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촌, 당숙
고경숙
동짓달 열여드레, 아버지 다섯 번째 맞는 기일 전날이다
백년골 사시는 당숙 내외께서
너덧 근쯤 돼 보이는 돼지고기 한 덩이를 유모차에 싣고
재를 넘어 오셨다. 이제 아버지 학렬(光)중 마지막 생존해계시는
올해 여든 여섯 되신 어머니 다음 어른으로
옆모습에서 언뜻 아버지 모습이 스친다
그런데, 이 점잖으신 어른께서
젊은 날 농한기만 접어들면 끼니를 전패하다시피 하시고
도박판을 전전하셨으니 할아버지 삼형제께서는
혹시나 곡간 털릴까 밤으로 봉창에 눈을 떼지 못하셨고
날이 밝으면 외양간 송아지며 마굿간 돼지새끼
심지어 달구새끼 안부까지 물어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한 시절 우리 집안을 혼란에 빠뜨렸던 탕아셨지만
지금은 동네 알아주는 알부자시다.
당숙! 그때 돈은 좀 따셨쏘? 어쨌쏘? 내 확인 사살에
헛기침 소리만 방안에 한참 어색하더니
아따, 땄으면 이러고 살것는가?
그때는 나락가마니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허는디 환장허것드라고
이때다 싶으신지 당숙모께서 고개를 쌀레 쌀레 내두르시며
아이고 내 속을 누가 다 안당가
자네 작은 할아버지는 끼니마다 밥이 먹구녕으로 넘어가느냐 하시지
새끼들 즈그 아부지 노름꾼으로 기억할까봐 입 닫고 산 세월이 60년을 넘었네
그놈의 헛손질만 하지 않았어도 떵떵거리며 살텐디 말여
돈 잃은 사람은 있어도 돈 땄다는 사람은 없는 것이 노름판이더라고
하루는 어쨋더랑가
노름방에 쫓아 들어가 화투판을 뒤집어엎어버리고
자네 당숙을 끌고 나옴서 같이 빠져죽자고
동네 방죽으로 끌고 갔더니 따라 오는척 하다가
아-나 너나죽으라며 다시 노름방으로 가시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지난 장날 사다놓은 새끼돼지를
100근 되는 돼지가 집에 있다는 거짓말로 판돈 잡아 쓰신지라
아, 글씨 밑천 대준 놈이 돼지를 잡으러 왔더라고
저 양반이 그런 양반이었씅께
지서에 칵 신고하시지 왜 그러셨어요?
아따, 그래도 잡혀가면 못쓰것더라고
봄에 쟁기질도 해야 허고 우세스럽기도 허고
당숙모 목울대에서 쇳소리가 난다
이때, 더는 꺼내놓을 이야기가 없으신 듯
고해성사처럼 헛기침만 하시던 당숙
골연 한 대 꺼내들고 밖으로 나가시는데
강 건너 서산을 기웃거리던 해님이 소나무에 걸렸다
와! '솔광'이다 '솔광'
당숙! 저어기, 저기 좀 보세요
화투 한 장이 걸렸어요
에끼, 이사람아! 이제본께 질녀도 참 못쓰것네
늙은이 놀리싱께 재미지신가?
예! 그리 헛웃음치실 때마다
아버지랑 할아버지들 모습이 얼비쳐 지나가시거든요.
첫댓글 시인님. 편안하시지요?
연일 바쁘게 지내시는 듯...
아버님 기일. 가슴 찡한 글 읽어 내려 가는데
왜 이리 웃음이 나는지...ㅎ
마지막 연에서 그만 빵 터졌네요.
예전엔 많은 분들이 노름판을 오가곤 했다지요.
패가 망신도 하고...
지난 이야기 진솔하게 풀어 보여주시니
곱게 머물다 갑니다.
그러게요
독자이신 아버지께서
친 동생처럼 지내시던 분이셨지요
잡다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시고
고운 댓글 감사드려요
오랜만입니다.
즐거운 명절 잘 보내셨나요?
글을 주욱 읽어내리니 옛날 저의 집 생각이 스칩니다.
농사지어 알곡을 축담에 나란히 끝까지 두었는데
밤만 지내고나며 한가마씩 없어져서
하루밤에는 할아버지께서 잠을 물리치시고 망을 봤더니
세상에 머슴이 지게에 지고 어디를가길래 살자기 따라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주막집에...노름판이 한참이더래요.
돈은 없고 노름에 졌으니 주인집 알곡을...ㅎ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들켜서 부끄럽고 미안한지 제발로 도망을 쳤다고~~~
옛날 친정생각하며 잘 읽었습니다.
새해에도 복 많이 받으소서. 시인님!
아우 없으신 아버지께서
매번 걱정하셨지요
잡다한 이야기 지루하셨을 텐데
고운 댓글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올려주신 글을 읽노라니 어찌그리 제가 살던 동네와 똑 같을까요
그때는 동네마다 다 그랬었지요
가산 탕진 하는 집이 거의 였으니까요
옛말 하시고 지금은 알부자시라 다행입니다
동감대의 글 감사합니다.
그랬었지요
밖에서 할일 없던 겨울
허기사 지금은 대놓고 하는
카지노 같은 곳이 있기도 하지만..
남의 이야기 좀 지루 하셨지요?
시로 함축시켜 시작노트에 적기전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 들으심서
즐거운 삶이 되시기를....
고운 댓글 감사드려요
('당숙'에 대한 추억)
가내 대소사의 전통 예법을 거론하며 늘 까탈스런분이 당숙이시다.초상이 날라치면 깨죄죄한 흰두루마기 차림으로 불그스름한 얼굴에 막걸리 냄새를 확확 풍기면서 한옥타브정도 높은 고음으로 사소한 일까지 진두지휘 하신다. 아무도 이분 말씀에 감히 토를 달수 없다. 그래야 한다는데 그게 좋다는데, 본인 생각이 곧 법이시다. 더구나 만만한 티가 나는 지관노인쯤 만나면 그대로 저절로 옥황상제가 되신다.
웬 들으신 풍월이 그리 많으신지...,기억력도 좋으시다.
네, 그런 분 꼭 계시지요
이젠 글로벌시대...
왕따가 무엇안지도 모르시면서...
우린 그러지 말아야 할텐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