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3일부터 5일까지 3일간은 황금연휴.
나 같은 샐러리맨은 이 기회를 어영부영 보내면 후회하는 기간이다.
일주일 전부터 아내와 애들은 한껏 기대에 부풀어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보채댔다.
가장노릇하기, 남편노릇하기, 아빠노릇하기 정말 힘들다. 같이 놀면서 희생하는 수 밖에.
어린이대공원, 서울랜드, 에버랜드, 아니면 그냥 야외 들놀이?
어느 것 하나 마음에 안 들고, 차가 막히고 인산인해로 짜증이 날 것 같다.
난 이럴 때, 항상 처갓집 경남 남해도를 생각한다.
산과 바다 그리고 섬이 빚어낸 천하절경!
애들한테 이 이상의 자연학습이 어디 있으며 오랜만에 장인, 장모님도 뵙고
아내 기분도 띄워주고 이래저래 좋은 곳이 처갓집이다.
그래서 나는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하여 5월2일 저녁9시,
승용차에 기름 가득 채우고 수빈이 진학이 아내와 함께
멀고 먼 남해도 가는 길에 나섰다.
대전~진주간 대진고속도로가 트여 시속 120Km를 유지하면 5~6시간 걸린다.
애들은 잘 시간에 어딜 가는지 아는 것인지 잠도 안 자고 팔짝팔짝 날리다.
지루한 고속도로를 마치고 남해대교를 들어서는 순간, 아내는 벌떡 잠에서 깨어났다.
누가 자기고향 아니랄까봐. 깜깜한 해안도로를 따라 길게 즐비한 가로수들이 전조등
불빛에 모습을 드러내며 우리 가족을 반기는 듯 했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영지리 고잔마을.
처갓집 들어가는 논길에는 전날에 뽑았을 마늘종대 껍질이 즐비하고
아내는 “아~ 마늘냄새!”한다. 이것이 그리던 고향냄새겠지.
새벽 2시30분 노인네들은 주무시지도 않고 불을 켜놓고 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
수빈이 진학이 씩씩하게 인사한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네! 집안 어른 편안하신가? 피곤할 텐데 어서 씻고 주무시게.”
나는 다음날 7시30분 일어나 부엌에서 밥하는 아내를 뒤로 한 채 처갓집 뒷산에 올랐다.
나는 이 곳이 내 고향도 아니건만 좋다.
이 풀밭 우거진 오솔길. 다듬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나무들. 음매~음매~ 소와 염소 소리.
물웅덩이에 올챙이들. 윙윙거리며 날아가는 벌들. 찌 찌르르 울어대는 숲속 산새들.
나는 뒷짐 지고 편안한 산책을 했다. 어느새 뒷산 정상이다.
앞에 툭 터진 바다와 섬. 고즈넉이 정박한 고깃배. 앞바다에 늘어선 멸치잡이 대발.
이른 아침부터 밭에서 마늘종대 뽑는 부지런한 농부들.
마을 앞 저 멀리 힘차게 우뚝 서 있는 산맥. 마을 양옆을 에워싸고 있는 엄마 팔 같은 산맥.
내가 지금 서 있는 말뚝 같이 든든한 이 뒷산.
이 곳을 왜 고잔(꽃안)이라 하는가. 꽃의 안, 꽃술 같은 곳.
이 곳에서 왜 남해의 인물들이 많이 낳다고 이 곳 사람들은 자랑들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과연 꽃향기 만발하는 포근한 명당이다.
나는 산기슭을 따라 내려와 아내가 해 놓은 아침밥을 온 식구가 한데 모여 먹었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지 아는 장인은 술과 설탕 안 넣고 만들었다는 포도주를 광에서 내왔다.
카~~ 이 순수한 맛! 운전 때문에 저녁에 먹기로 하고 딱 3잔 먹었다.
오늘 하루는 장인, 장모님 모시고 관광하는 날. 오랜만에 맛있는 것도 대접하고.
남해는 요새 잔치 분위기다.
삼천포항과 남해 창선을 잇는 연륙교가 만8년여의 역사 끝에 개통을 했단다.
모개섬-초양섬-늑도를 잇는 동양 최대의 교량이란다.
예전에 남해도를 가려면 차로 남해대교를 건너든지
삼천포항에서 금남호를 타고 뱃길을 건너야 했다.
나도 아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처갓집에 처음 인사가고 떠나는 날, 금남호를 탔다.
갈매기 울어대는 부둣가에 승선을 기다리는 차량과 사람의 행렬.
바다물살 가르며 힘차게 울리는 뱃고동 소리.
긴 머리 찰랑찰랑 바람에 날리며 갑판 위 늘씬한 다리 뽐내던 아내.
저 멀리 파란 하늘은 아내의 눈동자마냥 아름다웠다.
나는 유턴하고 또 유턴하고 연륙교를 3번이나 왕복했다. 여한 없이 본 셈이다.
장인, 장모 좋아하고 애들은 차창 밖으로 목을 빼고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장인어른이 소개한 바다 장어집.
숯불에 자글자글 구워 양념장에 찍어 먹는 1Kg 17,000원 바다장어.
이런 제기랄, 이 좋은 안주를 놓고 운전 때문에 술도 못 먹고.
“장인어른 백세주 드시고 백세까지 사세요! 난 딱 두 잔만 먹을께요”
3Kg 먹으니 배가 불렀다. 물냉면으로 입가심하니 한숨 푹 자고 싶었다.
해안도로 따라 달리는 길은 그야말로 한 폭의 서양화.
인상파 화가 고흐의 자유분방한 색채의 향연 같다.
아~ 이 바다, 산, 들판, 백사장, 그리고 저 멀리 섬.
처갓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 아내는 자기가 나온 초등학교라며 잠시 들리자 했다.
남해는 초등학교도 이렇게 멋있나. 나란히 늘어선 2층집 학사.
운동장 한켠에 몇백년은 됨직한 서낭당 느릅나무 같은 우람한 거목.
사방이 나무들로 빼꼼하게 찬 담장. 드넓은 운동장. 봉긋이 삼각형으로 올라 온 뒷동산.
울긋불긋 꽃밭, 한쪽 켠에 그네, 시소, 미끄럼, 뺑뺑이, 철봉 ....
수빈이와 진학이는 내리자 마자 달려갔다.
아내는 자기가 다니던 학교에서 자식들이 뛰어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여기 코흘리개 학교 다니던 그 옛날, 나랑 결혼하고 자식들이 오게 되리라는 걸
상상이나 했겠는가.
다음날 우리 가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또 다른 여행을 떠났다.
산꾼인 내가 남해 금산을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보리암 입구까지 차가 올라간다.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을 앞두고 원효대사가 명명한 보광산에서 1백일간 기도를 올렸는데,
조선이 자신의 뜻대로 개국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데서
금산은 유래한다.(해발 681m)
보리암 법당과 저 멀리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해수관음상.
수많은 도인들이 참선수행한 선방.
아내한테 절 마당에서 애들과 잠시 놀라고 하고 나는 금산 정상으로 향했다.
줄지어 불붙는 기암괴석의 능선들.
저 멀리 상주해수욕장. 갈매기 날아다니는 섬들.
이 드넓은 바다에 한 점 육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으로 장쾌한 풍광이로다.
바닷바람에 딸랑딸랑 흔들리는 법당 처마끝 풍경소리를 뒤로 한 채
우리 가족은 월포,두곡 해수욕장으로 갔다.
해안가 따라 길게 늘어선 자갈밭.
애들은 자갈을 주워 누가누가 멀리 던지나 바다에 돌을 던졌다.
아내와 나는 양말 벗고 백사장을 걸었다. 오래전 추억을 되새기는 양.
밀물에 바지가랑이 젖어오고 한참을 걸었다.
“아빠, 엄마, 어딜 가는 거야! 빨리 일루 와!”
애들 때문에 분위기도 못 잡는다.
다음 행선지로 부둣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애들 배 구경 시켜줄려고.
수빈이는 배에 타니 흔들흔들 재밌는 모양이다. 내릴 줄 모른다.
어느 낚시꾼이 갓 잡았다는 생선을 회를 떠서 소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아저씨, 한잔 하세요?” 난 회만 한웅큼 집어 먹었다. 꿀맛이다.
아내는 장인어른 도와 드린다고 빨리 집에 가자고 한다.
지금 남해는 마늘종대 따느라고 분주한 시절. 우리만 눌랄라 여행이란다.
집에 도착한 아내는 햇볕가리개 모자를 쓰고 너털바지 입고
종대 빼는 연장 들고 장인 일하는 밭으로 향했다.
그 뒤에 애들은 장난감 들고 쫒아갔다.
밭고랑 너머로 부녀지간 같이 일하고 애들은 물웅덩이 올챙이 잡느라 철없고
오랜만에 흐뭇한 정감이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져가고
저녁에 울산에서 온다는 처형 내외. 올 때 회를 한 사라 떠온단다.
오랜만에 술 대작을 할 사람이 생겼군.
애들은 저녁 먹고 씻고, 지친 하루 곤히 자고
장인 석잔 따라드리고 난 동서와 막걸리에 소주에 포도주에
이런저런 얘기하며 마지막 날, 폴싹 취해 버렸다.
마치 서울가기 싫은 사람처럼.
다음날 아침, 식사하고 아내는 서울에 가져갈 마늘종대와 상추를 한 가득 쌌다.
이 건 다 1등급 무공해 자연식품.
"몸 건강하시고 안녕히 계세요. 또 내려올께요." "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
장모는 마루에 걸터 앉아 또 눈물을 흘렸다.
아내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난 감기기운에 시큰거리는 코를 부여잡고 등돌려 먼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수빈이 아빠, 뭐해?" "응, 그냥 눈물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