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큰돈을 벌었다.1) 그는 1893년에 한 평화운동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같은 해 3월 14일에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하여 유산 가운데 20%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17%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기부하고, 나머지는 학문적으로 공적이 큰 사람들에게 상으로 줄 것을 구상했다. 이어 1895년 11월 27일에 세 번째로 수정하여 확정한 유언장에서,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라”(“prizes to those who, during the preceding year, shall have conferred the greatest benefit to mankind.”)고 밝혔다. 그는 1896년 12월 10일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 노벨상위원회와 기금 등이 마련되어 1901년부터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세계평화에 대한 기여’ 다섯 분야에 걸쳐 노벨상이 수여되었고, 1968년부터는 스웨덴 제국은행이 별도로 기금을 마련하여 수여하는 ‘노벨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노벨은 누구인가?
알프레드 노벨은 1833년 10월 21일 스톡홀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한테서 공학을 배웠고, 아버지를 닮아 손재주가 뛰어났다. 그는 1842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뢰 공장을 차려 성공한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로 갔다. 주로 가정교사한테 교육을 받았는데, 17세에 모국어인 스웨덴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등 5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는 17세가 되던 1850년에 파리에서 1년 동안 화학을 공부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스웨덴 출신의 발명가인 존 에릭손 밑에서 4년 동안 일하며 기계공학을 공부했다. 그 무렵 폭약 등 군수물자 생산으로 번창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크림전쟁이 끝나면서 몰락하기 시작하자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왔으나 아버지 사업은 1859년에 끝내 파산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스웨덴으로 돌아와 1860년경에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다음 해 니트로글리세린 제조법으로 특허를 받아 사업가 기반을 마련했다. 1864년 9월에 스톡홀름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동생을 비롯하여 다섯 명이 사망했는데도 그는 한 달 후에 첫 합자회사를 차렸다. 스웨덴 정부는 공장 재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배 위에서 니트로글리세린 취급에 따른 위험을 극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실험했다. 그는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산질 충전물질인 규조토로 스며들게 한 뒤 건조시켜 안전한 고형 폭약 다이너마이트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1867년과 1868년에 영국과 미국에서 다이너마이트 관련 특허를 따냈고, 1876년에는 폭발성 젤라틴을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다. 그는 40세의 나이에 큰 부자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 독일, 영국 등에서 계속 공장을 세웠고, 1886년에는 세계 최초의 국제적인 회사 ‘노벨다이너마이트트러스트사’를 세웠다. 그동안 그의 형인 로베르트와 루트비히는 카스피해 서안에 있는 바쿠 유전지대 개발에 성공하여 노벨 가문은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업에 몰두했지만 그는 은퇴 후에는 가급적 조용히 지내려고 애썼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유주의자, 심지어는 사회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자신의 발명품과는 달리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이 발명한 무기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기대했으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젊은 시절에는 영어로 시를 쓰기도 했다. 유품으로 남은 서류뭉치에서는 그가 쓴 소설의 초고들이 발견되기도 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1895년까지 협심증으로 고생하다가 이듬해 12월 10일에 이탈리아 산레모에 있는 별장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사업체는 폭탄 제조공장과 탄약 제조공장을 합해 전 세계에 걸쳐 90여 곳이 넘었다. 그는 평생 355개의 특허를 취득했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에 파리에서 세 번째 마지막으로 수정해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 두었던 유언장을 근거로, 그의 사후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어떻게 베풀었는가?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고 한다.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
같은 해 3월 14일, 그는 최초의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이에 따르면, 유산 가운데 20%는 일가친척에게 나누어주고, 또 17%는 병원과 의학연구소 등 여러 단체에 나누어 기부하고, 나머지는 기금을 조성해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하고 선구적인 발견이나 발명’에 상을 수여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1895년 11월 27일에 파리에서 세 번째 마지막으로 수정하여 스톡홀름의 한 은행에 보관해 두었던 유언장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 알프레드 베르나르드 노벨은 심사숙고한 결과 이 문서로 내가 죽을 때 남기게 될 재산과 관련하여 내 유언이 아래와 같음을 천명하는 바이다.”
그의 유언장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그의 재산이 그의 조카와 친척들, 지인들, 고용인들 등에게 얼마씩이 지급될 것인가를 상세하게 적고 있다.
이어 뒷부분에서는 “유언 집행인에 의해 안전한 유가증권에 투자된 재산으로 기금을 만들고, 거기에서 매년 나오는 이자를 지난해에 인류에게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금으로 수여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이자는 다음과 같은 5개 분야에 걸쳐 골고루 배분된다고 밝히고 있다.
첫째, 물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사람. 둘째, 가장 중요한 화학적 발견이나 개선을 이룬 사람. 셋째, 생리학이나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 넷째, 문학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이상적 경향의 작품을 쓴 사람. 다섯째, 국가 간의 우호를 증진시켰거나 군대의 폐지나 감축에 기여한 사람 또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거나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
알프레드 노벨의 사후에 공개된 유언장에 따라 1896년에 설립된 노벨재단은 노벨의 유언 실행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친척, 친지 등에게 지급되고 남은 스웨덴 화폐로 총 3,300만 크로나의 노벨의 유산은 세금을 내고 3,100 크로나가 남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알프레드 노벨은 순자산의 90.3%를 베푼 것으로 추계된다. 이 돈으로 1901년부터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세계평화에 대한 기여 다섯 분야에 걸쳐 노벨상이 수여되었고, 1968년부터는 스웨덴 제국은행이 별도로 기금을 마련하여 수여하는 ‘노벨경제학상’이 추가되었다.
오늘날에는 노벨상이 세계 최고의 영예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지만, 노벨의 유언장이 공개된 직후 스웨덴 내부에서는 이 상의 제정을 놓고 격렬한 비난이 일었다. 노벨의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한때 애인이었던 소피까지도 자신들의 정당한 유산이 엉뚱한 상에 빼앗기게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법적 대응을 고려했다. 또 수상자 선정에서 국적이나 성별에 구애되지 말라는 유언 때문에 스웨덴 국민 사이에서 국부가 해외로 유출된다는 비난도 일었다. 평화상 수상자를 스웨덴이 아니라 노르웨이 국회에서 선정하게 한 것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당시에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연합 국가였기 때문에 스웨덴 국왕이 노르웨이 국왕을 겸했는데, 두 나라는 1905년에 별개의 국가로 분리되었다).
노벨은 왜 베풀었는가?
노벨상 사이트에 들어가 아무리 뒤져봐도 알프레드 노벨이 왜 베풀었는가에 대한 답은 찾지 못했다.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의 한 신문이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형이 사망했는데 그를 알프레드 노벨로 착각하여 “죽음의 상인, 사망하다”라는 표제 하에 “사람을 더 많이 더 빨리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인물”이라고 폄하하는 부고 기사를 실었다고 한다.
회사에 출근하여 이 기사를 읽고 충격을 받은 알프레드 노벨이 속죄를 위해 재산을 기부하게 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에 관한 확증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하여 엄청나게 큰 돈을 번 알프레드 노벨이 ‘죽음의 상인’이라는 폄하 기사를 읽고 속죄할 마음을 갖지 않았겠는가? 비록 확증은 없다 할지라도 신문기사는 있다고 하니 ‘죽음의 상인’이라는 표현에 세계적인 부자 알프레드 노벨이 베풀고 싶은 충격을 받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앞에서 언급한 대로, 알프레드 노벨은 1893년에 평화운동가 베르타 폰 주트너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기꺼이 내 유산의 일부를 한 재단에 기부하여 5년마다 수여되는 상을 제정하고 싶습니다. … 남자이건 여자이건 유럽에서 평화의 실현에 가장 공로가 큰 인물에게 수여할 상을 말입니다”라고 썼다고 한다. 평화주의자였던 그가 자신이 발명한 무기로 세상이 평화로워지길 기대했으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가 언제부터인가 베풀 계획을 세우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가 다섯 번째로 명시한 수상 분야가 ‘국가 간의 우호를 증진시켰거나 군대의 폐지나 감축에 기여한 사람 또는 평화회의를 개최하거나 추진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임을 감안할 때 그는 언제부터인가 베풀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부자이니까 베풀었다
노벨상 사이트에 들어가면 알프레드 노벨이 ‘이미 40살에 부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앞선 글에서, 앤드루 카네기는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었을 때 “부자인 채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밝히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다. 마찬가지로 젊은 나이에 어마어마한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도 친척, 친지, 심지어 자기를 위해 일한 과거와 현재의 고용인들(주: 유언장에서는 servant로 표현되었음)에게까지 유산을 분배하면서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 생각했을 때 세상을 위해 베풀고 싶은 마음을 갖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