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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10. 마흔다섯번째주 .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
신앙고백
찬송 36장 주 예수 이름 높이여
기도 이원준 장로,하경숙 권사,조용림 권사,염성섭 장로,
성경말씀 빌립보서 3:1~4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국화옆에서
찬송 317 어서 돌아오오
광고 시립 전환을 위해 기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다음 주 직원 총회, 추수감사절 성찬 예배 (세례-안영식, 김기산, 최진환)
김장12/2~4,준비위원장- 하경숙 권사, 권선희 권사, 박희순 집사
찬송 168 하나님의 나팔 소리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 주님도 아프고 , 나도 아프잖아요..
지난 금요일 날(11/8)이 입동입니다.
아침이 되면 서리가 하얗습니다.
하얀 눈도 내린다는 일기예보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 김장을 합니다.
그리고 2020년 새 달력도 준비 되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이제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그런데 저는 무슨 일에 쫓기듯 사는지 단풍 구경하러
한 번도 산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가을 국화를 옮겨 심고 매일 국화 꽃잎에 코끝을 대며
벌처럼 코를 벌름거리고 인사를 나눕니다.
국화꽃 향이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서정주 시인의 글이 생각이 납니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 국화 옆에서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서정주 시인은 국화꽃을 심어 보았는지?
저는 국화꽃을 많이 심었습니다.
예전에 노숙자들과 함께 살면서
매일 새벽 4시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면 국화를 꺾꽂이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물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봄부터 가을 국화꽃이 피기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국화꽃 향기가 쓰고 달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눈물도 납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지 않습니까?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듯이
우리 인생도
좌절하고 실패하고 울고불고하면서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한송이 국화꽃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죽기도 합니다.
애처롭습니다.
1절입니다.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절,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3절,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4절,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우리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식욕과 성욕입니다.
식욕은 살고 싶은 것입니다.
성욕은 번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숭아와 오얏(자두)은 말이 없어도
그 아래 저절로 길이 생깁니다.
복숭아 오얏을 사람, 동물들이 먹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씨앗을 떨어트리고
다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번성합니다.
심지어 무거운 바위 밑에서도 여리디, 여린 풀들이
천근, 만근의 무게를 견뎌내고
구불구불 줄기를 뻗어 나무가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무언無言의 결과입니다.
묵언默言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묵언默言, 무언無言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란스럽게 일일이 고통을 호소하지 않고
견디며 참아 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프고 슬플 때마다
엉엉 울면서 야단법석을 떨기라도 하면은
경박스럽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성도님들이 얼마나 구접스럽습니까?
참 말들도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일일이 대꾸하겠습니까?
그러다가는 목회를 할 수도 없고 쫓겨납니다.
그래서 말들이 많은 사람들은 가급적 피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빌립보 교회에 말들이 많은 성도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성도님들이 있었습니다.
일하러 와서 일들은 하지 않고 험담만 하고 다닙니다.
대부분 말들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머리에 뿔이 났습니다.
2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이렇게 말들이 많은 성도들을 일컬어 개라고 호칭했습니다.
우리 어머님께서도 그랬습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겠느냐고?
더러우니까?
피하는 것 아니겠느냐?
엊그제 저도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에 사우나에 들러서 요양원에 옵니다.
그런데 새벽에 사우나에 갈 때마다
알바하는 분이 너무나 일찍 온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래서 며칠 다녔는데 3개월분 정기회원요금을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사용한 것만큼 공제하고 반환해 주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못 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할 수가 없어서
소비자 고발센타에 민원을 접수했습니다.
그랬더니 곧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방문하면 반환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춘자 권사님 약처방 받으러 전주 가는 길에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구질구질 꼬투릴 잡으면서 반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화가 치밀던지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사도바울처럼 개같은 놈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엄청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백춘자 권사님 처방을 받으러 전주에 갔습니다.
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제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오면서
얼마나 화가 치미는 일들이 많습니까?
예수님께서도 화를 참지 못하고
예루살렘성전을 뒤엎기도 했습니다.
지금 사도바울도 몹시 화가 나서
교회를 소란케 하는 놈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2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그런데 목사인 저는
요즘 화가 치밀어 오르면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집으로 가서
나 홀로 산책을 합니다.
그러면서 1시간여가 지나면
모든 것이
제가 잘못해서 빚어진 일이었다고 반성을 하게 됩니다.
노자가 한 말입니다.
잘 싸우는 자는 화를 내지 않고,
잘 이기는 자는 잘 싸우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한 가지가 있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Who am I ?
오늘 말씀에 사도바울도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자기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절, 열심 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
노무현 대통령께서 평검사들과 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요.
우리나라 검사들이 얼마나 잘나고 똑똑합니까?
그래서 독선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어머님께서 우리 어린 자식들에게 항상 하시는 말씀은
많이 배운 사람들은 익은 곡식처럼 머리를 숙이는 법이다.
되지 못한 사람들이 빈 깡통이 요란한 것처럼
시끄러운 것이다.
그렇습니다.
사도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로상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잘 난 체께나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잘 난 체해도 될 만큼 천재이기도 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5)
베냐민 지파라 하면
이스라엘 최초의 왕, 사울 왕의 가문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의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다문화 가정이 300만이 넘습니다.
우리나라도 백의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헬라-로마제국시대에
순수 히브리문화를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사도바울만은 이스라엘 히브리문화 전통을
철저하리만큼 지켰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상투틀고, 삿갓쓰고, 두르마기를 입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이 가장 깨끗하고 진실했다고 믿는
유대교 종파였습니다.
정말 율법으로는 흠잡을 것 하난 없는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따르지 않았던 사도바울로서는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이 말은 나도 예수를 몰랐을 때에는
너희들처럼 미친 개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나 교만했는지
얼마나 잘 난 체했는지
저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2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처럼
행악자들처럼
손할례(잘나내는 것, 유대 종교문화)당처럼
무늬만 크리스찬이었고
무늬만 목사였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목사인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제가 11월 9일, 토요일입니다.
아침부터 우리 김정자 집사님께서 묻습니다.
고드름이 뭐냐고?
그래서 겨울에 처마 끝, 물방울이 추위 때문에 길게 맺혀지는 것이
고드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묻고 묻습니다.
고드름이 뭐냐고?
치매가 심해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전예순 권사님이 매일 밥을 떠드리고 있는
목사인 저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분례 권사님은 대상포진 후유증 때문에 징징거립니다.
다른 날보다도 더 유별난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래도 모두 달래고 얼르고
그리고 성경을 읽다가 우리 아버님께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소외감을 갖지나 않으실까 해서 모시고 점심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읽고 있노라니
우리 강순옥 집사님께서 이재열 어르신을 모시고 왔습니다.
아침 식사도 거르시고
점심도 드시지 않았다고
그래서 성경을 덮고서 이재열 어르신 손을 꼭 붙잡고
가까운 식당으로 모시고 갔습니다.
일일이 밥을 떠 드렸습니다.
밥 한 그릇을 다 드셨습니다.
이렇게 착한 일로 일주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잘 못 했던 일들까지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목사인 저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목사인 저는 제 자신도,
그리고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목사인 저는 아직도 제가 누구인지?
Who am I ?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가 목사인 저를 함부로 말하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지합니까?
그리고 저 역시도 누군가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는 습관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일일신우일신日日新 又日新 새롭게 변화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제의 자아我가
오늘의 자아我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렇게 똑똑했던 사도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이렇게 변했습니다.
이런 경우를 일컬어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앞장섰던 사도바울이
이제는 예수님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제의 오해와 편견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하마터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죽일뻔하지 않았습니까?
오해 때문에
편견 때문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오해와 편견 때문에
내 친구에게
내 이웃에게 못되게 한적을 없습니까?
이제 가슴을 활짝 열고
오해와 편견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어제 성경을 읽고 있노라니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친구의 어머님을 우리 요양원에 모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리가 없습니다.
자리가 나는 대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30년 동안 미용 봉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습니까?
우리는 기분 좋으면 하고
내 기분이 뭐하면 봉사고 예배도 드리지 않습니다.
내 멋대로, 엿장수 맘대로입니다.
돈을 받고 하느냐? 물었습니다.
전혀 돈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루도, 한 달도, 1년도 아니고 30년 동안
미용 봉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서
누군가를 위해서 무료봉사를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일인지 깨달아야겠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있다면
이것이 예배입니다.
삶이 예배인 것입니다.
요즘 제 머릿속을 맴도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입니다.
예수 사랑은 아랑곳이 없이
교회만 무성합니다.
마치 열매 맺지 못하는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제 한 목숨 교회개혁을 위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제 생각을 누구에게 말하겠습니까?
미친놈 소리를 듣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묵언默言합니다.
그냥 제 바램 일뿐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도 미친놈이라고
십자가처형을 받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가족들까지도 예수님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세대를 일컬어 믿음이 없는 세대라 말합니다.
정말 믿지 못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CC카메라가 곳곳이 붙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는 다닙니다.
교회는 믿음공동체입니다.
이것이 아이러니irony입니다.
누구도 믿지 못하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에 다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깨달음입니다.
Who am I ?
내가 누구입니까?
Who am I ?
지금까지도 우리는 백조를 잡아먹어야지 하면서
기어 다니고 있는 두꺼비는 아닙니까?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 아버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선생님들이 집에 가시면 귀하신 어머님이시라고,
아들, 며느리, 손주들이 있다고
그러니 우리 선생님들을 함부로 대하지 마시고
존중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뇌경색이 한 번 더 오면
이제 병원 응급실 대신 장례예식장에 가셔야 한다고.
어제도 점심을 함께 하면서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면서 이제 천국에 갈 준비를 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엊그제 우리 이강우 교장 선생님께서 혈압이 179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의식이 없다고 간호사께 전화를 받고
아드님과 통화를 했습니다.
응급실에 갈까요?
장례예식장으로 갈까요?
그랬더니 팔복 장례예식장으로 갔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목사인 제가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2절입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사도바울도 이렇게 욕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올랐으면
목사가 욕하겠습니까?
이제
더이상 이런 개 같은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지 않도록
우리 성도님들도 조심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