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교황의 행동양식(His Way of Proceeding) / 제임스 마틴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이 예수회원으로서는 최초로 교황직에 선출된 이후 몇 주 동안, 예수회에 관하여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지난 25년 동안의 어느 때보다도 더 많았다. 이미 예수회원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성찰거리로 남아 있다. 그것은, 예수회 영성이 우리의 새로운 교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그리고 또한 예수회 영성이 새 교황에게 어떤 영향을 이미 주고 있었나 하는 것이다.
예수회 영성이 토대로 삼고 있는 것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의 삶과 가르침이다. 1540년에 예수회를 창설한 그는 한때 군인이었던 신비가이다. 그 영성의 대부분은 이냐시오의 고전적인 저작인 <영신수련>에서 흘러나온다. <영신수련>은 4주간 피정의 매뉴얼로, 피정자로 하여금 상상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영신수련”은 단지 신약성경을 읽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피정자에게는 복음서의 장면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가능한 한 생생하게 상상할 것이 요구된다. 영성 작가인 조셉 테틀로우(예수회)는 쓴 바와 같이, 피정자는 멀리서 관찰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성전 안에 있거나 요르단 강물에 발목을 담근 채 서 있는” 것이다. 기도하는 이는 복음서 이야기와의 그토록 강렬한 만남을 통해 깊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어간다.
모든 예수회원들은 살면서 적어도 두 차례 영신수련을 하게 된다. 처음은 수련자(novice) 때이고, 그 다음은 여러 해가 지난 후 제3수련(tertianship)이라고 알려져 있는 마지막 양성단계 때이다. 그러므로 교황 프란치스코도 이처럼 영신수련을 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에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아르헨티나 관구의 예수회 수련장을 역임했다. 그것은 그가 또한 영신수련을 통하여 예수회 수련자들을 지도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는 이냐시오 영성에 깊이 정통한 인물인 것이다.
영신수련에는 몇몇 핵심적인 영성적 주제가 담겨져 있다. 예수회원들을 비롯하여 영신수련을 받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을 따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그것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멀어지도록(detached) 초대받는다. 우리는 그 어떤 것을 향해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며, 이냐시오의 유명한 공식에서처럼, 부와 가난, 건강과 질병, 장수와 단명 가운데 어느 것도 선호하지 않는 “치우치지 않는 마음 상태(indifferent)”를 갖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영적으로 엄청난 경지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수회원들의 분명한 목표이기도 하다. 결국, 예수회원들은 스페인어로 “유용함(유효함; available)”을 뜻하는 “disponible”한 상태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장상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이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황직에 오른 놀라운 사실을 설명해 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다. 양성 단계를 마친 대부분의 예수회원들이 교회 내에서나 예수회 안에서 고위직에 “오르려고 애쓰거나 야망을 품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지 않는가? 짧게 답하자면,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냐시오는 그가 살던 당시에 목격했던 성직자들의 출세주의에 반대했고, 예수회원의 최종 서원 안에 그러한 출세지향적인 태도를 막는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하지만 자유로움 또한 이냐시오 영성의 중요한 덕목이다. 한 예수회원이 교회로부터 어떤 일을 하도록 요구받는다면, 그 예수회원은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준비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복잡한 질문에 대답하자면 “그렇다.” 주교품에 승격된 수도자는 “소속 회의 회원”으로 남아 있는 것이라는 교회법 705조에 따르면 교황 프란치스코는 여전히 예수회원인 것이다.)
이냐시오 영성의 또 다른 원천들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이냐시오 성인의 그리 길지 않은 자서전과, 이냐시오 성인이 저술한 <예수회 회헌(Constitutions)>,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 그리고, 예수회원인 존 오맬리 신부가 자신의 유명한 저서 <최초의 예수회원들(The First Jesuits)>에서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냐시오 성인과 초기 예수회원들의 행적이다. 오맬리 신부에 의하면, 16세기의 예수회원들이 이냐시오의 표현대로 “영혼을 돕기” 위한 사목이라면 어떠한 종류의 일이든지 맡을 수 있을 만큼 준비되어(available) 있었다고 알고 있는 것과, 초기 예수회원들이 로마에서 성매매 여성들의 재활을 위한 집을 오픈했으며 신학자들을 트리엔트 공의회에 파견하기도 했다고 아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이냐시오 영성의 몇몇 특징들(Some Ignatian Hallmarks)
그런데 이냐시오 영성(요즘 사용되는 보다 폭 넓은 용어로, “예수회 영성”이라는 표현을 보완해 줌)의 특징은 무엇이며, 그것이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끼친 영향은 어떠한가? 몇 가지를 제시하고, 이냐시오 영성의 특징이 그의 교황직 초기의 행적에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몇 가지 짚어 보고자 한다.
첫째, 이냐시오 영성을 요약적으로 표현한 말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라는 말이 있다. 이냐시오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다. 미사와 성사, 성경 외에도, 일상의 모든 순간, 즉 다른 사람들에게서, 일 안에서, 가정생활에서, 자연 속에서, 그리고 음악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모든 곳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영성, 즉 온 세상을 포용하는 영성을 교황 프란치스코에게 제공한다. 교황이 성 목요일 전례 때, 로마의 소년원 재소자들의 발을 씻겨준 유명한 일화는 이러한 영성을 보여준다. 하느님은 교회 안에서나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에서만 찾을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감옥 안에도, 가톨릭신자가 아닌 이슬람 청소년들 가운데서도, 남자든 여자든 모든 이들 안에도 계신다.
둘째, 예수회원은 “활동 중의 관상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활동 중의 관상가란 분주한 세상 속에서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러한 자질은 그의 교황직 최초의 순간에 증명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베드로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발코니에 나왔을 때, 그는 통상적인 교황 축복부터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시끌벅적한 군중들을 향하여, 그는 침묵 가운데 잠시 기도해 줄 것을 요청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떠들썩함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요함을 만들어 낸 그가 바로 활동 중의 관상가였다.
셋째, 거의 모든 수도회의 회원들처럼, 예수회원들도 가난(청빈) 서원을 한다. 우리는 예수회원으로 살면서 이 서원을 두 차례, 첫 서원 때와 최종 서원 때 하게 된다.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 예수회원들이 가난을 “어머니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는 가난한 사람으로 사셨던 예수를 본받기 위한 것이고 둘째는, 소유에 대한 욕구로부터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스도가 사랑하셨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예수회원들은 가난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난한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가난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 한다고 이냐시오는 말하였다. 지금까지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직에 있어서 전통적인 절차들을 상당수 피해왔다. 발코니에 나오기 전에도, 그는 교황들이 통상적으로 입는 짧은 망토인 고급 모제타를 걸치지 않았다. 그후 줄곧 그의 옷차림은 간소했다. 그는 교황궁에서 살지 않고, 콘클라베 동안 추기경들이 머물렀던 숙소인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방 두 개짜리 숙소에 살기로 했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다 더 가난한 방식을 선택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회원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지만, (이냐시오가 지닌 가난에 관한 개념들은 교황명으로 선택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예수회 영성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인 것이다.
예수회 영성에 대한 논평에서 종종 경시되기도 하는 또 다른 특징은 융통성(flexibility)이다. 그러나 <예수회 회헌>은 예수회 장상들에게 융통성을 거듭해서 권고하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대주교가 되기 전에 베르골료 신부가 수련장 및 연학원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회 관구장이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보라. 그는 장상으로서 세 가지 다른 임무를 역임했던 것이다. 그러한 직책들은 모두 융통성에 대한 이냐시오적인 이해를 요구한다.
<예수회 회헌>이 예수회 수도생활에 대한 규칙들을 빈틈없이 정해놓고 있는 반면, 이냐시오는 발생하는 상황에서 창조적으로 대처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공동체 생활의 특정한 국면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들을 길게 서술한 후에, 종종 이냐시오는 뜻밖의 상황들이 융통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는 단서를 붙여놓고는 했다. 이냐시오는 특별 과정을 공부하는 예수회원들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다른 어떤 것이 개인에게 적합하다면, 장상은 신중하게 그 문제를 고려해서 제외를 적용할 수 있다.” 융통성은 <예수회 회헌>의 특징이다. 또한 그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도 그런 것 같다. 그는 준비 없이 즉석으로 강론하는 것을 좋아하며, 군중 속의 장애아동을 안아주기 위해서 교황 전용차를 세운 일에서 보듯이, 상황의 필요에 따라 스스로를 맞추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수님의 벗이 되어(Jesus as Friend)
교황 프란치스코가 물려받고 있는 이냐시오 영성에 관하여 두 가지 더. 적어도 나에게는, 부활 성야 미사 때 했던 교황의 강론이 이냐시오적인 테마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이것은 내가 예수회원이기 때문에 갖게 된 편향된 시각 때문이겠지만!) 그는 강론을 시작하면서 이야기 속으로 스스로를 위치시키도록 신자들을 초대했다. 이것은 영신수련에서 핵심적인 기법이다. 그가 제안한 것은, 자기 자신을 부활 아침 무덤으로 가는 여인들 가운데 한 명인 것으로 상상하라는 것이었다. 교황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무덤으로 가는 길에 느꼈던 그들의 감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자기들을 떠났다는,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그분의 생명이 끝났다는 그들을 떠났다는 슬픔과 비애입니다.” “하지만 삶은 이전과 같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 여인들은 계속해서 사랑을, 자신들을 무덤으로 이끈 예수님에 대한 사람을 느꼈습니다.”
그 강론의 뒷 부분에서 교황은 신자들에게 예수님을 친구로 생각하라고 초대했다. “믿음을 지니고, 그분을 친구로서 맞이하십시오. 그분은 생명이십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이 그분과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분을 두 팔을 펼치고 여러분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쉽게 영신수련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영신수련>에서 이냐시오는 우리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말하듯이” 예수님께 이야기를 건네라고 여러 차례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각별하고도 생생하게 하느님의 아드님을 대하는 방식이다.
교황이 지닌 영성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만으로 교황이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틀린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영성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고, 또는 그의 영성이 그의 사목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도 똑같이 틀린 말일 것이다. 특별히 예수회 수련장과 장상을 역임했던 다른 모든 예수회원들처럼, 교황 프란치스코는 이냐시오 성인 및 예수회의 영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교황 문장에 예수회 문장(seal)을 삽입하기도 했다. 교황직을 수행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이냐시오 영성이 어떻게 도와줄지를 볼 수 있기를 나는 고대한다.
원문 링크 = http://americamagazine.org/issue/article/his-way-procee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