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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목민심서를 통한 이정 박헌영과 호치민과의 만남
이장희 추천 0 조회 57 14.06.26 15:0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양주 마재고택/동상/여유당표지석]

 

 

목민심서를 통한 이정 박헌영과 호치민과의 만남

 

『국제레닌학교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은 졸업 후 각자의 나라로 귀국했을 때의 안전을 위해 모든 학생들에게 가명을 쓰게 했다. 박헌영은 논을 가는 써레와 농작물을 끌어 모으는 고무래의 한자어를 합쳐 이정而丁이라 가명을 짓고, 러시아 발음인 이춘으로 등록하였다. 하층 농민계급의 마음으로 살겠다는  뜻이었다. 박헌영은 나중에 소련으로 보내는 개인 편지나 문서에도 이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이정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글을 발표한다.

 

국제레닌학교는 일본어나 조선어는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헌영은 영어로 수업하는 반에 편성되었다. 영어 수업외에  프랑스어, 중국어, 스페인어, 헝가리어, 아랍어, 루마니어, 핀란드어, 인도어 수업이 있어 학생들은 각자 익숙한 언어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학생 중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호치민도 있었다. 한자 발음대로 호지명으로 불리던 그는 박헌영과 각별히 친해서 조선의 역사와 사상을 알게 되었다. 박헌영은 그에게 조선의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저서 「목민심서」를 선물했다. 나라의 관리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인민을 대해야 하는가를 기록한 이 책은 장차 베트남 지도자가 되는 호치민에게 평생의 지침이 되었다.

 

박헌영평전[안재성/실천문학사] 146

 

 

다산이 정치적 박해를 받아 고행길인 귀양살이에서 나온 역작 목민심서는 자신의 고을 수령을 한 현장 경험과 현직의 수령들이 국민의 고혈을 짜고 탐관오리들이 많아 이를 시정하고자 지은 책이다. 목민심서는 부임赴任,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공전工典, 진황賑荒, 해관解官의 1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방행정의 우두머리인 고을 수령이 백성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조목조목 잘 나타나 있다. 백성들의 어려운 삶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또한 곡산부사의 수령을 역임한 경험을 바탕으로 백성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배부르고 행복한 삶을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담겨 있다. 부정부패로 만연되어 있는 조선의 행정 상태를 개혁한다는 근본 취지가 있는 것이다. 애민정신이란 백성을 위한 정치가 꼭 필요한 것이며 이는 현재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계속 영원할 것이다.

 

정은 일제의 암흑기에 피지배자인 국민들의 미래가 절망적일 때에도 다산과 같은 훌륭한 선비의 목민심서와 같이 실천하여 백성이 주인 되는 나라를 건설하고자 한 것이다.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어온 이정은 역시 같은 처지인 호치민에게 목민심서를 선사한 것이다. 러시아의 국제레닌학교에서 1929년에 동문수학한 이정과 호치민은 제국주의의 침략에 국가와 민족이 처해진 환경이 같고,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더욱 동감하였을 것이다. 베트남 역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어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며 제국주의에 대항하고 투쟁을 벌여 조국 해방에 대한 깊은 대화를 하였을 것이다. 1942년에는 호치민 역시 망명정부 생활을 중국의 충칭에서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와 함께 하였던 적이 있어 더욱 피지배자의 절망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이정과 호치민은 국가의 근본은 국민이 잘 살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첫 번째의 목표로 삼았을 것이다. 호치민은 평소에도 독신으로 청렴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그리하여 죽어서도 깨끗한 정치가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호치민이 다산의 가르침인 목민심서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존경 받는 지도자로 남은 것이다.

 

다산의 목민심서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교양서이자 필독서가 되었고, 세계평화와 백성들의 삶의 질 향상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다산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사상가이자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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