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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이란 무섭다. 사실 나는 이곳 낯선 데 올라와서 몇 달 동안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 만나지 못했었다. 옛날 제자들이 더러 가까운 데 살지만(서울), 연락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성호 교장(시조시인)이 서울 왔다 가는 길이라며 위로 차 나를 찾아왔다 얼마나 반가웠는지--.그글 붙잡고 울고 싶었다. 우린 몇 시간 동안 같이 있었다. 그의 숨결을 통해 그리움이 절절이 전해져 왔다.
그런데 북구 문협 박순옥 수필가의 딸이 경찰관으로 용인 시내, 그것도 지척인 중앙지구대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갔다. 특별한 인연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최 경찰관의 할머니가 아흔을 넘긴 분인에 옛날 내 노인학교 제자였다! 그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나는 인간승리의 주인공 천하의 임광기 교장과 호수 공원 산책을 나갔다가 맞닥뜨렸으니--.음악이며 서예의 대가이고, 노래 솜씨도 성악가를 뺨친다. 그는 관현악을 지도하여 밀양을 거쳐 부산, 그리고 서울에까지 명성을 날린 친구다.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지금도 서울을 오르내리며 후학들에게 서예를 가르친다. 그에게 콘서트 얘기를 했더니 두말 없이 오겠다고 했다. 일찍이 등단한 서부교육청 학무국장 출신인 이진표 수필가도 연락이 되어 참석했다. 서 있는 친구는 40년 전 제자 권철우 군>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를 마치고('국방일보' 보도 참조)
내 나이가 아직은 만 73세다. 까짓 일년이야 후딱 지나가겠지. 내년에 다시 어린 시원찮은 글을 쓸 수 있을지 글쎄 장담은 하지 못한다. 지난 십여 년은 온통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허우적댔었다. 거기엔 낯선 땅에서 보낸 4년 반이라는 세월도 포함된다.
지금도 방황하는 나는 그분이 계시는 그곳 외는 사실 갈 데라고는 없는 외로운 처지다. 그러면서도 서울엔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5000번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내에 세종문화관에까지 갈 수 있다. 그 근처에서 나는 하릴없는 사람도 아니되, 여기 기웃 저기 기웃 거리다 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탑골 공원-걸어서 간다-이나, 인사동 동원 뷔페(아주 낮은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곳)에까지 발걸음 한다. 서울역까지도 얼마든지 내 영역(?)은 확산된다. 뜻밖에 마음이 내키면 지히철로 갈아타고 양주역에서 내린다. 26사단 사령부로 가는 택시는 언제나 몇 대 대기한다. 요금 7천원. 사령부 앞에 어슬렁거리다가 돌아롤 때도 있고, 부사단장이나 주임원사 군악대장에게 전화를 하면 커피 한 잔도 얻어 마실 수 있다.
이른바 母部隊다. 내가 50년 전에 근무했었던 부대란 말이다. 거기 내 엄마가 있다. 고향이 있다. 따뜻하고 아늑하다. 품으로 받아 준다. 모든 전우들이 내 형제요, 자식이요 손자다. 그 대가족 중에서 내가 가장 연장(자)이다. 그들과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거짓말 같은 자긍심인들 왜 온몸을 휩싸 감돌지 않을까?
지난 6울 7일 내 생일이었다. 나는 가족들 앞에서 '폭탄선언'을 했다. 일생 마지막 콘서트를 서울 '문학의 짐'에서 열겠다고. 딸이며 사위, 큰손자는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일밖에. 아내는 펄쩍 뛰었다. 한 이불을 덮고 잔 지 40여 년, 그동안 기상천외한 일을 한 두번 겪었으랴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아예 말문을 닫는 바람에 난 얼마나 마음이 안 편했겠는가? 그러나 나도 돌이킬 수 없었다. 26사단의 장병들이 눈에 밣혀서였다. 그들을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 기념비적인(?)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강박관념을 넘은 나름대로의 소명이었다.
결과를 말하자. 나는 해냈다. <국방일보>에서 한 면을 몽땅 내 주어 소개했듯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콘서트'를 9월 5일 열었던 것이다. 신문은 200여 명이 들어섰다 했지만, 그건 내가 봐도 약간 과장이다. 그래도 100명은 훨씬 넘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행정부사단장 윤성필 대령과 이경진 사단 주임원사다. 그들이 주도하여 병력을 이끌고 왔기 때문이다. 나머지 30여 명의 장병을 두말할것도 없고. 물론 그 중심에는 특별 휴가를 내 준 사단장 신인* 소장이 서 있지만---.어쨌든 갖은 우여곡절과 난관을 뚫고 콘서트를 치른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래 한 번 써 보자. 포토 에세이라는 작은제목을 달고서.
<난 지금도 현역과 같은 기분이다. '진짜 사나이'며 '행군의 아침' 등을 장병들과 함깨 무대에서 불렀는데, 내가 봐도 그 기개가 가관이었다. 목이 터져라 싶었는데 결코 아프지 않았다. 온몸의 늙은 세포들이 젊음을 되찾아 꿈틀거리는 듯했고. 오른쪽이 이경진 주임원사다(불무리고등학장 겸임). 뒤쪽에 성악가 박참 중윅 있으니 문자 그댈고 將兵이다. 부사단장은 나와 함께 따로 '사단가'를 불렀다
속물근성은 내가 평생 떨치지 못하는 전유물이다. 교만도 그렇다고 어찌 고백하지 않을 도리가 있으랴. 떨치려고 애를 쓰지 않았다? 관속에 누우면, 탄식하리라. 아하, 이렇게 마감하는구나. 어쨌든 여기서 털어 놓자. <국방일보>와 <조선일보>, <실버넷뉴스>에서 크게 기사로 다루어 주었다. <국방일보>는 전술한 바와 같이 '전 세계를 통틀어도 유례없는 콘서트'라는 전제를 깔았고(원 제목은 '노병은 한결같은 현역이었다'), <조선일보>는 <26사단 장병들에게 노래 선물한 노병'이라 하여 부사단장과 '師團歌'를 열창하는 사진까지 실었다. <실버넷 뉴스>는 '아주 특별한 콘서트'라는 제하에 톱으로 다루어 주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군 제데 50면 만에 예비역 일반하사가 모부대 장병과 각계각층의 인사들 등 도합 200명이 모인 가운데, 장르를 넘나드는 노래를 부른 콘서트! 사회도 진행도 자신이 맡았으니 박지숙 기자는 바른 진단을 한 거지 허언을 일삼은 게 아니지 않는가?
<200명이 입장하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공간이 '문학의 집'이다. 그리고 말이다. 일찍이 '문학의 집'에서 대중가요가 주를 이루는 콘서트에 품을 내어 준 적이 없었다. 내게는 그래서 평생 잊지 못할 공간이 되었다. 서울대음대 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만 18년 강의한 노 교수도 있고, 26사단에서 동 시대에 근무했던 친구 서성식도 보인다. 장병과 국민이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은 아름답다 못해 처연하다(?) 주임원사 뒤 한 사람 건너 30년 전 제자 김진영. 그 뒤 안경 낀 젊은이도 역시 같은 해 졸업생 하준영. 저 멀리 빨간 넥타이를 맨 분은 이은집 소설가. 심상옥 수필가/ 이태희 표암문학회 회장도 보인다. 이경진 주임원사 오른쪽은 제자 장완규 군과 이종웅 군(40년 전)>
<오후 네 시가 가까워지자 참석자들이 속속 몰려든다. 난 여전히 하사모를 쓰고 보무도 당당히 걸었다. 오른쪽 색안경 낀 여성은 가수 복수미/ 오른쪽 신사는 원로 가수 이영규/ 그 뒤로 가수 정동진. 사단장이 당일 모범 병사 30명에게 특별 휴가를 주었다. 이것 또한 유사한 사례가 없었을 만큼 지휘관으로서 보기 드문 결단의 사례! 북한에 대응포를 퍼 부은 부대가 26사단이다. 그런 응징이 있었기 때문에 내 콘서트도 열 수 있었다.>
<원로 가수 쟈니리! 그를 모르는 사람은 60년대 중반에 군 생활을 한 사람이 아니다. '뜨거운 안녕'은 그 시절 모든 병사들을 울리고 가슴을 눈물로 적셨다. "또 다시 말해 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별들이 다정히 손을 잡는 밤--안녕히 라고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애인이 없는 나도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단 한 번 쟈니리를 가까이서 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 세울이 50년 흐른 뒤 그가 내 콘서트에 우정 출연하다니 어찌 꿍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있을까? 가수협회 모임에 비교적 자주 나가는데 그때마다 그를 만난다. 거침없이 튀어나오는 호칭이 '형님'이다. 나보다 네 살 연장이다.) /뜨거운 안녕'외 세 곡을 불렀는데,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26기계화보병사단 윤상필 행정부사단장(대령)이다. 부산에 살 때엔, 꿈과 같은 이런 파격적인 장면이 연출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부대까지 갔다오려면 꼬박 이틀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서는 왈복 다섯 시간이면 족하다. 예비역 하사가 '하늘같은' 계급의 현역 대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니 가당찮은 일 아니고 무언가? '사단가'를 둘이서 부르고 있는데--."눈부신 햇살 아래 옥토 삼천리/ 짙푸른 향내나는 내 조국 강토/ 어둠이여 사라져라 찬란한 아침/ 지켜서 억만년을 누려 보리라/ 아아 우리는 불무리의 용사--" 우리는 평생 동지요 전우요 형제로 지내기로 굳게 약속한 터다. 그의 두 아들도 군에 몸 담고 있다. 선대인은 경찰이었고. 집무실에 가면 그분의 사진이 사진틀 안에 모셔져 있다. (물론 게시해 놓은 건 아니고---)>
<이 또한 행운 중의 행운이다. 문우(세 살 연장) 윤행원 수필가와 O Sole Mio를 원어로 한 무대에서 부르게 되다니--.보다시피 그는 외관이 완전 성악가다. 인물도 워낙 좋은 데다 턱수염까지 멋지게 기르다 보니, 무대를 압도한다. 나는 초라하다? 수도권 문인들과의 교유는 내 여생을 꾸려 나가는 데 작은 희망을 준다.>
실로 50년 만의 해후도 있었다. 내가 부관참모부에 근무할 때, 보총중대에 갔더니 안면 있는 이등병이 나를 보고 아는 체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사범학교를 나와서 대학에 바로 진학하는 경우가 드문데, 서울 법대에 응시하여 당당히 합격했읐던 서성식 친구가 아닌가? 근데 피골이 상접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가 물었더니 하는 대답이다. 사법고시에 응시하느라 공부를 너무 무리하게 한 나머지 위장병을 심하게 앓았었더라는 것. 누가 군대에 가면 까짓 거 쉬 낫는다고 해서 모든 걸 잊고 군복을 택했다는 것. 그는 영어를 잘해서 이웃 공병대대에 배속되었고, 나는 이윽고 제대를 했다. 후문에 의하면 그가 사단장실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서 근무했더라는 것. 그런 뒤에 외환은행에 들어가서 마침내 경남-부산 본부장까지 올랐단다. 여기 와서 그를 자주 만난다. 그도 용인에 산다.
한데 말이다. 정말 소중한 또 다른 전우를 내가 알게 되었으니 현재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으로 있는 김의배 예비역 중위(실버넷 뉴스 편집국장)다. 내가 사단 공식 홈페이지에 부지런히 글을 써서 올리는 걸 보고 그가 연락을 취해 알게 된 전우다. 공교롭게도 우리 셋은 나이가 같다. 그와 서성식 친구, 나는 약간 엇갈린 시기에 같은 26사단에서 근무하다 50년 만에 만난 것이다. 물론 서성식 친구와 나는 알고 또 나는 김의배 75여단 대대 홍보 장교를 알지만, 그 둘은 서로 모른다. 내 콘서트 장에서 만나서 우린 영원한 26사단 동지로 남게 되었다. '국방 TV'의 '우리는 전우'에서 출연 요청이 왔는데, 우리 셋이 만나는 장면을 연출하라는 전제 조건을 달았다
<50년 만의 해후(?). 물론 첫반남이기도 하지만--.>
< 당사자로서 어찌 자못 심각하지 않을 수 있으랴. 인천에서 노래 지도 교실을 운영하면서 항상 음향기기를 다루는 전문가에게 지불한 봉사료만도 40만원이다. 마이크 원가가 500만원이라니 그 자체도 부담스러웠다. 떨어뜨려 망가진다면 곱다랗게 물어야 할 판. 장병과 전 참석자들이 일어서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는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콘서트가 시작되었다. 난 당연히 <목포의 눈물>과 <해운대 엘레지>를 먼저 선보이며 지역 감정부터 타파하자고 부르짖었다. 앞에 모니터가 있다.>
<국제PEN한국본부 부이사장 손해일 박사가 자작시 '독도'를 난송하고 있다. 그를 안 것은 부산에 있을 때였다. 김용태 총장님(법산 스님)이 시행하는 화쟁문화포럼 대상 시상식에 참석해서였는데,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서 서울에서 많은 문우들이 왔다. 그 일행들과 법산 스님의 법당에서 하룻밤을 보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노래를 부르고 시 낭송도 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해후했다. 그리고 몇 번이나 우린 얼굴을 마주쳤다. 그가 내 콘서트에서 시를 낭송하다니 그래서 더더욱 인연응 소중하다. 그나저나 나는 언제쯤 '화쟁포험분화대상을 받을 수 있을까? 부질없는 생각에 머리가 어지럽다.>
<지역감정이며 계층 갈등 심지어는 종교 간의 불화 해소까지 염두에 두고 연 콘서트지만 글쎄 한갓 촌로에게 부담일 뿐이었나? 그러나 멀리 예천 정화사에서 한 종파의 종정스님 보덕 선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찬불가요 '영원한 생명(작사 작곡 직접함)'을 불렀다. 난 개신교 복음성가 '방황하는 나그네(흑인 영가)'를 원어와 우리말로 소화한다고 나름대로 애를 썼고, 오늘 저녁 만나게 되어 있는 저 유명한 신상옥 안드레아 형제가 작곡한 '내 발을 씻기신 예수'는 삼가동 성당 성가대 지휘자 투태균 아마또 형제가 절창했다. >
<이 잘생긴 장교는 123기보대대 인사과장 박참 중위다.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한 친구로 곧 예편하면 외국 유학을 다녀오는 등 더 공부를 열심히 할 계획! 당일 박 중위는 '비목'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등 두 곡을 불러서 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작년 겨울 대대에 안보 강연을 갔을 때 인사를 나눈 사이라 구면이다. 대대장이 5일 동안이라던가? 특별 휴가를 주었기 때문에 일찍 나와서, 연습을 아주 많이 한 모양이더라. 어제도 정화를 통했다. 같이 휴가를 얻어 나온 나승일 일병은 뮤지컬 배우 지망생으로 28나이에 늦게 군에 입대했단다. 나 일병도 정말 돋보였다.>
<초등학교 동기동창 김인섭 형이다. 난 밀양 태룡토등고 송진초등 등 구 군데를 다녔었다. 처음에 부산중학교에 응시했으나 낙방, 이듬해 송진에서 한 해 재수를 해서 합격한 것이다. 김인섭 형은 학교에서 2킬로밑, 나는 4ㅋ킬로미터 떨어진 데서 등하교했다. 그의 추억담이다.
"야, 자네 선대인께서 한학자이셨잖아? 한 번 자네 집에 놀러 갔는데--4학년 때--그분이 여러 가지 묻고 그러셨는데 그런 엄하신 분 밑에서 어떻게 '딴따라'가 나왔노?"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딴따라라? 지금 어디 가서 물어봐도 내가 문인이라는 것보다 가수라고 하는 것이 더 관심을 끌게 한다. 왜 다들 일어섰냐고? 애국가 4벌까지 부르니까 그렇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김인섭 형의 딸이 내가 거의 묵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그러니까 명덕초등학교 교장으로 있을 때 내 학부모였다. 사위가 아마 해양경찰 총경쯤 됐을 거다. 인생? 流轉이다.
잠깐 진땀 나는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는 내내 걱정이었다. 행여나 잘못되어 26사단에 누가 되면 어쩌나 하고--.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콘서트 진행 중에 내가 실언을 한다? 군을 예찬하는 내 말에 누가 이의라도 걸면? 전 사단 예하 부대에서 모범 병사를 뽑아 특별 휴가를 보내 준다며 콘서트에 참가하도록 해 줬는데 오다가 무슨 사고라도 당하면? 비록 내가 모든 비용을 전담한다 하지만 그걸 믿지 않는다면? 쟈니 리 형님이 약속을 어긴다면? 차가자가 턱없이 부족하여 공간이 텅 빈다면?
그런데 기우였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사히 콘서트를 마칠 수 있었으니--.특히 비용은 정말 남에게 구걸(?)하지 않았다. 재작년 부산수필문학회에서 주는 대상 상금 200만원, 한국수필사 제정 '청향 문학상' 상금 300만원 중 100만원을 군 병사들에게 미리 쓴 게 있었으니(부관부/ 군악대/ 불무리 성당 등에서 햄버거를 사 주었다. 포상 휴가를 가는 병사 등을 만나 금일봉을 전했다. 그건 부정이 아니다.) 나머지가 400만원이었다. 그걸 몽땅 털어 넣어도 약간 모자랐다. 아내와 딸이 부담했다. 지금 내 마음은 한없이 편안하다.
<30여 년 전의 제자 김진영이 부사단장에게 꽃다발을 전하고 있다. 내 가슴이 벅차 올랐다. 못난 나를 스승이라고 치켜세우고 전화라도 자주 해 주는 진영이가 고맙다.>
첫댓글 이원우 선생님, 여여하시지요?^^
수고하셨습니다!
두 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한 일상 보내시기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