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5해방
←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인들 1945년 8월 15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연합국은 1943년 들어 태평양전쟁에서의 우세가 확실해지자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국가들의 전후 처리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미국·영국·중국의 지도자가 회동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은 적당한 절차를 거쳐서 독립하게 될 것이라는 원칙이 세워졌다. 이는 즉각적인 독립이 아닌 신탁통치 실시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소련이 참전하면서 일본은 급속히 무너져 결국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8·15해방을 맞은 한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본격적인 활동들을 펴나갔다. 그러나 뒤늦게 전쟁에 뛰어든 소련이 승승장구하면서 예상보다 빨리 한반도에 진주하게 되자, 이를 불안하게 여긴 미국은 38선 분할안을 소련측에 제시했다. 소련이 이를 받아들이자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각각 미국과 소련에 분할점령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무산되었으며, 한반도 남북에 분단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947년] 인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공화국 수립 1947년 오늘, 식민지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우리나라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기 정확히 1년 전이었다. 이에 앞서 6월 3일 루이스 마운트배튼 영국 주재 인도 총독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 독립시키겠다는 ‘마운트배튼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영국령 인도는 힌두교의 인도와 이슬람교의 파키스탄으로 분리 독립하게 됐다. 전날 인도의 네루는 국회의사당에서 가진 연설에서 ‘세계가 고요할 때, 한밤의 종소리가 울릴 때,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잠을 깬다.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한 나라의 혼이 크게 울려 퍼질 것이다’라고 역설했다. 인도는 독립과 동시에 네루를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하는 내각을 발족하고 제헌의회도 탄생시켰다. 인도를 지배해 온 영국 총독의 지위는 1948년 6월까지 명목만 유지되었다. 한편 파키스탄은 하루 전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두 지역으로 갈라진 영토를 소유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 1971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현재의 파키스탄은 독립 당시 서파키스탄이다.
[1961년] 동독 군인 콘라트 슈만, 서독으로 탈출
← 베를린 장벽을 뛰어넘는 콘라트 슈만 이틀 전부터 동서 베를린간의 통행이 차단되고 있었다. 열아홉 살의 동독 병사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 부근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명령서에는 ‘국경을 수비하라’고 쓰여 있었다. 다른 사람의 탈주를 저지해야 할 그가 1961년 8월 15일 서베를린으로 탈출했다. 완전무장을 한 군복차림으로 자동권총을 어깨에 메고 대담하게 철조망을 뛰어넘어 자유의 나라로 넘어왔다. 다음날 그 모습은 전세계 신문의 일면을 장식했다. 철조망을 뛰어넘는 도약의 순간을 카메라가 잡은 것이다. 베를린 장벽 건설은 전후 독일의 가장 암울한 비극이었다. 동독에서는 1953년 6월 17일에 발생한 동베를린 노동자의 봉기 이후, 국민과 정치 체제와의 알력이 확대일로를 걷고 있었다. 1959년 한 해 동안 무려 14만 5천명이 서독으로 망명했다. 1960년에는 젊은층을 중심으로 5만 6천명이 동독을 등졌다. 1961년 7월 한 달동안만 망명자수가 3만을 넘어서자 동독 국가평의회 의장 울브리히트는 마침내 제동을 걸었다. 장벽건설을 명령한 것이다. 장벽설치가 시작된 것은 8월 13일 새벽 2시였다. 46킬로미터에 이르는 베를린 시내 지역 경계선을 따라 장갑차가 배치되고 경찰, 군인, 민병대가 출동했다. 그들은 포석과 포장을 떼어내고 철조망을 둘러쳤다. 작업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됐다. 슈만은 그 경계선의 감시를 맡고 있었다. 동베를린에 있는 할아버지 집에 놀러왔다가 장벽설치로 돌아가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던 한 어린이의 애절한 소식과 자신의 사상성을 시험한 동독 비밀경찰의 비열한 행위에 분노한 것이 슈만이 탈출을 결심한 이유였다.
[1924년] 파나마 운하 개통
대서양 심해에서 태평양 심해까지 81.6km에 걸쳐 뻗어 있다. 수에즈 운하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전략적인 인공수로이다. 예를 들면 미국의 동쪽과 서쪽 해안 사이를 항해하는 배들은 혼 곶으로 돌아가는 대신 파나마 운하를 이용함으로써 약 8,000 해리의 항해거리를 단축시킬 수 있다. 오늘날 파나마 운하의 건설은 세계 대(大)토목공사의 위업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지만 시공 이후 공사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 1879년 수에즈 운하의 굴착을 감독했던 프랑스의 외교관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대양간운하만국회사를 구성하고 이듬해 지협을 통과하는 수평식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불충분한 계획, 질병, 사기죄 기소 등으로 1889년 결국 사업은 붕괴되었고, 1894년 이 프랑스계 운하회사는 신(新)파나마운하회사로 재조직되었다. 1903년 파나마와 미국 사이의 헤이-뷔노-바리아 조약으로 미국이 운하 건설권과 파나마 운하지대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독점권을 얻었다. 신파나마운하회사의 운하소유권은 1904년 미국에 매도되었다. 미국 토목기사들에게 주어진 주요당면문제는 해수면 높이의 수평식 호수-갑문식 운하를 건설하느냐, 아니면 그보다 더 높은 높이의 호수-갑문식 운하를 건설하느냐였다. 1879년 프랑스의 공학자 아돌프 드 레피네는 대서양 쪽의 물살이 세찬 차그레스 강과 태평양 쪽의 리오그란데 강을 막아 각각의 하곡에 항행이 가능한 호수들을 만들고 대륙 분수계에 수로를 내어 양쪽을 연결하는 안(案)을 제시했다. 레피네의 안은 해수면 높이의 운하를 선호한 당시의 프랑스 회사와 초기 미국 위원회에 거절당했으나, 1906년 미국 파나마 지협 운하위원회의 존 F. 스티븐스가 이를 기초로 최종 설계도를 작성했다. 1904년에 시작된 미국 감독하의 공사는 국회가 스티븐스의 설계를 채택한 후 급속히 진척되었고, 1914년 8월 15일 마침내 파나마 운하가 개통되었다. 수로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파나마가 수많은 충돌을 빚은 끝에 1977년 파나마 운하조약으로 2000년에 파나마 공화국이 운하 통제에 대한 전권을 갖게 된다는 안이 확정되었다.
[1989년] 이내창군 의문사
← 1989년 10월 6일 중앙대 운동장에서 치러진 이내창군 장례식 모습 1989년 8월 15일 전남 여천군 삼산면 덕촌리 거문도 앞바다에 한 구의 변시체가 떠올랐다. 당시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이었던 이내창씨였다. 서둘러 조사를 끝낸 경찰은 나흘뒤인 19일 이씨의 폐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바닷가 암석 해변을 거닐다가 실족해 익사했다`고 발표했다. 당장 의혹이 제기됐다. 이씨의 주검에 7군데나 난 피하출혈 흔적과 평소 약속시간을 잘 지키기로 소문난 이씨가 사건 당일 광복절 행사가 있었고 다음날 총장과 면담상태가 잡힌 상태에서 연고도 없고 생전 가보지도 않은 그 먼 곳까지 간 이유 등등 의문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이렇게 시작된 의혹은 학생과 교수, 교직원과 재야단체들로 구성된 ‘사인진상규명을 위한 범 중앙인 공동대책위’를 낳았고 대책위는 의혹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씨가 사고 전날 안성의 학교로 찾아온 남녀 2명을 따라 나섰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들 중 한명이 안기부 인천직원이라는 사실이 폭로됐다. 또 다른 인물 역시 군인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이처럼 의혹에 둘러싸인 이씨의 죽음은 석달전 의문의 변시체로 발견된 조선대 이철규군 사건과 맞물려 정권퇴진운동으로 이어졌지만 아직도 명확한 사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1899년] 한국 언론인 이길용(李吉用) 출생
1899. 8. 15 경남 마산~? 인천 영화학교를 거쳐 1916년 배재학당을 졸업했다. 일본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수학했고, 1919년 대전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전달하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2년 출옥하여 동아일보사 대전지국에 근무했다. 1927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주로 체육기사를 써서 한국 체육 취재기자의 선구가 되었다. 같은 해 〈매일신보〉의 고영한, 〈중외일보〉의 마춘식, 〈조선일보〉의 진번 등과 '운동기자단'을 결성했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했다가 일본경찰에 구속, 옥고를 치르고 신문사를 떠났다(→ 일장기말소사건). 8·15해방 후 〈동아일보〉에 복직하여 사업부장을 지냈고, 서울특별시 고문, 한국민주당 집행위원으로도 활동했다. 6·25전쟁 직전까지 〈대한체육사〉를 집필하다가 납북되었다.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1954년] 탁구선수, 체육인 이에리사 출생 1954년 충청남도 보령에서 태어났다. 문영여중을 거쳐 1973년 서울여상을 졸업하였다. 문영여중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70년 제10회 아시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주니어부 개인단식에서 우승하였다. 그 이후 국내의 각종 탁구대회를 석권하였으며, 1971년에는 국내대회 8관왕의 기록도 남겼다. 1972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15회 스칸디나비아 오픈탁구대회 개인전 단식과 복식에서 우승을 차지하였고, 이어 1973년 4월 유고슬라비아의 사라예보에서 개최된 제32회 세계 탁구대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세계 정상에 올랐다. 그해 신탁은행 탁구팀에 입단하고, 다음해인 1976년 제28회 독일 국제오픈탁구대회에 참가하여 개인전 단식과 복식에서 우승하였다. 1980년 독일로 가서 FTG 프랑크푸르트팀의 코치 및 선수로 활약하다가 귀국하여 1984년부터 1987년까지 국가대표 여자탁구팀 코치를 맡았다. 1991년 경희대학교 탁구팀 코치를 거쳐 1992년 대한탁구협회 국가대표상비군 수석코치가 되었고, 1994년 11월부터는 현대백화점 탁구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다. 1997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부회장에 선출되었다. 명지대학교 대학원에서 1992년 체육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97년 체육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9년 9월부터 용인대학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5·16민족상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저서에 《2.5g의 세계》가 있다.
[1888년] 로렌스 T(homas) E(dward) Lawrence 출생
1888년 8월 15일 태어남 / 1935년 5월 19일 죽음 로렌스는 영국의 작가이자 고고학자이며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동지역 전투에서 크게 활약해 이름을 떨친 군사전략가이다. 그는 역사학자로서 아랍 지역을 여행했으며,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아랍 전문가로 활동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 지원업무를 담당했으며, 1914년 육군중위가 되어 카이로로 가 정보업무를 담당했다. 1916년 6월 메카의 아미르(지방장관)인 후사인 이븐 알리가 투르크에 맞서 싸울 것을 선언하자 그해 10월 아랍에 파견되었다. 파이살의 군대에 합류한 로렌스는 투르크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며, 파이살의 군대는 승전을 거듭했다. 1919년 7월 31일 중령으로 제대했고 1921년 3월 아랍 담당 고문이 되어 다시 중동으로 갔다. 1922년 8월 28일 영국 공군에 일등병으로 자진 입대해 말년을 공군항공병으로 보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기록인 <지혜의 일곱 기둥 The Seven Pillars of Wisdom>(1926)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밖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Odyssey>를 영어 산문으로 번역했으며, 논문 <십자군의 성 Crusader Castles>(1936), 시선집 <소수민족 Minorities>(1971) 등의 작품을 남겼다.
[1916년] 대종교 나철, 세상 떠남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관향은 금성(錦城).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徵稅署長)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호(吳基鎬:1865~1916)·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扶助)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금식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伯佺)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 三一誥〉와 〈신사기 事紀〉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단군교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받았다. 그해 12월 도쿄의 어느 여관에서 이기호·정훈모 등과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靈戒)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로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重光節)이라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하던 인물들은 유신회 인물들이거나 호남 출신의 식자층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래서 서민층 중심인 동학이나 증산교에 비하여 대종교를 양반종교라고도 한다.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추대된 그는 밀계와 오대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확장에 주력하던 중, 당시 서울 북부지사교(北部支司敎)를 맡고 있던 정훈모의 친일행위로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그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三道溝)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 理大全〉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그는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조천(殉敎朝天)했다.
[1995년]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시작, 중앙돔 상부 첨탑 철거 광복 50주년 되던 해, 내무부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 전국에서 쇠말뚝 20개를 제거했고, 일본식으로 교묘하게 개명된 지명 129곳을 우리 식으로 고쳤다. 또한 1926년에 건립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의 첨탑을 제거했다
[1979년] 지옥의 묵시록 개봉 "코폴라 감독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영화를 선사했다." 베트남전 배경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이 개봉되었을 때《뉴스위크》지는 이렇게 격찬했고, 《타임》지는 "근래 10년동안 펼쳐진 예술행위 중 가장 어리석은 짓을 담은 영화이며, 이로 인해 코폴라는 예술적 자멸을 초래했다."고 비난. 연출자는 "전쟁의 이면에 잠재되어 있는 도덕적 문제를 거론하고자" 이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Have you ever considered any real freedoms? Freedoms from the opinions of yourself." 이 영화에서 커츠 대령이, 비밀명령에 따라 자신을 사살하러 정글로 들어온 위라드 대위와 처음 만났을 때 한 말.
[1886년] 인도의 종교가 라마크리슈나 세상 떠남
← 라마크리슈나 /라마크리슈나(1881경) Gadadhar Chatterji, Gadadhar Chattopadhyaya라고도 함. 1836. 2. 18 인도 벵골 후글리~1886. 8. 16 캘커타.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에 바탕을 두고 모든 종교에서 신에 이르는 길은 같다고 주장 가난한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정식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다. 평생 벵골어의 거친 방언으로 말했으며 영어도 산스크리트도 몰랐다. 23세 때 5세 된 사라다 데비와 결혼했는데 금욕주의 신조 때문에 끝내 신방에 들지 않았다. 사라다 데비는 나중에 신격화되었으며 라마크리슈나파(派)는 지금도 그녀를 성인으로 간주하여 '거룩한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라마크리슈나는 유명한 산스크리트 학자인 맏형 람쿠마르에게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는 '밥벌이나 하기 위한 교육'은 원치 않았다. 신에 관해서 책으로 배우기보다 자기가 살고 예배하는 방식을 통해 신을 '실감'할 수 있기를 원했다. 라마크리슈나는 체질적으로 절제가 어려워 환희와 깊은 침울 사이를 오르내렸다. 7세 때부터 신에 심취했고 신비로운 황홀경에 빠지기도 했다. 존경의 대상으로서 수많은 전설에 둘러싸여 있었던 관계로 라마크리슈나의 참모습을 밝혀내기란 상당히 어렵지만 그의 철학적 본질만은 아주 명확하다. 라마크리슈나는 정욕과 돈의 유혹에 맞서 싸웠다. 그는 사람이 영적(靈的)인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것은 이 2가지 악(惡) 때문이라고 믿었다. 금(金)에 대한 그의 반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심해져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정도였다고 하며 마침내 어떤 종류의 금속도 만질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모든 인위적인 사회계급을 거부했으므로 카스트 제도도 자연 배척되었다. 창조와 파괴의 여신 칼리를 신의 최고 현현(顯現)으로 보았던 그는 캘커타 칼리 사원의 승려가 되자 칼리를 '거룩한 어머니'로 부르며 예배했다. 칼리에게 계시를 달라고 탄원하는 동안 몇 시간이고 계속 울었고 전신이 타는 듯한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그의 상태를 어떤 사람들은 신들림이나 광기나 신경장애의 탓으로 돌렸지만 구마(驅魔)도 의학적 치료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결국에는 칼리나 다른 신들의 환영이 나타나 희열과 평온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는 언젠가 칼리를 '찬란히 빛나는 영원무궁한 영혼의 바다'로 묘사한 적이 있다. 친척들은 1859년의 결혼으로 그가 안정을 이루기를 바랐으나 사원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시 신들림이 나타났다. 그는 12년간의 고행을 시작했고 사마디(samādhi : 자기 유도에 의한 영적 황홀경)의 온갖 상태를 맛보았다. 라마크리슈나는 브라만 계급의 한 방랑여인의 도움으로 요가와 탄트라의 의식을 익혔다. 그는 '슈리 크리슈나'의 환영에서 절정을 이루게 되는 비슈누파(派)의 의식에도 통달했다. 수도사인 토타푸리를 만나면서 진정한 산니아신(sannyāsin : 고행자)으로 입문했고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을 배웠다. 라마크리슈나는 이내 사람이 영원한 브라만과 일체가 되는 '니르비칼파 사마디'에 도달했으며 이때 '라마크리슈나'라는 이름을 얻었다. 1866년 이슬람의 길을 따르면서 마호메트의 환영을 접했다고 전하며 그후 그리스도교를 연구했을 때는 분명 예수도 보았다. 라마크리슈나는 이 연구와 환영들로부터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같으며 모두가 옳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계시는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캘커타에 있는 그의 집 부근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운집했다. 그는 명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평범한 사람으로 머물렀다. 글을 쓴 적은 없지만 사후 여러 권의 어록이 제자들에 의해 출간되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모든 것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서 신을 보았다. 모든 길은 같은 목표로 향한다고 그는 믿었다. 라마크리슈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웅덩이에는 온갖 가트(ghat : 물길)가 있다. 힌두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 '잘'이라고 부른다. 이슬람교도는 그 액체를 떠와서는 '파니'라고 부른다. 그리스도교도는 그 액체를 '워터'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같은 물질이며 본질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다." 그의 이름으로 된 교단이 캘커타를 본부로 전세계에 전도사를 파견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제자인 비베카난다는 1893년 힌두교 대표로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회의에 참석했다.
[1926년] 시인 박인환(朴寅煥) 태어남
1926. 8. 15 강원 인제~1956. 3. 20. 서구적 감수성과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면서 어두운 현실을 서정적으로 읊은 후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 광선(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1939년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마쳤다. 이어 경기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1년 자퇴하고 한성학교를 거쳐 1944년 황해도 재령의 명신중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해방이 되자 학업을 중단했다. 서울로 와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여러 시인들과 사귀었고, 서점을 그만두고는 〈자유신문〉·〈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육군 소속 종군작가단에 참여하고 피난지 부산에서 김규동·이봉래 등과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55년 대한해운공사에서 일하면서 미국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심장마비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1946년 〈국제신보〉에 시 〈거리〉를 발표해 문단에 나온 뒤 〈남풍〉(신천지, 1947. 7)·〈지하실〉(민성, 1948. 3) 등을 발표하고, 1949년 김수영·김경린 · 양병식 등과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라는 합동 시집을 펴냈다. 모더니즘 시를 지향했던 '후반기'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 〈검은 강〉·〈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목마와 숙녀〉 등을 발표했는데, 이들 시는 8·15해방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의 황폐함을 겪으면서 느꼈던 도시문명의 불안과 시대의 고뇌를 감성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특히 "한 잔의 술을 마시고/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로 시작되는 〈목마와 숙녀〉는 그의 시의 특색을 잘 보여주면서도 참신하고 감각적 면모와 지적 절제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1955년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해서 공연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생전에 〈박인환 시선집〉(1955)이 나왔고, 이어 〈목마와 숙녀〉(1976) 등이 발행되었다. 죽기 1주일 전에 지었다는 〈세월이 가면〉은 뒤에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고 있다.
그밖에 2005년 남북 이산가족 첫 화상상봉 2005년 8.15 민족대축전 2003년 조오련, 한강 600여리(250km) 열흘 만에 종단 성공 2001년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남북 8·15 공동행사’에 참석한 일부 남측 대표단, 북한의 조국통일3대헌장 기념탑에 참배해 물의 2000년 남북 이산가족 200명 서울-평양에서 50년 만에 혈육 상봉(-18일) 2000년 북한 민항기 50년 만에 한국에 첫 취항 1998년 이란 성지순례단, 18년 만에 처음으로 양국 국경선을 통해 이라크를 방문 1998년 정부 건국50주년 맞아 공안사범 103명 등 총 7천7명 특별사면복권 가석방 1998년 북아일랜드 폭탄테러로 30년 만에 최대 유혈참극 발생 1997년 뮤지컬 ‘명성황후’ 국내 공연사상 최초로 뉴욕 공연 1996년 일본 행동파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 사망 1995년 김수환 추기경, 5.18 학살자 처벌해 민주질서 바로잡자는 메시지 발표 1992년 범민족청년학생연합회 결성 1991년 마다가스카르서 대통령 친위대가 반정부시위대 138명 학살 1989년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 전대협 대표로 평양축전에 참가한 후 판문점 통해 귀환 1987년 독립기념관 개관 1983년 독립기념관 천안에서 기공 1979년 캄보디아 헹 삼린 정권, 폴 포트 정권 4년동안 300만명이 학살되고 사원 2800개소가 파괴됐다고 발표 1979년 국방부, 국군방송 FM송신 시작 101.㎒ 1979년 보신각 완공 1975년 방글라데시 군부쿠데타, 1975 방글라데시 무지브라 라만 대통령 피살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1974년 새마을호 운행 개시 1974년 박정희대통령 영부인 육영수여사, 문세광에게 피격당하여 서거 1974년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 9.5㎞), 수원-인천간 전철(98.6㎞)개통 1974년 박정희대통령, 광복절 제29주년 경축사에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 제시 1971년 바레인, 영국으로부터 독립 1970년 남산 1호터널 개통 1970년 박정희 대통령, 남북통일. 8·15선언 발표 1970년 병무청 발족 1969년 우드스톡 축제 1968년 정치활동 정화법 시효만료 1966년 새돈 500원권 유통 1966년 중앙텔레비전방송, 동양방송으로 상호를 다시 변경. 동양라디오는 TBC, 동양TV는 TBC-TV, FM은 TBC-FM으로 개칭 1966년 KBS TV, 20시를 기해 전국 TV방송 실시 1965년 동양텔레비전 방송, 중앙텔레비전방송(JBS-TV)으로 상호를 변경 1966년 나트랑에 주월(駐越)야전사령부 신설 1961년 농업협동조합 발족 1960년 콩고, 프랑스로부터 독립 1954년 경부선 통일호 개통, 서울-부산간 9시간 30분 1954년 전국 댄스홀 폐쇄령 1953년 정부, 서울환도를 선포 1953년 ‘Korea Republic(現-코리아 헤럴드)’ 창간 1952년 네델란드 인도네시아 서이리안 조약 조인 1949년 헝가리 인민공화국 선언 1948년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1948년 하지중장 군정폐지 발표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식 1947년 인도네시아 단일공화국 선포 1946년 서울특별자유시 헌장 제정 1945년 일본 포츠담선언 수락, 무조건 항복 1945년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1945년 프랑스 페탕원수에 사형 결정 1945년 일본 왕 히로히토 항복 방송 1944년 수풍발전소 송전 시작 1923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전 개최 1917년 레닌 ‘국가와 혁명’ 완성 1914년 파나마 운하 개통 1771년 영국 계관시인 월터 스코트 출생 176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출생 1376(고려 우왕 2) 무위소, 신무기 수차 등 제조 423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393-423) 호노리우스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