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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참파를 찾아서
후에도 다낭에 오기까지 대책이 없었지만 참파 또한 마찬가지다. 호텔에서는 여행사가 점심제공하고 개인당 4만원을 받는다고 했다. 솔깃했다. 하지만 여행책자에 따르면 30분 간격으로 가야할 곳 미썬을 오간다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싶었다. 우리는 아침을 든든히 채우고 다낭성당으로 향했다. 웬만한 버스는 그곳을 다 경유한다는 인터넷소스에 근거에 둔 것이다. 하지만 호이안 가는 버스를 보았지만 미썬에 가는 차는커녕 안내판도 없었다. 묻고 물어 버스가 근처 꼰 시장을 지난다는 말을 듣고 우리는 걸었다. 하지만 곳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노란 색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버스터미널을 가야만 했다. 버스터미널은 그제 영응사를 가기위해 건넜던 투언푸억 다리 건너 바로 우측 편에 있었다. 그런데 티켓 파는 창구 어디에도 미썬(MY SON)이라는 말은 없다.
겨우 알아낸 것이 미썬에 가는 버스가 출발한다는 버스 위치다. 이윽고 노란 버스가 들어왔다. 버스에 글은 DANANG &PHU DA. 다들 간다고 말을 하는데 어디에도 미썬(MY SON)이라는 말은 없다. 내 관광책자 사진에는 미썬(MY SON)이라는 당당이 박혀있는데 미심쩍었다. 기사가 나타났다. 그는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키고 돈까지 받았다. 개인당 7만동(3천 5백원), 그들 버스는 조수가 딸려있다. 9시25분 드디어 버스가 출발을 한다. 1시간이상을 길거리에서 낭비한 셈이다. 그래도 간다니 천만다행 아닌가. 탄 손님은 노파 한분에 우리 두 명이 전부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손님보다는 화물이 더 많다. 짐작하건대 택배배송을 겸하는 듯싶었다. 버스가 다시 시내로 향한다. 그런데 그 버스는 우리가 섰던 곳에 모두 정차를 하는 게 아닌가. PHU DA가 미썬을 가는 버스란 것을 알았더라면 생고생을 안했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똑같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썬과 호이안인데 다낭사람들은 미썬에 대해선 거의 무관심이다. 이런 차별이 있나 싶다.
버스는 시내를 40분 정도 돌더니 드디어 교외로 빠져나갔다. 호이안과 연결된 큰 강을 건너서 nga3DUY XUYEN이란 정류장에 차는 잠시 섰다. 물을 사려는데 1만동을 말한다. 그러자 이를 본 버스기사가 조수를 불러 3천동짜리 하나를 꺼내 대신 물을 사 건네주었다. 물 값이 그전까지 최소 만동은 되리라 생각했는데 3천동인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기어코 만도을 준비해 물 3병을 사 조수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방에 챙겨 넣었다. 다시 출발한 버스, 그때부터 버스는 실은 짐 택배배달이 시작됐다. 마치 시골버스가 옥천 장날에 나왔다 집집이 꾸러미를 안기는 듯 가다 서다하며 때로는 택배 수취인이 안 나타나면 휴대폰까지 해가며 배달을 했다. 애틋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휴대폰을 휙휙 날리는 공중은 신문명인데 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 사이 차긴 브레이크를 밟는 차 소리가 났다. 거기서 내리라는 것이다. 미덥지 않은 듯 건너편 택시를 가리키며 타고 가라고까지 친절히 설명을 한다.
거기서부터 9킬로미터, 바로 보이는 모닝차 택시, 다낭은 모닝 차 택시가 참 많다. 우리는 흥정을 하고 인적도 집도 없는 길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갔다. 흡사 참파는 산 속 깊숙이 은둔하며 문명을 멀리하는 것만 같았다. 정확히 1471년 까지만 해도 이곳은 바로 참족들의 활동무대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베트남 그들은 자기 조상이라 여기지를 않는지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거의 보지를 못했다. 이런 비유가 맞는지 모르겠으나 우리가 발해를 대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참파가 어느 정도 길래 이렇게 부실하게 대접을 하는 것일까. 나의 궁금증은 짙어만 갔다.
아무튼 미썬은 참파왕국의 종교 성지다. 4~14세기에 걸쳐 건설한 참파왕국의 종교 성지는 두 개의 산에 둘러싸인 2제곱Km의 분지에 자리한다. 나는 지금 그 유폐된 과거속으로 향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참파왕국은 베트남 중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1,200년 동안이나 존재했던 왕국이다. 2~17세기에 존속했으며 대략 북위 18도선에서부터 남으로 케가 곶(바렐라 곶)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중남부 해안지역에 걸쳐 있었다.
참파의 번성시대 교역 루트
한마디로 말해 참파왕국은 베트남 중부와 남부 해안지역에서 1,200년 동안이나 존재했던 왕국이다. 2~17세기에 존속했으며 대략 북위 18도선에서부터 남으로 케가 곶(바렐라 곶)에 이르기까지 베트남 중남부 해안지역에 걸쳐 있었다. 참파는 중국에서 한나라가 몰락할 때인 192년에 세워졌다(중국어 지명은 린이[林邑]). 처음 이 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 대부분은 통킹에서의 중국 식민통치에 대해 끊임없이 투쟁을 벌이던 야만 부족들이었지만 점차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참파는 인도의 지명들을 따라 아마라바티(Quang Nam)·비자야(Binh Dinh)·카우타라(Nha Trang)·판두랑가(Phan Rang)라고 이름 붙인 4개의 소왕국으로 이루어진 분권화된 국가로 발전되어갔다. 인구는 해안에 위치한 소거주지들에 집중되었으며 상업과 해적행위를 위한 강력한 함대를 보유했다. 참파는 400년경 바드라바르만 왕 통치 때 통일되었다. 그 무렵 (꽝남 꽝응아이지역)왕도는 차키우였으며 인근에 힌두사상을 지탱하는 종교중심지 미션지역을 성역화 하였다. 그 배후의 항구가 다낭의 호이안이다.
아마라바티·비자야·카우타라·판두랑가
446년 중국이 참인들의 해안 약탈에 대한 보복으로 참파를 침입하여 다시 한 번 그 지역의 종주권을 장악했다. 마침내 6세기에 새 왕조와 함께 참파는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번영과 예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리고 8세기에 이르면 중남부의 카우타라(카인호아의 나짱), 판두랑가(남부의 판랑과 판리) 지역이 새로운 도시로 성장 한다. 국가의 중심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8세기 중엽의 중국 사료들은 임읍에 대한 언급이 없이 가장 북쪽에 있는 판두랑가의 중국식 이름인 환왕으로 이 왕국을 언급하기 시작한다. 8세기말경 참인들은 자바의 공격에 시달렸지만 9세기에 들어 북쪽으로는 중국 지방에 대해, 서쪽으로는 성장해 가고 있는 크메르(지금의 캄보디아) 제국에 대해 다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875년에 참파 역사상 6번째 왕조인 인드라푸라 왕조(점성왕조)가 세운 인드라바르만 2세의 통치하에서 수도를 다시 지금의 위에 근처인 아마라바티 북쪽지역으로 옮겼으며 화려한 궁전과 사원들을 세웠다. 이 왕조는 동즈엉에 거대한 대승불교 유적을 짓고 불교를 국가종교로 갖게 된다. 물론 당시의 불교는 힌두교와 결합된 혼합종교였다.
10세기 베트남의 다이 비에트 왕국(대월인)이 참파에 압력을 가해와 참파는 1000년에는 아마라바티를, 1069년에는 비자야(오늘날의 뀌년 항구)를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다. 1074년 9번째의 참 왕조를 세운 하리바르만 4세가 그 이후에 있었던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공격은 막아냈지만 1145년에 이르러 호전적인 수리아바르만 2세의 지휘 아래 크메르인(캄부자왕국)이 참파를 침략하여 점령했다. 2년 후 새로운 참왕인 자야 하리바르만 1세가 왕위에 올라 크메르를 쫓아냈으며 그의 후계자는 1177년에 캄보디아의 수도 앙코르를 공격했다.
동즈엉 불교 접목 유물
1190~1220년 참인들은 또다시 캄보디아 지배를 받았으며 그후 1284년에는 몽골인의 공격을, 그리고 13세기말에는 베트남 찬 왕들의 공격을 받았다. 15세기말이 되자 참파 왕국은 모든 실질적인 목적들을 달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공격과 방어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기나긴 싸움 끝에 참파왕국은 1471년 베트남인들의 침입으로 왕도인 비자야가 함락되고 국왕이 사망하자 흩어지기 시작하여 이후 참파왕국은 영토의 5분의 4를 대월인에게 넘겨주고 판두랑가 지역에서 연명을 했는데 1832년 민망황제 시대에 완전히 흡수되고 만다.
그런데 참인들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5년 베트남 통일이 된후 미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가해지는 정치적 보복을 피하기 위해 태국 캄보디아로 탈출을 했다. 그런 그들은 캄보디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에 의해 비극을 겪게 된다. 캄보디안인 2백만명 이상이 희생되는 과정에서 참인들 역시 50만명이 죽었다. 서기 192년에 후에 지방에서 건국하여 부남왕국과 더불어 힌두문명을 꽃피운 참인들은 그렇게 소수민족으로 역사고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참파의 몰락은 아시아 본토에서 유일하게 오세아니아적 특성을 지닌 문화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참의 회화는 사원의 비문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동남아시아의 문명을 이야기하면 동남아의 힌두 화 또는 산스크리트 화를 빼놓을 수 없다. 힌두교와 불교, 인도 고전신화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 율법, 산스크리트어, 왕과 신을 동일시하는 신왕사상에 기초한 왕권개념 등 인도에서 유입된 힌두문화 다섯 가지 요소는 동남아시아 제국들의 문명을 여는 바탕이다. 이러한 힌두문명은 동남아 제국의 역사적 전성기를 이끌며 앙코르 와트 같은 찬란한 종교건축과 예술을 꽃피웠다. 이러한 동남아 힌두화의 대표 문명이 바로 힌두-크메르(앙코르 왕조), 힌두-참파(베트남 중부), 힌두-자바(인도네시아)로 요약되는 3대 문명이다.
시바의 상징 링가
참파의 주요한 건축물들은 앞서 말했지만 베트남 북위 18도선의 중부와 북위 11도선 사이의 남부에 걸쳐 꽝남(참파명 아마라바티), 빈딘(참파 명 비자야), 나짱(참파명 카우타라), 판랑(참파명 판두랑가) 등 4개의 주요도시에 분산되어 있다. 원래는 250여 개의 유적지가 분포되어 있었으나 오랜 전쟁의 참사 특히 베트남전 당시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고 주로 4개 지역에 유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울창한 정글지대로 이루어진 미썬은 베트남전쟁 기간 동안 비엣공(베트콩)의 야전사령부가 있었기 때문에 미군 항공기의 폭격으로 상당수의 사원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낭지역이 위치한 곳으로 잘 알려진 꽝남지방의 유적에는 70여 사원이 위치하며 힌두문명의 성지로 불리는 미선(美山)유적지, 불교유적지 동즈엉 사원군, 참파 유적을 한 곳에 모아 전해놓은 참 조각 박물관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뀌년항을 배후로 하고 있는 빈딘지역에는 중기 시대의 도성인 사반성이 있고, 왕도로 향하는 길에 반잇사원, 방안사원과 동탑, 금탑, 은탑, 동탑, 상아탑, 흥탄사원 등의 10여개의 사원 군이 있다. 그리고 나짱은 가장 아름다운 포 나가르 사원이 있고 이미 소개를 한 바 있다.그리고 나트랑 바로 밑에 위치한 판랑(판두랑가)지역은 참파의 멸망기에 남아있던 호아라이, 포클롱 가라이, 포로메, 포담, 포하이 사원 등의 유적군이 있다.
사실 참파유적은 앙코르 유적처럼 웅장하지 않지만 섬세하고 깊이도 있어 나름의 특성과 향기를 지녔다. 이를테면 굽타 미술의 영향을 받은 참의 조각은 대단히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했으며 야성적 분출이 특징이다. 그들을 알려면 최소 몇 가지는 미리 알아두어야 한다. 우리가 불교나 기독교는 늘 대하는 일상과 다를 바 없기 때문 자연스럽지만 힌두 문명은 생소하여 파악하는 것조차 힘들다. 나는 힌두교의 3대 신, 창조의 신인 브라흐마. 세계질서의 유지자 비슈누신, 번영과 풍요를 상징하는 시바신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안다하지만 조각품을 보고 그들을 구분할 줄 모른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의외성에 대해 전혀 의식이 쫓아가지를 못한다 할 것이다.
이에는 힌두문명이 지역에 토착화하여 또 다른 이질적 문명을 만들어 더욱 혼란스러운 점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곳의 문명을 힌두-참파로 분류하는 것으로 보아서도 분명 힌두의 원형은 아닌 것이다.
종교는 문명을 건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곤 한다. 참파에서는 힌두교와 불교가 유입되어 함께 공존하였으며 힌두교의 3대신 가운데 시바신앙이 우세했다. 불교는 875년에 등장한 점성왕조 시대에 인드라바르만 2세가 동즈엉에 불교 건축물을 짓고 대승불교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 당시 불교는 힌두교의 영향 하에 있었기에 불교사원내에 시바신의 상징인 링가를 세우기도 하고 조상숭배사상까지 혼합되어 있 었다. 시바신은 파괴도 포함한 이중 성격의 신으로 다산과 풍요로서 세상의 번영은 링가로 표현된다. 시바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 링가형태로 표현된다. 링가는 사각형의 대좌위에 올려놓는데 인간의 얼굴을 비롯한 독특한 디자인을 가하여 장식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 둥근 대좌와 여성을 상징하는 요니 위에 링가를 올려놓는다.
인간의 얼굴이 장식된 링가를 소위 무카링가라 하는데 링가에 인간의 얼굴을 장식한 이유는 국가의 수호신인 시바신과 국왕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신왕 사상 때문이다. 그리고 힌두교 신들에게는 배우자 신들이 존재한다. 브라흐마 신의 배우자 신은 사라스바티 여신이다. 그녀는 지적 능력을 제공하고 음악과 예술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그래서 어디서 백조를 탄 여신의 조각을 보면 바로 그녀를 말하는 것이다. 비슈누신의 배우자는 락슈미여신이다. 그녀는 우유바다 젓기를 통해서 재탄생하였으며 연꽃위에 있는 모습이 일반적이다.
내가 본 실체중 제일 예쁘다 싶은 락슈미 상. 나는 반데스 스레이의 부조에 탄복을 했었다. 캄보디아 티엔 립의 반데스 스레이의 한 박공이다. 연꽃에 앉아 있고 락슈미. 양 옆으로 코끼리 두 마리가 기쁘게 락슈미에게 물을 뿌려 주고 있다. 그 밑으로는 가루다가 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앙코르와트는 앙코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룩한 수리아바르만 2세가 브라만교 주신의 하나인 비슈누와 합일하기 위해 건립한 거대한 힌두교 사원이다. 시바의 배우자 여신으로는 설산(雪山)의 처녀(히말라야의 처녀)라고도 불리는 우마(Uma: 시바의 첫 번째 배우자인 사티와 두 번째 배우자인 파르바티의 다른 이름)와 광폭한 여신 두르가(Durga)와 파괴의 여신 칼리(Kali)가 있다. 또한 이들 여신과 관련하여 성애(性愛)도 중시한 성력숭배(性力崇拜)가 있다. 나짱에서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우마 여신에게 많은 공을 드린다는 말은 아마도 성애를 상징하는 이런 의미 때문이 아니었을까싶다. 시바의 여신은 시바와 마찬가지로 이마에 제 3의 눈을 가지고 네 개 혹은 열 개의 팔을 갖고 있다. 그러니가 나는 혼돈할 수밖에 없다. 너무도 많은 신의 형상에 여신들도 여럿이니 누가누군지 나는 도시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이 인도의 고전신화 라마야나다. 이 시는 흔히 '라마의 사랑 이야기'로 알려져 있다. 길이는 〈마하바라타〉보다 짧다. 산스크리트로 된 이 서사시는 시인 발미키가 BC 300년 이후에 쓴 것으로 추정되며, 약 2만 4,000개의 2행연구가 7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인도인들은 이 시를 암송하는 것을 큰 공덕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인도 남부에서는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가 오늘날에도 말라바르의 카타칼리 무용극의 줄거리를 이룬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형태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다. 이 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라마가 아요디아 왕국에서 태어나 현인 비슈바미트라의 보호를 받고 자라 강건한 시바의 활을 휘어 자나카 왕의 딸인 시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음모에 의해 상속권을 상실한 라마는 부인과 이복형제 락슈마나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서 14년을 지낸다. 어느날 라마와 락슈마나가 그들을 유인하러 보낸 금사슴을 쫓아 숲속을 헤매고 있을 때 랑카의 마왕 라바나가 시타를 데리고 가버린다. 시타는 단호히 라바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라마와 락슈마나는 시타를 구하러 떠난다.
수많은 모험 끝에 그들은 원숭이들의 왕 수그리바와 동맹을 맺게 된다. 원숭이 장군 하누만과 라바나의 친형제 비비샤나의 도움으로 그들은 랑카를 공격하여 라마는 라바나를 죽이고 시타를 구한다. 후대에 만들어진 판본에서는 시타가 몸을 더렵혔으리라는 의심을 벗기 위해 불의 시련을 받는다. 그러나 그들이 아요디아에 돌아오니 백성들이 아직도 여왕의 순결을 의심하는 것을 보고 라마는 시타를 숲으로 추방한다. 거기서 그녀는 발미키 현인(유명한 〈라마야나〉의 저자)을 만나 그의 암자에서 라마의 두 아들을 낳는다. 아들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자 가족이 재회하게 되지만 시타는 다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대지에게 받아줄 것을 청하여 결국 대지는 그녀를 삼켜버린다.>
이 이야기를 조각한 유물들과 부조들이 차키우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사원으로 이루어진 도시라는 뜻을 지닌 앙코르 와트 또한 바로 그 대서사시 라마야나 바하바라타가 건축물과 조각 작품으로 몸을 바꾸어 다시 태어난 걸출한 예술이자 문화유산이다. 어지간한 도시 하나를 방불케 하는 거대한 규모의 유적지가 인도 신화와 서사시를 모태로 태어났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지만 앙코르 와트의 어머니는 캄보디아 크메르 왕조의 군주나 건축가가 아니라 바로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였던 것이다.
머리 형태의 여러 모습들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렇듯이, 캄보디아 역시 국가 성립 단계부터 인도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발전해 왔다. 앙코르 와트 유적 또한 사원의 건축 양식은 물론 조각 작품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인도 신화 및 라마야나 스토리를 떼어놓고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이 힌두신화는 베트남 식 변형인 호손정국으로 탄생되었고 중국의 서유기와도 비슷하다. 그들의 비석은 참파어로 참어는 원래 산스크리트어ㅢ 데바나기리 문자에서 기원하며 인도네시아의 아체어에 가깝다. 즉 쟈바 섬의 쟈바어, 필리핀의 타갈로어, 캄보디아나 탐족이 쓴 참어는 뿌리가 같다.
그리고 참파왕국의 지배이념은 국왕을 힌두교 3대신과 동일시한 신왕사상이었다. 고전기 동남아시아 왕국들은 왕권을 강조하는 시바신을 우위에 두었고 왕권의 상징으로 링가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자신과 시바신의 이름을 결합시켜 국가 수호신의 이름을 부여하였다. 이를테면 바드라바르만 왕은 자신의 이름 바드레와 이슈바라를 결합시켜 국가 수호신 이름인 바드레슈바라의 이름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원에 링가를 안치하였다. 비슈뉴신이 10개의 화신으로 지상에 네려온다면 시바신은 코끼리 가네샤,공작 스칸다, 성스ㅎ러운 소 난디 그리고 링가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링가는 성스러운 돌로 만져볼 수 있도록 시바신을 추상적으로 형상화 시킨 상징이다.
그들의 건축물에는 꼭 압사라가 등장한다. 압사라는 힌두교 신화와 불교 신화에 나오는 구름과 물의 여자 요정이다. 영어(영어: Aspara)로는 님프, 천상의 님프, 선녀 등으로 번역한다. 압사라는 아름다운 상상의 여인으로 젊고 우아하며 춤에 예술적 소질이 있다. 인드라의 궁중 노예인 간다르바의 부인들로, 신전에서 신이나 영웅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남편들이 만든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앞서 말했지만 참파는 중앙집권적 정치체계가 아니었다.
압사라와 악기가 보인다.
그 들의 비문에서 보면 중부의 미썬지방 남부의 판두랑가에 뿌리 내린 두 가문이 결합하여 나라를 운영하여 왔다. 미썬은 중부의 성지로 남부는 나가르 사원이 있는 나짱이 성지로 자리를 잡았다. 나짱에서 이미 본 이 여신은 참파예술이 만들어낸 걸작으로 이 여신에 대한 신화도 있다. 나중 이 여신은 천의 성모로 베트남에서 이름이 바뀐다. 아닌 말로 베트남 화 된 것이다. 그러니까 국왕은 사원을 건립할 때는 남과 북의 대표적인 성지인 미썬과 포 나가르 두 곳에 사원을 지어 평안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곧 두가문의 결합과 국가의 통합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참파왕국 사람들의 주업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은 농경이 아니라 대외무역이었으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상품이 침향이었다. 참파왕국은 중국, 인도, 지중해를 연결하는 항로의중간 기착지로 활용이 되었다. 12세기 모로코의 지리학자 에드리시는 '참파에서 신선한 물을 공급하고 항해를 떠난다.'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은 침향, 호추, 상아, 코뿔소 뿡 등 희소가치가 있는 토산물을 고산지대 소수민족으로부터 수확하여 무역항 호이안에서 수출하는 방식의 교환체계를 형성하였다. 즉 호이안은 인드라푸라(동즈엉)와 싱하푸라(차키우)를 낀 항구이다. 밀림에 갇힌 참파 유적들은 1901년 프랑스에 앙리 파르망티에에 의해 세상 속에 드러난다. 지금부터 약 1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렇다면 참파의 예술은 어떤 특징을 갖고 있을까. 이 이야기는 다음에 이어진다.
여러 의상을 갖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