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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의미
(마태복음, 19:3~12). 함석헌
오늘 이 결혼식은 현 사회에서 유례없는 결혼식입니다. 지금 결혼식이라고 하기만 하면 누구나 곧 부민관(府民館)이나 어느 교회당의 크고 화려하게 꾸민 식장과 예복화관의 성장(盛裝)과 수십백의 군중이 요정에서 떠드는 성대한 잔치를 생각하지마는 오늘 여기는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있는 것은 오직 엄숙하게 솟은 북한산과 맑게 흐르는 앞 시내와 고요하고 깨끗한 이 가정뿐입니다. 이런 식을 택(擇)한 이유는 주인 김선생이 몸소 말씀하신대로 오늘 두 분의 인생의 새 출발을 될수록 엄숙한 가운데 뜻있게 하도록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우리는 일반으로 유행하는 세상의 결혼식을 볼 때마다 심중에 불안함을 금치 못합니다. 거기서는 항상 인생이 모욕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일대사라고 말로는 하는 그때에 있어서 인생의 의미 같은 것은 별로 생각하는 일도 없이 오직 먹고 마시고 부(富)를 자랑하고 귀(貴)를 자랑하고 떠서 노는 부허(浮虚)한 것만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사랑하는 이 두 분의 뜻 깊은 이날을 극히 간소한 이 식으로써 엄숙하게 성심으로 보낼 수 있는 것은 어떻게 감사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진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믿는 신앙 때문에 허락하여 주신 일로 믿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참된 맘으로 인생의 이 큰일의 뜻을 깊이 생각함으로써 이 허락하신 뜻에 합하게 이날을 보내고 싶습니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결혼에 대하는 우리 마음의 태도입니다. 오늘 사회의 결혼식이 그렇게 난잡하여진 것은 저들의 결혼관이 난잡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을 일개 유탕(遊蕩)의 기회 허영취득의 기회로 아는 것은 결혼 그것을 쾌락생활의 일방편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성서의 입장에 설 때 가장 배격할 것은 이것입니다. 결혼은 인간이 자기생활을 쾌락하게 하기 위하여 자의로 짓고 자의로 무너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정하여 주신 것 입니다. 고로 절대 신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라고, 예수는 말씀하시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현대인은 대단히 구식의 말인 것 같이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완고한 말인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 하는 것은 현대인 스스로의 생활의 사실로써 말하게 하는 것이 가장 편합니다. 자유결혼을 주장하고 합리적 결혼을 실행한 현대인생이 도달한 결과는 실로 가장 비참한 것입니다. 소위 달콤한 이상으로 출발했던 가정이 파탄의 비련을 만나고 마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개인적인대만 그치지 않습니다. 결혼관의 여하는 사회생활 전체의 운명을 지배합니다. 사람들의 가지는 결혼관의 여하에 따라 남녀관계가 결정되고 남녀도덕의 건전 불건전에 따라 그 사회의 도덕적 공기의 맑고 더러움이 결정됩니다. 현대문명의 어지러움과 현대인의 결혼관의 어지러움은 표리(表裏) 서로 응하는 사실입니다. 금후는 또 모르나 적어도 오늘날까지의 인류 사회는 어디를 가든지 가정을 단위로 하지 않고 된 곳은 없습니다. 고로 깨끗한 가정생활 없이 건전한 사회는 바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깨끗한 가정이란 결혼의 신성을 지키지 않고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음은 결혼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면 이것을 하나님이 지어주신 신성한 것이라 하여 일생을 변함없이 지킨다 하더라도, 아무 귀하다 할 것이 없고 또 사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여기 대하여 우리가 첫째로 할 것은 결혼은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일반의 관념을 버리는 것입니다. 결혼은 결코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오, 행복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젊어서는 꿈을 꾸는 법이오 꿈 중에 가장 달콤한 것은 이 행복스러운 이상적 가정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환멸의 비애를 먹는 것 중에 이에서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결혼생활을 이미 하고 있는 사람은 이것을 잘 알 터입니다. 흔히 결혼식에 가보면 경사라고 수부다(壽富多)남자 하라 하고 하여 축사를 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들을 때마다 능히 양심을 가지고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고 의심합니다.
속임없이 진실을 고백한다면 서로 결혼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의 우리의 감상은 이미 전선에 있는 군사가 새로 배급되어 오는 신병을 맞을 때에 가질 그것과 방불한 것입니다. 내가 이미 지나보았거니 너도 또 이 어려운 곳으로 오는구나 하는 축하는 고사하고 애처러운 생각이 있습니다. 가정이란 행복스러운 것이 아닌 것은 다 잘 알 일입니다. 짐입니다. 힘 드는 점입니다. 가다가 때때로는 그저 집어 내던지고 활활 자유로 와보자는 생각을 하는 것은 한사람만이 아니고 두 사람만이 아닐 줄 압니다. 가정은, 정직한 톨스토이가 나이 팔십이 되어서 출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 이것이 가정생활의 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모르는 청년남녀를 보고 행복의 살림을 하라고 말 쉽게 축사를 내던지는 사람들은 대체 누구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일대 의문에 봉착합니다. 결혼생활이 그렇게 무거운 짐이라면 인류를 축복하는 하나님은 왜 그 짐 밑에 사람을 얽매였느냐고. 예수의 제자들이 결혼의 신성을 엄숙하게 말씀하시는 그 말씀에 대답하여,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차라리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한 것은 그럴만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말씀을 보면 「사람이 홀로 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2:18) 하시어서 모든 사람을 그 법칙하에 매신 것은 분명한 일이오 예수께서도 자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이 말을 받을만한 자는 받을 지어다」 하시어서 독신으로 있는 것을 일부 특별한 은혜로 받은 자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말씀하시었습니다. 그럼 왜 결혼생활을 하도록 명하시었습니까. 행복설이 설 수 없는 것인 줄을 안 다음에 인격의 완성설을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사람이 남성만으로도 완전한 인격이라 할 수 없고 여성만으로도 완전하다 할 수 없고, 양성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고 서로 합하여 완전한 인격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둘이 한 몸이 되나니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면 수긍할만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성서에 있는 결혼의 뜻을 충분히 드러냈다 할 수 없습니다. 우선 남녀 양성으로 가르기는 왜 하셨느냐 하는 것이 설명되지 않은 문제요, 또 사실에 있어서 인격적으로 서로 보족(補足)하는 가정이란 대단히 보기 드뭅니다.
그러면 결혼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나는 하나님의 맘성을 배우기 위하여서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모든 일의 목적은 구경 여기서 벗어지지 않습니다. 결혼생활은 그 중에서도 최고의 공과(工課)입니다. 결혼생활은 때로는 행복스러히 뵈일 수도 있고 때로는 고통스러히 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변치 않는 중심적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배우는 일입니다.
자식을 둔 후에 어버이의 마음을 안다고 하지만 아는 것은 어버이의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집을 간 후가 아니고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순종이 무엇인지 정결이 무엇인지를 체득할 수가 없고, 아내를 가져본 후가 아니고는 우주라는 큰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하나님의 마음을 진실로 엿볼 길이 없습니다. 행복스러운 가정만 아니라, 가장 불행한 파멸에 임한 가정에서 도리어 가장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더 절실히 안 것은 음행하는 아내를 두어 본 호세아요 탕자를 둔 아버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마음을 다소라도 배워 얻은 때에 행복 아닌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각각 자기 표준의 행복을 추구하는 때에 결혼생활은 부자유로 화하고, 가정은 고통의 장소가 됩니다. 마는 행복을 원치 않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뜻을 조금이라도 행하여 보자고 할 때 내버렸던 행복은 제 스스로 옵니다.
오늘 두 분은 이날껏 그야말로 안락한 가정에서 곱게 자라났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릇습니다. 이제까지도 인생 아닌 것 아니지만 이제부터가 실 인생입니다. 이제 두 분은 하나님의 교육의 최종 계단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나서는 부모의 무릎이라는 학교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그담 자라서 사물을 분별할만하게 되면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다된 후 마지막에 결혼에 의하여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고 부모가 되어봄에 의하여 하나님의 맘성의 가장 깊은 곳을 배우게 됩니다. 이 최종의 학교는 결코 안한(安閑)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교육을 병영 안에서 받은 조련이라 하면 이제는 전선에 서는 것입니다. 두 분은 이제 인생의 실전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악전고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전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워 하나님의 뜻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두 분의 새 출발을 심축(心祝)하시는 뜻으로 모인 우리 여러 사람도 보통 예사의 축사로만 하는 것 보다는 실 전선에서 새로운 두 분의 응원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할 것이오, 오늘 이 자리에서만 아니라, 앞으로 저들이 뜻하지 않았던 고난을 만나는 때에 잊지 말고 손을 빌리고 원성(援聲)을 주는 것이 참으로 하는 축하요 격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 행하자는 믿음으로 되는 깨끗한 가정을 요구하기 긴절(緊切)합니다. 참 조선의 생명은 사회 길거리에서도 바랄 수 없고 학교에서도 바랄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 밖에 유지되고 소생될 길이 없습니다. 실례를 들어 말하면 언어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깨끗한 가정은 절대적으로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신앙으로 자라난 두 분의 새 출전을 맞게 된 것은 이미 만신(滿身)에 창이(瘡痍)를 입은 우리에게 얼마나 힘이 되고 희망이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바라건대 여기서 맺어지는 두 분의 결혼 위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풍성하시기를 원합니다.
성서조선 1938. 12월 119호
저작집30; 없음
전집20;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