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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0일(주일) 주일설교 스가랴 9:9~17 ‘크게 기뻐해야 할 이유' 새찬송가 391장 오 놀라운 구세주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최근 무슨 일 때문에 기뻐하셨습니까? 사람들은 대개 어떤 조건이 생길 때마다 기뻐합니다. 건강을 회복했다든지, 새집으로 이사를 갔다든지,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붙었다든지, 취업에 성공했다든지, 적금을 탔다든지 등등의 이유로 기뻐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근본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뻐할 이유가 있어야만 기뻐하지만 우리는 기뻐할 이유가 전혀 없어도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쁨은 우리 믿는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시32:11)라고 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느헤미야 선지자는 느헤미야 8장 10절에서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살아갈 힘이 오직 여호와를 기뻐하는 데서 온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는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 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왜 스가랴 선지자는 유다족속에게 크게 기뻐하고 즐거이 부르라고 말씀했을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살펴보면서 주의 음성듣고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크게 기뻐해야 할 이유는 ‘화평을 전하시는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9~10절).
바벨론 70년간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족속에게는 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9절 말씀에 유다 족속에게 왕을 주신다고 하시며 그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9절 말씀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 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에 나귀 새끼나 타고 오시는 왕은 없느니만 못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스가랴 선지자의 이 예언은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마태복음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10절에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를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9:6에 보면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여기서 "평강의 왕"이라고 하는 데 이 말씀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염두에 두고 예고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평강의 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9:7절에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즉 평화는 예수님 자신이고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분’'이라는 말씀이고 ‘여호와의 열심’ 이 평화를 이룬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께서 평화 자체이시고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사람 스스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고, 평화주의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화평을 전하시는 왕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나귀 새끼를 타시는 겸손으로 교만하셔 세상의 전쟁을 일으시키는 세상 병거와 말과 활을 끊으시는 왕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제물로 자신을 드려 언약의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을 위해 화목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화목제물’(Propitiation)은 법궤 위의 ‘시은소’, ‘속죄소’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시은소’는 지성소 안에 있는 법궤의 윗 뚜껑인데,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그곳에 피를 뿌려 백성들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이것을 ‘화목제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화목제물’은 ‘진노를 없애주는 제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심청전 때문에 ‘화목제물’의 개념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용왕의 진노를 풀어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된 심청이는 아버지 심봉사를 위해 인당수에 자신의 몸을 던져 용왕의 진노를 풀었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심봉사가 자기 눈을 뜨는 일에 기여한 바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심청이가 용왕의 진노를 풀기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제물’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해 매일 진노하십니다. 나훔 1장 2절에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시편 7편 11절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서 매일 분노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죄인들에게 매일 분노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영원한 형벌을 받고 지옥에 떨어져야 마땅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모두 다 담당하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푸시는 화목제물이 되어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청이 용왕의 진노를 풀었듯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다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죗값을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가 다 실현되었고, 하나님의 공의는 완전히 만족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인을 향해 웃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진노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아버지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지배자의 모습이 아니라 구원과 섬김의 모습으로 지금도 우리를 통치하시는 참된 왕이시되, 화평을 전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화평을 전하시는 참된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도 그 분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된 자로서 말썽만 불러 일으키시는 트러블 메이커가 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전하는 복음의 피스메이커로 이 땅을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적용) 부도와 질병과 실직이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러 오시는 사건임을 인정하면서 즐거워하십니까?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자 끊어내야 할 세상 병거와 말과 활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 둘째,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는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11~12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셔서 ‘물 없는 구덩이’(11절)와 같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당긴 활과 끼운 화살로 삼아 대적을 물리쳐주셨습니다. 11~1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님은 물없는 구덩이에 갇힌 인생들을 영원한 요새인 말씀과 교회공동체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어도 이 구속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요동하지 않고 천국의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바벨론의 포로로 있던 유다 백성들을 건져주셨습니니까? 그 이유는 ‘언약의 피’(11절)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4장에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잘 지키면 너희가 복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포로가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을 모세가 짐승의 피로 언약을 인준하고 ‘언약의 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약의 내용 가운데 유다 백성들이 언약을 어겨 포로가 되어도 잘못을 깨달아 뉘우치고 마음을 돌이키면 다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신 30:3). 이 말씀은 너희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70년 동안 했지만 언약의 피로 인하여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된 것은 ‘일차적인 의미’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멸망과 지옥’에서 건짐 받는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로 언약을 맺는 것은 ‘그림자이고 예표’에 불과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써 언약을 맺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부활하게 되며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성령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결코 어기지 아니하시는 언약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다가 하나님께서 건져주신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는 옛날 동방의 왕들이 사람을 죽일 때 빠뜨린 곳입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을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고 할 때도 물 없는 구덩이에 빠뜨렸습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는 물도 없고 먹을 음식도 없습니다. 너무 깊어서 자기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물 없는 구덩이에 있다는 것은 3일만 지나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식기도를 해도 물을 마시고 하면 40일까지도 할 수 있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3일 이상 못합니다. 이처럼 물 없는 구덩이는 왕들이 죄수를 죽이려고 만든 장소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불신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 없는 구덩이에 빠지면 아무리 돈이 많고 쾌락을 즐기면서 기분이 좋아도 3일이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 죄수들 가운데에도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슥 9:12). 어떻게 이 사람들이 소망을 갖게 되었느냐?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물 없는 구덩이에 빠져있는 죄수들을 살려주겠다는 언약을 믿었기 때문이고, 둘째, 스가랴 9장 12절에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새’는 피난처입니다. 하나님께서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마련해주셨고 구덩이 속에서 꺼내주시겠다는 언약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죄수들은 소망을 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마련해주신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른 피난처가 없습니다. 세상의 신에게 피하면 완전히 망합니다. 구덩이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시편기자는 시편 61편 3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심이니이다”
적용) 나는 인생의 어느 구덩이에 갇혀 있습니까? 그 구덩이에 내가 원하는 돈과 능력의 물이 없는 것이 은혜 임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셋째, 용사가 되어주시는 왕이 오셨기 때문입니다(13~17절).
주님은 우리가 핍박과 조롱 가운데서도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화살과 칼이 되어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호위해주시고, 또 직접 용사가 되어 주셔서 싸워주십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영적 전쟁에서 우리를 화살과 칼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호위해주시고 대신 싸워주셔서 우리가 원수를 삼키고 밟게 해주십니다. 13~15절 함께 읽겠습니다.
새찬송가 351장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1)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우리 대장 예수기를 들고서 접전하는 곳에 가신것 보라
(2)원수마귀 모두 쫓겨가기는 예수이름 듣고 겁이 남이라 우리 찬송 듣고 지옥 떨리니 형제들아 주를 찬송합시다
(3)세상나라들은 멸망당하나 예수교회 영영 왕성하리라 마귀 권세 감히 해치못함은 주가 모든 교회 지키심이라
(4)백성들아 와서 함께 모여서 우리모두 함께 개가 부르세 영원토록 영광 권세 찬송을 우리임금 주께 돌려 보내세
후렴: 믿는 사람들은 주의 군사니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아멘.
이렇게 우리에게 용사되어 주시는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 용사되신 주님의 도우심으로 대적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날이 보게 될 것입니다. 16~17절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능력도 없는 양 떼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이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용사시오,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전적으로 듣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내 힘과 생각을 버리고, 시편 23편의 목자를 따르는 양처럼 주의 말씀을 따르고, 대장되신 주님을 따라 갈 때 그는 주 앞에서 왕관의 보석처럼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 형통함과 아름다움이 청년들의 강건함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삶을 형통하게 하고 보석처럼 빛나게 하는 힘은 내가 이룬 성공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주시는 구원입니다.
진정한 승리는 내가 의지하는 화살과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적용) 내가 의지하는 화살과 칼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간구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임을 믿습니까? 지금 나는 누구의 양 떼로 살고 있습니까? 나는 청년들의 구원을 위해 얼마나 수고합니까?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도는 세상의 것을 초월해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나는 무엇으로 기뻐하고 있습니까? 오늘 스가랴 선지자가 우리에게 크게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처럼 우리는 화평을 전하시는 왕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물 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어도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신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내가 의지하는 화살과 칼을 내려놓고 용사가 되어주시는 왕되시면 목자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따라가는 것을 인하여 기뻐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왕관의 보석과 같이 빛나게 해주시며, 우리의 삶을 형통함과 아름다움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우울과 낙심과 실패의 구덩이에 갇힐 때마다 다시금 화평되시며, 갇힌 자에게 놓임을 주시는 용사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저는 지켜줄 것 같은 세상의 화살과 칼은 없지만, 화평을 전하시고, 갇힌 곳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용사되어 싸우주시는 예수님이 저의 화살과 칼이 되어 주옵소서. 우리 수정교회가 구덩이에 갇힌 영혼들이 소망을 품고 돌아올 때 요새가 되어 그들을 품어주게 하옵소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화살과 칼이 되어 많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여호와의 땅과 같은 신앙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