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틈새
-정형일
골목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괭이밥 한포기가 틈새를 차지하고 있다
살펴보면 흙이 고인 곳마다 더 작은 풀들이
까치발로 고개 내밀고 있다
길 잃은 씨들이 굴러와서 보금자릴 틀었나
적으면 적은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캄캄해지면 잠들고 햇살 비치면 웃고
아무 것도 모르는 요람 속 아이처럼
딸랑이 같은 꽃망울 밀어올리고 있다
뿌리내리는 데는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다
봄의 틈새를 메우고 있는 저 앙증맞은 것들
빗방울에 맞아도 아프겠다
아주 높은 곳에서 본다면 우리들 지상의 삶도 "골목 아스팔트 가장자리에/ 괭이밥 한포기가 틈새를 차지하고 있다/ 살펴보면 흙이 고인 곳마다 더 작은 풀들이/ 까치발로 고개 내밀고 있다"의 상태일 것입니다. 말 그대로 까치발로 고갤 내밀고 해를 바라며 사는, 우리들도 이 세상의 어느 틈을 메우는 존재입니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세상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뭔가를 추구하고 향해 걷더라도 나의 존재조건이 모든 것들 사이의 "틈새를 메우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이 조건을 알아서 최대로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삶입니다. "적으면 적은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캄캄해지면 잠들고 햇살 비치면 웃고/ 아무 것도 모르는 요람 속 아이처럼" 자기를 모두 사는 것입니다. 적은 것을 탓하지 않고 작은 것을 괴로워하지 않고 최대로 사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뿌리내리는 데는 넓은 공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는 대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이의 존재로서 너무 넓은 공간을 꿈꾸며 괴로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다 가질 수 없고 동시에 여러 가지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고대 산스크리트 시인도 다음처럼 노래했습니다. "내가 세상을 다 정복하더라도/ 나를 위한 도시는 오직 하나뿐./ 그 도시에 나를 위한/ 한 채의 집이 있다./ 그리고 그 집안에 나를 위한 방이 하나 있다./ 그 방에 침대가 있고/ 그곳에 한 여인이 잠들어 있다./ 내가 있을 곳은 오직 그곳뿐."(「세상을 정복하더라도」)이라고. 그렇기에 이제는 이런 우리의 존재조건을 더 큰 눈이나 높이를 빌지 않고 삶 속에서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봄의 틈새를 메우고 있는 저 앙증맞은 것들/ 빗방울에 맞아도 아프겠다"는 심성이 자란다면 그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 글/ 오철수 시인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이 작은 틈새에 안달하지 않고 이 곳에서 이 화창한 봄을 피우겠습니다.
강물님 작은 틈새에서도 시심은 강물처럼 흘러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