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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녕군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진열된 온녕군 석곽 모습 |
온녕군 정(溫寧君 程)은 1407년(태조 7)에 태종대왕의 3남으로 태어나 1453년(단종 1)에 별세하였다. 신빈(信嬪) 영월신씨 소생이다. 배위는 익산군부인(益山郡夫人) 순천박씨인데 슬하에 아들이 없어 근녕군(謹寧君)의 차남 우산군(牛山君)을 계자로 삼았다. 우산군이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문화류씨를 맞이하여 6남을 둠으로써 후손이 번창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산군과 그 아들 6형제가 함께 참화를 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
▲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진열된 온녕군 석곽 모습 |
우산군의 차남 무풍군(茂豊君) 총(摠)은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루는 종친 학자이며 예술가로 그의 <지환부(指環賦)>는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해 내려온다. 무풍군은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인데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종친이 사류(士類)와 어울려 정치를 비방했다는 죄목으로 함경도 온성으로 귀양을 갔다. |
▲ 온녕군 사당 입구 전경 |
그러나 단천역(端川驛) 벽서사건(壁書事件)으로 또다시 장(杖) 백대를 맞고 거제도로 유배지를 옮겼다. 뿐만 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아버지 우산군과 형인 용성군, 네 아우 한산군 · 화원군 · 금천군 · 청양군도 모두 먼 섬으로 귀양가고 가족들은 종적(宗籍)에서 삭제되어 모두 서인이 되었다. |
▲ 사당 입구 좌측에 조성된 온녕군 신도비 |
▲ 내부에 조성된 사당인 혜덕사(惠德祠) 모습 |
전주리씨 온령군파 선영 안내도 |
▲ 안내도 우측 상단의 1번이 온녕군 묘이며, 본 자료에서는 온녕군과 2번 우산군과 8번 운양정 묘역만 소개합니다. |
이들 7인을 칠공자(七公子)라 한다. 이렇게 7부자가 무풍군 사건으로 모두 귀양을 갔는데,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6년 후인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 무풍군은 죽음을 당하고, 그 후 2년 뒤인 1506년(연산군 12) 6월 24일 아버지 우산군과 공의 형제들이 일시에 죽음을 당했다. |
▲ 사당 우측의 연못을 지나면 온녕군 아들 묘역이 있습니다. |
▲ 우산군 하단의 운양정(雲陽正) 묘역 - 우산군의 손자인 듯... |
이렇게 7부자가 비명에 감으로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으나 다행히 그 해 9월 2일 중종반정 때 신원(伸췦)되었다. 그때 우산군에게는 가덕대부에 추증되고 정민(貞愍)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장남에게는 승헌대부 용성군, 차남은 명선대부 무풍도정, 3남은 명선대부 한산도정, 4남은 명선대부 화원도정, 5남에게는 명선대부 금천도정, 6남에게는 명선대부 청양도정에 추증되고, 모두에게 묘지(墓地)가 하사되었다. |
▲ 온녕군의 아들인 우산군(牛山君) 묘역. 온녕군은 후사가 없어서 동생인 근녕군의 둘째 아들 우산군을 계자(繼子)로 맞아... |
그후 1705년(숙종 31)에 7공자에게 각각 정려문이 내리고, 1735년(영조 11)에는 무풍군으로 명의대부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추증되고, 1796년(정조 20)에는 무풍군에게 소민(昭愍)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리고 1900년(광무 4)에 4남부터 6남까지를 자헌대부 군으로 추증되고, 1910년(순종 4)에는 6형제에게 정민(貞愍) · 충의(忠毅) · 민절(愍節) · 혜정(惠貞) · 효의(孝懿) · 정헌(貞憲)이란 시호가 각각 내려졌다. |
▲ 다시 사당으로 돌아 나와서 사당 뒷편 산자락을 한참을 오르면 온녕군 묘역이 나타납니다. |
우산군 아들 6형제가 모두 후손을 두어 자손이 번창하여 문과급제 5명을 배출했다. 기타 군수 · 현감 · 부사 · 도정 등 중위 급의 관직을 지낸 이가 많고 문집을 남긴 학자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온녕군 후손 중에는 교육자가 비교적 많고 그 중에서 박사학위 소지자와 대학 교수가 많다. -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홈페이지 내용 발췌 - |
▲ 태종의 서3자인 온녕군(溫寧君) 묘역 전경 |
온녕군의 묘는 당초 경기도 양주군 미아리(현재 성북구 미아동 부근으로 추정)의 금표(禁標) 지역 안에 있었으나 1962년 서울시의 도시계획으로 현재의 위치인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대자리로 이장하였다. 즉, 현재의 묘는 40여년 전인 1962년에 조성한 것이다. 이장시 석관이 발견되었으며, 부장품은 매우 간소해서 구리수저 1벌과 분청사기 항아리 2개 접시 2개가 발견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
▲ 봉분 좌우로 옛 묘비가 서 있습니다. |
또한 500년이 넘은 왕자무덤의 파묘는 과연 무엇이 나올까 하고 학계와 언론 등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하지만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을 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온녕군의 묘는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 서편에 위치하여 있으며,주위에는 온녕군의 묘소를 비롯하여 그의 아들,손자들의 묘가 집단으로 조성되어 있다. |
▲ 온녕군 묘역 우측편에서 바라 본 모습 |
온녕군의 생전의 일면은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의 다음과 같은 글에 의하여 엿볼 수 있는데 그 글을 보면 온녕군은 생전에 풍류를 즐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 잠두봉 아래 양화나루 일대 경치 좋은 지역(지금의 절두산)은 세종 때에 이미 태종의 제7왕자인 온녕군 정(溫寧君 程)이 정자(亭子)를 짓고 차지하고 있었다. |
▲ 온녕군과 익산군부인 순천박씨(益山郡夫人 順天朴氏) 합장 묘역 |
이런 사실은 온녕군의 손자인 무풍정 이총(茂豊正 ?∼1504)이 이곳 잠두봉 아래에 별장을 짓고 은거했다거나 스스로 서호주인(西湖主人) 또는 구로주인(鷗鷺主人)이라 일컬으며 고기잡이배를 손수 젓고 다녔다는 등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온녕군의 손자 무풍정의 묘는 온녕군 묘의 청룡자락 끝에 조성되어 있다. |
▲ 묘역 좌측 문인석 뒷편에는 근세에 만든 듯한 묘비 2기가 있는데, 아마도 최근에 세운 묘비에 밀려서 이 곳으로 자리를 옮긴 듯... |
온녕군 묘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최영 장군의 묘소와 태종의 4남 성녕대군의 묘소, 성녕대군의 장인 창녕성씨 성억(成抑)의 묘소, 온녕군의 동생 근녕군의 묘소 등이 있다. 근녕군의 묘소도 금천동면(衿川東面) 신림동(현재의 신림동으로 추정)에서 근래에 이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으로 추정할 때 이 부근 일대는 왕실 묘역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
▲ 온녕군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제3대 태종대왕(太宗大王) [1367 ~ 1422] 가계도
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 ~ 1420] 적1남 아들 [생몰년 미상]
서1남 경녕군(敬寧君) [1395 ~ 1458] (효빈 김씨) 옹주(翁主) [1400 ~ 1402] (숙의 최씨 소생) |
온녕군 묘역 위치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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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좌측의 시작에서 빨간 선을 따라서 오르면 능선상에 온녕군 묘역이 있습니다. 소재지 :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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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상단의 화살표 부분에 온녕군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 하단 좌측의 대자리사무소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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