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막사발은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 국보가 됐을까. 임진왜란 때 펼쳐진 또 다른 전쟁인
조선과 일본의 '도자기 전쟁’을 다룬다. 우리 도자기 문화는 일본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지키지 못한’ 것이라는 역사적 해석이 바탕에 깔려 있다.
기존 작품 ‘사발, 내 사발’의 새 버전이다.
선조들에게는 국그릇, 막걸리 사발 등 다양한 용도로 쓰던 말 그대로 ‘막사발’이 있었다.
이 그릇은 나중에 그 가치를 인정받아 우리나라가 아닌 바다 건너 일본에서 국보 26호가 된다.
작품 ‘사발, 이도다완’의 주 소재인 다완(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잔 또는 사발)
‘기자에몬 이도다완’ 이야기다.
조선의 유학생이 일본 교토의 절에서 만난 한 승려가 사발 하나를 꺼내 일본 국보라며 그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은 시작한다.
유학생은 “일본은 도자기전쟁이라고 미화시키면서 우리 도공들을 데려갔다”고 응수했다.
이어서 승려가 한 말에 그는 멍해졌다. 승려는 “조선은 이 사발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를 더 승화시키고 발전시키려고 했는데,
당신들은 왜 그랬는가”라고 되물었기 때문이다.
이후 역사 속으로 거슬러가면서 조선 도공들의 애환이 담긴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인을 병들어 죽게하는 저주받은 찻잔이라 일컬어지며 깊은 산속 암자에 봉안되는
기자에몬 이도다완
찻잔 속 혼령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헤매이며 울부 짖는다.
시간은 거슬러 1952년,조선의 어느 가마터
늙은 자기장 노평은 식솔들과 함께 막사발을 구워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왕실용 백자를 빼돌려 자신의 배를 불려왔던
이대감은 새로이 자신의 수족이 되어줄 사기장을 물색하고
솜씨 좋은 노평이 그 물망에 오른다
한편 어느 일본인은 조선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훌륭한 처우를 조건으로 내밀려
노평의 제자 태주에게 일본으로 건너가기를 제안한다.
혼란스러운 사건과 상황들 속에서 끝까지 가마의 불을 지키던 노평은
마지막 순간 태주에게 사발 하나를 내미는데....
슬프고 애환이 느껴지는 서정적인 장면들이 많다. 가마터에서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있는데,
도예가들의 정신을 느낄 수 있고 일본군이 쳐들어왔을 때 도예가들이 저항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도 슬프다. 마지막에 사발 속에서 한 여인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에서도 조선 도공들의
애환을 느낄 수 있었다.
사발은 무엇이고 이도다완은 무엇인지 알고는 있어야겠어 함 적어봅니다.
옹기는 토기, 고려시대 질그릇 조선시대 옹기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생활용기입니다.
옹기는 보통 질그릇고 오지그릇으로 나눠지는데.. 질그릇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그릇
보통 떡시루가 질그릇에 속하죠, 오지그릇은 유약을 바른
옹기를 말하는데 보통의 갈색 옹기 항아리를 말합니다. 옹기는 백자, 분청, 청자와는
제작과정, 소성, 점토가 다름니다.
막사발은 조선시대 분청사기시대에 만든 막쓰는사발을 말합니다.
그 당시 생활에 쓰이는 그릇이 많이 생산되었고, 이것은 청자의 몰락과 맥을 같이하며,
시대상황및 역사를 대변합니다. 청자처럼 특정위치의 사용이 아니라,
좀더 많은 사람들이 쓸 수 있었던 그릇이였죠...
국그릇도 되고, 물그릇도 되고, 밥그릇도 되고, 깨지면, 개밥그릇도 되듯이....
이도다완은 조선 막사발이 일본으로 넘어가 찻그릇으로 변한것을 이도다완이라 합니다.
이제 제가 공연을 보고난 느낌을 몇자 적어 볼까합니다.
작년에 본 꽃과 나비(사발 내사발)공연을 잘 봐서 그런지 이번 공연에 출연하신 배우분들도 각자의
개성을 잘 표현해서 연기를 하셨는데 내내 공연을 보면서 작년에 볼때 노평역,연이역,매홍역이
제 뇌리를 계속 지나가면서 이번 공연의 3분의 역과 저도 모르게 저절로 비교 아닌 비교를 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 일본제자가 스승에게 "자기의 가치를 무엇으로 합니까"라는 질문에
스승이 그건 "마음 이다 마음을 가치로 매길수 있겠느냐"는 대사가 기억에 남네요
올 고생하신 배우분들 및 모든분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한울림 공연은 무조건 봐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사발의 사진 몇장과 공연장 사진입니다.