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의 동상일몽
왕하6:14-19(시119:18-20)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축복의 새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를 생각하며 감사할 일 20가지”
아내: 여보! 나처럼 얼굴도 예쁘고 살림도 잘하는 것을 4자성어로 하면 뭐라고 하지?(아내는 금상첨화라는 대답 기대)
남편: ‘자화자찬?’,
아내: 아니 그 말 말고…
남편: 그럼 ‘과대망상’,
아내: 아니 ‘금’자로 시작하는 말 있잖아!
남편은 알았다는 듯이 무릎을 치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금시초문!” 처음들어 본다라는 말이죠.
텔레비전 노인프로그램에서 낱말 맞추기 코너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설명해야 하는 말은 ‘천생연분’입니다. 할아버지가 아내에게 “여보 우리 둘 사이를 뭐라고 하지”하자 아내되는 할머니가 말합니다. “웬수!” 당황한 할아버지가 손가락 넷을 펴보이며 “아니, 네 글자로 말해봐”하니까 다시 할머니가 “평생 웬수”라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같은 것을 놓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말합니다. 부부가 되어 평생을 동상이몽의 마음으로 살면 행복을 얻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부가 되어 동상이몽이 아닌 동상일몽, 같은 생각과 같은 방향, 같은 꿈을 꾸면 행복하지 않을래야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같은 관계성은 비단 부부간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이란 어떤 면에서 하나님과 부부와 같은 존재입니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는 호세아의 부인 고멜이 틈만나면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가지만 호세아는 집을 떠난 부인을 찾아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버리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신부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역사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동상이몽의 마음으로 산다면 결코 축복의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과 동상일몽의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두 종류의 신앙인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신앙인이면서도 하나님과 동상이몽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고, 또 한사람은 하나님과 동상일몽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대표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삶의 영적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첫째, 도단 성의 위기와 삶의 위기들
엘리사는 엘리야의 제자로써 예언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고, 선지자 학교를 세워 가장 많은 제자를 양성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로 인도하셔서,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북이스라엘은 수많은 전쟁과 위기를 헤치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던지 그가 늙어 죽게 되었을 때에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요아스가 엘리사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3:14)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본문은 그런 엘리사가 젊어서 왕성하게 북이스라엘 지켜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북이스라엘 주변에는 아람이라는 나라의 군대가 매우 강해서 틈만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공격이 올때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로 아람군대가 어디를 공격하는지를 미리 알았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어 준비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기에 아람 왕과 군대는 번번히 실패하고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강력한 군대가 번번이 이스라엘에게 패하자 아람 왕은 탄식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왕의 신하들 중에 첩자가 있다고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신하를 믿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그 상황은 매우 심각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한 신하가 “왕이여 이스라엘에는 엘리사라는 하나님의 종이 있어서 왕이 한밤중에 침상에서 생각하는 것조차 전부 알아서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람이 패하는 모든 원인에는 엘리사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람 왕은 어떻게 하든지 엘리사를 잡으라고 명령하였고 바로 소식이 오기를 엘리사가 도단성에 와있다는 첩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람왕은 빠르게 군대를 동원해서 밤새 도단성을 첩첩히 둘러 쌓았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와 그의 주변인들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사건은 우리 인생에도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기독교인도 삶의 위기가 없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인,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에게도 언제나 위기를 올 수 있습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약5:13)
초대교인들은 목숨 걸고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이 정말 좋은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도 고난을 말합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 역사 벧전3:13-17에서 고난의 의미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 상세히 설교하고 있습니다. 믿는 자도 고난당할 수 있습니다. 고통과 위기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상이몽의 사람이 되느냐, 하나님과 동상일몽의 사람이 되느냐 드러나게 됩니다.
둘째, 하나님과 동상이몽의 사환
엘리사의 종이 일어나서 마당에 서서 보니 도단성 주위에 아람군대의 깃발이 하늘을 치솟고 말과 병거가 꽉 들어찼습니다. 그는 혼비백산해서 벌벌 떨면서 들어와 “내 주여 어찌하오리까” 이 한마디 말에 단긴 절망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의 두 눈에는 그를 둘러싼 아람의 군대만이 보였습니다. 그는 두 눈에 보이는 대로 느끼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이제 우린 끝이야, 난 이제 죽었네” 그는 하나님과 동상이몽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종 엘리사의 종이 될 정도라면 그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삶의 위기가 다가오자, 하나님과 동상이몽의 사람임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과 동상이몽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불안입니다. 물론 이같은 상황에서 인간이 어찌 두려움과 불안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열매가 되어 나타나서는 안됩니다. 사무엘상의 사울은 다윗의 등장 이후 불안병이 들더니 그것이 열매가 되어 나타나 그 자신도 망가지고, 그의 자손들도 철저히 무너져내리는 결과를 얻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적 점검이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나온 사환처럼 동상이몽의 삶으로 살며, 두려움과 불안의 열매가 맺히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는 이제 하나님과 동상일몽의 엘리사를 보겠습니다.
셋째, 동상일몽의 엘리사
주변에서는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아람 군대만을 바라보며 두려워 떨고 있을 때에 엘리사는 보는 것이 달랐습니다. 상황은 똑같은데 보는 것이 달라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그리고 기도하여 가로되 “야훼 원컨대 저희 눈을 열어 보게 하시옵소서” 하니 야훼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열매 사환이 눈을 떠서 보니 그 아람군대와 엘리사가 있는 그 성 사이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말과 불병거가 첩첩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같은 삶의 위기 속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을 원하실까요? 사환의 모습입니까 엘리사의 모습입니까?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불신앙은 문제를 극대화시키지만 신앙은 주님을 더 크게 보이게 한다”(이동원 목사님 책에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만일 그 문제가 우리 주님보다 더 크게 보인다면 이것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신앙의 인물들은 누구나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급 시킨 모세가 그랬고, 산헤립의 18만 오천명을 물리친 히스기야 왕이 그랬고, 예루살렘을 재건한 느헤미야가 그랬습니다.
넷째, 하나님의 마음 따라잡기
위기, 고난, 고통, 두려움, 불안이 닥칠 때에 하나님과 동상일몽을 이루기 위한 마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결코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엘리사는 동상이몽에 빠진 종에게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한 자가 많으니라” 불신앙 중에 고난이 오면 혼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방법이 없다고 자기 변명을 생산해 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어떠한 상황과 처지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 우리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일꾼들이 함께 한다는 것을 알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스승되는 엘리야 역시도 아합 왕과 이세벨로부터 고통을 당할 때에 고통스러우니까 로뎀나무 아래서 자신에게 죽기를 구합니다(왕상19: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하기를 남은 자 7,000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불신앙과 좌절은 홀로 있게 하지만, 참신앙과 뜨거운 기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기도의 동역자, 사랑의 동지들이 함께 있음을 알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안보이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다.
엘리사는 동상이몽에 빠져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시옵소서”
사환은 육신의 눈을 열려 아람의 군대를 볼 수 있었으나, 영의 눈은 어두워서 하나님의 군대를 볼 수 없습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보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볼 수 있는 것이 다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은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안보이는 하나님을 느끼며 동행하는 것입니다. 안보이는 죽음 이후의 삶, 영생의 삶을 믿고 본향을 향해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환경만 바라보면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예비하신 군대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영의 눈은 말씀으로 열립니다. 영의 눈은 기도의 능력으로 열립니다. 이 눈이 열리면 어떠한 역경에 처할지라도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다윗은 시23:4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바라보면 안됩니다. 그것은 육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영의 눈으로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안에 야훼께서 함께 하여 주십니다. 야훼의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하나님의 군대를 통해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안위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