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2021년 5월 이맘때쯤『계절스케치11』로 올렸던「하얀빛 향훈의 계절」이라는 타이틀의 글을 쌍둥이 손녀들에게 보내는 <산촌편지>의 형식으로 바꿔 쓴 글입니다. 이미 그 글을 읽었던 분은 이 글을 다시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름이 시작된다는 절기인 입하(立夏)를 지난 지도 벌써 꽤 여러 날이 지났구나. 내일모레면 온 산하에 모든 것들이 자라나서 가득해진다는 소만(小滿)의 절기가 시작되는 날이지. 산야에 가득한 5월의 신록이 싱그럽기만 하고 차츰 그 푸르름의 빛깔이 깊어지기 시작하고 있어.
한비, 한율아!
오늘은 5월에 하얀 꽃을 피우는 꽃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 이즈음 갓 초여름의 시기에 조용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있어. 노랑 개나리 꽃, 연분홍 진달래와 벚꽃, 보랏빛 라일락, 담홍(淡紅)의 복사꽃과 진홍의 철쭉 등 앞서 봄을 수놓았던 다채로운 색깔의 꽃들과는 다른 것들이지. 요즈음에 피는 꽃들은 한결같이 청신한 담록(淡綠)의 푸르름을 해치지 않으려고도 하는 듯 그 빛깔과 모습 모두가 다소곳한 것들이란다. 이들은 신록의 대지 위에 흰색의 고상함과 그윽한 향기로 차분하게 피어나고 있어.
5월 들어 이곳 산촌의 나래실농원에는 이미 미나리냉이가 과수나무 아래 풀숲과 언덕에 순백(純白)의 꽃 무리를 만들었었어. 또 이들과 어울려 피는 광대수염도 곳곳에 흰색 꽃 무더기를 만들었지. 지금은 다 지고 말았지만 가침박달이라는 나무도, 아그배나무도 5월에 들어 나뭇가지들이 가득 흰 꽃을 달았댔어. 산 섶에 백당나무, 밭둑에는 산딸나무가 이제 흰색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중이야. 앞뜰의 불두화도 마찬가지고. 이들은 모두 향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같이 모두 하얀색 꽃을 피우는 것들이란다.
그런데 이맘때쯤이면 향기를 가진 또 다른 하얀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지. 은방울꽃, 고광나무, 아카시아와 찔레꽃... 이들의 하얀 꽃향기, 백색 향훈(香薰)의 릴레이가 5월 내내 이어진단다. 이들은 모두가 그 모습이 전혀 화려하지도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꽃을 피워. 하지만 이들은 모두 흰색 또는 옅은 미백색의 우아한 꽃 색과 모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척이나 맑고 깊은 향기의 꽃을 피워내. 참으로 묘한 우연의 일치, 자연의 신묘한 연출이 아닐 수 없어.
은방울꽃은 그 모습이 여간 앙증맞지가 않아. 작지만 힘차게 뻗어 올린 두 줄기 잎새 뒤에 은방울 모양의 작은 꽃 타래가 보일 듯 말 듯 숨어있어. 외줄기의 가녀린 꽃대에 예닐곱 잔잔한 종 모양의 꽃들이 줄지어 피어나지. 이들은 나래실농원의 앞뜰에도 제법 큰 무리를 만들어 한창 꽃을 피우는 중이야. 하얀색 고운 빛깔의 이 꽃송이에 얼굴을 가까이하면 짙은 향기가 코를 강하게 자극한단다. 어찌 그리도 작은 꽃에서 그토록 진한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인지 신기하기만 해. 이 꽃들이 지면서는 콩알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초록 열매가 달려서 빨간색으로 익어. 그런데 이처럼 아리따운 은방울꽃이 치명적인 독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무슨 조화일까? 그리고 이토록 앙증맞은 아담한 풀꽃이 집안의 정원보다는 반그늘의 숲속에서 더 잘 자란다는 것도 무척 특이해. 그래서인지 서양에서는 이 은방울꽃을 ‘계곡의 백합 (Lily-of-the-Valley)’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그리고 층층이 매달려 있는 꽃 모양을 보고 은방울꽃을 천국으로 오르는 ‘야곱의 사다리(Jacob’s Ladder)’라고 부르기도 하고 ‘성모 마리아의 눈물(Mary’s Tear)‘이라고도 불러.
그리고 이제 막 고광나무 떨기들이 새하얀 꽃 문을 열기 시작했어. 미백색 홍조가 깃들인 꽃봉오리를 열어 산 섶 한 자락을 새하얀 빛으로 환하게 만드는 중이야. 순백의 청순한 꽃잎, 뚜렷한 잎맥의 초록 잎새, 그윽하면서도 부드러운 꽃향기...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는 하양 빛깔의 꽃송이는 다소곳한 모습인데 꽃의 한가운데에는 연노랑 꽃가루를 단 수술들이 가득 들어 있구나. 한편 연노랑 화분의 빛깔이 꽃잎에 은은하게 묻어나면서 그 꽃에서는 옅은 미백색(微白色)의 더욱 우아한 색감이 느껴지기도 해. 그리고 그 꽃은 문득 내게 흰옷을 사랑했던 우리 백의민족(白衣民族)의 애잔한 서정을 떠올리게도 하는구나. 이들 고광나무는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산 섶 여기저기에서 스스로 자라나서 무척이나 깊고도 맑은 향기의 꽃을 피워내고 있어. 해 전 밭일을 하다가 이 매혹적인 향기의 주인공을 찾아가다 보니 바로 이 고광나무 꽃이 피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지. 이후 이 나무는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나무의 하나가 되었어.
이 시기를 다투어 피어나는 흰색의 또 다른 꽃은 아카시아야. 산허리 여기저기에 제법 너른 가슴을 펴고 무수한 꽃송이들을 가득 피워낸단다. 함께 돋아나는 연둣빛 잎새들 속의 자잘한 꽃송이들은 은은한 연두색이 묻어나는 뽀얀 우윳빛이란다. 가난을 물리치고 강토를 푸르게 하기 위한 함성이 우리 산하의 전역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던 지금으로부터 50, 60년 전쯤인 1960, 70년대였지. 내가 코흘리개 어린이였던 시절 사람들은 벌거벗은 마을 산자락의 여기저기에 아카시아를 심었어.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던 5월의 이즈음에 배고픔을 이겨내기 위해 이 꽃을 따먹기도 했지. 마을이 가까운 숲이나 도시 근교 주변의 산자락에서도 무리를 이룬 아카시아 숲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도 지금 한창 꽃을 피우고 있어. 무리를 이룬 아카시아 숲의 꽃향기는 꽤 멀리까지 그 달콤한 내음을 전해준단다. 때가 늦은 이곳 산촌 지역에서는 이제야 아카시아꽃이 피기 시작했어. 써레질이 끝난 논에서 모내기가 한창인 시기야. 그리고 이 아카시아 꽃이 농익은 향기와 함께 흐드러질 때쯤이면 모내기가 끝나고 계절은 한발 성큼 한여름으로 접어들지.
한율, 그리고 한비야!
율과 비가 사는 도시의 정원과 담장에는 벌써 장미들이 화려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했지? 어느 아파트의 담장에 심어진 덩굴장미 사이에 간간이 심어진 찔레도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한 걸 벌써 지난주에 본 적이 있어. 이곳 농원에도 찔레가 곧 꽃 문을 열 듯 그 봉오리들이 아주 도톰해졌구나. 내일모레면 농원 곳곳의 찔레꽃이 피기 시작해서 5월 농원의 하얀색 향훈을 이어갈 거야. 찔레꽃에 관한 이야기는 이 꽃이 무성하게 필 다음 주에 좀 더 특별하고 자세하게 전해주마. 안녕~ (2022.5.19.)
첫댓글 5월의 꽃 향기가 오케스트라처럼 다가옵니다. 산과 들에는 이미 여러가지 꽃들이 흐드러지게 나의 코를 자극하고 있습니다. 한편 너무 빨리 지나는 것 같아 아쉽기도 합니다. 벌써 하순으로 접어드니까요. 아침 글의 향기를 마음껏 마시고 산책길에 나섭니다.
봄철 식물도감을 열어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름답고 향기를 가지고 피고지는 꽃에게서 인간이 배울 점이 많다는생각을 해봅니다. 언젠가 아름다은 꽃은 오래가지 못하거나, 향기로운 꽃은 아름답지 못한 경우를 보면서 꽃은 겸양의 덕을 가졌단 생각을 한 적이 있지요. 서재에서 상쾌한 숲속을 맘껏 거닐었습니다.
요즈음 피는 꽃들은 담록(淡綠)의 푸르름을 해치지 않으려는 듯 빛깔과 모습이 다소곳하다는 말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신록의 아름다움을 시샘하지 않는 자연의 신묘한 연출일까요?
아카시아 꽃잎 따먹던 시절의 추억은 잊었습니다. 너무 아픈 추억이겠지요.
순우의 글 한 꼭지에는 무척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스폰지 같은, 불가사의한 사유 공간에는 담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만, 저의 노쇠한 머리로는 언감생심이군요. 마냥 꽃 향기에만 취해봅니다.
이제 늦봄, 오월의 꽃들이 만발하고 지는 때가 되어가는 군요. 푸르름이 더 짙어지고 밥톨만한 열매 모습도 보이네요. 꽃이 열매로 맺는 계절이 다가오며 바쁜 농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나역시 지난주 일요일에는 서대문 안
산에 가서 아카시아 꽃향기를 듬뿍마
셨습니다.
년중 5월은 최고의 축복이네요
대자연과 함께하는 분들의 심성
은 티없는 거울이 아닌가 생각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