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 사무엘상 1: 15 - 18
제목: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일시: 2016. 7. 31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엘가나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아내가 둘이 있었다. 한나와 부닌나이다. 일부다처라는 테마는 오늘의 핵심은 아니다. 그러나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일부다처의 사회문화적 시스템에서 편한 가정은 없었다. 엘가나 역시 그러했다. 언제나 불씨를 안고 있는 관계인데 엘가나의 가정의 문제가 2절에 바로 드러나 있다.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고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었더라” 늘 이 문제가 짐이 되었던 한나는 엘리제사장에게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한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성전에서 해결하게 된다. 성전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는가?
III.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알아 주신다.
한나는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고 말한다. 꼭 입으로 구차하게 “내가 많이 힘들어”라고 말을 해야 되겠는가? 살다보면 우리는 표정관리를 해야 하기에 속마음을 내어 놓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또한 마음을 드러내고 싶어도 사람이 구차해지고 비참해지기에 침묵하는 경우들도 많다. 그때 사람들은 우리를 꿰뚫어 보지 못하고 우리의 마음이 슬픈지 기쁜지 눈치채지 못한다. 오히려 사람들은 중심과 동기를 보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기에 억울하기 짝이 없는 말들도 하고 대하기도 하는 경험도 수없이 많다. 심지어 마음을 드러내기라도 한다면 위로하기보다 우리의 약점을 치고 들어온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를 보라. 그는 한나의 슬픈 마음을 엿보았을 때 더욱 그 약한 곳을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와 한나를 “심히 격분하게 하여 괴롭게 하더라”
우리에게 슬픈 마음이 있을 때 왜 주님께 가지고 나와야 하는가? 주님은 알아주기 때문이다. 엘리는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한다. 알아주는 것 자체가 위로이다!!! “아신다”는 표현을 쓰지 않고 “알아주신다”라는 표현을 썼다. 그 말은 주님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우리를 살펴보시고 관심을 가지고 신경 쓰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누구든지 편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힘드시지요?” 라고 넘겨 짚어 말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백발백중이다. “남들이 모르는 애로사항이 많지요”라고 하면 “아니 목사님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라고 한다. 알기는 무엇을 아는가? 넘겨 짚어 말할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문제없는 사람이 없고 마음이 슬프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종류도 다양하다.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사업의 문제, 직장의 문제, 학업의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 등 모든 것들이 다 문제 덩어리들이다. 문제의 싸이즈도 다양하고 문제의 개수도 다양하다. 하나 해결되면 이제 불행 끝 행복시작이 아니라, 매일 새로운 문제들이 지뢰처럼 터져 나온다. 사람들이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없어서가 아니요 있어도 구차한 일이 되어 일일이 말을 못해서 그럴 뿐이다. 내 슬픈 마음을 몰라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알아주면 위로가 된다. 한나가 성전을 찾은 이후 그의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다.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 (삼상1:18).
오래 전에 아내와 차를 타고 가다가 아내와 대화를 하다가 아내를 화나게 한 적이 있다. 아내가 아프다고 했었다. 아프다고 호소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응? 어디가 아퍼? 병원에 가야하지 않을까? 왜 손목이 저리지? 뜨거운 것으로 마사지를 할까? 등등 관심을 보이면서 얘기를 해야 하는데, 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아는가? 겁도 없이 한마디로 케이오 시켰다. “운동을 해야지 운동을...” 아내는 아픔을 얘기하고 내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대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단지 내가 아내를 알아주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 한마디를 툭 내어 던진 것이 아내를 속상하게 하고 더 아프게 만들었다. 그때 아내는 더 이상 나로부터 위로를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오히려 마음에 상처만 입었다. 그리고 그 이후 내가 허리가 아프니 어쩌니하면 “운동 하라매”라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도 위로가 안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아시고 운명을 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 알아주시는 하나님은 벌써 우리의 위로가 되신다.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 문제는 주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어차피 문제는 있었다. 문제가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수학캠프를 프라하에서 했고 내일부터 라이프찌히에서 5개 교회에서 청소년들이 와서 한다. 수학문제를 아침 7시부터 밤 10시까지 풀게 될 것이다. 수학문제가 “어렵다” “쉽다”라고 할 때는 그 문제 자체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수학이 문제가 아니라 못 푸는 내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제가 얼마나 크냐 작냐의 것이 아니라, 그 문제보다 해결할 그릇이 더 크냐 하는 것이다. 그 문제보다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크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 문제보다 더 큰 하나님에게로 가지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He will carry you 라는 찬양곡을 유투부에서 들어보라. There is no problem too big God cannot solve it There is no mountain too tall He cannot move it And there is no storm too dark God cannot calm it There is no sorrow too deep He cannot soothe it. 문제가 있을 때 혼자 풀려고 끙끙거리지 말라. 마음이 슬플 때 그 마음을 아시는 주님께로 가지고 나아오라.
IV.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알아주실 뿐 아니라 해결해 주신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주님께 나오는 것은 주님께 나오면 답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위로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위로에는 끝이 있다. 엘가나는 좋은 남편이었다. 사실, 엘가나도 할 것은 다했다. 5절을 보라. 엘가나는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날 브닌나에게보다 한나에게 갑절의 제물을 주었다. 그리고 10아들보다도 더 나을 정도로 엘가나가 한나에게 소중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엘가나도 한나에게 해줄 수 있는 끝이 있었다. 어느 선까지 오면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위로를 하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의 위로와 하나님의 위로 사이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위로와 다른 것은 우리의 위로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막연한 위로이다.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 잘 될 거야. 너무 걱정 마... 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걱정이다. 나도 떨고 있다.
필리핀에서 대지진이 1990년도에 일어났을 때 제가 알고 있는 선교사님인 최기철 목사님은 당시 마닐라에서 바기오 산악지역의 첫 도시로 오는 중이었다. 험한 케논로드 중간에서 지진을 만났다. 그 지진은 뛰고(hopping) 옆으로 움직이는(shaking) 지진이었다. 많은 이들이 이 지진으로 죽었다. 바로 지진이 터진 시간에 그 목사님이 험한 산을 타고 차를 몰고 오셨기에 동료선교사들과 목사님들이 그분이 돌아가신 줄 알고 다들 관을 짜놓고 있으면서 사모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 걱정 마세요. 수색대에 계셨던 목사님이시니 불사조처럼 살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이곳까지 오셨는데 하나님이 생명을 연장시키지 않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뒤에서는 장례준비를 하고 있다. 그 목사님은 결국 살아서 4일만에 돌아오셨다. 마치 거지와 같이 헤어져 가지고 씻지 못하고 수염도 자르지 못하고 옷을 다 더러워지고... 사람들은 위로할 뿐 헛된 위로밖에 할 수 없다. 어떠한 대책을 세워주지 못하는 위로이다.
하나님의 위로는 우리에게 걱정마 하면서 진짜 걱정 안되게 대책을 세워주시는 위로이다. 우리는 공허한 위로를 남발할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은 당신께서 위로하신 말에 책임을 지신다. 엘가나가 위로를 하기는 했다. 그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위로는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위로이다. 결정적으로 한나가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자식을 갖는 일이었다. 한나에게 인형을 사주어도 컴퓨터를 사주어도 벤츠차를 사주어도 대저택을 구비해 주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곱절로 줄찌라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위로는 정곡을 찌르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 아이가 운다. 어떻게 아이의 울음을 달래나? 우는 원인을 제거해 주면 된다. 우는 이유는? 배고파 운다. 졸려서 운다. 오줌이나 응아 해서 운다. 놀아달라고 운다.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운다. 배고파 우는 애에게 깍꿍 한다고 그치냐? 아니다. 졸려서 울 때 아무리 우유병을 물려주어도 운다. 기저귀가 젖었으면 아무리 장난감을 가져다 주어도 운다. 주님은 정확하게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에 위로하시고 우는 원인을 아시고 고쳐주시고 치료하시고 회복시키신다. 하나님의 위로는 능력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위로는 능력의 위로이다.
공사가 한참 진행일 때 친구교수가 이곳에 방문했다. 3층 중간 에케방은 당시 거기서 식사를 하고 쉬고 하는 공사현장의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방문한 안교수와 식사를 하면서 공사가 얼마나 힘드는지... 라미나트, 방수, 타이루, 페인트... 참 많이 힘들다고 하니 하는 말이 자신이 미국에서 목회할 때 건물을 짓는데 힘들었다고 한다. 이것은 유도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 말은 격려가 되지 않았다. 실제 격려가 된 사람은 이곳에 방문하여 간식을 가져오거나 올라올 때 페인트통이나 라미나트박스나 시멘트등 무거운 건축재료를 하나라도 가져 올라오고 내려갈 때는 모아둔 쓰레기를 한 묶음씩 가져가는 사람이 가장 이뻤다. 마음이 슬펐던 여자 한나에게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었는가? 슬픈 마음을 알아주는 하나님일 뿐 아니라 그를 생각하여 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19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주 안에서의 안식은 세상이 주는 안식이 아니라, 참된 안식이다. 마취가 되어서는 안된다. 수술을 하기 위해 마취를 하면 잠들게 된다. 우리가 피곤해서 침대에 들어가게 되면 잠들게 된다. 그러나 깨어날 때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마취를 해서 안식하게 되면 깨어날 때 마취가 풀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회복실에 있게 된다. 그러나 잠을 자는 안식은 일어나면 벌떡이다. 아침에 회복실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는가? 평안도 세상이 주는 평안이 아니요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어야 한다. 음료도 한번 마시고 또 목이 말라 마시는 음료가 아니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음료를 마셔야 하는 것이다. 양식도 참된 양식, 다시 배고프지 않는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지는 가치도 세상의 가치가 아니요 참된 가치를 가져야 한다. 잃어버릴 가치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말에는 얼마나 변장된 것들이 많은가? 세상의 좋은 것은 더 좋은 것의 영원한 적이다.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 좋은 것을 잃으라. lose what is good to get what is better. good is the eternal enemy of better.
V. 한나를 보라.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한나만 그런가? 우리가 모두 그러하다. 문제는 우리의 일상생활이다. 만일 그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거나 슬퍼하게 되면 평생을 슬퍼하면서 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맡기기 위해 인생을 주님께 토탈로 맡겨야 한다. 그 안에서 위로를 얻는다. 참된 위로를 얻는다. 주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데 참된 평강을 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데 참된 기쁨을 주신다. 7월을 마치고 8월을 시작한다. 문제가 또 생길 것이다. 늘 성전을 찾으라. 주님 안에서 답을 발견하라. 늘 주님과 동행하면서 삶을 세워나가며 주님 안에서 인생의 숙제를 풀어나가는 지혜를 갖기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