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10월 25일,
미국, 그레나다 침공
그레나다(Grenada)는 카리브 해의 가장 남쪽 끝 부분에 있는 거제도 만한 작은 섬나라으로
베네수엘라에서 북쪽으로 160km 거리에 있다.
1498년 콜럼버스가 이 섬에 와서 스페인 도시 이름을 따 그레나다라고 이름을 지었다. 1650년에
프랑스 사람들이 마티니끄에서 여기로 와서 식민지를 세우고 생 조흐주라는 도시를 세운다.
1783년에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프랑스는 영국에 그레나다를 할양한다. 이후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다가 1974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후 에릭 게일리가 그레나다의 수상이 되었고 그는 비밀경찰 등을 이용해 독재정치를 폈다. 외국
자본과의 유착으로 실업과 빈곤이 늘어나는 가운데 1979는 무력 쿠데타가 발생해 게일리 정권은 붕괴
되었고 대신 모리스 비숍(Maurice Rupert Bishop, 1943-1983)을 새 수상으로 하는 새 정부가
탄생하였다. 그런데 모리스 비숍은 쿠바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게 군사원조도 받는 등 적극적인
친공산권 방향으로 나아갔고, 당연히 당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정부와 대립 각을 세우게 되었다.
Bishop in Bautzen, East Germany, 1982
한편 비숍은 집권 후 자금과 노동력을 쿠바로부터 지원받아 국제공항을 건설한다. 하지만 공항과
관련된 인프라는 유럽과 북미로부터 조언을 받았다. 공항 건설과 관련하여 로널드 레이건은 공항의 목적이
소련 전투기들의 중간 기착지로 활용될 목적으로 건설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의 부하였던
헛슨 오스틴과 베흐나르 코아흐가 1983년 10월 13일 쿠데타를 일으켜 모리스 비숍을 구금했고 19일
처형했다.
그레나다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유지니아 찰스 도미니카 총리가 의장인 동부 카리브해 국가 기구는
이 지역의 안보가 염려되어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고 미국은 침공을 결정한다.
명분은 동카리브해 국가기구(OECS)의 요청과 그레나다의 세인 조지스 대학의 의대에서 공부하는
600여명의 미국 대학생들을 포함한 그곳에 있는 1,000여 명의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것을 들었다.
실제로는 그레나다의 건설 중인 국제공항이 군사적인 목적으로 소련과 쿠바의 카리브해 지역 전초 군사
기지가 되어 미국을 위협하고 중앙 아메리카의 반란에 무기를 수송할 목적이라고 미국정부는 판단한
것이다. 비록 비숍 정부는 이 공항은 관광객들을 위한 상업 공항이라고 밝혔지만.
결국 1983년 10월 25일 미 해병대 병력 2천여 명을 시작으로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인 그레나다를
기습 공격한다. 10월 25일 오전 5시에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그레나다 침공은, 미국에게 있어서는 월남전
이후 최초의 대규모 군사행동이었다. 12월 15일 섬 전체가 제압되었다.
UN에서는 침공 개시 직후인 10월 25일부터 28일에 걸쳐 긴급하게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하여
가이아나, 니카라과의 공동안을 채택시켰지만 미국은 거부권을 발동하여 전쟁을 계속했다. 결국
공동안은 부결되어 11월 2일 UN 총회 심의에 부쳐지게 된다.
안건은 기존 공동 결의안에 벨기에의 수정안이 더해져 가결되었다. 이 수정안은 군사간섭의 국제법 위반
우려, 그레나다의 주권 보호, 외국군의 즉시 철수 등을 주요 안건으로 담고 있었는데, 미국과 카리브 동맹군은
이 결의안에 응하지 않고 평화유지군이라 이름만 바꿔 전쟁을 계속해 결과적으로는 UN 결의안을 따르지
않았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 등 전통적인 우방도 침공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미국은 침공 후 약
20개월 후 그레나다를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