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2장(제물론) 21절
[원문]
“내 어찌 삶을 좋아하는 것이 미혹한 일이 아님을 알겠소? 내 어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자와 같지 않음을 알겠소? 려희(麗姬)는 애(艾) 땅에서 땅의 경계를 관장하는 관리의 딸이었습니다. 진(晉)나라에서 그 여자를 처음 데려왔을 때에는 옷깃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지요. 그러나 임금의 처소에 들어가 임금과 호사스러운 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그[녀]는 처음에 울었던 일을 후회하였습니다. 내 어찌 죽는 사람이 그가 처음에 삶을 추구했던 일을 후회하지 않음을 알겠습니까?”
[해설]
이번 절에서 장자는 많은 사람들이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데, 그 근거가 있느냐고 묻는다. 그는 사람들이 죽은 후의 상태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안좋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오류에 빠져 있음을 려희(麗姬)의 예를 들어 지적한다. 려희는 자신이 살았던 애(艾)땅에서 진(晉)나라로 갔을 때는 슬퍼서 눈물을 흘렸지만, 임금과 함께 좋은 생활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처음에 울었던 일을 후회하였다.
삶과 죽음은 함께 존재한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따르고, 죽음이 있으려면 반드시 미리 삶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존재론적 입장이다. 삶과 죽음은 함께 인식된다. 삶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죽음과 대비되어야 하고, 죽음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삶과 대비되어야 한다. 이것은 인식론적 입장이다. 존재론적 입장과 인식론적 입장에서 삶과 죽음은 대등한 지위를 가진다.
그런데 우리들은 흔히 가치론적 입장에서의 삶과 죽음은 대등한 지위를 지니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즉 삶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서 좋아하고, 죽음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 싫어한다. 그렇지만 장자는 삶과 죽음을 존재론과 인식론과 마찬가지로 가치론으로도 대등하다고 생각한다. 장자의 이러한 관점이 바로 제물론이다. 삶과 죽음을 대등한 가치로 놓을 수 있으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의 어리석음을 지적한 서양의 철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헬레니즘 시대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Epicurus, B.C.341~271)이다. 그는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죽음이 우리에게 오지 않고, 죽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노자 『도덕경』 50장
[원문]
근원에서 나오면 살고 근원으로 들어가면 죽는다. 삶으로 가는 사람들이 열 명 중에 세 명이 있고 죽음으로 가는 사람이 열 명 중에 세 명이 된다. 살 수 있는 사람인데 공연히 죽을 곳으로 가는 사람 역시 열 명 중에 세 명이 된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살려고 하는 마음이 너무 두텁기 때문이다.
대체로 보고 듣건대, 섭생을 잘하는 사람은 육지에서는 코뿔소나 호랑이를 만나지 않고, 군대에 들어가서는 적병에게 피해를 입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사람은 코뿔소가 그 뿔로 받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으로 할퀼 곳이 없고, 적병이 그 무기를 쓸 때 허용할 곳이 없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에게는 뿔, 발톱, 무기들에 의해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해설]
노자는 [근원에서] 나오면 살고 [근원으로] 들어가면 죽는다(出生入死)고 하였다. 노자는 삶과 죽음(生死)이 근원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삶에 대한 가치와 대등하게 생각한다. 다만, 섭생을 잘 하는 (도를 잘 닦는) 사람은 비참하게 죽지 않는다고 하였다. 비참하게 죽는 것은 비참하게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위적인 삶을 산 결과로 노자는 보고 있다. 결국 노자는 인생의 목적을 즐겁게 사는데(逍遙遊) 두고 있다.
〈이어지는 강의 예고〉
▪ 595회(2024.11.19) : 장자 해설 (31회), 이태호(철학박사/『노자가 묻는다』 저자) ▪ 596회(2024.11.26) : 현대시와 품격(1), 김상환(국문학박사/시인//대구시인협회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