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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읍성 엣 지도
1872년 지방지도 나주지도
나주지도 羅州地圖, 羅州牧은 지금의 전남 나주시의 시내를 포함하여 나주시 공산면, 노안면, 다시면, 동강면, 문평면, 반남면, 세지면, 왕곡면과 영암군 금정면, 시종면 북부, 신안군 지도읍, 압해면, 자은면, 암태면, 안좌면, 비금면, 흑산면, 도초면, 장산면, 장성군 대화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북부, 삼도면, 평동면, 무안군 삼향면 일대에 해당하는 큰 고을이었다.
읍치는 금성산 동남쪽 의 경현동과 교동지역에 있었다. 羅州牧은 인근 務安縣의 地界를 넘어 서쪽 해안의 도서를 越境地로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지도에도 해안의 섬들이 자세히 그려져 있다. 또한 당시 무안현 境內에 있던 三鄕面도 나주의 월경지였는데 지도에는 경계의 표시가 없다. 이들 월경지는 1906년 월경지 정리에 의해 비로소 인근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지도는 다양한 색채를 사용하여 고을의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성곽이 있었던 읍치에는 주변의 산을 환포형으로 그려 중심 공간임을 부각시켰으며 각종 관청 건물을 자세히 그려 넣었다. 읍성의 동문 근처에는 당간인 木檣과 石檣의 모습까지 그려 넣은 점이 이채롭다.
이들 당간은 나주의 지형이 行舟形이기 때문에 이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 전해진다. 현재에도 석당간은 그대로 남아 있다. 각 성문은 방어에 용이한 甕城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고 당시 右營에 해당하는 鎭營은 남문 바깥쪽에 위치하고 있다. 영산강에는 戰船, 商船, 그리고 나룻배의 모습까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읍성내 현 나주시가지 모습
<1872년 지방지도 나주지도 읍성 부분>
나주는 백제시대 발라군(發羅郡)이었고, 통일기에는 발라주로 승격되어 전남일대의 치소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9년후 다시 발라군으로 강등되었고, 경덕왕때는 금산군(錦山郡)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 나주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나타난 것은 후삼국의 쟁패시기부터였다. 고려태조 왕건이 나주를 경략하여 후백제의 견훤을 견제하고 나주평야의 풍부한 물산을 장악하여 중심기지로 활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나주 호족 오다련(吳多憐)의 딸과의 사이에서 다음 대를 잇는 혜종을 얻게 된다. 현종1년 거란의 침입당시 현종은 나주로 몽진와서 열흘을 지내고 가니 그 사연이 사마교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나주목은 전라도의 중심으로 조선시대 말까지 그 위치를 유지하게 된다.
건물에 대한 안내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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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재일 눈길이 가는 것이 안내판이다. 옛 읍성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옛 읍성지도 그리고 자료을 인용하여 멋지게 꾸며 놓았다 충주에는 덩그라니 관아 공원이란 돌덩이 하나가 놓여있다.(아래 참조)
충주읍성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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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 <1872년 지방도>에 나타난 충주목 지도의 읍성.
충주읍성/ 충청감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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