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9. 주일예배설교
고린도전서 15장 9~10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 2024년이 오늘을 포함해 삼 일 남았습니다. 돌이켜 보니 어떠셨습니까? 아마 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선을 오갈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뻤던 일이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 된 일이지만, 짜증 나는 과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으셨습니다. 물론 지금도 진행되는 고된 일이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인사가 있습니다. 올 한 해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 짜증 나는 일 등등 많은 일이 있었을 테지만, 잘 견디시고 여기까지 오신 여러분에게 큰 박수를 보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 격려의 박수에 바울도 함께 하십니다. 그도 이런 시절을 겪었기에 동일한 심정으로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한 해를 총정리 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도 고백하다시피, 하나님의 교회-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대교 중에서도 가장 강경파인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그리스도인에 대해 누구보다도 적대적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직접 개입할 만큼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는 일에도 가장 적극적일 만큼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에서 회심하였습니다. 다메섹에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정보를 받고 그들을 체포하러 가던 길이었습니다. 도중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바울을 둘러 비췄습니다. 이에 당황한 바울은 빛을 향해 외쳤습니다. ‘누구십니까?’ 그러자 빛 가운데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이 소리에 고꾸라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인생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3년간의 신학과 영성 훈련을 받고 성령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에 정말 수 없는 죽음의 상황을 맞이했고, 여러 번의 감옥생활, 수도 없는 매질과 협박 등 바울은 죽음의 계곡을 수도 없이 지나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불만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의 상황은 열악했지만,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계곡을 건너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오히려 열정이 더 뜨거워졌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 본문인 9절과 10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이 불평도 불만도 갖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은 그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지 않는 바울에게 임한 하늘의 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불평의 상황도, 불만의 환경도 바울을 휘두르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를 고백하는 사람을 당할 수 있는 불평과 불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불평과 불만을 파쇄하시는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않게 하려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습니다. 항상 기뻐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며 성실히 살았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있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렇습니다. 이것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듯,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능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결코 없습니다. 그렇기에 살아갈 것 모두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으로 모든 것이, 모든 일이, 모든 사건이,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 하나님만이 영광이십니다!
■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전유물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누구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그 누구에게라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일 수 있습니다. 아니, 고백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여러분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아멘? 아멘!
그렇다면 어떻게 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최소한 바울처럼만 살면 될까요? 맞습니다. 바울처럼만 살 수 있어도 다행입니다. 그래서 그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답게 살 수 있는 태도를 나누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자신을 가장 작은 자로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인정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가장 나중에 사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순서의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회개의 의미입니다. 자신이 예수님 핍박자로 살았던 지난날에 대해 회개에 입각한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9절입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의 이러한 인정에 비추어볼 때, 우리의 형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바울 못지않게 죄인이지 않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가장 작은 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나는 가장 작은 자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자신이 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임을 고백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수고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인정하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고, 나의 수고는 나의 수고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물론 나의 수고가 적잖으니 인정해야 합니다. 나의 수고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수고의 공급처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더 중요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나의 수고가 가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하나님의 은혜에 나의 수고를 양보하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의 수고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할 때 더 큰 의미와 가치를 갖기 때문입니다. 나의 수고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일엽편주(一葉片舟)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바다에 띄워진 나의 수고는 최고의 환호와 최고의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에 나의 수고를 양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나의 수고가 단단히 덕을 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 우리는 이렇게 올 한 해를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았습니다. 도무지 건널 수 없을 것 같던 고난의 강을 건넜고, 도대체 이해 못 할 슬픔의 바다도 건넜습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의심했던 불가능의 산도 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2024년이 오늘을 포함해 삼 일 남았습니다. 남은 날 동안 하나님의 은혜를 신나게 노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사방에 간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송구영신(送舊迎新),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