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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왔고 추운 날씨였다
첫사랑 옥이와 나는 춘천 육림극장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슬픈 이별 영화감상을 하며 부둥켜안고 같이 울었다.
영화가 끝나고 영화의 진한 여운을 진정하면서 옥이와 나는 육림극장에서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재래시장 골목을 걷고 있었다.
우리가 팔짱을 낀 채 데이트하는 모습은 누가 보아도 지극히 다정한 연인처럼 보였을 것.
정말로 옥이는 나의 하나밖에 없는 천사, 나의 모든 것, 나의 첫 여자, 나만의 사랑이었다.
동그란 빨강 모자를 쓰고 빨강 코트를 입은 작은 체구 옥이는 인형같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그날도 극장에서 중앙시장으로 이어지는 재래시장 노점 상인들은 장작불과 연탄불을 피워놓고
고달프지만 활기찬 일상을 살고 있었다.
옥이는 시장골목 어느 상점에서 멈추더니 나를 기다리게 하고서는 무엇인가를 사가지고 나오는 것이다
석사동 옥이 동네까지 바래다주고 헤어질 즈음, 동네입구 어귀에서 옥이가 걸음을 멈추고 나 보고 눈을 감으라고 한다.
나는 옥이가 첫 키스를 해주려는가 싶어서 눈을 감고 기다렸다.
그 순간 가슴이 벌렁 벌렁 뛴다.
그런데 입속으로 달콤한 초콜릿이 한 개가 들어오는 것이다.
나 : 이게 뭐야?
옥이: 자기야. 오늘이 무슨 날일까?
나 : 글쌔... 무슨 날 이지?
옥이: 바보처럼 무디기는... 오늘이 밸런타인데이인데 그것도 몰라?
나 : 그게 뭔데?
옥이: 바보야! 오늘은 여자가 남자한테 사랑고백하면서 초콜릿을 주는 날 이잔아.
옥이가 시장골목 상점에 간 것은 나를 주려고 초콜릿을 사러 들어갔던 것.
나는 달콤한 초콜릿 맛도 있었지만, 옥이의 사랑스럽고 귀여운 그 행동에 감동하면서 옥이를 부둥켜 안고 내가 첫 키스를 시도했다.
옥이는 나의 그런 행동을 한참이나 자연스럽게 받아드렸고 부끄러움을 타며 내 팔목을 꼬집고 예쁜 눈을 흘긴다.
헤어짐의 아쉬움을 남긴 채 손을 흔들어주면서 종종 걸음 자기 집으로 들어 가고,
그 모습을 보고 옥이가 준 초콜릿을 오몰오몰 맛보면서 옥이생각만 하면서 나도 집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린다.
나는 원래가 여자에게는 쑥맥이다.
여자 앞에서면 왠지 말투가 버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하고 싶었던 말 표현을 못한다.
여자마음을 사로잡는 달콤한 말 재주가 없을 뿐만 아니라 외양을 멋스럽게 하여 여자눈길 끌 수 있도록 하는 꾸밈새도 모른다.
그야말로 무드 없는 남자인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자력으로는 여자를 사귀지 못하고 있었는데 옥이를 알고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옥이는 우리의 동창생 이인배가 소개를 해주어서 만나는 계기가 되었고, 인배가 재미없는 내 성격을 사전에 좋게 설명해주어서 만남이 지속되고 발전된 것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동창생 이인배 이야기를 해 보겠다.
인배는 근화초등 3학년 때인가 울진에서 전학을 왔다.
아버지가 산림공무원으로 울진군청에 (울진군이 당시 행정구역상 강원도이었음) 근무하다가 강원 도청으로 인사 이동되어서 전학을 오게 된 것. 인배 집은 부자동네인 기와집 골목 내리막길에 아담하고 깨끗한 개량 한옥집 이었고
근화동 판잣집 쪽방에서 살던 나는 인배 가정을 부러워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인배 집에 가면 인배어머니가 해주시는 옥수수 빵을 많이도 얻어먹었다.
인배는 항상 깨끗하고 단정한 정장양복을 입었으며 한 눈에 보아도 귀공자 같았다.
또한 머리가 좋아서 공부도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다.
춘천중학교를 수석으로 합격하여 (현준이가 3등 합격) 당시 변두리 학교인 근화초등학교 개천에서 용 났다고 춘천시내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나는 춘천중을 입학하고 1학년에 형님직장을 따라서 포천중학교로 전학하고
그 후 고등학교졸업까지 인배와 헤어지게 되었다.
누구보다도 잘 나갈 줄 믿었던 인배는 가정에 우환과 불행이 겹치면서 사춘기를 방황하면서
방탕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멀리서 듣고 안타까워하였다.
나 역시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청소년기 방황을 하며 공부에 집중을 하지 않고 살아갔다.
그래도 꿈은 커서 실력도 안 되면서 서울의 명문대 법학과를 지원했다가 여지없이 낙방한다.
인배역시 나처럼 명문대 법학과를 지원했다가 낙방한다.
형님이 춘천으로 다시 전근을 와서 인배와 나는 재수생 신분으로 추락하여 강원도청아래 시립도서관에서 재수공부 한답시고
아지트를 만들어 다시 만나게 된다.
같이 1년을 재수하지만 인배와 나는 공부에 관심 없고 네 돈 내 돈 없이 용돈만 생기면
싼 안주 춘천 닭갈비 막걸리로 끓어오르는 욕구불만과 삶의 분노를 삭이며 달래곤 했다.
우리는 실력이 안 되어 다시 서울의 대학문에 도전을 할 수 없었고, 그 당시 강원대 법학과가 신설이 되었다고 하기에 강원대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입학을 해 보니 우리의 동기생인 이철근, 변춘자등등 많은 친구들이 1년 전에 정상적으로 입학하여 2학년선배가 되어 있었다.
1년 후배들하고 동급생이 되어 수업을 하자니 자존심은 상하고 . 인배는 결국 1학기도 채우지 못한 채 중퇴를 한다.
그즈음 인배는 준수한 외모에 세련된 말솜씨로 모든 여자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어 여자들 우상이었다.
반면에 나는 여자 앞에서 버벅 거리며 여자를 두려워하였기에 시선도 주지 않아 존심이 상해있을 때였다.
인배가 나의 그런 모습이 딱하게 보였던지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를 나에게 양보하고 만남을 주선했다.
그 사람이 소중한 첫사랑 옥이였던 것이다.
그해 가을 의지하고 지냈던 인배는 교정을 떠났고 나는 더욱 학교적응을 못하며 지냈다.
그래도 옥이와의 교제가 위안이 되어 1학년을 겨우 수료하게된 것이다.
이인배는 그 후 만남을 같지 못하고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살고 있다.
학원 유명강사가 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식도 있고, 어디서 어찌 사는지 모른다.
혹여 인배가 이 글을 읽는다면 소식을 줄 텐데... 보고 싶고 그립다.
인배소식을 아는 친구가 있으면 연락주기 바란다. 인배야! 우리가 죽기 전에 한번 만나보자꾸나. 꼭.
옥이와 데이트를 끝내고 집으로 오니 집안분위기가 험악하고 예사롭지 않다.
16살 터울의 아버지 같은 형님이 엄숙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며 형님 방에 들어오라고 한다.
오늘 무엇을 하고 밤늦게 이제 들어오느냐고 추궁을 하신다.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오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자 형님이 갑자기 내 귀싸대기를 후려치신다. 내 눈에서는 별이 반짝였다.
형님은 너 같은 놈 고생하며 공부시킬 것 없으니 당장 집구석을 떠나가라고 호통 치신다.
없는 살림에 인간되라고 대학교 보냈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연애질이나 하는 놈,동생 취급 안하겠다고 한다.
부모님 물려준 재산 없이 형님도 20대 초반에 숱한 고생을 하고 독립하였으니 나도 나가서독립하라고 하신다.
알고 보니 중앙시장 골목에서 옥이와 팔짱을 끼고 희희낙락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때,
형수님이 장을 보러 왔다가 우리 모습을 우연히 발견하고 너무 실망한 나머지 형님에게 모든 사실을 알렸던 것.
대학등록금을 마련하려고 형수님 결혼기념 패물을 팔아서 입학시켰고,
공부만하는 착한 시동생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형수님 실망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형님 봉급을 아껴서 조카딸 3명이나 키우고 어머니를 모시고 나의 학비까지 형님 형수님이 짐을 지고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나 그때 순간은 형님 형수가 너무나 야속하고 원망스러웠다.
남들은 대학신입생 미팅도 자주하고 야유회도 자주 가는데 젊은 청춘 남녀가 데이트 좀 했기로 그리 심하게 야단치는 것이 너무 마음 상했던 것. 나는 두말없이 형님 뜻대로 “집을 나가겠습니다.” 하고 내방으로 건너와 옷가지 챙기며 가출 결심을 다진다.
주섬주섬 소지품을 챙길 때 어머니가 달려와서 내 가슴을 치며 통곡하신다.
“이놈아!” 당장 형님 앞에 가서 잘 못했다고 용서를 빌어야지 이 엄동설한에 어디를 나간단 말이냐“ ”네가 나가면 나도 나간다. “ 하면서 울부짖으신다. 나는 어머니를 진정시키고 차분하게 설득하였다.
형님 수입은 뻔하고, 조카들 중학생 되면 생활비는 늘어나는데 내가 도저히 염치없이 대학까지 갈 수 있는 가정형편이 아닌 것이라고.
형님이 지금까지 공부시켜 주신 것을 평생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살겠다고.
건강하고 사지 멀쩡하니 나도 열심히 살면 독립할 수 있다고.
꼭 성공해 돌아와서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밤새도록 어머니를 설득 하였다.
내 결심이 굳어서인지 어머니는 더 이상 말씀을 못하신 채 한숨만 쉬면서 밤을 지새우신다.
새벽기차를 타려고 집을 나서는데 어머니가 종이에 싼 물건을 내 주머니에 넣어주면서 간수 했다가 필요할 때 쓰라고 하신다.
문 밖에는 흰 눈이 소복이 쌓여있고 새벽 찬바람 돌풍에 눈발이 휘날린다.
북받쳐 오르는 슬픔의 눈물을 어머니에게 안보이려고 눈 바닥에 엎드려서 하직 인사를 올린다.
울고 서있는 어머니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뛰면서 남춘천역으로 달렸다.
남춘천역에서 막상 춘천을 떠나려고 하니 옥이생각에 도저히 발걸음이 안 떨어진다.
그렇다고 가출해서 초라한 내 모습도 보여주기 싫었다.
한동안 망설임 끝에 옥이를 한번만 더 보고 떠나기로 했다.
옥이 동네를 갔지만 선뜻 불러낼 용기가 안 나서 동네를 맴돌고 있을 때.저 멀리 골목에서 옥이가 종종걸음 치며 자기 집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달려가서 옥이를 부르니 옥이는 깜짝 놀라서 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옥이는 동네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나오는 중이었다. 겨울코트를 걸치고 쓰레바를 신고 있었으며 목욕대야를 들고 있었다.
옥이: 자기 웬일이야?
나 : 어.. 어.. 어디 가서 잠깐 얘기할까!
옥이: 그래.. 근데 무슨 일이 있어?
나 : 암튼... 가서 이야기할께...
나는 옥이와 택시를 타고 근처 한적한 다방에 들어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춘천을 떠날 계획임을 말했다.
옥이는 금세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더니 눈물을 뚝뚝 떨군다. 한참을 머리 숙여 흐느끼던 옥이가 눈물범벅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단호하게 말한다.
옥이: “형님에게 용서를 빌고 당장 집으로 들어가!”
나 : “그럴 수는 없어!... 꼭 우리 엄마 같은 말을 하는 구먼!”...
옥이: “내가 자기 공부 방해 되지 않게 안 만나주면 되 잔아”!...!
나 : “ 집안사정이 그렇지 않다니까!”...
옥이: “꼭 가야만 해?...
나 : “그래야지.. 그게 나의 길인 것 같아”...
옥이: “그럼 나도 자기 따라 갈 테야”
나 : “그건 안 되지...옥이부모님 걱정할 꺼구...나도이런식으로 옥이를 데리고 갈 수 없지..
자리 잡는 대로 옥이를 떳떳하게 델꼬갈게... 기두리고 있어...
옥이: 가는대로 꼭 연락을 해야 돼...
나 : “ 그럼 꼭 연락을 할게...
우리는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남춘천역 근처 음식점에서 이별주로 헤어짐의 아픔을 함께했고.
새벽에는 남춘천역사안 차가운 의자에서 부둥켜않고 울면서 밤을 지새웠다.
새벽이 열리면서 첫 열차시간이 가까워지고 우리 헤어짐의 시간도 왔다.
그재 우리는 육림극장에서 사랑하는 연인의 안타까운 이별장면을 보고 슬퍼했는데
그 불행이 이틀 만에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주연배우가 되어 그 장면을 연출하는 것이다.
목욕한 후 곧바로 나를 만난 옥이얼굴에는 화장기하나 없이 청초하고, 눈물자국만 있다.
풀어진 긴 생머리에서는 향긋한 삼푸 냄새가 나고, 순결한 처녀 살 냄새가 난다.
우리는 깊고 깊은 포응을 오랫동안 하였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나는 첫 열차를 타고 옥이가 흔들어주는 작은 손을 보면서, 멀어지는 옥이모습 한 번 더 보면서 그렇게 남춘천을 떠났다.
옥이생각 어머니생각을 하며 강촌을 지나 가평에 다다를 즈음, 어둠이 거치고 차창 밖 강변에 물안개가 자욱이 깔려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깊은 슬픔의 나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주머니에 넣어 주신 종이뭉치를 펼쳐 보았다.
거기에는 어머니 끼고 있던 쌍가락지 금반지가 있었고 꼬깃꼬깃 접어두었던 지폐가 여러 장 있었다. 그 순간 양볼에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는 지금 가출을 하는 것이 아니고 출가를 하는 것이다.
거친 세상풍파를 홀로 헤쳐 가는 법을 깨닫기 위해, 수행의 길로 가는 구도자처럼 출가를 하는 것이다. 라고 자위를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주영회장님도 일찍 집을 나와 점원 생활, 쌀 장사꾼등 밑바닥부터 출발하여 성공했는데..
나 또한 그렇게 밑바닥부터 출발하여 기필코 성공하리라 다짐하고 온갖 슬픔을 잊기로 했다.
그러나 세상은 나의 뜻대로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1971년 2월 중순 집을 나온 그때부터 8월까지 어머니가 주신 금반지를 팔아 장사밑천을 하고 수도권 5일장 장터를 열심히 찾아다니면서 보따리 행상을 하였다. 제법 목돈을 마련하여 희망의 빛줄기가 보일 즈음 더 큰 돈을 벌어보자고 동업자와 동업을 하다가 몽땅 사기를 당하고 무일뿐 신세로 추락한다.
갈 곳도 없어 청계천 복개공사장에 기거하면서 해보지 못한 상노동을 죽기를 각오하고 3개월 버텼으나. 만성피로와 만신창이상처 몸으로 졸도를 한다.
몸이 회복되어 남산에 올라가서 스산한 마음을 달래본다.
서울시가지 소공동 명동 빌딩숲이 보이고, 정주영 회장처럼 재벌이 되어 그 빌딩주인이 될 날이 신기루처럼 요원 할 뿐더러, 왕십리 방향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집 한 채도 같지 못하고 이렇게 초라하게 서있는 것이다.
남산 돌계단을 터덕터덕 내려오니 벌써 낙엽으로 단풍잎이 깔려있고 불어오는 가을 찬바람에 내 마음은 더욱 스산해지는 것이다.
남산도서관이나 들러보자고 들어가 보니, 현관에 중앙지 지방지를 모아 놓은 신문철이 보인다. 그중에 강원일보 신문철이 눈에 들어온다. 반갑기도 하고 고향소식 그리워 강원일보를 꺼내서 뒤적이던 중에
강원도교육위원회에서 교육행정직 공무원 5회 공개채용시험공고문이 나와 있다.
또 뒤적이니 강원 도청에서 모집하는 행정직공무원 채용공고문도 나와 있다.
내 꿈은 고등고시에 있었지만 인생항로 좌표를 잃고 헤매던 나에게 그 공무원시험에 관심이 쏠린다. 시험 날자는 20여일밖에 없다
교육청과 도청 시험 날짜 간격이 있어서 그 두 가지 시험을 다 보기로 하고, 다음날 부랴부랴 응시원서를 준비하여 제출하였다.
남산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시험 준비를 하고 두 가지 시험에 응시하여 모두 합격하였다.
1972년 봄에 도청시험은 평창군청으로 첫 발령이 나고. 도교육청시험은 원주시 교육청으로 발령이 났다.
어느 기관으로 갈까 망설이던 중 죽마고우 김춘식이 도 교육청소속으로 나보다 1년 먼저 발령받고 근무 중이라서 춘식이 조언을 듣고 교육계통을 선택 원주시교육청으로 발령받았다.
나는 그동안 보고픈 어머니도 옥이도 연락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왜냐하면 내가 기필코 성공을 해서 찾아보고, 내 마음을 강하게 스스로 단련하기 위함이었다.
또, 고달픈 일상을 끝내면 고단한 몸 쉬기 바빴고, 문득 문득 그리운 모습 생각하며 잠자기 바빴다. 원주로 발령을 받고 비록 말단 공무원이지만 내 자신이 떳떳할 수 있어 1년 6개월 만에 옥이를 만나기 위해 춘천을 갔다.
그런데 옥이는 달라져 있었다. 무덤덤한 표정이고 언제 나하고 사랑 같은 것이 있었느냐는 표정이다.
나는 당황스럽지만 왜 이렇게 달라졌느냐고 물어보지를 못했다.
옥이 기대치에 못 미치는 말단 공무원이 되어서 일까?
아니면 다른 사랑하는 남자가 생겼기 때문일까? 그 후로 나는 옥이 얼굴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첫사랑 옥이와 달콤했던 시절, 분명히 그 연애가 나의 인생항로의 변곡점이 된 소중한 인연이었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내 기억의 저편으로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옥이로 끝나는 이름은 나와 숙명적인 관계가 있는가보다.
첫사랑 옥이는 가고 새로운 옥이가 왔다. 첫사랑 옥이는 0옥이, 새로 온 옥이는 영옥이,
영옥은 지금까지 살고 있는 나의 반려자다.
영옥이도 처음에는 첫사랑 0옥이처럼 이해심 많고, 상냥하고, 나긋나긋하며 순종적 이었다.
1978년 원주시에서 현준이가 결혼식 사회를 보고 죽마고우 몇 명만 초대하여 초라한 결혼식을 올렸다.
영옥은 생활력이 강하고 야무지게 살림하여 박봉의 내 봉급으로 2남1여를 생산해 잘 성장시켰다.
이제는 모두 독립하여 제 앞가림을 하고 있다. 엄마가 바르게 키워서 비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영옥을 항상 고맙게 생각하며 죽는 날까지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런데 가끔 사소한 일로 싸운다.
며칠 전 외손자 감기 때문에 내가 운전을 하고 병원 갔다 오는 중에 수리 받을 일이 있어서
삼성 서비스 센타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서비스 센타 주변은 차가 많아서 마땅한 주차장을 못 찾고 헤매던 중 벌어진 싸움.
영옥:(보통 목소리) 저기 주차하고 있는 차 뒤에 잠깐 새우면 되겠네,,,
나 :(보통 목소리) 그 곳은 주정차 금지구역이잔아...
영옥: 잠깐이면 될 텐데...
나 : . . . . . .
영옥:(큰 목소리) 저기도 있네. 저곳에 정차 하자고요...
나 :(큰 목소리) 그곳도 주정차 금지구역...
영옥:(더 큰 목소리) 다들 그렇게 주차하고 일을 보고 나오는데 융통성 없기는...ㅉ ㅉ ㅉ
나 :(매우 큰 목소리) 이 사람아!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야! 모르면 잠자 꾸나 있어!
영옥:(아주 큰 목소리) 운전 못한다고 사람 무시해요!... 매사가 그러더라...
나 :(아주 아주 큰 목소리) 무시는 뭐가 무시한다고,제발 잔소리 하지 말고 신경 건드리지마!.
외손자 동섭:(겁먹은 작은 목소리) 할머니 할아버지 싸우지 마세요...
우리는 찔끔 놀라서 더 이상 싸움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손주 녀석이 우리 싸움을 말린 것이다.
수줍고 상냥하던 영옥이 이렇게 변했다.
나이가 들면 여성은 남성화되고 남성은 여성화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라지만
나는 젊었을 때 영옥, 첫 사랑 0옥이 모습 그대로이기를 원하면서 그리워하는 것이다.
첫사랑 0옥이도 우리 영옥이 처럼 변해버렸을까? 첫사랑 0옥은 절대 변하지 않았을 것 같다.
밸런타인데이 유래는 AD 3세기경 남자 징집을 위해서 군인들 결혼을 금지했던 황제 명을 어기고 결혼식 혼배성사를 집전했다가 2월14일 처형당한 성 발렌티노주교를 기념하는 축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영미를 중심으로 카드선물을 주고받는 날로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여성 쪽에서 사랑을 밝힐 수 있는 날로 관습이 정착되고 있다. 내일은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다.
이런 일 저런 일로 세상풍파에 찌들어 감성 무디어져있을 여자 동창생들아!
내일은 아름답고 꿈 많던 소녀가 되어서 낭군님 입속에 초콜릿 한 개를 넣어 주시라!
분명 옆지기는 크게 감동받아 “역시 나는 당신밖에 없다” 환호하면서 아픈 어깨 주물러주고, 가려운 등 긁어주면서 추운 겨울밤 안방 이불속이 간만에 훈훈해지는 황홀한 밤이 될 것이다. ^0^...
첫댓글 와우!
진짜 러브 스토리네 ㅎㅎㅎ
남의사랑 재미있다
지나간 옛추억을 생각 하면서 ..
우리도 그시절에 빠져 버리는것 같다
아~옛날이여^♥♥♥♥♥
아 --너무멋져부려 옛날 love 스토리내 강이수님 다시생각하게 하네 누구나 첫사랑은 다마음속으로 간직하는데
이렇게 실랄하게 밝히는 용기가 아름답다.. 감동이내..
치악산님은 코수술 경과가 좋아 지셨는감? 나도 5년전 코골이 수술하였는데 엄청 아파서 고생했당.
울 나이는 건강이 최고의 덕목. 최상의 목표. 자식에게 짐 않되고 활기차게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도록 ♡♡노력함세!♡♡
사라져가는 추억을 붙들고싶어서
이글을 쓰고. 왠지 발가벗은 내 몸을
보여주는 것 같아 브끄 브끄.?
정제되고 가다듬은 문장표현이 아닌들
어떠하랴!나는 그분야 전공하지않은 것을 친구 들이 알고있고
친구들 아량을 믿기 때문.
진부한 긴글 읽어주어서 고마우이!!!!
용흠이 모친상 알려준자영 고마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