란다.
그 얘기를 듣고, 아 내게 이름이 없구나 해서 원법우 교우님이 오셨다는 것이다.
법신불이 나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다닌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한번도 아니다.
안명원 교도님 - 한번 발심한 이후 초지일관.
부인이 전혀 종교심이 없었는데 큰 자동차 사고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원불교를 이해하게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10주년 기념 행사-3가지를 모두 은혜롭게 치뤘다.
- 음악회 : 한국 음악가 초청
- 강연회 : 교정원장님 초청
- 의료봉사 : 한의사 4명 초청, 한국인 1000명이 왔다갔음.
이 모든 것이 성황리에 무사히 끝났으며
특히 의료봉사는 한약재를 들이는데 외교관을 동원하여 외교문서라고 하고 통과했다.
한의사들을 파리교당에 데려다주고 늦게 돌아오는데 고속도로에서 바퀴에 펑크가 났다. 새벽 4시..
그래서 어찌할까 어떤 휴게소에 들어갔더니 마침 정비차가 앞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 진리가 사심없이 한 나를 길거리에 재우지 않으시는구나” 생각했다.
사심을 가지고 노력하면 사람들이 도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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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시민들의 우수성
1. 택시-헤맨 비용은 받지 않겠다.
2. 독일에서 차 만나서 반가워서 손 들었더니 ‘너 돈 있느냐, 내가 꾸어줄께’했던 이야기.
3. 차 안내 - 자전거 타는 젊은이에게 물어보았더니 자전거 뒤를 따라오라 하면서 안내해 주더라.
우리 국민소득 2만불에서 멈춰있는데, 나는 그것이 선진의식의 부족이 아닐까 생각한다.
독일은 사람들이 이사가서 가장 먼저 지도를 산다.
누가 물어보면 답해주기 위해서.. 정확한 안내를 위해서..
길 물을 때 독일 사람들은 본인이 모르면 ‘나 따라와라’ 하면서 아는 사람을 연결해 준다.
그런데 우리들은 누가 물어보면 “몰라요” 한다.
독일에서 16년 살고 왔더니 한국이 더 어렵더라.
내가 불공의 상대처를 찾아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알아두자.
여러분 핸드백, 가방에 전차 어디에서 가는지 서너개는 가지고 다니자.
윤리적인 도덕적인 부분은 우리가 맡아서 해야 한다.
퀴즈시간 - 성직자들이 성당 고치기 위해서 퀴즈에 참여하기도 함.
우리도 그렇게 휴머니스트처럼 민중을 감동줄 방법은 없을까 생각함.
□ 고호 이야기
-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상태에서 10년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누가 한 사람도 인정해 주지 않는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고호의 인상임.
고호는 불쌍한 사람이다. 생전에 그림을 딱 1점밖에 못 팔았다.
나는 가끔 고호 그림을 암스테르담 고호 미술관에서 보았다. 여러분에게도 추천한다.
□ 스칼라 극장
이태리 밀라노 스칼라 극장은 230년 되었는데 스칼라극장 객석이 가장 무섭기로 유명하다.
왜냐하면 관객들이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만약 솔로가수가 틀리면, 당장에 일어나서 지적한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교무들도 객석 잘못 생각했다가는 큰일이다.
늘 오는 교도님들이라고 대충 해서는 안된다.
□ 아침좌선을 5시반에 한다.
어떤 때는 새벽 1시반에 깨어서 잠을 잘 수가 없다.
5시에 나가기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나는 나가서 죽자 생각하고 나간다.
엄격함을 지키자. 죽비 칠까.
유럽사람들-흔들릴 때는 흔들리더라도 지킬 때는 잘 지킨다.
독일 빵집 - 아침에 빵을 가지러가는데, 16년간 가는데, 추리닝 입고 오거나 슬리퍼 끌고 오는 사람 못봤다.
아닌 것은 분명히 지키려는 노력이 있다.
독일에서 한 사람은 보고 가려고 했는데 한 사람을 못보고 갔다.
독일 사람들 보고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지키려고 하느냐고 물어봤다.
지키려고 하는 것.
뢰겐스부르크에 큰 식당
- 10마르크, 20마르크 등의 식사, 맥주, 음료수 등 메뉴가 3가지가 있다.
일류 식당에서 3가지 메뉴를 가지고 있는 것은 혼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돈 없이도 이 식당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 필요하다. 회사가 무너질 때까지 그것을 지켜라.
4000원, 8000원.
젊은이나 돈 있는 사람들이 10마르크나 20마르크를 시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들은 그렇게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킬 것은 지키는 것이 유럽 사람들의 자랑.
창문에 예쁜 꽃을 마련해 놓는 것.
나는 한국의 상계교당에서도 꽃꽂이를 그렇게 한다.
독일식으로 해 놓으면 누가 해놓느냐고 한다.
독일에서의 사람 초대.
차 마시고 할 때 센티미터도 틀리지 않게 세팅해 놓는다.
독일사람은 온다고 연락받은 집은 다 그렇게 해 놓았다.
온다고 약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와서 놀랄 정도로 세팅을 해 놓아야 할 것이다.
감동- 나를 위해서 이렇게 준비했구나.
독일의 집 초대 : 피아노, 플롯 등 자기 집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줌.
- 말로만 불공해서는 안됨.
- 우리 상계교당은 엄격함.
그렇게 정성이 들어간 것이, 대종사 실상사 노부부의 이야기가 맞다고 생각.
불공에는 감동이 들어가야 한다.
안나 파블로바.
러시아 사람. 영국과 프랑스에서 무용하다가 헤이그에서 젊은 나이에 죽었음.
지젤.. 백조가 죽는 간단한 무용을 연출해야 함.
안나 파블로바가 그것을 연기하면 백조가 죽는 것보다 더 백조같다.
- 안나 파블로바의 길 그대로 다 써치라이트가 비춘다. 가지고 갔던 꽃다발들을 사람들이 던졌다.
너도 죽으면 너 없는 연단에서 객석에서 사람들이 너 있는 듯한 법설을 듣고 박수를 받을 만한 법설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가슴에 꽃히더라.
청년들이 감동을 줄 수 있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
히말라야의 산.
1950년대 전에 히말라야를 올라갔던 사람보다, 이후에 정상을 밟은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왜?
장비? 체력?
마지막 베이스캠프를 예전에는 밑에서 쳤는데,
요즘은 베이스캠프를 코앞에서 친다.
여러분의 이상을 팔부능선에다가 치고 그 이상을 치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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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과 답변
최성현 - 왜 다시 돌아오셨는가
교무님 - 성현법문 중 10년 이상 머무르지 말라.
귀소본능, 여기 왔더니 다문화를 적응해서 오히려
박순명 - 가서 일원상서원문 어떻게 읽는지
교무님 - 기본적으로는 한글로....
문화적 차이에 따라 문제
성직자를 사회적으로 높게 보는 사회이다.
여행 때도 성직자 가방은 열수가 없다고 한다.
덕분에 된장, 고추장 등도 많이 가지고 와서 나눠주었다.
그리고 여행, 기도 등 많이 하고 왔음.
아프리카 교당 개설 때에,
첫 번째 한달동안 와서 현지인들을 매치시켜 준 것은 나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 교당..
나는 사람들에게 교무하며 개척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밤이 새도 나올 말 들을 말은 많지만 이제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