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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설교 기획, 이렇게 한다
들어가는 말
대략적으로 관찰할 때, 한국교회에서 행하여지는 설교들 가운데 교리를 주제로 하거나 그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찾기란 그다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 십자가 죽음과 부활, 또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구원 등과 같은 복음에 대해서는 종종 설교가 행하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도 일정한 주장을 구호를 강조하는 듯이 단순히 반복적으로 전달할 경우가 많을 뿐, 설득력이 강한 성경의 주해를 통하거나, 혹은 어느 한 교리의 이해를 높이는 심층적인 연속 설교를 행하는 일은 드문 일인 듯싶다.
칼빈 탄생 500주년이 되는 올 해에 전에 없이 설교와 목회의 일상에 신학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소리가 높지만, 아직 그것을 어떻게 실행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 방향에 대해 도움을 주는 일은 적은 듯하다. 더욱이 신학에 대한 이러한 강조에 대해서 목회 일선에 있는 목회자들 가운데 동의가 수렴이 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만한 확인이 없는 듯하다. 다만 신천지를 비롯한 각종의 이단들이 교인들을 교회에서 빼내어 가는 일들이 있게 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한 실제적인 필요 때문에 신학과 교리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이 다소나마 제고되는 움직임을 본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관찰들을 염두에 두면서 교리설교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누고자 한다.
교리설교의 이해
먼저 교리설교란 무엇일까? 교회로 하여금 교회이게끔 하는 정체성을 밝혀주는 지표가 무엇인가에 대한 신학적 판단은 설교와 성례이다. 칼뱅(John Calvin)은 풀이하기를 교회는 하늘의 교리(the heavenly doctrine)를 설교라는 외적인 방편을 통하여 성도를 복음의 진리 안에서 온전케 하는 사역을 감당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어떤 설교이든지 그것이 설교인 이상 교리를 담고 있지 않을 수가 없다. 즉 모든 설교는 교리를 전달하는 설교인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 당시 사도들의 설교는 예외없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에 대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 그리고 그의 뜻을 강론하는 것이었다. 사도들은 설교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을 교리적 언어와 형태로 설명하고 보호하였던 것이다. 사도들의 교회가 결코 단순하며 빈약한 몇 가지 교리만을 고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바른 교훈을 심화하면서 경건의 실천을 도모하였다는 사실은 성경을 통해서 사도들의 가르침과 경건의 실제를 조금이라도 생각해본다면 누구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 웰스(David Wells)는 지적한다.
초대교회에서 행하여진 설교들을 살펴볼 때,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의 설교 이해를 따를 때, 모든 설교는 교리를 담아 전달하여야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교리설교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냥 ‘설교가 교리설교이고 교리설교가 바로 설교이다’는 답을 내릴 수가 있게 된다. 교리를 담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설교는 성경의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지, 신학의 결과물인 교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지 않은가? 설교가 교리를 담고 있어야 한다면 그것이 교리강의와 무엇이 다를까? 이러한 질문들은 좋은 질문들이다. 답을 찾기 위하여 설교가 성경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 설교가 성경적이라는 것은 단지 설교가 성경 본문의 단어들을 연구하고 문법적 분석을 충실히 하였음을 뜻하는 것일 수가 없다. 그것은 석의적(exegetical) 연구의 기초 위에서 성경을 주해(exposition)하는 것과 관련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주해하는 것은 본문과 근접문맥, 본문이 속한 책, 그리고 성경 전체의 의미 맥락을 따라 해설되는 교훈적 원리나 교리들을 풀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성경적인 설교는 주해의 방식을 따른 설교이며 또한 교리설교이다. 따라서 교리설교는 교리강의와 달리 교리 자체를 신학적 토의의 맥락에서 다루지 않고 성경의 본문을 따라 본문의 의미를 해설하면서 교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교리강의와 구분이 된다.
요컨대 설교의 방식에 따라서 설교가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인가, 아니면 주제설교(topical preaching)인가로 구별은 되겠지만, 모든 설교는 결국 교리를 담아 전달한다는 점에서 교리설교라고 할 것이다.
교리설교의 필요성
오늘 한국교회에 교리설교가 필요한가? 이 질문에 대한 원리적인 답은 이미 모든 설교가 교리설교라는 명제에서 주어졌다. 모든 설교가 교리설교이어야 한다면, 한국교회에 설교가 있어야 한다는 너무도 당연한 이유로 인하여 한국교회에 교리설교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설교의 필요성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자 하는 까닭은 한국교회에서 행하여지는 많은 설교들이 실제로 교리를 전달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적용에 치우친 강조로 말미암아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신감을 갖는 법,’ 또는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법’ 등과 같이 심리치료에 속한 설교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거나, 또는 도덕적 강조를 이끌어 내거나 예화를 통한 모범을 닮도록 강조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혹자에 따르면, 한국교회 설교는 “교회의 성장과 부흥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해석보다는 목회의 방향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진단하기를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현세적이고, 물량적이며, 상업적이며, 세속주의와 유물주의, 자율주의 사상의 늪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경고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평이 옳다면 그 경고 또한 당연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을 위하여 성경을 수단으로 사용할 뿐 그 말씀의 바른 해석을 전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설교가 아닌 것이며, 그렇게 될 경우 교회의 정체성이 바르게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적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를 쉽게 하여 청중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하는 것이 “청중을 위한 최대의 서비스요 따라서 가장 효과적인 설교”라는 주장을 할 경우, “설교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점점 오락화 되고 있고, 엔터테인먼트 되고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는 비평의 소리도 귀기울여야할 중요한 점을 지적해준다.
한국교회가 성장을 멈추고 오히려 감소하는 상황에 이르렀음을 염려하는 소리가 높다. 교회가 윤리적으로 개혁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와 교인들의 윤리적 삶이 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올바른 해석과 교훈을 깨달아 그 말씀에 순종할 경우라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교훈을 구호로 삼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고 이루어지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 곧 복음의 교리를 성경에서 바르게 해석하고 이를 적용하도록 할 때에 그것의 가능성이 열릴 줄로 안다. 적어도 교리와 설교는 생활의 경건과 서로 분리되거나 무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에 교리가 담겨 있지 않아 회중들이 교리에 대한 이해가 결핍되었을 때, 그들에게 경건의 삶과 신앙의 양육이 건강하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교리설교의 방식들
교리설교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어떤 방식의 설교를 행할 것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설교의 방식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본문을 주해하는 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말하는 주제설교이다. 전자는 본문의 주해를 통하여 본문에서 이끌려 나오는 교리들을 설교하는 것을 말하며, 후자는 교리 주제를 정하여 그것과 상관이 있는 본문을 찾아 설교하면서 교리주제를 펼쳐가는 설교를 말한다. 다시 전자와 관련하여, 단회적으로 본문을 옮기면서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연속적으로 성경을 따라 읽어가며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후자의 경우에도 어떤 교리주제를 필요에 따라 선택하여 설교를 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에 사도신경 강해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나 대,소유리문답들의 강해, 또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연속하여 설교하는 경우도 있겠다.
교리설교의 방식들과 관련하여 헤플린(James L. Heflin)은 에릭슨(Millard J. Erickson)과 함께 출판한 공동저서에서 강해식 교리설교, 주제식 교리설교, 내러티브식 교리설교 그리고 연극식 교리설교의 네 가지 방식들을 소개한다. 헤플린은 강해설교에 대해 “성경 본문을 설명하고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는 설교”라고 정의를 내리면서 반드시 연속적인 해설방식을 따르는 것만을 강해설교라 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를 제시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라서 그는 강해식 교리설교에 속한 유형들로 크게 세 가지를 제시한다. 본문을 한 절, 또는 몇 절에 한정하여 설교하는 강해식 본문설교(expository-textual sermons), 또는 이보다 더 많은 분량의 본문을 단락으로 정하여 설교하는 강해식 단락설교(expository-passage sermons), 그리고 본문에서 제시하는 어떤 주제를 다른 성경에서 가져온 구절들과 연결을 시켜 교리를 풀어가는 강해식 주제설교(expository-thematic sermons) 등이다.
주제식 교리설교와 관련하여 이르기를, 헤플린은 주제설교란 “성경 본문이나 성경적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에 집중하거나 여기로부터 파생되지는 않지만, 어떤 주제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는 설교”를 말한다고 정의를 내린다. 이어 저자는 주제별 교리설교가 신학적 견해를 증빙하기 위하여 본문의 소리를 무시하는 선정적인 오류를 범하거나 단순히 무의미한 ‘성구사전식 설교’(concordance preaching)가 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환기시킨다.
이상의 두 가지 방식들에 덧붙여 헤플린은 내러티브(narrative)식 교리설교와 연극식 교리설교를 언급한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이야기나 연극의 형태로 재현함으로써 회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훈과 복음의 교리들을 간파하고 스스로 적용하도록 하는 설교 방식들을 제안한다. 하지만 내러티브식 설교가 교리설교이기 위하여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단지 이야기 전달의 효과만을 높이는 것에만 머무르게 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전통적으로 교리설교에 유용한 형태로 많이 사용되었던 방식은 신앙고백서나 대, 소요리문답 등을 매주 연속적으로 설교함으로써 교리설교를 행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은 개혁교회에서는 교회사적 전통으로 자리잡은 방식으로, 이를 테면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52주로 나뉘어 년 1회 129문답들에 이르는 전 문항을 설교할 수 있도록 구분해 놓았으며,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이것을 설교하는 것을 오래 동안 설교자의 의무로 여겨왔다. 이와 관련하여 글 뒤에 부록으로 보어(Jeffrey K. Boer)가 만든 웨스트민스터 신앙표준문서들을 1년 동안 52주에 걸쳐서 설교할 계획표를 첨부하였으므로 참조하면 설교 기획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교리설교의 준비
교리설교의 준비는 설교의 방식이 강해설교이든지, 또는 주제설교이든지,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에 충실하여야 한다. 성경의 본문이 말하는 바를 근접문맥과 본문이 속한 책의 전체의 맥락 안에서 충분한 석의 과정을 거친 주해 작업에 실패한다면, 그 설교는 그것이 강해설교이든지 주제설교이든지 이미 적절한 설교로 인정이 되기가 어렵다.
첫 번째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스스로 기초적인 석의와 주해를 감당할 능력을 길러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적절한 주석서나 강해설교집 등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과제는 첫 번째 주해 작업을 통해서 확인이 된 복음의 원리 또는 교리적 함의를 정리하여야 한다. 강해설교를 한다면 당연히 문맥의 흐름을 따라서 설교의 논리 구조를 형성하여야 하며, 주제설교를 한다면 주제가 되는 교리의 이해를 전달하기에 적절한 나름의 논리 구조를 구성하여야 할 것이다.
세 번째 과제는 어느 방식의 설교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경의 본문을 다루고 있는 이상 그 본문에 대한 충실한 주해를 통해 확인된 교리적 결과물들에 대한 조직신학적 이해를 충분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서론과 신론으로부터 종말론에 이르는 조직신학 전반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학습함으로써만 가능한 일이므로 기본 교리 학습에 충실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마디로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교리를 가르치며 설교할 능력을 갖추는 일은 공부하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교리설교를 잘 행하지 않는 이유들 가운데는 교리가 교회부흥이나 삶의 적용과 같은 실용적 효과를 주지 못한다는 섣부른 판단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더 실질적인 이유는 설교자들이 교리 자체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다는 데에 있기도 하다. 설교자 자신이 교리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반드시 그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서 교리를 전달하게 되어 있다. 교리 자체가 성경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네 번째 과제는 강해식 설교이든 주제식 설교이든 본문을 통해 제시하는 교리가 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적실성(relevance)을 갖도록 교리의 적용적 측면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교리전달이 단지 과거의 정보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고 말게 될 우려가 있게 된다. 그 결과 교리가 교인들의 삶과 교회의 부흥에 있어서 얼마나 유익하며 필요한지를 모를 뿐만 아니라 교리설교는 지루하다는 인상을 피하기가 어렵게 된다.
끝으로 다섯 번째 과제는 영적 능력이다. 로이드 존스가 이른 바처럼 “설교는 불에 타오르는 사람들 통해 나오는 신학이다.” 설교란 모름지기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임재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 스스로가 하나님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의 영적 충만한 임재와 능력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설교의 목적을 이룰 수가 있겠는가?
교리설교의 실제
매우 탁월한 교리설교의 실례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본문설교(textual preaching)의 방식에 따른 것으로, 미국 카버넌트신학대학원 총장이며 설교학 교수인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의 설교이다.
채플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본문으로 택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는 본문으로 택한 한 절을 분석하면서 세 가지 주제를 뽑아내었다. 하나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20절)는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또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20절)는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삶과의 연합’이라는 주제를, 그리고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0절)는 구절에서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이라는 주제를 이끌어 냅니다.
채플은 각각의 주제를 다루면서 본문의 문법적 분석을 필요에 따라 제시한다. 예를 들어, ‘나를 사랑하사’(과거시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과거시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현재시제) 등을 시제에 따라 구분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는 현재 내가 무엇을 하는가를 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바라보는 데에 있음을 이끌어 낸다. 말하자면 오늘 내가 어떠한 가와 관련한 성화의 문제를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칭의를 통해 해결해 간다. 채플의 이러한 주해는 그가 칭의와 성화에 대한 교리적 이해를 정확히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채플은 근접문맥을 살피는 해석을 통해 주해를 열어간다. 즉 채플은 20절 본문 가운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의 의미풀이를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에서 찾는다. 채플은 여기서 바울 자신이 율법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의 길로 나가는 길이 있으니 곧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임을 15-16절을 인용하여 밝힌다. 이렇게 근접문맥을 통해 주해뿐만 아니라, 채플은 율법의 용도를 밝혀 자신의 해석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좀 더 넓은 문맥으로 나가서 3장24절을 인용한다. 채플의 이러한 노력은 그가 본문 자체뿐만 아니라, 가까운 문맥과 책 전체를 살피는 이해에 기초하여 주해를 충실히 하였으며, 이에 기초하여 설교의 구성논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채플은 적절하게 성경의 다른 책들에서 필요한 관련 구절들을 살펴 제시하는 주제설교의 특징도 설교 가운데 반영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 안에서의 거룩함과 관련하여, 엡 2:6, 19, 롬 12:1, 사 64:6, 눅17:10, 빌 3:9, 골 3:3-4 등 성경 전반에서 적절한 해석을 따라서 인용을 하며, 그것을 설교의 본문에 용해하여 자신의 설교 요점을 보강하고 있다. 말하자면 앞서 말한 교리설교의 준비로서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들을 잘 이행을 하였음을 알게 한다.
채플은 또한 자신이 본문에서 만나고 있는 교리를 충분히 다룰 만한 조직신학적 이해를 잘 갖추고 있다. 그는 갈 2:20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개혁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핵심적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와 맞물려 칭의와 성화의 상관적 관계도 빈틈이 없이 훌륭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별히 성화에 있어서 점진적인 측면과 확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구별하여 잘 제시하고 있다. 설교 전반에 걸쳐서 이해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율법의 기능과 관련하여 채플은 훌륭한 개요를 제시한다. 이러한 신학의 탄탄한 기반 위에서 채플은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누리는 은혜로 인한 것임을 바르게 밝힌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은혜가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성화의 동력이며 근원이고 또한 그 실상임을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관찰은 채플은 교리설교를 위한 세 번째 준비과제를 잘 갖추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적실성의 문제이다. 과연 채플은 이러한 설교를 통해 회중들로 하여금 사변적이지 않으며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이 되는 교훈을 전해줄 수 있었을까? 설교가로서의 채플의 뛰어남은 이 점에서 남다르다. 그는 설교를 통해 답을 주고자 하는 교리의 문제에 봉착한 한 사람의 영적 상황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시작한다. 충분히 회중의 관심을 집중시킬만한 도입이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의 연합,’ ‘그리스도의 삶과의 연합.’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세 주제들에 꼭 들어맞는 탁월한 예화와 자기 자신의 간증을 적절한 자리에서 제시를 한다. 채플은 이것들을 통하여 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신앙과 삶에 있어서 얼마나 실존적인 문제인가를 깨달아 적용의 교훈을 받아가도록 돕고 있다.
나가는 말
채플의 설교를 읽으면 한 편의 교리설교를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설교적 노력이 있어야 하며 그 이전에 성경과 신학에 대한 저변의 기반이 확실해야 하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교리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교리설교가 바로 설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교리를 담지 않는 설교는 성경적이지 않다. 성경은 교리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다원주의, 이단의 횡행, 그리고 실용주의와 물량주의와 같은 세속화의 흐름 등을 거슬려 복음을 전하는 설교 사역은 온전히 성경의 교리를 바르게 전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러한 교리설교의 중요성과 필요성, 그리고 긴급성을 원론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실제로 설교자들이 교리설교를 행하는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교리설교가 단순한 도덕적 설교와 같은 어떤 것들보다도 준비하는 데에 많은 수고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설교자 자신이 교리체계를 명료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하면, 그것도 성경의 주해를 통해 교리를 확신하고 설명할 능력이 없다면, 교리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해보아야 허공을 향한 외침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교리설교를 어떻게 기획하고 준비하여야 할까? 답은 하나이다. 그 답은 ‘공부하여야 한다.’이다.
첫댓글 설교를 통해서 교리를 전달하게 되어 있다.
교리 자체가 성경의 교훈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