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아랍권에 불어 닥친 정치 변동을 상세히 보도해 국제사회의 호평을 받았던 위성방송 <알자지라>의 고위 인사들이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위키리크스가 최근 공개한 카타르 주재 미국 대사관의 외교전문에서 드러났다. 이에 따라 중동문제에 관해 서방 언론의 시각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논조를 추구해 온 것으로 평가받았던 <알자지라>의 위상이 크게 흔들릴 것으로 보인다. 파문이 커지자 이 방송국의 와다 칸파르 총사장은 결국 자리에서 물러났다.
<AP> 통신 등에 따르면 카타르 주재 미국 대사관이 2005년 10월 작성한 외교전문에는 칸파르 총사장이 미 대사관 공보관 등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칸파르 총사장은 이 자리에서 이라크 북구 탈 아파르 지역에서 벌어진 미군의 군사작전에 대한 인터넷판 특집보도에서 두 장면을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삭제 장면은 얼굴을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한 여성 등 전쟁 피해자들의 모습을 담고 있어 미군의 이미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었다. 전문에 따르면 당시 미 대사관 측은 칸파르 총사장에게 <알자지라>의 보도에 대해 계속 불만을 늘어놓았고, 칸파르 총사장은 한숨을 쉬는 등 곤혹스러운 태도를 보이다가 결국 장면을 삭제하겠다고 말했다.
미 대사관 측은 또 미 국방정보국(DIA)이 2005년 7~9월 <알자지라>의 보도 내용을 분석한 자료를 칸파르 총사장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칸파르 총사장은 7~8월 분석 자료를 이미 카타르 당국으로부터 전달받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미 대사관 관계자가 예전에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 모종의 '합의'를 언급하자 칸파트 총사장은 "언론기관으로서 그런 성격의 합의문에 서명할 수 없다"며 구두 합의임을 강조하는 대목도 있었다.
이 전문보다 7일 전에 작성된 다른 전문에서도 <알자지라>의 인터넷판 편집 책임자가 미 대사의 항의에 따라 특정 기사를 삭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따라 파문이 일자 <알자지라>는 20일 성명을 통해 지난 7월부터 사퇴 의사를 표명한 칸파르 총사장이 이날 자리에서 물러났다고 밝혔다. 칸파르 총사장의 후임은 방송를 소유한 카다르 왕실의 셰이크 아마드 빈 자셈 무하마드 알타니가 맡기로 했다.
칸파르 총사장은 이날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알자지라>에 "개선과 변화"가 필요해 사퇴하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또 미국과의 관계가 드러나 사퇴한 게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내 사퇴 이유에 대한 모든 소문들로 우스갯거리가 됐다"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 <알자지라>의 영문판 인터넷 홈페이지 화면.
아랍어로 '섬'이라는 뜻인 <알자지라>는 카타르 왕조가 <BBC> 중동 지국을 인수해 1996년 11월 개국한 민간 상업방송으로 이라크 전쟁 등에서 각종 특종 보도로 유명세를 탔다. 올해 초 이집트 민주화 시위를 24시간 내내 보도해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으로부터 "<알자지라>야 말로 진짜 언론"이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동 민주화 열풍이 튀니지, 이집트를 넘어 바레인 등 카타르 근처의 친미국가들로 넘어오면서 <알자지라>의 보도에 변화가 감지됐다. 시민들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민주화 열기를 전하던 이집트와 달리 단순한 사실 보도가 늘어난 것이다.
이에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5월 <알자지라>가 이집트와 같은 장기 독재국가의 민주화 시위는 상세히 보도했지만, 카타르 왕실의 전략적 파트너인 바레인 등 군주제 국가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태도를 바꿨다고 비판했다.
리비아 사태 때 <알자지라>는 처음부터 시위대 편을 들었다. 시위가 내전으로 번진 후 반카다피 진영에 나토(NATO)군이 가세하면서 서방국들의 개입에 대한 정당성 여부가 도마에 오랐지만 방송은 반군 측에 기운 보도 태도를 유지했다. 공습에 참가한 국가 중에 카타르가 끼어있었던 게 주요 원인으로 꼽혔다.
공정한 언론으로 평가 받아온 <알자지라>가 '아랍의 봄' 보도엣 한계를 드러낸데 이어 이번 외교전문 폭로로 미국과의 '친밀한 관계'마저 드러나면서 신뢰도에 치명상을 입게 됐다. 시청률이 한때 40%를 넘어설 정도로 <알자지라>에 대한 신뢰를 보여온 중동 지역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