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구멍 절을 찾아
극심한 가을 가뭄으로 타들어 가는 농심을 적셔주는 단비가 새벽녘에 조금 쏟아졌다. 해갈이 되려면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마른 대지의 목을 축이고 늦더위를 식혀주는 비여서 더없이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직장 동료와 함께 산행을 하기로 약속을 했었기에 창밖을 내다보며 갈 수 있을 것인가를 연신 고민해야 했다. 이런 날은 실컷 늦잠을 자며 집에서 푹 쉬는 것도 필요하련만 비가 멎고 오후부터 갠다는 일기예보에 배낭을 챙겼다.
전날 마신 술로 속이 쓰리고 아침도 먹지 못했다고 투덜대는 친형님 같은 동료와 함께 하는 시간은 늘 마음이 푸근해서 좋다. 둘이 함께 있으면 세상살이의 하지 못하는 얘기가 없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공산터널을 지나자 비에 씻긴 팔공산의 깨끗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산자락의 이마로 벗겨지는 구름의 모습이 멋지다. 오늘 산행은 이른 가을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은해사로 향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와촌으로 이어지는 길은 완공을 앞두고 임시 개통되어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팔공산의 뒤편 하늘은 동화사가 있는 앞쪽과는 사뭇 달랐다. 잔뜩 흐린 하늘에 빗방울까지 떨어졌다. 은해사는 과거에 몇 번 다녀 간 곳이기에 산사의 입구를 찾는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늘은 포항000에서 이곳으로 산행을 온다기에 산행의 목적지를 이곳으로 정했던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신발 끈을 고쳐 매는데 함께 했던 동료가 갑자기 빨리 차에 다시 타라고 했다. 다급한 소리에 영문도 모르고 차에 올랐더니 옆의 차에서 내린 사람이 친구의 부인인데 부부가 아니고 남자가 바뀌었단다. 결국 차를 다른 곳으로 옮겨 주차시키고 그들의 방향을 확인하고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름드리 소나무가 늘어선 일주문을 들어설 수 있었다.
어젯밤에 부부동반으로 친구들과 늦도록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사람을 바꾸어 나타난 황당함과 놀라움의 충격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도망을 가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었지만 먼저 본 것이 죄가 되어 마주치지 않도록 우리가 배려를 해 주어야 했다. 멀찌감치에서 뒤따르다가 절로 들어선 것을 확인하고서야 비로소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메밀꽃이 하얗게 핀 길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바삐 걸으며 행여나 뒤따르지나 않을까 싶어 바쁘게 걸음을 놓았다. 산이 통째로 물속에 거꾸로 담긴 산중호수 신일지를 지나 비구니들의 요람인 백흥암에 이르자 포항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비에 젖은 산은 눅눅했다. 바람한 점 없는 숲은 조금만 걸어도 숨이 막히고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서리가 내린다는 백로가 지났지만 올해의 늦더위는 장난이 아니었다. 차도를 따라 왼편의 중앙암으로 오르는 길은 멀고도 지루했다.
물기 가득 머금은 길은 미끄러웠다. 산을 찾아온 사람들도 가뭄에 콩나듯이 보였다. 간간이 기도를 하러 가는 차량들이 독한 매연을 내뿜으며 산을 올랐다. 도중에 밀짚모자를 눌러 쓴 비구니를 만나 멀찌감치에서 뒷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데 홱~ 돌아서더니 “찍지마세요” 한다. 뒤통수에 눈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을까? 공력으로 보아 아마도 그 비구니 스님은 곧 득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싶다.
계속해서 올려치는 길은 숨이 거칠어지고 입에 단내가 나고 다리가 후들댔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 번도 쉬지도 못하고 중앙암(5.2km)까지 올라야 했다.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본 벌 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중앙암은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기도처다. 이 절에는 샘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옛날 이 샘에서 암자에 계신 스님을 위해 날마다 한사람 몫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돌샘에서 쌀이 나오는 것을 목격한 산적이 욕심이 나서 스님을 죽이고 구멍을 크게 뚫으니 쌀 대신 피가 솟구치면서 돌바람이 불어 산적을 즉사시켰다는 것이다.
중앙암은 자욱한 구름에 덮여 신비로움을 더했다. 일명 돌구멍 절이라 불리는 중암암은 일찌기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이 수련한 곳이라고 한다. 김유신이 열일곱 살 때 수련을 하면서 마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소설당 옆의 장군수로 목을 축이고 돌구멍바위를 지나자 세상과는 인연을 끊은 지 오래인 듯 한 아늑한 중앙암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무엇 때문에 이곳에다 암자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요와 평화가 법당에 가득하다. 이곳에는 세상사의 살아가는 잡다한 얘기도 소리도 없었다. 사람들이 중앙암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을 이제서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암자에서 바라보이는 맞은편 산자락의 전경이 멋지다. 중앙암에는 세 살 먹은 어린이가 흔들어도 흔들린다는 건들바위, 만년을 살았다는 만년송,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 기암괴석으로 어우러지는 빼어난 경치가 자랑이다.
오늘 산행은 달리 목적지도 없었기에 이곳에서 산을 내려가자는 것을 억지로 달래 윗쪽으로 몇 발자욱을 더 옮겨놓자 석탑과 함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멋진 바위군락이 구름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돌구멍 사이로 배낭을 벗어야 통과할 수 있는 틈을 통해 만년송이 있는 바위지대에 올라섰다. 이곳을 오르지 않고 그냥 갔더라면 두고두고 후회를 할 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년송은 은해사 등산로 최고의 절경지였다.
넓은 바위에 앉아 정답게 얘기를 나누며 점심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천상의 세상에서 온 신선 같았다. 이곳은 조망도 빼어나 멀리 구름에 가린 팔공산의 뒷편 산자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맞은편으로 외로운 운부암을 바라보며 나누는 커피 한잔의 향은 한마디로 "아주 그냥 죽여줘요" 였다.*^^ 부부가 함께 온 옆자리 사람에게 산딸기 주를 한잔 얻어먹는 행운을 맛보며 한 동안 산의 멋에 취해 있다가 일어섰다.
내려서는 길은 사람들에게 한 귀동냥으로 백흥암 쪽으로 곧장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만년송에서 한참 동안 이어지는 길은 경사가 심하고 바위도 흙도 젖어 있어 위험했다. 조금만 방심해도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가파른 지대를 벗어나자 길은 다시 정겨움이 있고 부드러운 오솔길이었다. 숲속 계곡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차도로 돌아가는 길보다 백흥암으로 내려서는 길은 훨씬 짧았다.
중간 지점인 백흥암에서 신일지 저수지까지 내려서는 포장길도 장난이 아니었다. 저수지의 팔각정에 벌러덩 드러누워 바라보는 산빛이 좋았다. 저수지의 둑을 따라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에 우수수 낙엽이 떨어졌다. 가을!! 가을이었다. 떠남의 계절인 가을의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생명이 넘치는 저 푸르름의 나무들도 이제 곧 머지않아 잎을 다 놓고 알몸으로 서 있겠지?
이제는 모두들 돌아갔으려니 생각하며 절 문을 나서자 포항서 온 사람들이 가지 않고 있었다. 늦은 점심을 함께 하며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길은 갓바위로 이어지는 샛길로 들어섰다. 이곳 박사에는 아름답고 잊지 못할 추억의 옛 그림자가 있는 곳이기에 속도를 늦추어 천천히 차를 몰아야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코스모스 곱게 핀 길을 따라 아름다웠던 옛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고개를 넘었다.
세상을 살다가보면 보고도 못 본체 알아도 모른체 해야 하며, 무덤까지 갖고 가야할 비밀이 있다더니 바로 오늘을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그들을 피해 산행을 하느라 출발부터 공연히 가슴을 조려야 했으나, 천천히 산을 즐기며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를 맘껏 가슴에 담을 수 있었던 멋진 산행이었다. <2008. 9. 21>
첫댓글 네이버와 호환이 되지 않아서...... 사실 이 글을 올리지 않으려고 간단하게 사진 몇 장만 올렸었는데 맴이 변해 이렇게 올려본답니다.........*^^
재일이는 글도 잘 쓰고 사진도 잘 찍네 참 부럽구만 좋은 정치를 잘 감상했네 자네의 지혜로운 언행이 친구의 가정을 파행으로 부터 일단 구했네 마음이 나쁜사람 같으면 목줄을 거머쥘려고도 했을텐데 자네 용안을 보니 세월이 살짝 비켜 갔나보군 나이보다 어려 보이네 건강하시게 .........
살며~ 이렇게 가슴에 크게 와 닿는 칭찬은 들어보지를 못했던터라 너무 기분이 좋다네. 하지만 살아가며 잘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친구의 칭찬이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라네. 작은 것을 크게 보고 덕담을 서슴치 않는 친구야 말로 마음이 아름답고 넉넉하게 느껴지는구먼~^^ 건강하시고 체육대회 때 보세나 ㅎ^^
재미있게 잘 읽었네! 친구부인의 만남은 어쩌면 어쩔수 없는 만남인데. 오해일수도 있겠지만.. 역시 경험이 많은 친구라서.... 잘 대처했다고 생각되네! 멋져!.
우째~~ 경험이라는 것이 연애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 같기도 한데.....ㅋㅋㅋ 귀신은 살짝 속였는데 친구는 못 속이겠구먼 ㅎㅎㅎ~~ 잘 지내지???
도까비님따라 아주 맛깔스러운 산행을 하였습니다. 산안개가 자욱한 길을 따라 오밀조밀한 메밀꽃밭을 지나오니 어느새, 나의 신발등도 물기가 함빡~즐거운산행~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지금 생각난건데...그들이 절로 들어섰다는 대목이...아마도, 부모님이나...친정가족중의 누군가가 절에 모셔져 있어서...일것 같기도 하다는...^^
끝까지 읽어주셨네요. ㅎ^^ 감사합니다. 가지지 못한 것에 욕심을 내기 보다 비록 작지만 가진 것에 만족하며 함께 나누는 것이 이토록 더 즐거워짐은 님의 예쁜 마음이 전해지는 리플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ㅎㅎ^^ 행복 가득한 하루 되세요.^^*ㅎㅎ~~
익히 들어온 좋은 곳이지만 아직 가보지 못해으니, 못내 아쉬웠는데............ 자네 일지로 충분히 달래겠네
잘 지내는가?? 체육대회 때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보이지 않아서 서운했다네. 환절기에 건강하시게나.
나도 올해 첨으로 은해사 절구경ㅎ고 식당가서 밥도 먹고 했는데 .......남자하고 둘이서 ..........도까비님 혹 나를 보셨는감???......내년에 메밀꽃 필때 이코스로 해서 꼭 산행 한번 합시다요 가까운곳에 이리도 아름답고 멋진곳이 있는데......구경 잘하고 갑니다
내가 바라던 바인데요? 좋아요.^^ 근데~ 어휴~~폭탄주에 푹절여 방금 대리운전으로 돌아와 컴 앞에 앉았는데 .......꼭 기억할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