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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말씀] 구속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함 2019. 11. 10. 이현래 목사
내 신앙의 출발은
‘하나님이 나를 지었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어렸을 때는 모르고 교회를 다녔지만 결정적인 자리는 ‘하나님이 나를 지었구나. 나는 피조물이구나.’라는 거기서 시작했다. 마침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피조물입니다.’로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에게 구속에 대해 말씀 드리고 있다. 이것은 필연적인 사건이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답이 없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남의 일이 아니고 내 일이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는데 그냥 놔둬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을 위해서가 아니고 내 자신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인간 사회는 왜 혼란스러운가? 어디를 가도 혼란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그런가? 그것은 창세기 1장 2절에 나와 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1:2) 다른 것이 아니고 그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가 아직 미완성되어서 그렇다고 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완전하게 창조하셨지만 뒤로 보면 알겠지만 항상 방해꾼이 있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다고 했다. 창세기 2장에 가면 땅은 경작할 사람이 없어서 안개만 올라와있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밀만 뿌렸지만 가라지도 날 수 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면 결국 하나님은 혼돈하고 있고, 인간은 무엇을 찾고 있는지를 알아야 된다. 하나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렇게 찾고 있다. 무엇을 했느냐고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에는 없는 말이다. 세상의 누구도 그 말을 물어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려면 자기가 어디 서 있는 곳이 있어야 한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없기 때문에 “어디 있느냐?”고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무엇을 하느냐는 것밖에 물어볼 수가 없다. 뭘 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정의된다. 그 사람이 나는 교사라고 하면 교사구나 한다. 나는 군이라고 하면 이 사람은 군인이구나 한다. 이렇게 정의가 된다. 이 사람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정의되지 못한다. 묻기를 그렇게 밖에 묻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도 궁금하니까 요즘 뭘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 직업이 무엇이냐고 묻는데 직업이 그 사람이 돼버린다. 이것은 답이 아니다. 이 속에서 좋은 직업도 있고, 나쁜 직업이 있으니까 거기서 우열이 생기게 되고, 불평등이 생기게 된다. 좋은 직장, 나쁜 직장,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이런 것이 생긴. 이것이 다 불평등이고, 혼란이 생기게 된다. 사람은 똑 같은 사람이다.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이것을 묻고 있다. 인간은 자유가 어디에 있느냐? 평등이 어디 있느냐? 또 정의가 어디 있느냐? 이것을 찾고 있다. 세상에 참된 자유가 없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자유라고 하는 것이 나오면 반대가 나오고 문제가 생긴다. 평등을 주장하면 한편으로는 좋은 것 같은데, 또 나쁜 것이 생긴다. 끝이 없다. 우리 사회는 늘 평등과 정의를 요구하고 있다. 과연 평등이 가능한가? 가능하지 않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떻게 평등하겠는가? 똑 같은 시간에 출발을 해도 100m를 10초에 뛰는 사람도 있고, 100m를 20초에 달리는 사람도 있는데, 어떻게 평등하겠는가? 어떤 사람은 10만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100만원을 받는가? 이것이 불평등이다. 왜 그렇게 받는가? 이유가 있다. 많이 버니까 많이 주는 것이다. 기업에서 생각할 때, 이 사람은 100만원을 줄 가치가 있고, 이 사람은 10만원 밖에 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준 것이다. 그것을 불평등이라고 하고, 평등하게 만들려면 강제를 써야 한다. 강압을 써야 한다. 강제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면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 똑같이 받는다면 누가 더 일을 많이 하려고 하겠는가? 아무리 평등하게 하려고 해도 평등이 불가능하다.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주장하는 정의가 다르고,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정의가 다르고, 다 정의가 다르다. 어디서 정의에서 하나가 되겠는가? 자유 안 에서도 하나가 안 되고, 평등 안에서도 하나가 안 되고, 정의 안에서도 하나가 안 된다. 그러니까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디를 가든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인간의 소원은 성취가 불가능한 것을 소원하고 있다. 될 것을 소원하면 되는데, 안 될 것을 소원하고 있다. 안 될 것을 소원하고 있는 것이 저주이다. 시지프스의 신화에 나온 대로 하늘에서 신들이 싸우다가 저주를 했다. 무슨 저주인가? 큰 바위덩어리를 산 밑에서부터 굴려서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라는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올려놓으면 도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평생 그것을 되풀이 하는 것을 저주라고 서양 사람들은 표현했다. 안 될 것을 계속 하려는 것이 저주이다. 예를 들어 물고기가 나는 산에서 살고 싶다고 하면 저주이다. 나는 물에서 태어난 것이 감사하고, 물처럼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행복하다. 나는 왜 물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가? 나도 토끼처럼 산에도 가고 싶다고 하면 불행해진다. 인간은 안 될 것을 계속 찾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은 것이 있구나. 그 정해놓은 것을 찾으면 너무 쉽다. 이미 다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내가 새로 만들 필요가 없다. 토끼가 용궁에 들어가서 간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꾀를 부린 것이 간을 나무에 걸어놓고 다닌다고 하여 빠져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용궁에 사는 놈들이 간을 빼놓고 다니는지 안 빼놓고 다니는지 알겠는가? 그래서 속았다고 한다. 자기도 모르는 것이나 안 될 것은 안 해야 된다. 안 될 것을 모르고 계속 하려고 하면 원망이 생기게 되고, 분노가 생기게 되고, 싸움이 생기게 된다. 혹시라도 누가 원망이 생기거든 그 사람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가 찾지 않을 것을 찾아서 그렇다고 생각하면 아부 쉽게 해결이 된다. 그러면 인생문제가 확 풀리게 된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느냐고 생각하면 끝이 없다. 뭐가 잘 안 되면 다른 것을 찾으면 된다. 사람마다 그 사람에게 딱 맞는 것이 있다. 나는 장사가 잘 될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장사하는 집에서 자랐으니까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장사를 해보니까 아닌 것이다. 나보다 훨씬 능력 있는 사람이 많다. 꼭 돈이 없어서만 장사를 못한 것이 아니다. 나는 돈이 없어서 장사를 못했지만 어떤 사람은 돈이 없어도 장사를 잘한다. 차이가 있다. 장사하는 사람이 다 자기 돈으로 장사하는 것이 아니다. 남의 돈을 가져다가 장사를 한다. 나는 그것이 안 된다. 1000만원을 가지고 가서 2000만원어치를 가져와야 된다. 그래도 경영하기 어렵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20%만 남으면 많이 남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물건을 사오면 재고가 남는다. 다 팔리면 20%가 남으면 많지만 다 팔리는 것이 아니다. 1000만원어치 물건을 사다가 팔면 60%이상 재고가 남는다. 또 그 재고가 없으면 장사가 안 된다. 계속 원금이 잘려 나간다. 그것을 막으려면 외상을 더 많이 가지고 와야 된다. 나는 그 재주가 없어서 유지를 못한다. 다른 사람은 그 재주가 있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전부 능력이다. 요즘 기업들은 2000% 3000%를 이야기한다. 자기 재산에 비해서 빚이 2000%라는 말이다. 상상이 되는가? 내일 돈 빌리러 가보라. 내 아파트가 1억짜리라고 하면 1억을 빌려줄 줄 아는가? 그렇지 않다.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은행에서는 안전하게 담보를 잡는다. 6000만원 정도를 담보로 잡아놓고 돈을 빌려준다. 그런 판에 어떻게 2000% 3000% 빚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을 특혜라거나 비리라고 한다. 그것이 능력이다. 내 재산은 1000만원인데 은행 빚이 2000만원이 있다면 능력이 좋은 사람이다. 은행지점장은 어떻게 하면 담보가 충분한데 돈을 빌려주는가가 고심이다. 그리고 기업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 담보보다 돈을 더 많이 빌려오느냐의 전쟁이다. 그래서 골프 치러 다니고 술 먹고 다닌다. 어떻게 하다가 예를 들어 담보는 1000만원밖에 되지 않는데 1500만원을 대출을 해주었다면 그때부터는 칼자루가 은행에 있는 것이 아니고 기업에게 있다. 그때부터 지점장이 졸졸 따라 다녀야 한다. 밥 사주고 골프장 데리고 다니고 해서 돈을 받아내어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전부 능력이다. 아무나 되는 일이 아니다. 특혜를 준다고 다 되는가? 안 된다. 마을사람에게는 돈을 아무리 부어주어도 살리지 못한다. 될 사람에게는 돈을 주지 않아도 돈을 만들어내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이 사회는 어차피 평등하지 못하다. 이런 일로 싸우는 것은 끝이 없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면, 가인과 아벨이 둘 다 똑같은 마음을 제사를 드리러 갔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갔다는 말을 아주 거룩한 행동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되었는가? 왜 아벨의 제물은 열납이 되는데, 왜 내 제물은 열납이 되지 않느냐고 하여 형이 아우를 죽였다. 이것이 지금도 똑같다. 예수님을 죽일 때도 똑같다. 우리 제사가 있는데 자기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이다. 그냥 군중들이 죽인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장수족이 나온다. 800살 900살을 살은 장수족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은 평등하지 못해서 불만일 것이다. 나는 왜 800살 밖에 못 사는데, 저 놈은 왜 900살을 사는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나도 80세가 넘었으니까 꽤 많이 산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90세가 넘게 사는데 왜 나는 골골하고 있는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90세라도 정정한 사람도 많다. 아무리 평등하게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모두 100살이 되면 오라고 하면 되겠는가? 우리가 장수족을 생각하면 천살은 못 넘겼지만 지긋지긋하게 오래 살았다고 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자기보다 더 오래 산 사람이 있으니까 여기서 행복할 수 없다. 내가 남보다 더 오래 살았다고 행복할 수 없다. 그 다음은 네피림이 나온다. 네피림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 아들들이 누가 더 땅에 있는 딸들을 차지하겠는가? 이 생각 아니겠는가? 거기서도 평등이 없다. 이것이 바벨로 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로 평화가 있을 수 없고, 평등이 있을 수가 없다. 판이 그렇다. 노름판에서 다 돈을 따는가? 누가 돈을 땄으면, 누구는 망한다. 판이 그런 판에서는 방법이 없다. 잘한 사람, 못한 사람, 이렇게 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그것이 싫으면 판을 바꾸어야 한다. 다른 판으로 바꾸어야지 그 판에서는 안 된다. 내가 장사판에 있었더라면 끝없이 열등생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그 판에서 불러내셨다. 다른 판으로 불러내니까 숨이라도 쉬게 되었다. 내가 다른 판으로 왔으니까 지금까지 살고 있지 만일 그 장사판에 있었더라면 지금까지 살 수가 없다. 어느 판에 살고 있는지 판이 아주 중요하다. 아무데서나 나만 잘하면 되지는 그것도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판이 그러면 아무리 잘해도 안 된다.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기서 아무리 잘해도 광야에서 배고픈 것보다 못하다. 왜? 판이 그렇기 때문이다. 노예이다. 종으로 잘 먹는 것, 종으로 세끼 먹는 것과 광야에 나와서 한 끼 먹는 것 중 무엇을 택하겠는가? 종을 택하겠는가? 광야에 나와서 한 끼 먹는 것을 택하겠는가? 사람들은 애굽에 있을 때는 고기국물이라도 먹었는데 여기에 와서 우리를 굶겨 죽이려고 하느냐고 했다. 사람은 끝이 없다. 여기서 하나님과 인간의 문제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에 대한 대답이 안 되면 무엇을 해도 안 된다. 그 말을 자기 분수,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안 된다는 말이다. 어느 판에 가져다놓아도 안 된다. 만일 나도 이 분수를 조금이라도 몰랐으면, 그때 나도 장사를 잘 할 수 있었는데 교활한 놈들은 잘되고 나같이 정직한 사람은 안 되었다고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1000만원을 가지고 도매상에서 물건을 달라고 하면 1200만원어치 달라고 하는 것이 떨린다. 다른 사람들은 2000만원어치도 거뜬히 가지고 오는데 나는 1200만원이 되면 이 예산을 어떻게 얻을까를 생각한다. 그러면 안 된다. 내 능력으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민을 했겠는가? 판이 바꾸어져야 한다. 그 판에서는 안 된다. 그래서 구속을 찾는 것이다. 왜 못 뛰어내린다는 소리를 하는가? 하고 싶어서 하겠는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도저히 나는 이해가 안 됐다.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데, 아무 효과가 안 난다. 다른 사람들은 잘되면 그냥 가면 된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를 감사하고 찬양하고 가면 된다.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나 같이 안 되는 사람도 어떻게 돼야 되지 않겠는가? 너는 안 되니 지옥에 살라고 할 수는 없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같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믿어라. 안 믿으면 지옥가야지 별 수 없다고 할 하나님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이르기를 원하실 것이다. 나는 하나님을 잘 몰라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버지도 자기 자녀가 다 잘되기를 원하지 하나만 잘되기를 원하겠는가? 하물며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너는 점수가 안 되니까 지옥에 가서 연탄불이나 쬐고 있으라고 하시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써있든지 써있지 않든지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지옥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옥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나는 모른다.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이 말이 너무 좋다. 그래야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옥 갈 사람 따로 있고, 천당 갈 사람 따로 있으면 나는 불안하다. 내가 천당에 갈지 지옥에 갈지 모르니까 불안하다. 모든 사람에 구원에 이르기를 원한다고 하면 내가 안심이 된다. 어떻게 하든지 구원을 하시겠구나. 점수를 낮추든지, 수능시험을 쉽게 내든지, 차라리 시험을 없애더라도 나를 살릴 것 같다. 만일 하나님이 대통령이라면 학생들을 다 살리기 위해서 수능시험을 폐지하고 본시험도 폐지하고 다 폐지하고 고등학교 졸업하면 모두 대학에 들어오게 하겠다. 이번에 정책을 또 바꾼다고 하는데, 해방 이후 문교정책만큼 많이 바꾸어진 정책이 없다. 문교부 장관만큼 많이 교체된 장관도 없다. 항상 그 자리에서 뱅뱅 돈다. 새롭게 한다고는 하지만 또 그 자리다. 교육혁명이 일어나야 된다. 우리에게는 구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려면 예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수를 보내서 우리를 구속하게 했으니까 예수를 모르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계속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여러분이 잘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모두 구속이 되면 내가 이 말을 하지 않는다. 할 필요가 없다. 새 언약은 이것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그 날 이후로는 어린아이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새 언약의 요점이다.(렘31:11,34)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새 언약이다. 예수를 보내신 것은 그렇게 하려고 보내신 것인데, 예수님이 와서 죽기까지 했는데 이것이 안 되면 어쩌겠는가? 죽기까지 했는데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안 된다. 피를 흘리고 죽었고, 옆구리를 찌르니 뭐가 어찌 되었다는데, 나한테는 이것이 안 되니 어쩌겠는가? 아마 여러분도 나보다 우등생은 여기 안 올 것이다. 우등생은 올 필요가 없다. 그것이 잘되는 사람은 여기 올 필요가 없다. 나처럼 잘 안되니까 왔을 것이다. 여러분도 다 나 같은 사람이니까 여기 왔겠지 잘되는 사람이면 여기 왜 오겠는가? 삐까번쩍한 교회가 많고, 사람 많은 교회가 많고, 좋은 것 많은 교회가 많은데, 무엇 하려고 여기 오겠는가? 다 된 분들은 가면 된다. 다 되신 분들은 졸업장을 줄 테니까 가시고 안 되는 분들은 남아 있으면 된다. 이것이 구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평등, 자유, 정의, 이것이 구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예수의 죽으심 안에서만 가능하다. 어떻게 죽는가? 하나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었다. 그 안에 있다. 그래서 그 질문을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뛰어내려봐라.”하는 것이다. 나 같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너 뛰어내려보라고 하겠는가? 생각해보라. 나 같은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너 뛰어내려봐라 이렇게 하겠는가? 뛰어내려보라고 하는 놈이 미친놈이지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하겠는가? 그 말을 할 만 하니까 하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는 것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아마 여기도 그런 분은 없는 것 같다. 누구 하나 못 박아 놓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는 이런 자격 있는 사람이 있는가? 나는 그런 자격이 없으니까 아무도 나한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무나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봐라. 누구에게 그런 소리를 하겠는가? 옆에 강도들도 있었다. 옆에 강도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하지 않았다. 할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다 죽지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는가? 안 죽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죽었는가? 뛰어내리지 못하니까 죽었다. 뛰어내려보라고 하는데, 당당하게 뛰어내릴 수 있었으면 왜 죽었겠는가? 일부러 죽었다? 그런 사람도 있는가? 일부로 죽을 사람도 있는가? 내가 그 말을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 왜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다 되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 다른 사람은 그런 소리를 안 했는데, 왜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 이런 질문이 또 있다. 내가 교황인가? 신학자인가? 총회장인가? 대구교회에서만 나에게 목사라고 하지 밖에 나가면 나는 목사도 뭐도 아니다. 여러분이 어쩌다보니 나를 목사라고 한 것이다. C.C.C.에서 부른 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재승 형제에게는 간사라고 하고, 나에게는 목사라고 했다. 그것이 어떻게 어떻게 오다보니까 된 것이지 교회 문 밖에 나가면 나는 목사가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까 무시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까 콧방귀 낀다. 아직은 모르는 사람도 많고, 아는 사람도 있지만 나 같은 사람이 해보았자 무시한다. 그래도 내가 안하면 할 사람이 없다. 내가 조사해 보았다. 2천년간 역사를 다 조사는 못했지만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 유명한 신학자들을 조사해보았다. 그래서 세상이 왜 구속이 안 되었는가를 알게 되었다. 그런 분들이 그러니까 안 되었다. 개신교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칼빈이다. 그는 구속에 대해 굉장히 강조했다. 그런데 어떻게 구속을 받느냐? 어떻게 그 구속을 누리느냐? 이것에 대한 대답이 없다. 그 대답은 ‘성령’이 대답이라고 했다. 이것이 되는 사람은 얼마나 좋겠는가?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이 안 된다. 성령이 하신다고 하니까 막막해진다. 이 사람의 이런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칼 바르트라는 사람이 나왔다. 다른 것은 다 잘 해석을 했는데, 구속 부분에 가서는 애매모호하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답이 없다. 아예 구속이라는 말도 언급을 잘 안했고, 화해라는 말을 했다. 하나님이 죄인들과 화해하려고 내려왔다. 그래서 죽었다. 죽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내가 제일 어려웠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를 위해 죽기까지 했다는데 이것이 안 된다. 무엇 때문에 나를 위해 죽기 까지 했는지를 모르겠고, 내가 그렇게 악질인가? 이것이 하루 이틀 생각한 것이 아니다. 부흥회를 가면 옆에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고 통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환장할 일이다. 옆에서 가슴을 치고 통곡을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으니 얼마나 답답한 일인가. 더군다나 그때 전도사를 한다고 강당에서 설교를 하는 사람인데, 이것을 모르니 어디 가서 물어볼 데도 없고, 상담할 데도 없고 답답했다. 그래서 내가 뛰어내리지 못한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것이 안 되니까, 좋은 말로 해서 안 되니까, 지금 이러는 것이다. 아주 신사적으로 하면 좋겠는데 그것이 안 된다. 뛰어내리지 못했다고 하니까 이제 좀 실감이 난다. 다른 데서는 다 나와는 일치되는 데가 없다. 그런데 거기서만 일치가 된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다 죽는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거기서 나는 일치를 찾을 수 없다. 그냥 일반적인 죽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아들이라고 조롱하는 그 속에서도 뛰어내리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조롱인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뛰어내려봐라. 뛰어내릴 줄 알고 한 말이 아니다. 뛰어내리지 못할 줄 알고 한 말이다. 내가 그분을 만날 자리가 없다. 아무데도 만날 자리가 없다. 오기는 그 길로 쭉 왔다. 돌이켜 보면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얻었다. 그것이 묘하게 성경이 기가 막히게 써있다. 아브라함이 사라와 동침하니 이삭을 얻었다는 말이 없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니까 가인을 낳았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여 또 아벨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 100세에 사라가 이삭을 낳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좌우간 낳았을 것인데, 사라와 동침해서 낳았다는 말이 없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뭐라 하는가? 정혼하고 아직 합방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한다. 이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는 분명하게 그렇게 말했다. 정혼하고 아직 합방하기 전에,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때는 그런 말이 없고, 아브라함이 100세에 와서 내년 이맘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삭을 얻은 것이다. 이삭을 얻었다고 했지 둘이 동침해서 이삭을 낳았다는 말이 없다. 참 이상하다. 좌우지간 동침을 했으니까 아기가 나올 것인데, 동침했다는 말이 없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를 보면 이렇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족보는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헨리의 족보이다. 마리아의 족보이다. 마태복음은 요셉의 족보인데, 누가복음은 요셉의 족보가 아니고 마리아의 족보이다. 전혀 다르다. 그것이 참 이상하다. 성경이 일부러 그렇게 쓴 것 같지는 않은데, 어떻게 이렇게 한 구절도 빼놓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성령이 인도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하나님이 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머릿속으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이 사람들은 아담이 하와와 동침을 해서 낳은 아들들과는 다르다는 그 말이다. 다르다. 다른데서 왔다는 말이다. 결국 하늘로부터 왔다는 말이다. 동침했다는 말이 없으니까 사람의 생각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으로 하면 아기는 반드시 동침을 해야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산부인과 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이 안 된다. 이것을 산부인과 적으로 설명을 하려다가 교단이 갈라지고 했다. 설명이 안 될 일이다. 구속 안에 오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시 또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으로 들어간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 더군다나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구속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바르트는 처음에는 그리스도가 구속자다. Christ is redeemer이라고 했는데, 후기에 가서는 Holly sprit is redeemer이라고 했다. 성령이 구속자라고 하니까 이것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가? 자기는 심오한 뜻을 가지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내가 더욱이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으면 옛날처럼 똑같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구속이 없는 기독교이다. 구속이 없이 건축이 가능한가? 사람들을 모아놓으면 교회되는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고 교회가 되고, 사람이 없다고 교회가 안 되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모인 데는 많다. 촛불만 해도 200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요즘에는 태극기 모은다고 난리라고 한다. 사람을 불러 놓았다고 교회는 아니다.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교회가 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부름 받은 사람은 택함을 받아야 하는데, 그 택함 받은 것이 알고 보면 구속이다. 흙이 많아도 벽돌을 찍어야 집이 되지 흙이 그냥 집이 될 수 있는가? 흙이 많다고 씨를 심지 않았는데도 콩이 나오겠는가? 우리가 교회 불려온 것은 너무나 큰 은혜이다. 세상으로부터 불려 왔다. 무엇을 하려고? 구속하기 위해서 불려왔다. 왜 구속을 해야 되는가? 건축을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되기 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부름 받았다. 우리가 창조된 것은 하나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 창조되었다. 마찬가지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 나라가 되기 위해서 부름 받았다. 이 부름 받음을 헛되이 하면 안 된다. 여기서 탈락해서 가버리면 언제 또 돌아올지 모른다. 불가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한다. 나와 같이 있던 스님에게 지금 70이 넘고 아직 성불을 못하셨으면 어떻게 하실 거냐고 물으니까 인도환생, 죽으면 다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고 했다. 왜냐하면 사람이 되면 다시 출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축생이 되면 몇 억겁을 가야 출가를 할지 모른다. 육도윤회를 해서 돌아와서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니까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불을 하느냐 못하냐는 사람이 된 후다.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그 많은 사람 속에서 부름 받은 것은 굉장한 것이다. 다 바벨로 가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가 부름 받은 것이다. 무엇을 하려고 부름 받았는가? 건축을 위해서 부름 받았다. 바벨로 간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기 위해서 간 것이고,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교회로 건축되기 위해서 온 것이다. 부름 받은 것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이 부름 받은 장소에 이것저것 불평불만 하고 있을 자리가 아니다. 이 부르심이 얼마나 귀중한지 모른다. 모든 것이 구속 안에서만 가능하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예,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러기 전까지 이 세상은 혼란스럽다. 계속해서 혼란스럽다. 어디 있다고 대답하겠는가? 나는 삼성에 있다고 대답해야겠는가? 나는 민주당에 있다고 대답하겠는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여러분은 교회 안에서 뭘 하고 있다고 대답하시겠는가? 너 대구교회 불러 놨는데 뭘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뭘 하고 있다고 대답하겠는가? 한번 속으로라도 이야기해보라. 지금 대구교회에 와서 뭘 하고 있는가? 이것이 심각한 문제이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구속 안에 오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만 딱 남는다. 그 외의 것은 다 떨어져 나가고 없으니까 우리가 평등해진다. 우리가 다 평등해진다. 그래서 다 자유롭다. 그것이 정의로운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른 것이다. 세상에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과 관계가 올바르지 못했다. 그 자체가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인간이 모여서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정의가 나오겠는가? 돼지들이 모여서 우리 깨끗하게 해야 된다고 한다고 돼지막이 깨끗해지겠는가? 요즘에는 개를 자기 애기들처럼 키운다. 애완견이라고 하다가 개격을 존중해준다고 반려견이라고 한다. 애완견은 개를 무시한 것이라고 해서 반려견이라고 한다. 반려견이니까 같이 잠도 자고 별짓을 다한다. 똥 싸는데 가보면 신문지를 갖다 준다. 개 키우는 집에 가면 똥냄새가 얼마나 나는지 모른다. 닦겠지만 냄새가 많이 난다. 그 놈들은 사람처럼 대우하니까 자기가 사람인줄 착각한다. 그렇다고 개가 사람이 되는가? 개가 반려견이면 사람과 평등한가? 요즘에 또 애완견, 반려견도 있고 유기견이 있다. 어쩌다 길을 잃거나 키우다 처리하기 어려우니까 내보내니까 거지같은 개가 된다. 유기견을 데려다가 깨끗하게 만들어 입양을 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개 산업이 돈으로 따지면 엄청나게 크다. 그렇다고 개와 사람이 같겠는가? 아담에게 개를 데려다 놓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2:23)고 했는가? 하나님이 개를 갖다 놓고, 이것의 이름을 지어보라고 하니까 ‘개’라고 했다. 이것이 무엇이냐? 이름을 지으라고 하니까 ‘개’라고 짓지 않았겠는가. 네 갈빗대를 빼서 사람을 만들자, 반려자를 만들자. 그래서 하와가 나온 것이다. 갈빗대서 나와야 반려자가 되지 종자가 다른데 반려자가 되겠는가? 외로우니까 다 그런 짓을 할 것이다. 그것이라도 해서 위로를 받고 살려고 하는 것이다. 구속 안에 있지 않으면 사람과 관계가 되지 않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 개는 정말 충실하다. 장인어른께서 한번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무지한 놈을 봤다는 것이다. 누가 싸움하는 투견을 키웠는데 아마 싸움에 졌는가보다. 우리 살던 집 위에 공원이 있는데, 거기 끌고 가서 개를 둘러 매치면 이놈이 뻗었다가 도망가지 않고 다시 기어서 주인 앞에 와서 엎드려 빌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또 집어다 던지고, 또 집어다 던져서 결국 그 개가 죽더라는 것이다. 간이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그것을 보고 오셔서 무지한 놈을 봤다고 하셨다. 아무리 그러기 전에는 싸워서 이기라고 자기는 못 먹어도 개는 먹이고 했을 것인데, 싸움에 졌다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인간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더 잔인하다. 6.25 때 서울역 광장에서 인민재판을 했다. 무슨 명이 내려졌는가? 타살형이 내려졌다. 총으로 한방 쏘면 신사적이다. 몽둥이를 들고 제자들이 교수를 때려서 죽이는 것이다. 옛날에 김*봉씨라고 작가도 되고 문학가도 되고 교수도 되는 분인데, 그렇게 맞아서 8일 동안을 죽은 상태로 있다가 어떻게 해서 깨어났다. 그것을 말하면서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자기는 죽어보니까 천당도 지옥도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문학가이니까 수필인가 뭔가를 쓴 것을 보았다. 사람이 더 잔인하다. 6.25때 그런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 얼굴 껍데기를 벗겨놓은 일도 있었다. 사람이 잔인해지면 말할 수 없이 잔인하다.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사람은 누구의 형상이 되든지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안 되면 마귀의 형상이 되어도 되어야 한다. 무서운 세상이다. 구속이 없으면 사람이 언제 변할지 모른 것이다. 어느 순간에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자기 좋을 대로 얼굴이 변한다. 자기가 싫으면 찡그려지고 분노하게 되고, 자기가 좋으면 하하하 하게 되는 것이다. 형상은 어차피 형상이니까 사람은 별 형상이 다 될 수 있다. 여러분은 웃을 때도 주의하고, 분노할 때도 주의하기 바란다. 웃을 때는 좋은데 분노한 얼굴을 사진 찍어 놓으면 다음에 보면 괴물로 보인다. 화가 날 때 스마트폰으로 찍어놓고, 다음 기회에 어떤 모습인지 보기를 바란다. 그것은 괴물이지 인간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은 모르고 한다. 어차피 형상이니까 할 수 없다. 어떤 신학자는 창조는 연합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 칼빈이 그런 말을 했다. 신학자들 중에 연합의 세계가 나왔데 했는데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의로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속으로 성화가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거룩한 사람이 되려면 공짜로는 안 된다. 내가 노력을 해야 한다.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지경까지인데, 그것까지는 안 하고 앞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는 사람과 합해지면 완전해진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아서 그 힘을 가지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게 되면 믿음으로 의롭다함도 완성되는 것이다. 그 연합을 칼빈이 말했다. 우리가 말하는 연합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와 연합하면 모든 사람과 연합하고, 내가 예수와 연합하면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연합은 이런 연합이다. 교리적 연합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와 연합할 사람을 찾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찾는 것은 자기와 연합하기 위해서 찾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몸이 없다. 육체가 없다. 우리는 육체가 좋기도 하지만 괴로운 것이다. 하나님은 괴롭든지 안 괴롭든지 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연합하려면 육체가 있어야 된다. 그래서 우리를 찾고 있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 찾고 있는 아니다. 우리 육체가 얼마나 소중하냐는 것이다. 오늘도 내 육체가 건강했더라면 교회에 가서 형제들을 볼 것인데, 육체가 이 모양이 되니까 형제자매들을 보고 싶어도 현장에서 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신 것은 자기와 연합하려고 찾는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연합이 되는가? 안 된다. 어떤 자리에 가야 연합이 된다.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과 연합이 가능하다.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기독교인이라서가 아니고, 우리가 말하는 ‘구속 안에서’라는 말이다. 사람이 만든 사람이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그 사람과만 연합이 가능하다. 우리가 구속 안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과 연합이 불가능하고, 하나님과 연합이 불가능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연합을 필요로 한다. 오늘 우리가 찾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찾는 것이다. 우리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있게 되면 우리는 그냥 생명으로 연합이 된다. 연합하자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취미로 연합된 것도 아니고, 기호로 연합된 것이 아니다. 생명으로 연합된 것이다. 닭은 닭끼리, 오리는 오리끼리, 끼리끼리 연합이 된다. 그것은 생명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리와 닭이 육지에서 키우니까 같은지 알았다. 그런데 같은 것이 아니고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오리는 원래 물에서 사는 놈이고 고기를 먹고 사는 놈이므로 물고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한다. 닭과 조금 다른 것이 아니고, 아예 차원이 다르다고 한다. 계란과 오리알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계란은 영양가가 좋지만 오리알은 계란이 별로 없다. 왜? 생선이 먹고 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식품 전공한 사람에게 물어보니까 계란과 오리알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한다. 사촌간이나 되는지 알았는데, 서로는 완전히 다르다고 한다. 오리고기를 먹을 때는 생선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먹어야 한다. 그래서 옛날에도 중풍 걸린 사람들이 오리피를 먹은 이유가 그것이다. 닭의 피를 먹으면 중풍에 걸리겠지만 오리피를 먹으면 중풍이 좋아진다고 한다. 유유상종이라고 생명대로 연합이 된다. 불평꾼들은 불평꾼들끼리 연합이 된다. 이상하고 묘하다. 불평꾼들은 불평꾼들이 있어야 신이 난다. 반면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긍정적인 사람들끼리 있어야 힘이 난다. 내가 C.C.C.에 가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그전에 나도 부정적인 것이 많았다. 사람은 비판적이라야 이성적인 것 같다. 비판적인 사람은 정직하다, 샤프하다, 듬직하다, 멋있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긍정적인 사람을 보고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거기에 가서 배웠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고,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잘 된 사람은 절대로 없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보니까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 주변을 보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뭘 해도 절대로 안 된다. 직장생활도 제대로 안 되고, 장사를 해도 제대로 안 되고, 뭘 해도 안 된다. 비판정신이 세상에서는 굉장히 고상한 정신이지만 그것은 고상한 것이 아니고 망조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집안에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 긍정적인 사람이 성공한다. 부정적인 사람은 아주 멋있게 보이지만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성경이 “시체를 만지지 말아라. 죽음을 가까이 하지 말아라.”고 말하고 있다. 왜 그렇게 말했겠는가? 죽음을 가까이 하면 죽음이 나를 더럽힌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장이 죽음을 가까이 했을 때는 7일 동안을 근신했다. 송장이 썩어서 냄새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이 부정적이라는 말이다. 형벌 가운데 가장 극악한 것이 산 자를 죽은 자와 함께 묶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산자는 죽은 자와 함께 썩어야 하기 때문에 가장 극악한 형벌이고, 십자가 보다 더 지독한 형벌인 것이다. 죽은 자와 함께 묶어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이렇게 되면 자기도 죽게 된다. 잘 들어 두기 바란다. 세상을 잘 살려면 잘 들어두어야 한다. 시체와 자기를 묶어두면 자기도 결국에는 자기도 시체가 된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것과 내가 묶여지면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버린다. 어찌하든지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최소한도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람은 어디 가도 긍정적이다. 교회 안에서도 잘된 사람은 모두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부정적인 사람치고 잘 사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세상에서도 잘 살려면 긍정적이어야 하고, 교회 안에서는 물론 구속 안에 있으면 다 긍정적이다. 거기에는 부정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구속 안에 오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한 방에 해결된다. 이렇게 저렇게 하고가 아니고, 한방에 다 해결된다. 인간사회는 왜 이러냐? 이것이 문제냐? 저것이 문제냐? 이런 것을 해결하려고 하면 끝도 없다. 그런데 한 가지만 해결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속이 되면 뭐합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다. 구속이 되어보지도 않고 왜 구속을 묻느냐는 것이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 먹으라고 하면 밥을 먹으면 됐지 밥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배고픈 사람이 먼저 먹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3)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그것은 가난하니까 무조건 받아놓고 봐야하니까 그런 것이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것을 받아서 뭐하느냐고 묻는다. 그런 사람에게는 돈다발을 주어도 이걸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까 주고 싶은 생각이 드느냐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주었던 것도 뺏고 싶을 것이다. 내가 누구에게 돈을 100만원을 주었더니 나에게 뭐하러 주는 것이냐, 왜 주는 거냐고 하면 주었던 마음이 사라진다. 돈 버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어렵게 번 돈을 나에게 주는 것이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왜 줄까 하고 의심부터 하면 다음에 주고 싶겠는가. 그래서 가난한 자가 천국이라는 말이 성경에 있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 복이 다 그런 복이다. “심령(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했다. 배부른 사람에게는 천국이 없다. 아예 없다. 정말 공평하다. 배부른 사람이 천국까지 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불공평하다. 배부른 사람은 천국이 없고, 배고픈 사람에게 천국이 있으니까 이것이 공평한 것이다. 나같이 안 되는 사람에게 뭐가 되면 공평한 것이다. 하나님이 공평하신 것이다. 내가 믿음이 좋았으면 이러고 있겠는가? 나는 믿어지지 않으니까 문제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공평하게 하시느라고 나 같이 믿음 없는 사람에게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을 주었다. 이것은 믿고 안 믿고 할 것이 없다. 성령에게 미루고 안 미루고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성령이 어떻게 해주시면 되고, 안 해주시면 안 되는 그런 문제인 것 같으면 나는 안 된다. 그러려면 사역을 왜 하는가? 사역이라는 것은 계시를 해석하는 것이다. 왜 계시를 해석하는가? 알아듣기 쉽게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들을 수 있게끔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사역자가 필요한 것이다. 성령이 하신다고 하면 무엇 하러 사역자가 필요하겠는가? 그렇다면 성령이 다 하시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 하시면 되지 아들은 무엇 하러 보내겠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신비이고 비밀이다. 하지만 계속 사역을 통해서 내려와서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어야 만민이 구원을 받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누구는 천당 가고 누구는 지옥가게 된다. 믿음 좋은 사람은 가고, 믿음 안 좋은 사람은 못 가게 되는 것이 되고 만다.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되고, 성령을 못 받은 사람은 안 된다고 하면 되겠는가? 안 된다. 지옥에 간 사람들이 가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편하겠는가? 지옥에 있는 사람도 올라와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죽어서 장사되어진 동안 갔다 온 곳이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갔다 왔다. 옥에 있는 영이라는 말은 전에 노아의 날에 방주를 예비할 때 불순종한 영들이다. 홍수가 날 것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어도 듣지 않았던 놈들이다. 거기를 찾아가려고 연옥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이것을 천주교에서는 연옥이라고 한다. 우리의 구속이 밝아져야 연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구속을 전할 것이다. 나는 이것이 너무 밝아졌다. 아무도 그렇지 않은 사람이 없도록 밝아져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후퇴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다른 이점이 있었겠지만 중요한 목표는 구속이다. 다른 것도 있지만 죽으심의 중요한 목표는 구속이다. 인간사회는 왜 이런가? 나는 왜 이런가? 모든 문제가 하나하나 조목조목 해결되는 것이 아니고, 원인이 해결되면 다 해결되는 것이다. 근본을 알고 약을 제대로 쓰면 한 가지 약으로 병이 낫아 버린다. 이런 사람이 명의다. 약을 써보니까 A라는 약을 쓰다보면 부작용이 생긴다. 그러면 B라는 약을 먹어야 한다. 이것을 먹다보면 또 부작용이 생긴다. 그래서 C라는 약을 또 먹어야 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병치레를 한 사람은 약이 한 주먹씩 된다. 계속 약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누가 잘 치료하는 사람인가? 약이 점점 줄어지게 하는 사람이 잘 치료하는 사람이다. 약이 계속 늘어나는 사람은 안 된다. 옛날에 김*동 형제 어머니가 그랬다. 어디에 갔더니 약이 한 주먹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를 갔더니 약을 세 개만 주었다고 한다. 내가 직접 들은 말이다. 약을 많이 주는 사람이 명의가 아니고, 약을 적게 주고 치료하는 사람이 명의이다. 이렇게 하려면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예수가 나의 구속자가 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우리가 예수의 구속 안에 있으면 교회문제이고 사회문제이고 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치료해도 안 된다. 치료를 해보니까 이것을 치료하니까 저것에 부작용이 생기고, 저것을 치료하니까 이것이 부작용이 생기니까 어느 세월에 치료가 되겠는가? 그냥 시간만 연장하고 있는 것뿐이지 치료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치료되는 병이 아니다. 치료될 수 있는 병이면 약간 고생하고 끝나면 된다. 이것은 치료되는 병이 아니까 때문에 죽을 때까지 그냥 이렇게 가는 것이다. 우리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되고, 인생은 한방에 해결해야 된다. 약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한 방에 해결하는 약이 있다. 내 몸을 치료하는 것은 안 되지만 인생을 해결하는 것은 한 방에 된다. 복잡했던 머리가 ‘나는 피조물이구나.’ 이것 하나를 알고 나니까 싹 정리가 되었다. 피조물이라는 말이 이론이 아니다. 내 위에 누가 있구나. 나는 내일도 모르는 존재이구나. 모레도 글피도 아시는 분이 있구나. 이러니까 싸악 날아갔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을 알고 나니까 바벨로 가던 생각이 싸악 없어졌다. 나도 바벨로 가고 있었다. 전도도 하면서 바벨로 가고, 목사를 하면서도 바벨로 간다. 뭣 좀 커져보려고, 뭣 좀 잘 되어보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벨로 가는 길이다. 나도 그 길에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한 줄 아는가? 어떤 분이 충주에 와서 연합집회를 했다. C.C.C.에서 엑스플로 74운동을 할 때, 나는 그때 간사였다. 3천명이 모인데서 그분이 설교를 하니까 나는 그분에 대해 사회를 했다. 3천명 군중 앞에서 그때 이분이 내가 제일로 부러운 목사님이라고 말했다. 자기는 하도 유명하니까 나 같은 사람을 다 잊어먹고 나를 모를 것이다. 나는 그때 그런 비참한 말을 했다. 가장 존경하고 가장 부러워하는 목사라고 말했다. 그렇게 헤맸던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불렀다는 이 사실을 알고 나서 이것이 싸악 사라져버렸다. 약만 제대로 쓰면 한방에 인생문제는 해결된다. 이러고저러고 할 것이 없다 예수님 같은 분도 다 벗겨 놓으니까 그것만 남는데 우리가 남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 자리에 가면 다 하나다. 아무것도 다른 것이 없다. 잘살고 못살고 이런 것도 없고, 잘되고 못되고 이런 것도 없다. 다 벗어버리고 나면 다 똑같다. 목욕탕에 가면 다 똑같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군인들끼리는 목욕탕에 가서도 소장님, 준장님, 이래야 된다. 다 벗고도 그렇다. 그런데 구속 안에 들어가면 대장이고 소장이고 준장이고 없다. 다 똑 같은 인간이다. 얼마나 평등한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그 자리가 얼마나 복된 자리인가! 세상에서 찾고 찾아도 못 찾던 그것이 그 안에 다 있다. 자유와 평등과 정의가 다 있다. 경북대학교에 가면 큰 비석이 있다. 거기에 맨 위에 자유, 평등, 정직이 있다. 그때 한창 데모해서 한 글자가 빠졌다. 그 말을 보고 데모할까봐 그 말만 빼고 세 가지를 적어 놓았다.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다. 인간사회에서는 그것이 실현이 불가능하다. “네가 어디 있느냐?” 그 자리에서만 가능하다. 교회생활을 하면서 성질이 맞는 사람도 있고, 안 맞는 사람도 있다. 취향이 같은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또 실수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사람이 사는 데인데 완전한 사람이 와 있는가? 구속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가 누구를 보고 뭐라고 하겠는가? 우리 말 속담이 재미있다. 똥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나무란다고, 내가 누구를 비판하고 있으면 그런 식이다. 나는 똥이 묻어 있으면서 재 묻은 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판하려고 해도 못하겠다. 내가 똥이 묻었는데 혹시 똥 묻었다고 지적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래서 못하겠다. 다음에 또 나도 잘못하면 어쩌겠는가? 내가 용서해야지 다음에 나도 용서하지, 내가 용서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이 나를 용서하겠는가? 나는 넓게 포석을 하는 것이다. 다음에 나도 심판을 받지 않으려면 그래야 내가 보존이 된다. 그 사람을 심판하면 나중에 나도 심판을 받을 것인데, 왜 그렇게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뭐를 하려다고 보면 남이 또 나한테 이렇게 하겠지 하고 그렇게 못한다. 내가 싸울 힘이 있으면 모르겠는데 싸울 힘이 없으니까 그렇게 못한다. 그것이 여러분이 볼 때는 굉장한 도덕심이 있는 것 같이 보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살려면 좀 그렇게 살기를 바란다. 기껏 남을 욕해 놓고 보면 다음에 그 욕이 나에게 다 돌아온다. 남을 다 무시해 놓으면 다음에 내가 또 무시당한다. 구속 안에 오기 전에는 우리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구속의 길을 이야기하느라고 교회에서 이런 것은 한 번도 말하지 못했다. 그랬더니 좀 실수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그것도 구속의 길로 가기 위해서 그런 것이니까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다 과정 중에 있다. 우리가 다 완성된 것이 아니고, 과정 중에 있으니까 뒤에 오는 사람들도 좀 이해하고, 앞에 가는 사람들도 뒤에 오는 사람들을 좀 이해하고, 또 뒤에 오는 사람들은 앞에 가는 사람들을 보고 가야지 앞에 간다면서 그 모양이냐고 하면 안 된다. 이것이 참 어려운 것이다. 언제 그것이 굉장하다고 보여지겠는가? 그런 사람들 눈에는 그것이 안 보인다. 그래서 앞에 간다는 것 때문에 괜히 욕만 먹고 있다. 앞에 가는 것들이 왜 저 모양이냐고 하고 있으면 그것이 되겠는가? 그러면 뒤에 오는 것들이 왜 저 모양이냐, 이럴 것이 아니겠는가? 피장파장이다. 조금이라도 나보다 잘하는 것이 있으면 본받고, 조금이라도 나보다 못한 것이 있으면 나는 그렇게 안 하면 된다. 삼인행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100% 다 잘할 수는 없으니까 10%만 잘해도 내가 본받을 것은 본받아야 한다. 조금만 잘해도 나는 그것을 사고 싶다. 왜? 나한테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 도움이 된다. 10%밖에 안 되는 사람도 도움이 되고, 100%인 사람은 물론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100%가 있겠는가? 구속 안에서 만날 때만 우리가 100%다. 거기서는 우리가 다 저절로 서로가 100%가 된다. 거기는 점수가 없는 곳이다. 아버지 앞에 가면 아들들은 점수가 없어야 된다.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점수를 매기면 그 아들들은 다 망치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이놈은 서울대학교 간 놈, 이놈은 고려대학교 간 놈, 이렇게 다 갈라놓으면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이 집에 오고 싶겠는가? 아버지에게 가고 싶겠는가? 점수 매기고 앉아 있는 아버지에게 누가 가고 싶겠는가? 세상은 다 점수를 매기니까 점수 안 매기는 아버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집에 들어가면 아버지는 나를 점수를 매기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살 구멍이 생기고, 숨 쉴 데가 생긴다. 아이들이 왜 가출을 하는가? 숨 쉴 데가 없으니까 가출을 한다. 구속이 없으면 사람이라는 것이 잘하려고 하는데 안 된다. 더 잘하려고 하면 더 안 된다. 연합하려고 하면 더 분열된다. 참 이상하다.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라는 것이 있었다. 세계교회협의회를 결성한다고 나이로비에서 모였는데, 거기 갔다 와서 둘로 갈라졌다. 연합하려고 하면 갈라져버린다. 차라리 멍청한 놈들만 있으면 낫지 똑똑한 놈들만 있으면 더 갈라지고 더 갈라진다. 계속 갈라진다. 그것이 그 사람 잘못이 아니고, 구속 안에 없기 때문이다. 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이 그 판이니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 버린다. 누가 그렇게 하고 싶겠는가? 장로교과 둘로 갈라질 때 에큐메니칼 때문에 갈라졌다. 그전까지는 둘이 아니었다. 우리는 주의하자. 우리의 목표는 오직 구속에 있지 다른데 있지 않다고, 기독교의 모든 해답도 거기서 오지 다른데서는 해답이 없다. 기독교라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불교 방송을 들으니까 절절히 수양이다. 수양하는 사람과 수양도 하지 않고 맨날 ‘주여! 주여!’ 하는 사람들과 같겠는가? ‘주여! 주여!’만 하면 뭐가 되는 줄 알고 하는 것은 억지 쓰는 것이고 비이성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새벽 예불을 할 때도 낱낱이 조목조목 외우면서 절을 하는 것이다. 나 이러이러한 일을 하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자기한테 스스로 말하는 것이다. 매일 그렇게 하는 사람과 ‘주여~!’하는 사람과 같겠는가? 목 터지게 부른다고 일이 되겠는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을 알아야지 무슨 방법을 쓰면 안 된다. 무슨 방법으로 우리가 될 방법이 없다. 생명의 일치라야 되고 생명의 연합이라야 가능하다.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지금 우주가 지탱되는 것도 생명의 연합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지탱하고 있다. 다 쪼개져 있는데, 그래도 남자 여자는 연합이 가능하다. 이혼한 사람도 있고 많이 있지만 그래도 하여간 남자는 여자 없이 못 살고, 여자는 남자 없이 못사는 이 불가분의 연합체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만약 이것이 둘로 갈라지면 인구가 없어져버린다. 유럽에서는 벌써 결혼하기 전에 1~2년 살아보고 산다고 한다. 1~2년 살아보고 결혼한다고 한다. 결혼을 안 한다. 내가 아는 사람도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는데 둘이 살고 있다. 우리 같으면 동거생활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부모들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살아보고 그 다음에 괜찮으면 결혼하라는 것이다. 참 편리하다. 그런데 그것이라도 남아 있으니 인간이 남아있지 그것이라도 없어지면 인간은 다 없어진다. 애기 낳지 말자고 하면 인간이 없어지고 만다. 인간 없는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있어도 인간 없는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신학자가 있는데, 그 말도 맞긴 맞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없으면 자기가 창조를 해야 한다. 그것이 구속이다. 자기와 연합할 인간이 없으니까 부득이 구속을 해야 한다. 그래야 자기가 연합이 가능하다. 그 신학자가 말한 대로 인간이 없는 하나님은 없다는 것인데, 없다가 아니고 하나님은 또 구속을 한다. 사람을 찾는다. 재창조다. 구속은 재창조다. 여기서 나간 것이 부활이다. 부활이 다른 것이 아니다. 부활을 따로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부활은 교회 안에서 발생한다고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구속으로 산 사람들이 새 생명이고 부활이라는 말이다. 새 생명의 삶이 곧 부활의 삶이다. 구속이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그렇게 알면 된다. 그러므로 내가 이 말을 안 할 수 없다. 나도 그렇고 그런데 말을 할 때마다 너무 좋다. 또 새로운 것이 나온다. 자꾸 새로운 것이 발견된다. 여러분도 해보면 매일 나처럼 안하고 못 견딘다. 안 해보니까 그렇다. 고기는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먹어봐야 안다. 안 먹어 보고 모른다. 구속 받으면 뭘 하는가? 그 다음에 사람이 되어야지 인간이 되어야지 이러고 있는 사람도 있다. 지난번에 누가 그 질문을 하길래 점잖은 자리에서 그 말을 했더니 삐져서 몇 번 안 나오더니 다시 나온다. 이제 좀 알겠다고 하고 나온다. 그 다음에 뭘 하느냐고 물으면 안 된다. 무슨 여유가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뭐 할 것이냐고 하는데 다음에 뭐가 안 되면 어떤가? 나는 그렇다. 구속으로 끝난다고 해도 그것을 외쳐야 되겠다. 그것이 참 사람이 되는 것이니까 부활을 안 해도 해야 한다. 부활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참 사람의 길을 가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부활은 새 생명의 삶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좋은 말이긴 하지만 안 되더라도 나는 사람은 사람이 되고 봐야 된다는 것이다. 나는 사람이 되고 봐야 한다. 안되어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