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트를 만나다
혹독한 고원의 삶이 정신의 백신 되는 곳 2012.01.16 15:12 입력심혁주 교수 tibet007@hanmail.net 발행호수 : 1130 호 / 발행일 : 2012-01-18
사람들은 여름이면 휴가를 간다. 산과 바다로. 그리고 그 속에서 수영, 일광욕, 서핑, 음식을 즐기며 한 여름의 짜증과 무더위를 날려버린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대단히 욕먹을 말이지만 ‘적게는 수만, 많게는 수십만이 배출해낸 오염물질이 득실대는 바닷가에서 물장난을 치면 휴식이 될까’라는 생각을 매번 한다. 여기에 관하여 나의 아내의 어디서 빌려온 주장에 의하면 “어떤 여행이라도 철학은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 북새통에도 스트레스는 풀리고 휴식을 얻을 수 있다고 하니,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 개인의 취향인지 아니면 나이가 먹었다는 증세일까. 그럼 “당신은 매년 여름에 어디에 가서 고고하고 우아하게 휴식을 취하시나요?”하고 조금은 꼬며 반문 한다면, 나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Indiana Jones)’의 고고학자 해리슨 포드처럼 “티베트요”라고 힘주어 대답한다. 그럴 때 나의 아내를 비롯한 사람들의 표정은 거의 흡사하다. 정확히 “음, 놀고 있네”하는 얼굴들이다.
맞는 말일게다. 나 역시 폼 잡고 나만의 휴가라고 자위하고 떠나지만 매번 육체적으로는 절대적으로 힘든 휴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여름에는 계곡이라도 가자”라고 매년 그렇게 아내에게 사기(아내의 표현을 빌리자면)를 치고 있다. 사기를 친 덕분인지 아니면 그렇게 고고한 척을 한 대가로 나는 매년 여름 ‘템플 스테이’라는 나만의 테마로 티베트 지역의 적지 않은 곳을 헤집고 다녔다.
문명세계엔 없는 삶의 형태
내가 티베트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004년 7월의 여름부터이다. 그때는 내가 쓰고 있던 박사학위의 주제가 ‘너무도 흉측한(아버지의 표현을 빌리자면)’ 티베트인들의 조장(鳥葬)의식에 관한 것이어서 문화를 체험하고 인터뷰하기 위한, 어쩌면 학위를 받기위한 제도적인 행위를 할 때였다. 여기서 말하는 제도적인 행위란 나의 감성적, 주관적 추진력이 상당히 배제된 채 지도교수의 거부할 수 없는 권유(시키는 대로 안하면 졸업 못할 것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아래 학위를 무난히 통과하기 위한 계산적 행위가 지배적이었음을 말한다. 1년간의 티베트 장기답사를 마치고 2005년 나는 ‘중국 개혁개방 후 티베트자치주 전통문화의 변천과 발전-천장(天葬)과 장극(藏)을 중심으로’라는 학위논문으로 ‘티베트학(藏學)’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렇게 시작된 티베트와의 인연은 끊어질듯 하면서도 매년 이어져 오늘날에는 여행을 넘어서 좀 더 구체적이고 스릴 있는 티베트 답사를 다녀오고 있다. 그리고 항상 티베트라는 고원의 세계에서 지상세계로 내려 올적마다, 내가 하는 첫 번째 본능적 행동은 시원한 콜라를 맛있게 마시는 일이며 ‘다시는 이 고약한 고원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러나 참 우습게도 매년 그맘때만 되면 자의든 타이든 나는 티베트의 어느 불교사원에서 명상을 하고 있고(실지로는 졸고나 자는 수준), 거주하는 라마승과 이야기를 하고 있고, 활불(活佛)과의 오묘한 종교적 대화를 하고 있다.
티베트가 주는 매력은 문명세계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거룩한 자연환경과 티베트인들의 경건한 종교적 삶에 있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가 사는 속세와는 전혀 다르게 구축된 문화와 사상의 이질감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우리는 대자연에서 치유 된다’는 말을 티베트에서 실감하곤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대자연 속에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치유와 소통의 처방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겸연쩍지만 나의 주관적 예를 하나 들어볼까. 2007년의 티베트 여행은 처음 티베트에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오감의 느낌과 소득이 있었다. 내생에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수행 중인 티베트의 고승활불을 동굴 속에서 알현 했으며 또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7월의 크리스마스’라고 제목을 붙여도 좋을 만큼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해발 4,500미터 상공에서 눈사람을 만들기도 했다. 숨이 차올라 죽을 것 같은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눈사람 만들기’는 왜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 낄낄거리며 놀았다. 한 여름에 펑펑 내리는 눈을 맞는 기분이란 붕어를 잡으러간 낚시터에서 고래를 만나는 기분이랄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티베트는 그런 곳이고 티베트의 매력은 거기에 있다. 그렇게 솔솔 티베트에 빠져들며 심상 스케치에 열을 올리며 나는 10여 년 동안 티베트를 답사하고 체험하고 있다.
그 힘든 여정을 매년 반복하고 있는 이유는 내가 전공하는 학문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선택한 육체적 고통 속에서 느끼는 정신적 치유와 희열을 경험하기 때문이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해상도는 반비례한다고 딱 잘라 말 할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 육체적 고통이 지속되고 증가될수록 그동안 늘어졌던 정신의 탄력은 반작용의 힘을 받는다. 사실 속세를 살아가는 나의 몸과 마음에서는 매일 매일 바이러스가 끊임없이 자생적으로 발생한다. 그것도 악성으로 말이다. 이 악성 바이러스는 욕망과 욕구, 집착과 소유의 내성을 지니고 있어 끊임없이 내 마음 속에서 순환하며 확장하고 나를 몰아 부친다. 해서 이 바이러스를 자정하고 치유하지 않으면 나는 결국 뿔난 괴물이 될 것이며 그것도 모자라 타인(他人)에게 이 바이러스를 전염하고 말 것이다.
대자연 속에서 접하는 치유의 시간
이를 치유하는 방법은 내 몸속에 백신을 돌리는 일 뿐이다. 그 백신이 나에게는 티베트에 있다. 티베트의 숨 막히는 생존환경과 티베트인들의 가치관 그리고 티베트 민족의 삶(정체성)과 우주관이 나의 악성 바이러스를 잡아내고 정화시키는 백신인 것이다. 때로는 명상과 수행을 흉내 내면서까지 내 마음과 육신의 바이러스를 잡으려고 끙끙댄다. 그 방법의 일환으로 나는 매년 나의 ‘업’(인간관계의 찜찜함)을 정화하고 세속적 욕구와 욕망의 탐욕 줄을 목욕시키는 방법으로써 척박하고도 거룩한 오지, 티베트를 의도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관리와 성찰을 하는 기준은 다양하다. 어떤 이는 사상과 철학을 가지고 자기관리를 하며, 어떤 이는 유행하는 옷을 가지고, 또 어떤 이는 운동을 도구로 삼아 자기관리를 유지한다. 모두 다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사랑하는 방법일 것이다. 나는 티베트 여행과 그 속에서 맛보는 오감체험으로 자기 관리를 한다면 좀 거창할까.
나이 60이 되어서도 내 주관으로 나의 휴양지를 선택할 수 있을까. 힘들 것이다. 나의 체력이 ‘이제 그만 좀 하지’라고 쏘아 붙일 것이고, 나의 가족이 ‘폼 그만잡고 이제는 바다 좀 가자’라고 협박할 것이다.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나의 정신적 열정이 많이 식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나는 희망한다. 내년에도 나의 피서지는 티베트의 어느 고원이 되길.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들었고 무엇을 했는가는 어쩌면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년에도, 다음 년에도 절박하게 티베트의 어느 곳에서 소불알처럼 축 늘어진 정신 줄을 조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티베트의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바라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수박만큼 큰 티베트의 별을 바라보며 탄력 없는 정신의 기운을 섭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잘 참고 버티어서 무사히 속세로 하산하는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고 나를 관리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심혁주 교수는 대만국립정치대학교(臺灣國立政治大學校)에서 티베트의 ‘천장’(天葬)과 ‘장극’(藏劇)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명지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다. 저서와 논문으로 ‘티베트의 활불(活佛)제도(서강대학교 출판부. 2011년 대한민국우수학술도서선정)’, ‘티베트 천장(天葬)-하늘로 가는 길(책 세상)’, ‘티베트 독립운동의 현 단계와 역사적 배경’등 다수가 있다. |
첫댓글 육체적 고통과 정신의 해상도는 반비례한다고 딱 잘라 말 할 수는 없지만, 나의 경우 육체적 고통이 지속되고 증가될수록 그동안 늘어졌던 정신의 탄력은 반작용의 힘을 받는다 (본문 중 발췌)
>>명상중 발저림이 극성할때 혹은 백팔배 기도중 절의 횟수가 많아 지며 힘들어 할 때가 정신의 해상도가 또렷해지고 이 경계를 넘어설때 힘들지만 괴롭지 않은 행복을 경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