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곤경의 날에 저희 피신처가 되셨나이다.”(시편 59(58),17ㄹ)
교회는 오늘 이냐시오 데 로율라, 곧 로율라의 이냐시오를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1491년 카스티야(Castile) 왕국의 키푸스코아(Guipuzcoa) 지방에 있는 바스크 귀족 가문에서 열세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성인은 젊은 궁정 조신이자 의기양양한 기사였으며 스페인 국왕에게 봉사하는 군인이었습니다. 1521년 프랑스의 침공에 위협을 받고 있는 스페인을 위해 전쟁에 참여한 성인은 수비대의 선봉에서 싸우다 포격을 받아 큰 부상을 얻게 됩니다. 성인은 고향으로 후송되어 힘든 회복기를 보내던 중 우연히 읽게 된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을 통해 회심을 하게 되고, 그 이후 이전의 군인으로서의 삶을 모두 버리고 우리가 잘 아는 ‘예수회’라는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릅니다. 책을 통해 회심하게 된 성인의 이 같은 예는 자신이 읽은 것에서 깊이 영향을 받는 사람의 모범적인 예, 책의 위력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증인이 됩니다. 한편, 이냐시오 성인은 자신의 회심 체험을 바탕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성생활의 기초, 곧 영신수련이라는 구체적 기도방법을 만듦으로서 가톨릭교회의 영성의 역사의 위대한 일을 이룬 거룩한 성인입니다.
이 같은 성인을 기억하는 오늘 복음 말씀은 이번 주간 계속되는 마태오 복음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지고한 가치를 밭에 숨겨진 보물과 어렵게 찾은 귀한 진주에 비유합니다.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발견한 사람은, 또 귀한 진주를 찾던 상인은 마침내 그가 찾던 귀한 진주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밭과 진주를 사들입니다. 그들은 남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그 밭의 가치와 진주의 참된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의 가치를 다 합하여도 밭에 묻힌 보물과 귀한 진주의 가치에 미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는 그들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그 밭과 진주를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하느님께서 하루하루 소중한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그 분 나라의 가치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금 내가 소유한 모든 물질적 재산과 사회적 지위, 나의 모든 명예와 위신을 뛰어넘는, 아니 그 모든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지고한 가치를 지닌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것이 비록 지금은 밭에 숨겨져 있고, 그 가치를 바로 알지 못하는 이의 옷장 속에 숨겨져 있을지라도 매일의 말씀을 통해 전해져 오는 그 가치의 지고함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려 한다면, 우리는 그것의 참 가치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그 가치를 깨닫게 될 때, 우리 각자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지금 내 손 안에 담긴 모든 것을 내어 버리고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얻고자 즉각적으로 나의 모든 것을 투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이야기하는 하느님 나라의 이 같은 지고한 가치, 지금 내가 소요한 모든 것을 다 합쳐도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그 지고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밭에 숨겨진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눈, 값진 진주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오늘 독서의 말씀이 그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이번 주간 계속되는 독서의 말씀은 고통과 비탄의 예언자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칭하는 그 고통과 비탄이라는 말에 걸맞게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는 일을 넘어 자신이 태어난 순간까지를 저주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예레 15,10)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예레미야는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를 원망하고 자신이 태어난 순간을 저주합니다. 고통이 너무 극심하면 상대방이나 상황을 원망하는 것은 넘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원망하는 이 예언자의 모습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든 여정이었는지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예언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 15,16)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 삼켰더니 그 말씀이 내 마음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었다는 이 예언자의 말은 말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며 그 말씀의 뜻을 새겨본다면 그 의미는 더욱 깊고 심오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신앙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많은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한 모델을 제시해줍니다.
사실 지금 현대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도전을 넘어 마치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편하고 믿음 없이 살아도 아무 지장이 없으며 아니 오히려 믿음의 삶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장애가 되는 이 세상에서 과연 신앙을 갖고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세상은 우리에게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례미야 예언자의 말씀은 신앙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답을 제시해줍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언제나 그와 함께 할 것임을 약속해 주시고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약속을 다음의 말씀으로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예언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너를 대적하여 싸움을 걸겠지만, 너를 이겨 내지 못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하고 건져 낼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를 악한 자들의 손에서 건져 내고, 무도한 자들의 손아귀에서 구출해 내리라.”(예레 15,20ㄴ-21)
예언자에게 하느님의 이 말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위로이자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고통뿐인 세상에, 시련과 박해뿐인 자신의 예언직분에 하느님의 이 말씀은 그가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힘이 되어 주었을 것이며, 이 말씀으로 예언자는 자신의 삶에 기쁨과 즐거움을 찾았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오늘 복음의 우리의 질문에 답이 있습니다. 곧 밭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수 있는 눈, 좋은 진주를 발견할 수 있는 눈은 바로 이 하느님의 말씀에 담겨 있다는 사실. 여러분 모두가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우리 삶의 기쁨이자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하느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 삼킴으로서 말씀의 힘으로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 기쁨의 나날을 보내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저의 힘이시여, 당신께 노래하오리다. 하느님, 당신은 저의 성채, 자애로우신 하느님이시옵니다.”
(시편 59(5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