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이(考異)사마광(司馬光)이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지을 때에 뭇 책을 참고하여 그 같고 다른 점을 평하고 취사에 뜻을 두어 《고이(考異)》 30권을 지었으니, 전실(典實)하여 법다운 것만 뽑았다. 이것이 역사를 쓰는 자의 절실한 법이 되기에 이제 그를 모방하여 《동사고이(東史考異)》를 짓는다.
중국 역사에서 삼국(三國)의 사실을 잘못 논한 것
중국 사람들이 외이(外夷)의 사실을 기록함에 있어 혹은 본국의 속담에 전해지는 것을 따르기도 하고, 혹은 멀리서 잘못 들은 억설을 인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어긋나는 것이 많다. 《후한서(後漢書)》에는 동명왕(東明王)을 부여왕(扶餘王)으로 삼았고, 《북사(北史)》에는 동명왕을 백제의 시조로 삼았으니 사실이 위(우태(優台)ㆍ구태(仇台)의 분별 조를 가리킨다)에 보이며, 또 주몽(朱蒙)이 죽고 아들 여율(如栗)이 즉위하였다 하니 이 말 역시 위(유리(類利)가 도망쳐 돌아오다의 조를 가리킨다)에 보인다. 또,
“공손도(公孫度)가 해동(海東)에 웅거할 때 백고(伯固) 신대왕(新大王)가 그와 통호(通好)하였는데, 백고가 죽고 아들 이이모(伊夷謨) 고국천왕(故國川王)가 즉위하였다. 이이모는 백고 시대부터 이미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하고 또 도망해온 오랑캐 5백여 호(戶)를 받아들였는데, 건안(建安) 연간에 공손강(公孫康)이 군사를 일으켜 출격하여 그 나라를 격파하고 읍과 부락을 불질렀으며, 항호(降胡 도망해온 오랑캐를 가리킨다)가 또한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그 후에 이이모가 다시 현도(玄菟)를 공격해오자 현도는 요동과 합세하여 크게 격파하였는데, 이이모가 죽고 아들 위궁(位宮) 산상왕(山上王)이 즉위하였다.”
하고, 또,
“북제(北齊) 천보(天保 문선제(文宣帝)의 연호) 3년(552)에 문선제(文宣帝)가 영주(營州)에 이르러 최류(崔柳)를 고구려(高句麗)에 사신 보내어 위말(魏末)의 유민들을 구제하게 하면서 최류에게 조칙하기를 ‘만약 따르지 않거든 편리한 대로 처리하라.’ 하였는데, 최류가 고구려에 이르러 허락을 받지 못하게 되자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며 주먹으로 성(成) 양원왕(陽原王) 을 쳐서 어상(御床) 밑에 떨어지게 하였다. 성의 좌우는 죽은 듯이 숨을 죽이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며 끝내 복종함으로써 최류가 5천 호(戶)로 복명(復命)하였다.”
하였다. 이 조항은 중국에서 과장한 말이라 아마도 본국에서 숨겨 뺀 것인 듯하다. 《남사(南史)》에는,
“진(晉) 나라 시대에 백제가 요서(遼西)를 점유하였다.”
하고, 또,
“백제왕 모도(牟都)가 죽었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오류는 모두 위(우태(優台)ㆍ구태(仇台)의 분별, 《남사(南史)》에 말한 백제왕(百濟王) 모도(牟都)ㆍ모대(牟大) 조를 가리킨다)에 보인다. 《북사(北史)》에는,
“진한(辰韓) 초기에는 여섯 나라였던 것이 점차 열두 나라로 분열되었으니, 신라는 그 중 하나다. 혹은 위(魏) 나라 장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쳤으므로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가, 뒤에 다시 귀국하여 보니 남아 있던 사람들이 신라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 임금은 본래 백제 사람으로 바다를 건너 도망하여 신라로 들어가 드디어 그 나라의 임금이 되었다. 처음에는 백제의 부용(附庸)이 된 처지라 백제가 고구려를 정벌함에 그 융역(戎役)을 견디지 못하더니, 뒤에 서로 거느려 돌아가서 드디어 강국을 이루었고 이어 백제를 습격한 다음에 가라국(迦羅國)의 부용이 되었다.”
하였다. 또 《후한서(後漢書)》 및 《통전(通典)》에는,
“마한(馬韓)의 해도(海島)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는데, 그 인종이 단소하여 한(韓)과 같지 아니하며, 모두 머리를 깎아서 선비(鮮卑)와 같다. 옷은 가죽을 입되 상의만 있고 하의는 없어 나체와 같으며, 소ㆍ돼지를 잘 치고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시(韓市)에서 무역한다.”
하였다. 【안】 이는 왜(倭)에 속한 듯하다. 《당서(唐書)》에는,
“장인(長人)이란 길이 3장(丈)이 되는 인류로서 톱날처럼 생긴 어금니[牙]에 꼬부라진 손톱이며, 검은 털이 몸을 덮고 화식(火食)을 아니하며 금수(禽獸)를 잡아먹는가 하면, 혹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그리고 부인(婦人)들을 얻어서 의복을 만들어 입는데, 그 나라가 산(山)을 연하여 수천 리가 되고 협애하다. 그리하여 철관(鐵關)으로 관문을 이름하였는데, 신라에서 항상 노사(弩士) 수천 명을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다.”
하였다. 이와 같은 등등의 말은 먼 나라에서 잘못 전해 들은 것이라, 특별히 이에 기록하여 중국 역사의 잘못을 밝힌다. 그러나 이는 큰 일을 든 것이요, 그 소소하게 잘못된 것은 번거로이 기록하지 않는다.
몽고는 명 나라 때 달단(韃靼)이라 일컬었다. 그 지역은 북으로 사막 끝까지인데 38부(部)로 나뉘었고, 다 해마다 조공(朝貢)을 바치므로 장사와 나그네가 길에 가득하다. 남자는 황녀(皇女)에게 장가들고 여자는 친왕(親王)에게 시집가서 금옥 인장(印章)을 찬 자가 전후로 잇달았다. 그 사람들은 다 무례하고 사납기가 여러 오랑캐 가운데 더욱 심하다.
풍속이 온돌 만들기를 잘하나 거처에는 궁실이 없다. 부락이 강성하여 예부터 제어하기 어려웠다. 다만 공경히 부처를 받들어 삼가서 죽고 사는 것을 그로써 하므로 청인이 그 풍속을 따라서 달랜다. 그래서 그들의 승려들을 불러다가 여러 원당(願堂) 및 백탑(白塔)ㆍ오탑(五塔) 등의 절에 나누어 거처하게 하여 매우 후히 대접한다.
조정에 벼슬하는 자는 흔히 높은 품질(品秩)로 총애 받는다. 또 황제가 황색 옷을 입는데 몽고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다 황색 옷 입는 것을 허락한다. 비록 그들의 숭상하는 풍속이 그렇다고는 하나 황제와 대등하게 되는 것이다. 황제가 한여름이면 열하(熱河)에 머물면서 ‘피서산장(避暑山莊)’이라 일컬으나, 그 실은 스스로 방수(防守)하는 것이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이라고도 이름 한다. 그 나라는 흑룡강(黑龍江)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중국과 교통하여 상인이 해마다 온다. 관소는 옥하관(玉河館)의 곁에 있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 높은 코에 천성이 사나워서 흔히 거리에서 사람을 죽인다. 그래서 건륭(乾隆) 때 그중의 몇 사람을 찢어 죽이게 하였더니, 그 뒤부터 자못 두려워하여 규칙을 지킨다고 한다. 청인은 그들을 천하게 여겨 개돼지로 대우한다. 그 나라에서 나는 석경(石鏡)이 가장 좋다.
개는 그 종류가 많은데, 아라사(鄂羅斯)에서 기른 놈은 뛰어나게 크고 사람을 무는 것이 마치 범과 같다. 아마 이것은 ‘여오(旅獒)’라고 하는 종류의 개인 모양이다. 몽고에서 나오는 개도 역시 억세고 사나워서 길들이기가 어렵다. 기르는 사람들은 쇠사슬로써 목을 걸어 매어두고 대문을 지키게 한다. 그 생긴 모양은 보통 개와 같은데 몸집이 크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호백(胡伯)’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것의 별종이다. 오직 백탑보(白塔堡)에서만 난다는데, 영리하고 날래어 사냥을 잘하는 놈은 값이 은으로 10여 냥을 한다고 한다. 그리고 ‘발발(勃勃)’이라고 하는 놈은 비록 작기가 고양이만 하나 교활하고 영리해서 사람의 뜻을 잘 안다. 그러므로 일반 민가에서는 고양이처럼 가까이 하여 기르는데, 낯선 사람을 보면 수염을 치켜 세우고 꼬리를 흔들며 으르렁거리면서 짖는데 사납기가 몽고개보다 무섭다. 북경의 기이한 동물로서는 코끼리와 범이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조참(朝叅)’과 ‘호권(虎圈)’의 기사 중에 실려 있다. 그 다음은 낙타[槖駝]인데, 몽고산이다. 키는 한 길 반이나 되고 황갈색에 목은 길고 허리는 가늘며, 머리는 양같고 발굽은 소같다. 등살은 그대로 안장이 되어 있고 귀는 드리워져 있으며, 누울 때는 반드시 발을 구부려 배가 땅에 닿지 않도록 한다. 바람이 불 것도 미리 알고 샘물이 솟는 곳도 미리 안다. 몽고인들이 많이 타고 다니는데, 매양 말을 타고 그 밑을 지나면서 바라보면 마치 지붕 위에 사람이 앉은 것처럼 보인다. 다만 너무 흔들리고 출렁거려 익숙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잘 가는 놈은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호인(胡人)이나 한인(漢人)들이 노새나 말을 길러서는 수레를 끌고 타고 다니는 데 쓰지만 오직 낙타만은 우리 나라 사람들이 소와 말의 등에 짐을 싣듯이 등에 짐을 싣고 다닌다. 물건을 실을 때는 재빨리 다리를 굽혀 이것을 받는다. 사람을 보면 누런 물을 내뿜는데, 냄새가 몹시 나서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으로 사막에 있는데, 천하의 막강한 나라이다. 48부(部)의 왕이 해마다 들어와 조공(朝貢)한다. 나라 풍속이 귀천이 없이 다 누런 옷을 입는데 황제의 의복 빛깔과 같다. 건륭(乾隆)이 황화요(黃花謠)를 듣고부터는 더욱 견제하고 있다 한다. 회자(回子)는 회회국(回回國)이라고도 하며, 바다 가운데에 있어 다섯 달이 걸려야 비로소 중국에 이른다. 강희(康煕) 때에 명령을 거역하였으므로 드디어 군사를 풀어 토벌하여 그 왕을 사로잡아 서울로 데려오자 그 딸을 후궁으로 바치었다. 그곳 사람들은 검은 얼굴에 눈이 깊고 구레나룻이 더부룩하다. 옷과 모자는 청인과 같고, 여자는 알롱달롱한 옷을 입으며 머리는 땋아서 늘어뜨린다. 도광(道光) 때에 또 반역하였으므로 양우춘(楊遇春)을 보내어 토벌, 평정하였다. 악라사(鄂羅斯)는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이라고도 하며 흑룡강(黑龍江)의 북쪽에 있으니, 중국에서 2만여 리나 떨어져 있다. 10년에 한 번 와서 관에 머무르며 교역(交易)을 할 뿐, 조공은 하지 않는다. 그 나라 사람은 검은 얼굴과 우뚝한 코에 성질이 사납다.
“천하에는 여러 가지 잡종락(雜種落)이 많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왕이라 하여 모여든 자들을 많이 보았다. 몽고 사람으로서 중국에서 생장한 자는 그 문장과 학문이 만인이나 한인에게 어깨를 겨누지만, 그 용모는 험상스럽고 커서 아주 달랐으니, 더구나 그 48부의 추장(酋長)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추장들은 저마다 각기 왕호를 가져서 좌현(左賢)이니 곡리(谷蠡)니 하는데, 저희들끼리는 서로 예속(隸屬)되는 법이 없이 세력을 나누고 힘으로 버티고 있어, 누구든지 감히 먼저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중국이 안연(晏然)히 아무 일도 없을 수 있는 이유이다. 나는 몽고왕 두 사람을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보았고, 또 두 사람을 산장(山莊) 문 앞에서 보았는데, 그 중에도 늙은 왕 하나는 나이 방금 81세로서 허리가 굽고 피골이 썩은 것 같으며, 얼굴은 나귀처럼 길고 키는 거의 한 길이 되었다. 젊은 자는 귀신같이 생겼고, 종규도(鍾馗圖) 같기도 하였다. 서번 사람들은 더욱 사납고 날래고 추악해서, 괴상한 짐승이나 기이한 귀신 같아서 두려웠다. 회회국은 옛날 회골(回鶻)로서, 더욱 사나웠다 한다. 토사(土司 남방 묘족(苗族) 두목의 칭호)는 서번이나 회골에 비하면 웅장하고 큰 것이 대개 같았다. 아라사(鄂羅斯)란 것은 흑룡강(黑龍江)에 있는 부락으로, 집마다 반드시 개 한 마리를 두는데, 개마다 크기가 나귀만 하고, 목에는 작은 방울을 10여 개나 달며, 턱 밑에는 여러 가지 끈을 장식해서 멍에로써 수레를 끌게 했으니, 개 크기도 이 같거든 하물며 사람일까 보냐. 출입을 할 때에는, 반드시 개를 이끌고 옆눈을 뜨고 퉁소를 분다. 그들의 갓이나 의복은 신분에 따라 모양이 다르므로 분간하기가 쉽다. 대개 만주는 비록 많이 번식했지만 아직 천하의 반이 못 되니, 그들이 중국에 들어온 지는 이미 백여 년으로, 수토(水土)에 익고 풍기를 길렀으므로 한인과 다를 것이 없이 맑아지고 단아해져서 이미 저절로 문약(文弱)해지고 있으니, 오늘 천하의 형세를 돌이켜 볼 때, 그 두려운 바는 항상 몽고에 있고 딴 오랑캐에 있지 않다. 그것은 무슨 까닭일까. 몽고의 강하고 사나움은 서번이나 회회국만은 못하나, 전장(典章)과 문물이 가히 중원(中原)과 서로 대항할 만하기 때문이다. 유독 몽고는 땅이 서로 접하기가 백 리도 못 되는데, 흉노(匈奴)ㆍ돌궐(突厥)로부터 거란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국의 후예이다. 위율(衛律)과 중행열(中行說)이 이미 도망가는 소굴로 삼았거든, 하물며 그 전장과 문물이 아직도 옛날 원(元)의 유풍(遺風)을 가지고 있음에랴. 겸해서 군사와 말이 강장한 것은 본래 사막의 본질이고 보니, 천하의 법도가 한 번 해이(解弛)해지고 호흡이 잠깐 급해지면, 48부의 몽고왕들이 또한 한갓 강한 활을 가지고 새하(塞下)에 가서 토끼나 여우만 쫓을 뿐이리요. 내가 본 바로는 그들 추장이 이미 저와 같고 나와 더불어 이야기한 자들도 부재(孚齋)ㆍ앙루(仰漏) 같은 사람은 모두 문학하는 선비이다. 옛날 유연(劉淵)이 새내(塞內)에 들어와 살 때에, 유주(幽州)ㆍ기주(冀州)의 명사들은 많이 그를 따라갔다. 연의 아들 총(聰)은 경사(經史)를 널리 알고, 약관(弱冠) 시절에 경사에 놀며 명사들과 더불어 사귀지 않는 이가 없었다. 슬프다. 천하가 한 번 흔들려 풀처럼 움직이고 바람처럼 일어나면, 어찌 연과 총의 무리가 그 속에 있지 않은 것을 알리요. 이것은 내가 눈으로 본 바 확실한 몇 사람이거든, 하물며 내가 얻어 보지 못한 자가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함에랴. 이제 내가 열하의 지세를 살펴보니, 대체로 천하의 두뇌(頭腦)와 같았다. 황제가 북쪽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다름 아니라 두뇌를 누르고 앉아 몽고의 인후를 틀어막자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몽고는 이미 날마다 나와서 요동을 뒤흔들었을 것이니, 요동이 한 번 흔들리고 보면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는 것이요, 천하의 왼쪽 팔이 끊어지고 보면 하황(河湟 영하성 지방)은 천하의 오른편 팔이라 혼자서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니, 내가 보기에는 서번의 여러 오랑캐들이 나오기 시작하여 농(隴)ㆍ섬(陝)을 엿볼 것이다. 우리 동방은 다행히 바다 한 쪽에 궁벽되어 있어서 천하 일에 상관이 없다 하겠으나, 내 이제 머리털이 흰지라 앞일을 가히 보지는 못할 것이로되, 30년을 넘지 않아서, 능히 천하의 근심을 걱정할 줄 아는 자가 있다면 응당 나의 오늘 이야기를 다시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호(胡)ㆍ적(狄) 잡종의 일을 위와 같이 아울러 기록해 둔다.”
대저 만물(萬物)에 그림자가 생기는 것은 그 형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해나 달빛에 반사되었을 때 그림자가 생기고 자체의 빛은 없어지는 것이 정당한 이치이다. 《물리소지(物理小識)》에 “겁야번은 달에 반사되어도 그림자가 없다. 풍지(馮贄)의 《기사주(記事珠)》에 의하면 ‘호양(胡陽) 백단사(白壇寺)에 있는 번(幡)은 해에 반사되어서는 그림자가 있고 달에 반사되어서는 그림자가 없으니,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름을 겁야번(怯夜幡)이라 한다.’ 했다.” 하였다. 용마(龍馬)에 “빙잠(氷蠶)의 사견(絲絹)은 달에 반사되어서는 그림자가 없고 해에 반사되어서는 그림자가 분명하다.” 하였다. 《습유(拾遺)》에 “동해(東海) 원교산(員嶠山)에 빙잠이 있어, 일곱 치 길이에 비늘과 뿔이 달렸는데, 서리와 눈이 그 몸뚱이에 덮여야만 다섯 가지 채색의 고치[繭]가 조성되며 그 고치로 무늬비단[文錦]을 짜서 의복을 지어 입으면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다.” 하였다. 요즘 연경(燕京)에 다녀온 사람의 말에 의하면, 연경 주재 악라사국(鄂羅斯國) 사관(使館)에 빙견포(氷絹袍)가 있더라고 하는데, 악라사국은 북극(北極) 가까이 위치하여 빙산(氷山)과는 그 거리가 2만 리가 되며, 해는 보이지 않고 빙산만 조명(照明)되어 있는 지방이다. 《희조신어(熙朝新語)》에 “청 성조(淸聖祖)가 여러 학사(學士)들에게 ‘글대로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개중에는 허황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인 것이 있다. 동방삭(東方朔)의 말에 「북방에 두께가 천자나 되는 얼음이 있어 봄이나 여름철에도 녹지 않는다.」 했는데, 금년에 악라사국에서 입조(入朝)했다고 하니, 거기는 북극과의 거리가 2십도 이상이 되는 지방으로 이름을 빙해(氷海)라 하여 두꺼운 얼음이 응결되어 있으므로 사람이 갈 수 없다. 동방삭의 말이 허위가 아님을 이제야 알 수 있다.’ 했다.” 하였다. 성조는 또 “북쪽은 몸시 추운 지방으로 얼음이 천 길 두께로 응결되어 있어 봄과 여름철에도 녹지 않는다는데, 지금에 과연 그런 지방이 있다.” 하였다. 또 “《신이경(神異經)》에 ‘북방에는 두꺼운 얼음 밑에 큰 쥐가 있어 그 무게는 천 근이나 되고 이름은 분서(鼢鼠)로 땅속을 뒤지고 다니며 해와 달만 보면 즉사한다.’ 하였는데, 지금 악라사국에는 바다가 가까운 북쪽 지방에 코끼리만한 쥐가 있어 땅속을 뒤지고 다니다가 바람을 만나거나 해를 보면 즉사하며, 그 뼈는 상아(象牙)와 같으므로 토인(土人)들이 접시ㆍ사발과 빚ㆍ비녀를 만든다. 짐(朕)도 그 기물(器物)들을 직접 보고야 사실임을 믿었다.” 하였다. 또 “《연감유함(淵鑑類函)》에 ‘분서는 그 무게가 만 근이나 되는 것도 있다.’ 했는데, 분서가 지금에도 있다. 그 몸뚱이는 코끼리와 같고 어금니는 상아(象牙)와 같은데 약간 노랗기만 할 뿐이다.” 하였으니, 이는 다 고서(古書)와 부합되는 말이다. 《청일통지(淸一統志)》에 “분서는 악라사국 해안 지방에서 생산되며 서령(西寧)의 이름으로는 마문탁와(摩門橐窪)라 하는데, 그 고기의 성분이 매우 한(寒)하지만 먹으면 열(熱)해진다.” 하였다. 빙서(氷鼠)는 《이물지(異物志)》에 “동방삭의 말에 ‘북방에는 얼음이 백자 두께로 얼고 얼음 위에는 쥐가 있는데, 그 털이 여덟 자 길이나 되어 베를 짤 수 있다.’ 했다.” 하였다. 《녹이편(錄異編)》에 “음산(陰山) 이북에는 눈이 쌓여 역대 이래로 녹지 않고 그속에는 박[瓠]만한 큰 저거(蛆渠)가 있어 그 맛이 매우 감미롭다” 하였으니, 빙잠의 일종이 아닌지 누가 알랴.
16일 오전 방송한 '서프라이즈'는 독일 바바리아 지역 동굴에서 발견된 거대 유골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했다.
독일에 주둔했던 미 육군이 훈련 중에 발견한 독일의 브라이텐비너 동굴에는 수천여개의 유골이 있었다. 그중에는 다른 유골의 두 배 크기의 뼈도 있었다.
인류학자인 페트릭 쿡크는 브라이텐비너 동굴이 세계 제 2차대전 당시 연합군 병사들의 시체를 유기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됐다.
쿡크는 또한 1563년 베르톨드 뷔흐너가 탐사대를 이끌고 독일 바바리아 지역 동굴 탐사 후 쓴 책을 발견, 2배이상 큰 거인의 유골의 기록이 미 육군이 발견한 유골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유골 분석 결과 인류의 DNA와 유사, 동굴 주변에 거인족이 집단 거주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거인과 관련된 기록은 세계 여러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04 동남아시아에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길이 3.1미터 길이의 거대 유골이 발견됐으며, 미국 캔자스 주에서도 신장 5m이상으로 추정되는 거인의 발자국이 발견돼 화제가 된 바 있다.
기원전 3500년전 수메르 문명의 영웅으로 기록되고 있는 왕 길가메시는 거인으로 묘사돼 있다. 일각에선 거인이 외계인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1989년 러시아 보로네슈에서 아이들과 몇 시민이 봤다는 외계인 역시 키 3m가 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집단환각에 의한 단순 해프닝이라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